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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좇는 시선 (4/13)

3화. 좇는 시선

록시나가 공작성의 안채인 휘네 궁전으로 돌아온 건 새벽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남들의 시선을 피해 궁전에 도착한 그녀는 곧장 뻗어 버렸고 그대로 정오까지 숙면을 취했다.

그녀를 깨운 건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여주인이 침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하녀들이 종을 울려 잠을 깨웠다.

록시나는 몽롱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일어나 앉았다. 키에라가 풍미가 진한 수프와 빵, 야채샐러드, 신선한 과일주스가 든 쟁반을 들고 와 그녀의 앞에 놓았다.

록시나는 음식을 눈으로 훑다가 키에라에게 물었다.

“밀린 급여는 받았어?”

“네, 어제…… 라울 님이 직접 오셔서 주셨어요. 최고급 식자재도 전달하셨고요.”

“내보냈던 사람들도 돌아올 거야.”

“라울 님께 설명을 들었어요. 이혼……하기로 했으니까 원래대로 생활하게 될 거라고요.”

키에라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록시나를 똑바로 볼 자신이 없나 보다.

“이혼이 확정될 때까진 풍요롭게 지낼 수 있으니까 키에라도 마음 졸일 일이 없을 거야. 그리고 저기 테이블에 있는 건 선물이야.”

록시나는 어제 마레에서 사 온 모자 상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키에라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모자를 하나 샀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이별 선물을 미리 주시는 거예요?”

“지나다가 생각이 나서 산 거야.”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혼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폐하께서 안 된다고 하시면…….”

“이혼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괜히 희망 품고 그러지 마.”

록시나는 무덤덤하게 말한 후 한숨을 쉬었다.

“선물, 지금 봐도 돼요?”

“아니, 쑥스러우니까 네 방에서 풀어 봐. 마음에 안 들면 바꿔도 돼. 모자 가게엔 말해 뒀어.”

“바꾸지 않을 거예요. 왜 그런 짓을…… 그보다 어서 드세요. 드신 후에 외출 준비를 서두르셔야 해요.”

“외출?”

“하네스 경의 신부께서 모임을 여셨잖아요.”

키에라의 대답 록시나는 이마를 짚었다.

“아…… 하네스 경의 아내가 사교계에 데뷔하는 날이었지.”

“공식적인 자리인 만큼 부인께서 참석하지 않으면 안 돼요.”

키에라는 록시나의 손에 수프용 스푼을 쥐여 주며 덧붙였다.

“신부의 이름은 헤일로라고 한대요. 이름을 꼭 외우셔야 해요.”

“이름 정도는 알아. 하네스 경이 엄청나게 자랑하고 다녔으니까.”

록시나는 하네스라는 이름의 기사를 떠올렸다. 그는 짝사랑하던 여인 헤일로를 아내로 맞이해 행복해 죽으려고 했었다. 아내의 장점을 나열하는 걸 즐기는 건 물론 외모를 찬양하는 팔불출이었다.

“식사를 하시는 동안 오늘 입으실 의상을 골라 오겠습니다.”

록시나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스푼을 들긴 했지만 입안이 깔깔하고 기운이 없었다. 어젯밤 그 사내에게 정기를 다 빨렸나 보다.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수프를 억지로 떠 입에 넣던 그녀가 부르튼 입술을 혀로 핥을 때였다. 키에라가 오늘 입을 드레스를 들고 왔다. 파란색이 인상적인 드레스였다.

“어때요? 이걸 입으시면 주목받을 수 있겠죠?”

“주목받기 싫어. 있는 둥 마는 둥, 티가 나지 않을 만한 걸로 골라 줘.”

“공작 부인으로서의 체통과 명예를 생각하시려면 당연히 시선을 끌어야죠.”

공작 부인? 이혼 합의서에 도장을 찍은 마당에…….

“이혼 예정이라는 거…… 소문이 돌았을 텐데 주목 받아서 뭐 하게.”

록시나는 수프 그릇만 비운 후 쟁반을 옆으로 치웠다. 먹히지 않았다. 말이 좋아 사교 모임이었지 누군가의 험담을 하려고 모인 사람들뿐이다.

그중 공작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여자들이 꼭 있어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이혼을 결정한 저와 이레 전에 결혼한 신부의 행복과 절망감이 극명히 대비될 터였다.

