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정당한 외도
“식재료가…… 다 떨어져서…….”
하녀 키에라는 마치 자기 잘못이라는 듯 울먹거렸다. 항상 밝고 씩씩한 성격이 수분감을 잃어서 질겨진 빵과 수프, 맹물뿐인 식탁 앞에선 기를 펴지 못했다.
“넌 먹었어?”
록시나가 물었다. 키에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먹었어요!”
“정말?”
“그럼요, 한 끼도 못 굶는 성격인 거 아…….”
꼬르르르…….
키에라의 말허리를 자르듯 꼬르르 소리가 났다. 그녀는 얼른 주린 배를 감쌌지만 록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 부인!”
“너 먹어. 난 생각이 없으니까.”
“어제도 굶으셨잖아요.”
“살 빼는 중이야. 군살이 늘었어.”
“어제도 그 말씀을 하셨어요.”
키에라는 이틀째 내리 굶어 수척해진 록시나를 가여워 죽겠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공작이 이혼을 요구하며 생활비를 끊어 버린 바람에 공작 부인이 기거하는 휘네 궁전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 바람에 50여 명의 하녀와 시종들의 끼니를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해 내보내고 남은 게 바로 키에라였다.
한 명 정도는 끼니 걱정을 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결국 이렇게 됐다.
“키에라…… 너도 일자리를 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저까지 떠나면 공작 부인의 수발은 누가 들어요?”
“나도 손발이 있어.”
“저는 괜찮으니까 어서 드세요.”
“입맛이 없어서 그래. 먼저 올라갈게.”
록시나는 까슬까슬한 입술을 앙다물고 돌아섰다. 키에라의 말대로 이틀이나 굶었더니 기력이 없었지만 배가 고파서 미칠 것 같지 않았다. 졸음이 쏟아지거나 넋을 놓는 시간이 늘어난 게 배고픔을 못 느끼게 한 것 같았다.
록시나는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앉아 창밖을 응시했다. 하늘이 우중충했다. 록시나의 인생 같았다.
“흠…….”
한숨이 쏟아졌다. 습관적으로 터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 번 더 한숨을 내보낸 후 머리맡에 둔 이혼 합의서로 손을 뻗었다.
반년 전 남편 안투르 퍼시 공작은 이혼 합의서를 들고 나타나 도장을 찍지 않으면 생활비를 끊겠다고 통보했다.
고함을 치거나 신경을 긁으며 협박했으면 원망스러울 텐데 그는 두 사람이 이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살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도 말했다. 록시나의 아버지와 두 오라비 때문이었다.
그를 사위로 맡은 후 록시나의 아버지 티에리 바라단과 두 이복 오빠들 케르거와 돈이 항상 문제를 일으켰다.
국왕의 막내아들이자 퍼시의 영주인 공작이 제 사위라는 점을 이용해 뇌물을 받아 안투르 퍼시의 명예를 떨어트렸단다.
그리고 귀부인들을 희롱하는 사건이 빈번한데도 국왕과 사돈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안투르는 굉장히 도덕적인 성격이고 제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면 끔찍하게 싫어했다. 아니 경멸하는 수준이었다.
록시나가 없으면 생활이 안 될 정도로 사랑에 빠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용서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어 했다.
그들과의 악연을 끊어 내려면 록시나와 이혼뿐이라고 말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그를 이해한다. 그녀가 생각해도 아버지와 두 오빠들은 쓰레기였다.
딸자식이자 누이동생인 그녀도 친정이라면 치가 떨리게 싫었다. 그래서 감히 그에게 이혼만큼은 안 된다고 매달릴 수 없었다.
이혼 합의서를 놓고 나가 버리는 안투르를 묵묵히 바라본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가 휘네 궁전을 떠나자마자 생활비가 끊겼고 작금의 상황에 이르렀다.
록시나는 이혼 합의서를 바라보다가 헙탁 서랍에서 도장을 꺼냈다. 키에라까지 굶게 할 순 없었다. 버틴다고 희망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런데도 도장을 찍지 않은 건 친정으로 돌아갈 시간을 최대한으로 늦추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났다.
록시나는 이혼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눈물이 흐르거나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무덤덤한 기분처럼 울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끼고 결혼반지를 뺐다.
이것으로 결혼은 끝났다. 돌돌 말아 놓은 이혼 합의서에 결혼반지를 끼워 고정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출하세요?”
모자를 챙겨 나오자 키에라가 물었다.
“응…….”
“어디 가시는데요? 궁 밖을 나가시는 거면…… 마부가 없어서 제가 몰아야 해요.”
“길렌 궁전에 가려고.”
길렌 궁전은 안투르가 기거하는 궁전이었다. 공작성의 살림집은 휘네 궁전이었지만 이혼을 요구한 날 안투르가 거처를 옮겼다. 길렌 궁전은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었다.
“그거 혹시…….”
키에라의 시선이 이혼 합의서에 머물렀다.
“버틴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고…… 너까지 굶게 할 순 없어.”
키에라는 입술만 꼬물거렸다. 굶는 것보다 록시나의 사정이 딱해서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다녀올게.”
록시나는 열없이 웃어 보인 후 휘네 궁전을 나왔다. 모자를 쓴 그녀는 소녀 같았다. 가는 몸매는 바람에 불 때마다 날아갈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그렇다고 병약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었지만 걸음걸이에서 힘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앞만 보고 걸었다.
제 명운이 달린 이혼 합의서의 무게가 가벼운 탓에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쉴 때마다 한숨이 섞였다. 이혼이 확정될 때까지 몇 달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퍼시 공작 부인의 삶도 오늘로 끝이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며 좋게 생각하고 싶어도 낯빛은 그늘처럼 흙빛이었다. 절망감에 전 눈빛으로 정면만 바라보며 울창한 나무숲을 지날 때였다.
“와아!”
길렌 궁전에 다다르자 어디선가 함성이 들렸다. 그녀는 함성이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분주하게 발을 움직이자 경기장이 나왔다.
길렌 궁전엔 몇 백여 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이 있었다. 이곳에선 주로 마상, 족구, 축구, 폴로, 야구 등과 같이 다양한 경기가 열렸다.
오늘도 경기가 열린 모양이다. 공작의 근위대인 푸른 날개와 공작성의 경비대인 백사자 문양의 휘장이 펄럭거리는 막사가 수십여 개 있었다.
경기는 주로 근위대와 경비대가 팀을 나눴다. 결속력을 다지고자 기강이 헤이해질 때마다 크고 작은 경기를 열었다.
경기장과 가까워질수록 축제의 분위기였다. 그리고 경기는 한참 전부터 시작됐던 모양이다. 굶주리는 안주인의 사정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기가 막혀 헛웃음이 쳐졌다.
“나 같은 건 굶어 죽든 말든, 상관도 없겠지.”
록시나는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경기장엔 수백여 명의 관람객이 있었다. 모두 귀족이나 기사들의 가족이었다.
사람들은 공 뺏기 경기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록시나가 온 걸 알아보지 못했다. 대외적인 행사 외엔 휘네 궁전에서 지낸 탓에 몰라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경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와아!”
사람들의 함성이 또다시 시작됐다. 상대방 선수를 어깨로 밀치며 골대에 공을 넣은 안투르의 활약 때문이었다.
록시나의 남편이자 퍼시공작령의 영주인 그는 생명력이 넘치다 못해 열정적이었다. 공 뺏기 경기는 물기를 먹인 진흙 위에서 맨발로 치르는 경기로 여인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다.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짧고 타이트한 바지 하나만 입은 사내들이 근육질의 몸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게 인기의 요인이었다.
단련이 잘된 기사들의 몸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으니 이런 여흥이 또 없었다. 여인들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노골적인 시선을 떼지 못했다.
록시나는 안투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안투르 퍼시.
스물여섯의 젊은 공작은 케이프런 왕국이라는 강국의 공작이자 아달프 국왕이 애지중지하는 늦둥이 막내아들이다.
본명은 안투르 오스번 케이프런이었지만 록시나와 결혼하면서 퍼시령의 공작이 되었다. 케이프런 왕국은 왕자가 결혼하면 공작령을 내렸고, 공작령의 지명을 성(姓)으로 사용하였다.
국왕인 아버지가 물고 빠는 늦둥이 막내아들인 만큼 안투르는 모든 면에서 풍족했다. 항상 자신감이 넘쳤고 왕자 특유의 오만과 거만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리고 카리스마가 넘쳐 머리카락부터 발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가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모두를 겁먹게 했다.