“흰색 바탕에 노란 꽃무늬가 자잘하게 들어간 걸로 가져다줘.”

“……예.”

“장신구는 귀고리와 목걸이면 돼.”

“반지는요?”

“……내 것도 아닌데 뭐.”

“결정이 나기 전엔 부인이 착용하셔야 해요. 그래야 구설에 덜 오를 거예요.”

“폐하께선 허락하실 거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아.”

록시나는 심드렁한 어투로 대답한 후 도로 누웠다. 그러자 키에라가 애타는 음성으로 종종거렸다.

“또 누워요?”

“목욕물 준비하는 동안만.”

“오늘따라 유독 잠이 많아요.”

“새벽에 뒤척거렸거든.”

록시나는 생각나는 대로 대답한 후 눈을 감았다. 잠깐 일어나 앉았을 뿐인데 하체가 욱신거렸다. 어젯밤에 잠자리를 한 사내 탓이었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걸레짝을 만들어 놨다.

“두드려 맞은 것 같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린 그녀는 몸을 옆으로 돌렸다.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눈꺼풀은 묵직한데 막상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찡그리고 있던 눈을 떴다. 창밖은 비를 뿌릴 것처럼 흐렸다. 그 사내, 위험하다. 어젯밤의 떨림이 가시지 않은 듯 생각만으로도 질구가 촉촉하게 젖었다.

그녀는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간 치마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손가락에 끈적거리는 애액이 묻어났다. 어쩜 제대로 빼지 않은 정액이 마저 흘러내리는 걸지도 모른다.

“또 하고 싶잖아.”

록시나는 손가락을 이불 밖으로 빼 천장에 대고 바라봤다. 손가락에 하얀 점액질이 묻어 있었다. 사내가 남긴 흔적이었다.

“이런 건 비워 내지 않으면 정말 피곤해질 수도 있어.”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 생김새에 대해선 몰라도 그의 몸은 생생했다. 떡 벌어진 어깨, 넓고 탄탄했던 가슴, 굵고 긴 팔과 다리, 만족스러웠던 페니스와 키스.

“첫 키스였다고 고백해 버리다니.”

그땐 가면을 썼으니 그 정도의 진실을 털어놔도 창피하지 않았다. 그 사내는 록시나가 누군지 모를 테니까 거리낄 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한다.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이렇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는데…….

한탄하듯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키에라가 침실에 들어섰다.

“부인, 목욕물을 다 받았습니다.”

***

다리를 꼰 안투르는 팔걸이에 한쪽 팔을 걸친 채 앉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인중을 살짝 누른 채 상념에 잠긴 그는 자신의 발끝을 보고 있었다.

어젯밤 록시나를 안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다른 사내와 뒹구는 걸 허락했어야 했다. 이런 후회로 인해 한숨이 연거푸 쏟아졌다.

“공작님, 안색이 어두운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안투르의 오른팔 격인 하네스가 물었다. 제 집에 초대를 한 탓에 손님들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아니, 좀 피곤해서…….”

“부족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생각나면 말하지.”

안투르는 팔을 뻗어 주스 잔을 집었다. 사교 모임은 오전 일찍부터 시작돼 점심을 시작으로 저녁 식사가 끝나는 느지막한 저녁까지 이어졌다.

록시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일찌감치 모인 귀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를 떨었다.

“좀 웃으세요. 하네스가 절절매고 있습니다.”

책사 라울이 주의를 주었다.

“공작님께서 인상을 쓰고 있으니 안주인도 눈치를 보고 있잖아요.”

“별…….”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하네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저 날씨 탓이니까 신경 쓰지 마.”

“노인네도 아니고 날씨 탓을…….”

하네스는 어리광을 부리듯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안투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주스 잔을 입가로 붙이며 숨을 들이마시듯이 입을 벌렸다.

“공작 부인께서 드셨습니다.”

시종의 알림에 주스를 마시던 안투르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주스 잔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록시나를 응시했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부인.”

하네스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제가 늦었죠? 미안해요.”

“원래 늦게 등장하시잖아요.”

록시나는 항상 점심 이후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하네스는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아내 헤일로를 끌어안으며 소개했다.

“부인, 제 아내입니다. 예쁘죠?”

“네, 아름다워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록시나는 누가 들어도 형식적인 대답을 하고는 하네스와 헤일로에 희미하지만 아름다운 미소를 보냈다. 그녀는 두 사람을 지나쳐 안투르의 옆자리에 앉았다.

안투르의 시선이 옆얼굴을 따갑게 했다. 어젯밤에 데보라를 찾은 걸 아는 남편의 시선에 뺨이 붉어졌다.

“어젯밤, 좋았나?”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던 안투르가 관심을 보여 놀라기도 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젯밤에 대해서 안다는 말투였다.

“무슨 소리죠?”

“어젯밤에 허락된 외도를 즐겼을 텐데?”

안투르가 신발을 똑바로 신는 척하며 록시나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미행했어요?”

“라울이 휘네 궁전에 갔을 때 없다더군. 그래서 예상한 것뿐이야.”

“……발뺌해 봤자 소용없겠죠.”

“속일 사람을 속여.”

꼭 시비를 걸거나 비꼬는 것으로 들렸던 록시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았느냐 물었는데…… 별로였나 봐?”

“그런 건 왜 묻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좋았어요.”

“또 찾을 만큼?”

“네.”

“매일매일?”

“아마도요. 그런데 왜 자꾸 물어요?”

“그동안 어떻게 참았을까?”

안투르가 코웃음을 치는 바람에 록시나는 울컥했다.

“다른 방법으로 해결했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혼자 해결할 때보단 확실히 좋았겠지?”

“네. 그런데 왜 그렇게 관심을 가져요? 신경 쓰이는 것도 아닐 텐데.”

“신경 쓰여.”

록시나는 움찔했다. 신경 쓰인다고? 이제 와서 왜? 그녀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뒷골이 당길 만큼 화가 치밀었다.

“웃겨.”

록시나의 대답에 안투르는 충격을 받은 듯 넋을 놓고 응시했다. 싸우자는 시비 조에 어안이 벙벙했다.

“말이 심하군.”

“무례하게 굴잖아요.”

“고상하게 행동해.”

“어젯밤 얘길 왜 물어요?”

록시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질문 자체도 심기를 건드렸지만 노골적인 시선이 얼굴에 들러붙어 피부가 따끔거렸다. 뺨에 열감이 느껴졌던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신경 쓰이니까.”

“궁금해서 물은 것뿐이야. 허락까지 구해 가며 얻은 밤이잖아.”

“그렇게 궁금하면 와서 훔쳐보든가요?”

“훔쳐 봐도 된다는 소리 같군.”

“고통스러운 밤을 경험하고 싶다면요.”

“고통스러운 밤?”

“욕구불만으로.”

록시나는 안투르에게만 들릴 만큼 아주 작게 속삭였다.

“풋.”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헛웃음이 터졌다. 평소였다면 그녀가 한 대답이 하찮아야 했지만 잠자리를 한 탓인지 조금 귀여웠다.

“욕구불만은 당신이 더한 거 아니야? 귀까지 붉힌 걸 보니…… 한 번 더 채우고 싶은 듯한데.”

이번에는 안투르가 복화술을 하듯이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그를 노려봤지만 곧 코웃음을 쳤다.

“이제 보니까…… 이런 대화를 좋아하셨네요. 폼이나 잡기에 음담패설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닌 줄 알았죠.”

“꽤 좋아해, 그리고 공작 부인도 그런 쪽으로 타고난 것 같아서 대화가 통하고.”

“진즉에 말씀을 해주시지. 밤새도록 해드릴 수 있는데.”

“하하!”

록시나의 반격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눈에 힘을 준 채 험악한 분위기를 내던 그가 갑작스레 웃어젖히는 바람에 모두가 당황했다. 특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하네스와 라울은 공작 부부를 주시했다.

하지만 안투르나 록시나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안투르는 웃는 상으로 주스로 목을 축였고 록시나는 인상을 잔뜩 우그러트린 채 하늘을 노려봤다.

“얼마나 음탕한지 궁금하군.”

“말도 못하죠.”

“……당신이 이런 성격인 걸 귀부인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나?”

“없어요.”

“왜 숨겼지?”

“뭐 좋은 거라고 드러내요?”

록시나는 얄미울 정도로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내겐 왜 드러냈지? 좋았냐는 물음에 얼굴만 붉히고 말면 됐을걸.”

“당신에겐 숨길 필요가 없잖아요. 제가 한 요구를 생각해 보세요.”