이렇듯 빼어난 배경과 남다른 기질을 타고난 젊은 공작은 외모까지 훌륭했다.
어머니 아모사 왕비의 미모를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눈이 부셔서 감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미남이었다.
이렇게 완벽한 미남의 미모가 절정에 올랐다. 스물여섯인 그는 우락부락한 진짜 사내가 되었고 누가 봐도 에너지가 넘쳤다.
“모두 덤벼!”
안투르가 고함쳤다. 상체를 환히 드러낸 그는 바지 하나만 입은 채 진흙탕을 뛰어다녔다.
그 모습이 꼭 신화에 나오는 에로스처럼 뭇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몸에 진흙이 묻어도 훌륭한 미모를 가릴 수 없었다.
오히려 야성적인 모습을 부각해 여심을 흔들어 놓았다. 턱! 안투르가 긴 포물선을 그리던 가죽 공을 한 손으로 잡았다.
“우와!”
구경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상대방 선수들이 달려들기 시작했지만 안투르는 빨랐다.
옆구리에 낀 가죽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제게 달려드는 수비수와 공격수를 조롱하듯 가볍게 따돌렸다.
요리조리 몸을 피하거나 날아오를 때 튄 진흙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모두 즐거워 보였다. 공 빼앗기 경기를 치르는 안투르와 기사들, 경기를 구경하는 귀족들의 얼굴 모두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안투르와 기사들이 상의를 탈의한 모습은 마치 뛰어다니는 조각상 같아 움직임이 큰 동작을 보일 때마다 환호성이 터졌다.
“승!”
심판을 보던 기사장 하네스가 안투르가 주장인 팀의 승리를 알리자 모두가 박수를 치며 일어났다. 록시나는 챙을 깊이 눌러써 얼굴을 가린 후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안투르는 분명 진흙이 잔뜩 묻은 몸을 씻으려고 할 테니 이혼 합의서를 건네며 키에라의 밀린 급여와 이혼이 확정될 때까지의 생활비를 달라고 요구할 생각이었다.
경기장에서 떨어진 곳엔 여러 개의 막사가 있었다.
그녀는 한가운데 위치하고 제일 큰 막사로 곧장 걸어갔다. 안투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록시나를 보지 못한 안투르는 호위 기사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물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진흙을 닦아 내고 있었다.
호방하게 터지는 웃음소리와 안색이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어 환했다. 고른 치열을 모두 드러낸 그는 승리로 이끈 방법을 호위 기사들에게 전수하듯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그때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넓은 가슴, 근육질의 팔과 조각처럼 잘 깎아 놓은 듯한 복근이 탄력적으로 움직였다. 공작의 막사 앞에 도착한 록시나는 치마를 꽉 움켜쥔 채 안투르를 바라봤다.
안투르…….
록시나는 바싹 말라 버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왼쪽 가슴 쪽으로 손이 올라갔다.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긴장됐다.
막상 마주치고 나니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부르튼 입술을 혀끝으로 문지르길 수 번.
록시나를 발견한 호위 기사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안녕하십니까, 공작 부인.”
그들은 일제히 공작 부인에게 예의를 갖추어 허리를 숙일 때야 안투르도 록시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투르의 표정이 순식간에 식었다. 웃음기가 가신 얼굴이 딱딱하게 변했다. 그는 한쪽 눈썹을 둥글게 휘는 동시에 턱을 쳐들었다.
“무슨 일이지?”
표정만큼이나 거만하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찾아온 용건을 물은 안투르는 호위 기사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의 고갯짓에 호위 기사들이 눈치껏 흩어지기 시작했다.
록시나는 안투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얘…….”
“빈손이면 할 얘기가 없어.”
선수 치듯 말허리를 자른 안투르가 막사로 들어가자마자 커다란 물통 앞에 섰다. 바가지를 들어 올리자 등 근육이 쩍쩍 갈라져 도드라졌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넓은 등과 곧은 허리, 작지만 봉긋한 엉덩이, 말의 허벅지처럼 굵고 단단한 허벅지와 매끈한 종아리 때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혼 합의서에 도장을 찍기 전엔…….”
“가지고 왔어요.”
이혼 합의서를 내밀었다. 결혼반지로 고정한 두루마리 종이를 든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그는 몸에 묻은 진토를 씻어 내린 동시에 바지를 벗었다.