“솔직하군.”

“……속이거나 내숭을 떨 이유가 있나요.”

“끝이다, 이건가?”

“네.”

록시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린…… 서류상의 이혼이 아니더라도…… 틀렸어요. 내가 먼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까.”

돌아올 수 없는 강이라…….

안투르는 입꼬리를 스르륵 올렸다.

“안심해요.”

록시나는 허벅지에 올린 손을 주먹 쥐었다.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안투르가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쥔 손을 바라보자 안투르가 물었다.

“안심하라는 건 무슨 뜻이지?”

“제가 매달릴 일은 없을 거라는 거예요.”

록시나의 대답에 안투르는 입매만 비틀었다. 매달린다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문득 어젯밤에 그녀가 내뱉었던 흐느낌이 떠올랐다.

“꿈을 꾸는 것 같아…… 이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 더 해 줘…… 심장을 멈춰 줘.”

안투르는 손끝으로 주스 잔의 손잡이를 쓸어내리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분위기가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하네스와 라울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피하려고 일어났다.

“제가 일어날게요.”

눈치 빠르게 록시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귀부인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섰다. 하네스와 라울이 안도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앞만 보고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공작 부인.”

힐다 자작 부인이 록시나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뱁새눈을 뜨긴 해도 지척에 있는 안투르를 의식한 귀부인들이 예의를 갖추었다.

“안녕하세요, 공작 부인. 오랜만에 뵈어요.”

“오랜만에 뵙네.”

“하네스 경의 아내, 헤일로완 인사를 나누셨지요?”

“물론.”

“아름답죠?”

힐다 자작 부인은 어딜 가나 붙임성이 좋아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잘 어울려. 하네스 경도 미남이잖나.”

“공작님껜 비할 바가 아니지만요.”

“그런가…….”

록시나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남편은 잘생긴 걸로 따지면 퍼시 공작령을 넘어 케이프런 왕국 전체를 놓고 봐도 손에 꼽을 만한 미남이었다.

하지만 록시나는 힐다 자작 부인처럼 마음 편하게 생김새에 대해 논할 수 없었다. 잘생겨 봤자 저는 그 무엇 하나 가질 수 없는 전남편에 불과했다.

“공작 부인, 안녕하세요.”

프레디 경의 아내 조지아가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이에요, 조지아. 이제 몸은 괜찮아요? 저번에 꽤 큰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네, 이젠 괜찮아요.”

“조지아는 그 사고 덕분에 사랑을 되찾았잖아요. 요즘 프레디 경이 그렇게 사랑해 준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힐다 자작 부인의 옆에 있던 란디가 말했다. 란디 역시 어느 기사의 아내였다. 사교계의 뻐꾸기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이곳저곳에 소문을 옮겼다. 록시나가 제일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그래.”

“좋은 소식도 있다네요.”

“좋은 소식?”

“회임이요. 호호.”

란디의 대답에 록시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조지아의 배로 향했다. 자세히 보니 배가 볼록하게 나온 것도 같았다.

“축하하네.”

록시나는 활짝 웃었다. 조지아도 남편 프레디의 외도와 무시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기 때문에 제 일처럼 기뻤다.

“좋아하는 과일이 뭔가?”

“과일이요? 임신 중엔 과일을 많이 먹어야 한대. 내가 선물할게.”

“아, 아니에요. 공작 부인께 선물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게 아닌데요.”

“축하하고 싶어서 그래.”

록시나는 방글 웃으며 란디의 손을 꼭 잡았다.

“잉태와 출산이 쉬운 일은 아니잖아.”

“부인…….”

“진심으로 축하하네.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수 있도록 몸조리 잘해.”

“감사합니다.”

조지아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사교 모임엘 자주 나왔지만 록시나만큼 축하해 주는 부인이 없었다.

조지아가 프레디에게 외면을 받을 땐 진심 어린 걱정을 해 주었던 이들이 화목한 모습을 보이자 차갑게 돌아섰다.

간혹 조지아의 험담을 하기도 하는 등 마음에 상처를 안기는 일들이 많아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록시나에게 진심이 느껴지는 축하를 받아 조지아의 안색이 한층 밝아졌다.

“부, 부인…… 혹시 일행이 없으시면 저와 같이 계실래요? 저…… 친한 사람이 없어졌어요.”

조지아는 고개를 숙였다. 힐다나 란디와도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어 록시나와 있다가 때가 되면 돌아갈 생각이었다.

“오래 있지 않을 건데…….”

“저도 그럴 거라서요.”

“좋아, 저쪽으로 가서 앉을까?”

록시나는 힐다와 란디에게 대외적인 미소를 보낸 뒤 테라스 쪽으로 이동해 기둥 뒤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여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조지아가 뒤를 흘끗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있다가 사라지면 아무도 눈치 못 챌 것 같아서.”

“아…….”

조지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제넘겠지만 공작 부인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알 것 같아?”

“공작님 때문이잖아요. 마음에서 비워야 하니까…… 아예 숨는 거…… 저도 그 기분을 수 년 동안 달고 살았어요.”

“자존심이 상하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절망적이지.”

록시나는 다리를 꼬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허벅지 안쪽 살이 빡빡하게 조이고 살결이 겹쳐지는 모든 부분이 따끔거리거나 쑤셨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 보세요. 프레디도 제 속을 그렇게 긁더니 결국은 후회하고 돌아왔어요.”

“내겐 그럴 가능성이 없어.”

“왜 그렇게 속단하세요.”

“그랄 만한 이유가 있어서.”

록시나는 다리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하며 눈을 가물가물 뜰 때였다.

“부인, 마상 경기가 열릴 거예요. 시합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하네스의 시동이 숨어 있는 록시나를 찾았다.

“티타임만 하다가 갈 줄 알았는데?”

“경기가 빠질 수 있나요?”

록시나는 쏟아지는 한숨을 토해 낸 후 하네스와 헤일로에게 다가갔다. 헤일로를 품에서 떼어 놓지 않으려는 양어깨를 감싸고 있던 하네스가 록시나를 발견했다.

“가신다는 말씀은 절대 안 돼요. 저녁까지 계셔야 합니다.”

하네스가 선수 쳤다.

“하네스…….”

“제 아내를 위해서라도 계셔 주세요. 왕자님의 아내이자 이곳 퍼시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건 공작 부인인데 일찍 가 버리시면 저나 제 아내의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하네스는 서운한 투로 따졌다. 한마디로 공작 부인으로서의 본분을 지켜 달라는 요청이었다.

“저녁까진 힘들고 서너 시간 정도 있다가…….”

“기사장의 아내가 귀부인들의 모임에 데뷔하는 날이에요. 공식적인 모임에서 하실 일이 있을 텐데요?”

하네스가 책임감까지 따지려고 하는 바람에 록시나는 한숨을 쉬었다. 허울뿐인 데다 모임이든 뭐든 공작 부인으로서의 영향력을 잃은 그녀로선 막막했다.

그러나 제 생각만 할 수 없는 것도 사실. 그녀는 실망감과 서운함을 숨기려고 고개를 숙인 헤일로에게 사과했다.

“사과할게, 헤일로. 오늘의 주인공은 헤일로인데 그 생각을 못 했어.”

“아, 아니에요. 부인께서 불편하다고 하시면…….”

“저녁까지 있을게.”

“정말요!”

헤일로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하네스의 대답에 록시나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안투르와 록시나의 사이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소리를 하나 싶다.

“공작 부인!”

누군가 록시나를 반갑게 불렀다.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세미 그라이드가 눈이 부실 정도로 밝고 가는 금발을 휘날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그는 안투르를 최측근에서 호위하는 기사단인 푸른 날개단의 기사가 된 듯 날개 모양이 크게 새겨진 푸른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세, 세미?”

“453일 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

“그 숫자는…… 뭐야. 낯간지럽게.”

“공작 부인을 뵐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센 날짜죠. 얼마나 뵙고 싶었는지 몰라요.”

세미는 두 살 연하로 스무 살의 청년이었다. 하급 귀족에 곤궁한 살림으로 인해 가죽 제품을 만들어 팔던 그가 기사단이 되었다. 록시나로선 감회가 새로울 만큼 뿌듯했다.

“1년 만에 푸른 날개의 단원이 되다니 정말 장해.”

“모두 공작 부인의 덕분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공작 부인의 보증이 아니었으면 기사단에 입단하지 못했을 거예요.”

세미의 대답에 록시나는 지그시 미소만 지었다. 세미를 알게 된 건 안투르와 결혼해 퍼시로 내려온 지 6개월이 지나던 무렵이었다.