축 늘어진 남성이 가랑이 사이에 달려 있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저것이 저렇게 굵고 길었나?
제 몸을 관통하듯 넘나들던 기억과 감각이 혈관을 쫀쫀하게 조여 난감했던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형식적으로 넣고 빼는 수준의 관계였음에도 음부가 간질간질해 큰일이었다. 얼굴을 붉힌 채 입술을 꼬물거리는 록시나에게 안투르가 걸어왔다. 몸에 묻은 진토를 닦아 낸 그는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넓은 어깨와 다부진 가슴, 철갑을 두른 듯한 복근, 잘 단련된 팔 근육이 시야를 꽉 채우는 바람에 정신이 혼미했다.
더구나 그는 남성향이 강한 체향을 흩뿌리고 있어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기세로 뛰었다.
“이혼하지 않겠다더니?”
안투르가 머리카락을 적신 물기를 털어 내며 물었다. 그녀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매료된 듯 바라보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치마 밖으로 비죽 나온 구두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가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용기를 그러모으듯 단전까지 공기를 들이마시는 모습이 측은했다.
“더는 버틸 힘이 없어서 이혼을 선택한 거예요.”
“6개월…… 오래 버텼어.”
안투르는 거만하게 쳐든 턱을 비틀었다. 그는 이혼 합의서를 빼앗듯이 낚아채다가 결혼반지를 발견했다. 그는 결혼반지와 록시나를 번갈아 봤다.
“이혼하기로 해놓고 결혼반지를 끼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새 주인을 만날 때까지…….”
“새 주인은 없어. 재혼하게 된다면 새로 제작할 테니까. 이건 당신이 가져.”
안투르는 결혼반지를 록시나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아바마마께서 며느리에게 선물한 거니, 당신 거야.”
“하지만…….”
“다이아몬드만 분리해서 되팔든 목걸이를 하든 해.”
안투르는 무심한 어조로 말한 후 내용을 읽어 봤다.
록시나 퍼시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찍힌 도장을 확인한 그가 종이를 돌돌 말아 침상 위에 던졌다.
“오늘 아바마마께 제출하지. 승인까지 서너 달은 걸릴 거야. 아들을 이혼남으로 만들 생각이 없으실 테니까 설득의 시간이 필요하거든. 이혼 합의금으론 얼마를 원하나?”
“6개월 치 생활비와 이혼이 확정될 때까지의 생활비, 키에라의 급여를 금일 처리해 주세요.”
“라울에게 지급하라고 말해 놓지.”
“바로 받을 수 있나요?”
“물론.”
“마부도 고용해야겠어요. 비용을 지불해 주세요.”
“정원사, 마부, 하녀들 모두 원래대로 돌려놓지. 합의금은 얼마나 원하지?”
“돈은 필요 없어요.”
“합의금을 받지 않겠다는 건가?”
“아뇨, 돈보다는 다른 걸로 보상받을게요.”
“다른 보상?”
“오늘부터 다른 사내를 만나는 걸 허락해 주세요.”
안투르는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록시나를 노려봤다. 결혼 후 2년, 그녀를 이렇게 오래 본 것도 처음이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오늘부터 다른 사내와 잠자리를 하게 해주세요.”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군.”
안투르는 어이가 없어 혀끝으로 어금니를 쓸었다. 허리를 양손으로 짚은 그는 고개를 앞으로 빼 록시나를 잡아먹을 기세로 쏘아봤다.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이혼하면 다른 사내를 만나게 될 텐데, 뭘 그렇게 서둘러?”
“제가 골라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이번뿐이에요.”
“이봐.”
“원만하고 조용한 이혼을 바라지 않아요?”
말투처럼 따끔한 시선을 치켜뜬 록시나가 안투르를 노려봤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강렬하게 부딪쳤다. 활활 타오르던 잿빛 눈동자에 날카로운 섬광이 번들거렸다.
보통은 그의 눈빛에 기가 죽기 마련인데 록시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나 보다. 한쪽 눈썹을 높이 쳐드는 걸로 그를 압박했다.
“허락 못 하겠다면 뭐라도 저지를 심산이군.”
“폐하께 당신이 제게 한 일을 알리겠어요. 생활비를 끊으면서까지 아버지가 정해 준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했다는 걸요. 저는 하사품이나 마찬가지인데 감히 왕의 하사품을 거절해요? 아들이라도 안 될 말이죠.”