우연히 길을 지나던 록시나의 눈에 마차에 깔려 신음하는 여자 아이와 울부짖는 중년 부인이 들어왔다.

여자 아이를 살리려면 마차를 들어서 옮겨야 했지만 마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차에는 퍼시에서 악랄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기사장 헨드릭이 타고 있었다.

헨드릭은 여자 아이가 깔렸다는 말에도 마차를 출발하라고만 소리를 질렀고 그 누구도 그를 설득할 수 없었다.

옷차림이 남루한 계집아이와 중년 부인을 깔본 탓이었다. 해서 록시나가 나서 헨드릭을 마차에서 내리게 한 후 계집아이를 구해 의사에게 보냈다.

그리고 헨드릭에게 치료비와 10년 치의 생활비, 정신, 신체적 피해 보상비를 지불하게끔 만들었더니 이렇게 감사해한다.

록시나는 옛날 일을 떠올리다가 수줍어했다.

“내가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야.”

“다행뿐인가요? 저나, 로지, 어머니 모두에게 은인인걸요.”

“그렇게 말하지 마. 정말 낯간지럽단 말이야.”

“저도 그 얘기 들었어요. 공작 부인께서 세미의 가족을 구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거요. 남편은 그때 공작 부인이 영웅 같았다고 했고요.”

록시나와 세미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헤일로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 하네스 역시 맞장구를 쳤다.

“그 일로 헨드릭 경은 파직당하고 퍼시에서도 추방을 당했지. 반성의 기미가 없었거든. 그리고 나에게도 행복한 나날이 시작되었어.”

“헨드릭 경의 후임으로 기사장이 돼서요?”

세미가 놀리듯 묻자 하네스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니야, 헨드릭 경에게 미운털이 박혀서 고생을 좀 했었거든! 내가 공작님과 친할 걸 질투했어.”

“저도 질투하시면 어쩌죠?”

세미가 장난스레 묻자 하네스가 크하하, 웃었다.

“내 아내에게 수작만 걸지 않으면 질투할 일은 없으니까 공작님과 친해져 봐. 크하하!”

세미의 넉살에 록시나와 헤일로도 손을 가리고 웃었다.

“오! 우리 공작 부인께서 웃으셨어!”

가짜 웃음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눈치챈 하네스가 록시나를 놀렸다.

“세미, 네 덕이니까 지금부터 공작 부인의 호위를 맡아. 침울하시는 일이 없도록 재롱을 떨어.”

“재롱이요?”

“그게 은혜를 갚는 일이야.”

“예! 사명감을 가지고 공작 부인의 웃음을 책임지겠습니다!”

세미까지 맞장구를 치는 바람에 록시나와 헤일로는 연신 키득거렸다.

“세미는 언제 봐도 밝아서 좋아. 앞으로 많은 여인들에게 관심을 받을 거야.”

“이 모든 게 공작 부인 덕분이죠.”

“또 그런 소리를…… 세미의 잘생긴 외모와 호방한 성격 덕분이야. 하네스에게도 총애를 얻은 것 같은데?”

록시나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떼며 대화를 이끌었다.

“그저 열심히 했습니다. 기사장님이 시키는 건 똥물까지 마셨으니까요.”

“똥물을 마시게 해?”

“충성심을 테스트하는 항목으로 똥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물론 진짜 똥물이 아니라 냄새만 비슷하게 낸 거였지만요.”

“난 또…… 진짜 똥물인 줄 알았어.”

“저나 동기들 모두 그렇게 믿었어요.”

“모두 성공했어?”

“저만 성공했습니다. 그 후로 기사장님의 눈에 들어서 푸른 날개의 기사단의 단원이 될 수 있었어요.”

“세미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착실하니까 언젠가 기사장이 오를 수 있을 거야. 아니 국왕 폐하의 기사단이…….”

“공작 부인이 계신 퍼시에서 떠나지 않을 거예요.”

세미가 록시나의 말허리를 잘랐다.

“제가 기사가 된 건 공작 부인 때문이에요.”

“나 때문…… 에?”

“네. 은혜를 갚아야죠.”

목소리나 눈빛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록시나는 감동받아 눈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이때껏 살면서 세미처럼 듬직하게 말하는 사내를 만나보질 못해 코끝이 찡하고 눈가가 따끔거렸다.