록시나는 푸른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지난 6개월 동안 이혼 후 자신에게 닥칠 불행을 걱정하느라 피가 말랐다.
자유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니 친정으로 돌아가기 전에 잊지 못할 추억을 쌓고 싶었다. 몸 구석구석.
“어차피 나는 당신이 뭘 하든 관심이 없어. 허락을 구할 게 아니라 몰래 하지 그러나?”
“정정당당하게 외도하고 싶어요.”
“정당한 외도라니…….”
“당신 몰래 하는 건 죄를 짓는 거예요. 이혼녀가 되는 것도 황망한데, 죄인까지 되란 말이에요?”
록시나의 대답에 안투르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제 아내가 이런 성격인 줄 몰랐다.
안투르는 짝다리를 짚고 선 자세로 록시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제 가슴에 닿는 키, 엉덩이를 가릴 만큼 길게 늘어트린 곱슬머리, 밀가루처럼 하얀 피부에 파란 눈동자, 분홍빛이 선명한 입술과 오뚝한 콧날을 빠르게 훑었다.
눈에 띄는 미인형은 아니었지만 아기자기한 이목구비와 홍조를 머금은 뺨이 제법 인상적이었다. 발가벗은 몸을 본 적이 없어서 몸매가 어떤지 모르겠다.
가슴은 좀 큰 것 같았지만 드레스가 펑퍼짐한 탓에 확신할 수 없었다. 가슴이 크냐, 작으냐는 중요하지 않다. 스물둘의 젊은 여자가 발정한다면 침 흘릴 짐승은 넘칠 테니까.
생각이 복잡해진 안투르는 입맛을 다셨다. 록시나가 색을 밝힌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던 그로선 의아했다.
“록시나, 당신…… 그런 쪽으로 활발했나?”
안투르는 침착하고 격조 있는 음성으로 질문을 던진 후 록시나의 안색을 뜯어봤다. 아무리 봐도 그런 쪽으로는 타고난 것 같지 않았다.
“아주 많이…… 활발해요.”
“몰랐군.”
“당연히 몰랐겠죠.”
“말하지 그랬어?”
“말했으면 우리 둘의 사이에 변화가 생겼을까요?”
록시나는 조소를 흘렸다.
“모르지, 한 번 했는데 너무 좋아서 당신을 매일매일 찾았을지. 물고 빠느라고 정신 없었지도 몰라.”
“제가 아버지 딸인 것도 용서가 될 만큼요?”
안투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티에리 바라단의 탐욕적인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콧등을 잔뜩 구겼다. 오물을 밟은 것처럼 코끝이 찡했다.
“거봐요, 안 되죠?”
“내가 섣불렀군.”
“전 그런 쪽으로 왕성하고 외로워요. 그러니까 허락해 주세요.”
“안 돼.”
안투르는 똑 부러지는 음성으로 거절했다. 고집스레 뜬 눈매가 그녀에게 경고하듯이 날카롭게 변했다.
“공작 부인으로서의 체통을 지켜. 음탕한 건 이혼 후에 해.”
그녀가 공작 부인이라는 게 세상에 알려진다면 개망신은 안투르의 몫이 된다. 생각만 해도 입매가 비틀렸다.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이혼할 때까지 참아.”
“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이혼도 없어요.”
“이혼 후엔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당신이 매일 찾아와 줄 것도 아니잖아요!”
“우린 이혼할 거야, 내가 왜 가나? 그리고 이혼할 사이인데 그건 하겠다? 당신은 내가 밉거나 원망스럽지 않아?”
“사람은 미워해도 거긴 미워할 수 없죠.”
록시나의 대답에 안투르는 입술을 벌렸다. 그녀의 시선이 배꼽 아래로 향했다.
“시원시원하게 생겼네요. 주인을 닮아서 잘생긴 게 제대로 해보고 싶은 충동이…….”
“그만! 당신 이런 여자였나?”
“네.”
“그동안 외로워서 어떻게 지냈어? 혹시 나 모르게…….”
“자위 기구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어요. 기둥처럼 생긴 것만 있으면 되니까.”
록시나는 당돌하고 거침없었다. 안투르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안투르의 분신에 머물러 있었다.