“보답을 받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말해 주니까 든든하네.”

“부인께서 위험에 처할 때마다 제가 곁을 지킬 거예요.”

“고마워.”

“고맙긴요.”

세미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록시나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감정을 솔직하게 말한 것뿐인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래선 사랑 고백이라도 한 줄 알 정도였다.

“겨, 경기장으로 가실까요?”

“세미도 경기에 참가해?”

“그럼요, 상품이 엄청나잖아요.”

“아참, 로지는 어떻게 지내?”

“로지가 사랑에 빠졌어요. 어쩌면 시집을 갈지도 모르겠어요.”

“로지는 좋겠다.”

“결혼은 부인도 하셨으면서.”

“사랑에 빠졌다며. 상대방도 로지를 사랑하는 거 아니야?”

“맞아요. 로지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다면서 매일매일 찾아와서 찬양을 하죠. 고마운 마음이 큰데 어떨 땐 밥맛이 없어요.”

“왜?”

“오빠보다 더 좋아하잖아요! 제가 로지를 어떻게 키웠는데!”

세미가 흥분하는 바람에 록시나는 입을 가리며 소리 내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간간이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제가 로지를 짝사랑했나 봐요. 이럴 줄 알았으면 대충 키우는 건데.”

“로지에게 서운하구나?”

“그런가 봐요.”

세미는 고민을 상담하듯이 한숨을 내쉬다가 갑자기 사과했다.

“죄송해요, 갑자기 푸념을 늘어놨습니다!”

“아니야, 즐거웠어. 세미의 질투…… 귀여웠거든.”

“귀여워요?”

“나도 세미처럼 질투해 주는 사내가 있었으면 하고 바랄 만큼.”

록시나는 방글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면을 쓴 것처럼 씁쓸한 감정을 웃음으로 지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미가 물었다.

“행복하시죠?”

세미의 질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왜 그런 걸 묻는지, 또 안투르와 제 사이에 대해 들은 바가 없는지 궁금했다.

“음?”

록시나는 대답 대신 눈을 깜빡거렸다.

“아니, 아니에요. 제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사과드릴게요.”

“세미는 좋아하는 여인이 있어?”

록시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 같을 땐 질문을 던지는 게 한 방법이었다.

“아뇨.”

“왜 없어?”

“기사단에 들어올 생각만 했더니…….”

“이젠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하니까 좋은 사람을 만나.”

“네! 노력하겠습니다!”

세미가 충성을 맹세하듯이 큰 소리로 대답하는 바람에 록시나는 또 웃음을 터트렸다.

“세미는 재미있어.”

록시나의 칭찬에 고양된 세미가 뺨을 붉히는 사이 경기장에 다다랐다. 경기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2층 단상엔 안투르가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록시나가 단상에 오르자 세미와 번갈아 봤다.

“저 옆에 누구지?”

안투르가 라울에게 물었다.

“어제 선발된 기사단원, 세미입니다.”

“푸른 날개인가?”

“네. 실력이 굉장한 데다 총명합니다.”

“공작 부인과 친한 것 같은데…….”

“공작 부인의 추천으로 입단할 수 있었습니다. 왜 있잖아요, 1년 반 전에 헨드릭 경의 마차에 깔렸던 계집아이…… 세미가 오빠입니다.”

라울의 대답에 안투르는 잊고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마차에 깔린 하급 귀족을 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려고 했던 헨드릭의 잔인함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록시나의 분노. 마치 제 가족이 당한 일이라도 되는 양 눈에 실핏줄을 터트리며 화를 내 많은 이들이 놀랐었다.

“록시나 덕분에 팔자가 폈다고 해야 하나?”

“엄청난 피해 보상금에 기사단 입단 추천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라울의 대답에 안투르는 입매를 비틀었다. 록시나가 세미를 바라보는 눈빛이 거슬렸다. 경직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안투르에게 세미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어제 푸른 날개에 입단한 세미 그라이드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안투르는 무표정한 얼굴만큼 건조하고 메마른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가 대답하는 사이 록시나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러자 세미가 눈치 없이 그녀에게 뛰어가 말했다.

“부인의 자리는 공작님의 옆자리인데 왜 여기 계세요?”

“여기가 편해.”

“하지만…….”