“천박한 여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연애를 하고 싶어요. 굵고 튼튼한 팔에 안겨 키스를 하고 싶고…… 넓은 가슴에 안기고 싶어요. 옆자리가 허전하고 텅 빈 침대에서 혼자 일어나는 건 그만하고 싶어요.”
결혼 생활 2년째였지만 안투르와 잠자리를 한 건 결혼식 당일과 배란 기간 중 몇 번이 전부였다.
그것도 형식적인 관계로 록시나는 치마를 허리까지 깐 상태에서 엎드려야 했고 그는 남성만 꽂고 흔드는 게 고작이었다.
불이 붙을 만하면 파정을 마친 남편이 바지를 추어올린 후 침실을 나갔다. 용건만 보러 온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애욕에 눈을 떠 버린 그녀로선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당신의 마음은 포기한 지 오래예요. 예식을 올리기 전에 당신은 이런 말을 했었죠. 아바마마의 체면 때문에 하는 결혼이지만 원만한 생활은 힘들 거라고요. 당신이 날 쳐다보는 눈빛을 보고 이런 날이 올 걸 예상하고 있었어요.”
“예상이 가능했다면 내 성격도 예상했을 텐데? 안 된다고 한 이상, 허락할 수 없어.”
“그럼 이혼도 무효예요. 마음대로 해요, 나뭇가지만 있어도 얼마든지 풀 수 있으니까.”
몸이 달아올랐는지 질 구멍에 좆만 꽂으면 상관없다는 투였다.
“내가 생활비를 끊으면?”
“폐하께 용돈을 달라고 하죠, 뭐. 아드님께서 생활비를 끊는 바람에 하녀와 쫄쫄 굶고 있다고. 그리고 소문 내버릴 거예요. 당신이 이혼을 요구하며…….”
“망신을 주겠다?”
“안투르 퍼시 공작은 체면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잖아요. 아내와 처가를 뺀 모든 사람에겐 착하고 성실한 공작이길 바라죠. 그게 왕가의 혈통으로서 갖추어야 격조라고 생각하니까요.”
당황한 안투르는 혀를 입 안에서 굴렸다. 생활비를 끊은 탓에 이혼하기로 했다지만 속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이혼을 원하는 건지, 외도를 빌미로 이혼을 하지 않으려는 건지. 그녀의 생각을 가늠할 수 없었던 그는 쏘아붙일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하고 싶어요, 제 몸을 올라탄 사내가 헐떡거리는 걸 원해요.”
“미쳤군.”
“망가지고 싶어요.”
하도 어이없는 소리라 안투르는 록시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밀랍인형처럼 엉덩이만 대주던 아내의 민낯에 당혹스러웠다.
“망가지면 당신만 손해일 텐데?”
“저는 이미 결혼과 동시에 손해를 봤어요. 한 푼도 쥐어 보지 못한 내 몸값은 아버지가 고스란히 챙겼죠. 당신과 결혼해선 돈 쓰는 건 문제없었지만 행복하지 않았고 이혼을 하게 되면 내 몸값은 똥값이 돼요.”
“재혼을 생각해야지.”
“늙다리 귀족에게 시집이나 갈 텐데요. 이혼녀나 과부에 젊은 남자는 행운이 따라야 해요. 그런데 제겐 그런 행운이 없을 것 같아요.”
록시나는 앞날을 예측한 것처럼 자조했다. 케이프런 왕국에서 나고 자란 여자는 왕비와 공주가 아닌 이상 가축처럼 거래가 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결혼하고 싶을 땐 처가에 몸값을 주고 데리고 간다. 몸값은 나이와 외모, 가문에 따라 천차만별로 정해졌다.
명문 귀족가의 영애라도 팔려 가는 걸 피할 수 없었다. 데리고 살다가 자식을 못 낳거나 불화가 생기면 사내들은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단, 아내는 남편에게 이혼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에 노예나 다름없었다. 이 노예는 이혼을 당하면 친정으로 돌아가 다른 남자에게 팔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독신으로 두는 법이 없었지만 드물게 이혼녀에 독신일 경우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 가문에 수치를 안겼다는 죄목이었다.
그러니까 록시나의 운명은 또다시 팔려 가든가 화형을 당하든가 둘 중의 하나였다. 행복한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공작님과 한 결혼처럼 또 어디론가 팔려 가겠죠. 지금까지의 결혼 생활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가혹할 거란 예감이 드네요.”