세미는 안투르에게 시선을 돌리다 움찔했다. 록시나가 앉아야 할 의자에 어떤 여인이 앉아 있었다.

“어…….”

세미가 당황하자 록시나가 망토를 잡아당겼다.

“곧 소문을 듣겠지만…… 우리 부부는 곧 이혼해.”

록시나는 세미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예?”

“우리 부부의 불화는 유명해.”

“……그, 그래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록시나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세미가 록시나의 옆에 앉았다. 그는 그녀를 곁눈으로 훔쳐보다가 안투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놀랐지만 안투르가 먼저 시선을 돌리는 바람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혼이 결정된 건가요?”

“적어도 우리 부부만큼은.”

“시기도 정해졌어요?”

“지금쯤 이혼 합의서가 왕궁으로 향하고 있겠지.”

록시나의 대답에 세미는 고개를 숙였다.

“이혼을 허락한다는 왕명이 떨어지면 이곳을 떠나시겠네요.”

“아마도.”

“재, 재혼처는 알아보셨어요?”

“그건 내가 정할 수 있는 아니라서…….”

대답하는 사이 경기를 시작하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저,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경기 준비를 해야 해서요.”

“응. 다치지 않게 잘해.”

“꼭 우승할 거예요.”

“기대할게.”

세미는 빙그레 웃고는 돌아섰다. 록시나는 망토를 펄럭거리며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찰나였지만 가슴이 덜컹거렸다.

무언가를 바치겠다는 말, 세미에게 처음으로 들어 본다.

세미 같은 사내와 결혼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록시나는 습관처럼 터져 나오는 한숨을 조심스레 내뱉었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릴 때 얼굴이 따끔거렸다. 누군가 쳐다보는 게 틀림없었다.

자기 자리를 빼앗긴 공작 부인을 조롱하는 시선일 터. 그녀는 일부러 고개를 들거나 쳐다보지 않았다. 어차피 눈이 마주치게 되면 비웃음을 사고 말 테니까.

“어디 불편하십니까?”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턱을 문지르는 습관을 눈치챈 라울이 물었다. 아까부터 록시나를 흘끗거리는 게 마음에 걸렸던 그는 대답을 기다리면서도 두 사람을 번갈아봤다.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

“부, 부인이요?”

라울은 당황했다. 전엔 없는 사람 취급을 하더니 이혼 합의서에 도장을 찍고 난 후론 태도가 변한 것 같아 의아했다.

“혹시 후회하십니까?”

“후회해.”

“그,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번복하시는 게 어떨지요?”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안투르는 록시나와 잠자리를 한 걸 크게 후회하고 있었지만 라울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록시나가 이혼을 조건으로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하겠다고 한 건 비밀에 부치고 싶었다.

라울과 하네스가 믿을 만한 부하인 건 인정하시지만 치부까지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후회하신다는 건지요?”

“그런 게 있어.”

“안색이 안 좋습니다. 특히 부인을 노려보는 시선이…… 꽤 노골적입니다.”

“그럴 거야. 꽤 복잡해졌거든.”

안투르는 술잔을 집어 입술에 댔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릴리안이 안주를 집어 주며 요염을 떨었다.

“공작님, 이것도 드시면서…….”

“릴리안.”

“예, 공작님.”

“네 자리로 돌아가라.”

“예?”

“혼자 있고 싶어. 방해하지 마.”

“고, 공작님…….”

릴리안은 당황했다. 안투르의 정부가 되고 싶어 아름답게 치장한 보람이 없어져 울상을 지었다.

“공작님께서 혼자 계시고 싶다고 하네. 자네 자리로 돌아가.”

릴리안이 머뭇거리는 바람에 라울이 끼어들었다. 그는 눈에 힘을 잔뜩 준 채 그녀를 위협했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 가자 얼굴을 붉힌 그녀가 일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안투르와 릴리안에게 쏠렸다가 록시나에게 이동했다.

하지만 록시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말 위에 올라탄 기사들을 보고 있었다. 꼰 다리에 팔꿈치를 괜 그녀의 관심은 온통 세미에게 쏠려 있었다.

대기석에서 투구와 갑옷을 점검하는 모습이 늠름하고 다부져 보였다. 1년 반 전엔 사내다움보단 소년의 앳된 티를 막 벗어 지금처럼 멋진 인상은 없었다.

“어엿한 사내가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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