아버지와 오빠들은 록시나의 결혼을 장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혼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훤했다.
“공작님이 원하는 대로 해 줬으니까 오늘부터 다른 사내를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세요.”
록시나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비장한 표정과 정확한 어조에 안투르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그녀를 위아래로 연신 훑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황당한…… 하아.”
안투르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도 어쩔 수 없군. 바라단 가문은 아주 음탕하지. 뇌물, 비리, 문란한 생활, 탐욕. 원하는 게 있으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해내야 하는 그 아집마저 당신에게서 느껴져.”
“예, 저는 록시나 바라단이에요. 망할 아버지의 비열하고 문란한 피가 이 몸에 흐르죠.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매듭 지어요.”
록시나가 슬슬 표독한 성격을 드러냈다.
“내가 원하는 건 살아서 팔딱거리는 거예요. 다른 건 없어요.”
살아서 팔딱거리는…….
현기증이 날 것처럼 혈압이 오르고 뒤통수가 얼얼했다. 안투르는 록시나의 얼굴에 구멍을 뚫을 것처럼 꽤 오랫동안 응시했다.
“다른 사내와 자고 싶어요.”
“좋아, 원하는 대로 해.”
안투르의 허락에 록시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성큼 다가와 그를 와락 껴안았다. 미움의 감정이 없다지만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놀리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고마워요.”
록시나는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후 뒤로 물러났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그는 그녀를 이상한 여자 취급했다.
“정상이 아니군.”
“고마워요, 진심이에요.”
“……임신만 조심해. 아바마마께서 승인하기 전에 다른 놈의 씨를 갖는 건 꽤 위험한 일이 될 거야.”
록시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만 가 볼게요.”
안투르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가든 말든 그는 뒤돌아섰다. 어안이 벙벙한 것 같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록시나는 막사를 나왔다.
막사를 나온 록시나는 하늘을 응시했다. 눈이 시릴 만큼 푸른 하늘 끝이 붉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잘했어, 록시나…….
록시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싸구려 창녀처럼 말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허락을 받아 내지 못했을 터다.
이혼을 결심하기까지 흘린 눈물의 양을 안투르는 모를 거다. 미움과 원망이 없다? 거짓말이다. 그런 마음이 왜 없겠나.
겉으로 드러내 봤자 안투르가 알아줄 것도 아닌 데다 자존심만 상할 게 뻔해 괜찮은 척 연기한 것뿐이다.
괜찮은 척, 씩씩한 척, 천박한 척 연기를 해야지만 버틸 수 있으니까.
록시나는 자조하다 말고 얼굴을 문질러 억지웃음이라는 가면을 썼다. 맞은편에서 안투르의 책사이자 퍼시성의 재정을 담당하는 라울과 푸른 기사단의 단장, 하네스가 걸어오고 있었다.
록시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두 사람에게 걸어갔다. 그러자 록시나를 제일 먼저 발견한 라울이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공작 부인.”
“안 그래도 라울을 찾아가던 참이었네.”
“저를요?”
“지금 막 이혼 합의서를 전달 드렸어. 지급을 중지했던 생활비 6개월 치와 키에라의 급여를 지급해 줬으면 좋겠어.”
록시나의 대답에 하네스가 공작의 막사를 응시했다. 라울도 막사와 록시나를 번갈아 보다 말문을 뗐다.
“……이혼하시는군요.”
“굶어 죽게 생겼기에.”
“휘네 궁전으로 보내겠습니다.”
“3,000길라트(한화로 약 2000만 원)를 먼저 받을 수 있을까?”
“지금 당장요?”
라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공작 부인의 생활비는 월 4,000길라트였다. 품위 유지비와 궁전 관리비, 각종 행사, 공작 부인의 용돈 등등을 생각한 금액으로 이는 법으로 정해 놓은 금액이었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하는 건 아니었지만 보자마자 달라고 해 당황스러웠다.
“당장. 좀 써야 할 곳이 있어.”
“어디에 쓰시려는지…….”
“유흥.”
록시나의 대답에 라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사이 안투르가 막사에서 나왔다. 하네스가 안투르에게 뛰어갔다.
록시나는 새침한 표정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잠시 후 하네스에게 상황을 보고받은 안투르가 소리쳤다.
“내어 드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