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103화 (103/103)

103화. 외전 4.

“아빠!!”

벌써 열 살이 된 재희는 부리나케 달려와 무혁에게 뛰어들었다.

“우리 딸, 오늘도 학교 재미있었어?”

부장 검사로 승진한 후론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그럴 때마다 무혁은 종종 재희를 직접 학교까지 데리러 가곤 했다.

“저기 좀 봐, 재희네 아빠가 오셨어.”

“진짜 멋있다.”

주변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무척 마음에 든 건지, 재희는 일부러 보란 듯이 무혁에게 더 응석을 부리곤 했다.

“아빠, 안아줘.”

“재희는 이제 아기 아니라고 하지 않았었나?”

“지금은 재혁이가 없으니까 괜찮아요.”

어린 동생 앞에서는 의젓한 재희지만, 동생이 없을 때는 당당히 어리광을 부리겠노라 선포했다.

사랑스러운 따님의 기적의 논리 앞에서 무혁은 기꺼이 응석을 받아줬다.

“어쩌면 이리도 귀여우신지, 우리 딸.”

뺨에 살짝이 입을 맞춰주자 재희는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륵 웃었다.

여전히 가볍기만 한 재희의 손을 꼭 잡고서 무혁은 손수 차 뒷문을 열어줬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

“응. 재희도 카드 예쁘게 만들었어요.”

생일 파티를 위해 부녀는 나란히 손을 잡고 플라티나 호텔 베이커리 코너에 들렀다.

일찌감치 예약해 둔 생일 케이크는 재희가 직접 찾으러 갔다.

“케이크 찾으러 왔어요. 진재희예요.”

“네, 귀여운 꼬마 아가씨. 여기 케이크 조심해서 가져가세요.”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직원은 직접 나와 재희의 손에 상자를 단단히 쥐여줬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해가며 재희는 침착하게 케이크 상자를 들고 무혁에게로 돌아왔다.

“아빠, 여기 케이크 찾아 왔어요.”

“기특하네. 우리 딸, 잘했어.”

사소한 성공이 누적될수록 아이의 자존감이 높아지는 법이니까.

밝게 웃는 재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혁은 화사한 꽃이 그려진 케이크를 확인했다.

흔들리지 않도록 뒷자리에서 재희가 상자를 꼭 잡고 있고 무혁은 느긋하게 운전대를 잡았다.

[내일 특별 사면을 통해 약 오백 명의 죄수가 출소하게 됩니다. 이번에 형 집행 정지가 결정된 조원식의 경우 십 년 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끄고서 무혁은 어느새 뒷자리에서 고이 잠든 딸을 힐끔 바라봤다.

이제 카 시트는 겨우 졸업했지만, 여전히 작고 어린 딸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는 불행은 저 혼자 겪은 것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늘 하나 없이 해맑은 딸을 힐끔 보고서 무혁은 엷은 미소를 띄웠다.

“무혁!!”

현관문을 열자마자 애 보기에 지친 제레미가 달려왔다.

식구가 늘자 아예 옆집을 사서 정착했지만, 제레미는 언제나 무혁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곤 했다.

“삼촌, 케이크 망가지니까 뛰어들지 마.”

“재희 너!”

어릴 때는 그렇게 제레미를 잘 따르던 재희도 요즘에는 은근히 약도 올리고 놀려먹기도 했다.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거실로 오니 둘째 재혁은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려 아빠에게 달려왔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응, 재혁아.”

케이크 상자를 내려놓고 무혁은 아직 어린 아들을 안아 올렸다.

활발함이 다소 과하기까지 한 누나와 달리 재혁은 유난히 낯 가림이 심하고 얌전했다.

태어날 때부터 워낙 순하게 태어난 덕분에 민재도 두 시간만에 순산했을 정도니까.

기특하기만 한 아들의 엉덩이를 두드려주며 무혁은 민재의 행방을 물었다.

“엄마는?”

“저기.”

안방을 가리키며 재혁은 포근한 아빠 품에 꼭 안겼다.

매번 누나가 아빠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니, 어린 재혁 역시도 틈이 날 때마다 아빠의 품에서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토실토실한 뺨을 살짝 꼬집어주고서 무혁은 재혁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자고 있어요.”

조심스레 문을 여니 침대 위에 엎드려 잠든 민재가 보였다.

아직 정장도 다 벗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걸 보니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언제 잠든 거야?”

“재혁이랑 놀다가 잠들었어요.”

요즘 들어 재판이 많다더니, 며칠이나 밤을 새운 사건 공판이 오늘 끝났으니 저리 지친 것도 이해가 갔다.

“재혁이 기특하네. 일부러 안 깨운 거지?”

“대신 제레미 삼촌한테 놀아달라고 했어요.”

“잘했어.”

정말로 의젓하고 기특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서, 무혁은 머리맡에 흩어진 사건 기록을 정리했다.

꼼꼼하게 기록된 메모만 봐도 질 재판은 아니었던 모양이라서.

무혁은 재혁을 옆에 앉혀두고 민재를 바로 눕혀줬다.

“잠시 제레미 삼촌이랑 놀고 있을래?”

“응. 아빠.”

재혁을 내보내고, 무혁은 타이트한 펜슬 스커트의 지퍼를 내렸다.

블라우스의 단추를 모두 열고서, 뒤로 깔끔하게 묶어놓은 머리끈도 풀었다.

“어지간히도 피곤했나보네.”

무방비하게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오로지 남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얇은 슬립만 남겨두고서 무혁은 클렌징 워터를 화장솜에 묻혀 조심조심 화장도 지워줬다.

민낯에 마스크 팩까지 얹어주고 나니 편한지 배시시 웃었다.

여전히 손이 많이 가는 민재를 보며 무혁은 살며시 입을 맞췄다.

“조금만 더 자고 있어, 공주님.”

생일만은 온전히 둘이서 보내고 싶다는 무혁의 선언은 아이가 둘이나 있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했다.

거실에 나가니 두 장난꾸러기는 제레미에게 매달려 신나게 놀고 있었다.

“이젠 애도 잘 보네.”

“힘들어, 오늘은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단 말이야.”

“삼촌이 잘 놀아줘서 재희도, 재혁이도 좋겠네?”

“제레미 삼촌, 좋아!”

매번 바쁘네 힘드네 투덜거리면서도 제레미는 훌륭한 보모 노릇을 해줬다.

언제나 컴퓨터만 잡고 방에 틀어박혀 있을 녀석도 두 아이 덕분에 이제는 제법 외출도 자주 하게 됐다.

“우리 말썽꾸러기들, 옥자 할머니가 왔어요.”

“할머니다!!”

그래도 오늘은 일이 있으니까, 무혁은 옥자에게 부탁해 두 아이를 맡기기로 했다.

여전히 힘이 넘치는 홍옥자 사장님께서는 두 아이를 양손으로 꼭 잡고서 무혁에게 은근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언니가 서운하다더라. 이번 주 중에 한 번 얼굴이라도 좀 비춰.”

“민재 소송이 오늘 끝났어요. 며칠 뒤에 한 번 들르겠다고 전해주세요.”

“흐응, 그래 그럼.”

그토록 밉다고 하던 홍 여사도 이제는 사위에게 먼저 들르라는 이야기를 할 만큼 너그러워졌다.

“아빠 안녕!!”

아이들에게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고 무혁은 제레미에게 슬쩍 눈짓했다.

이제는 아이들 앞에서 차마 들려줄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까.

예상대로 제레미는 일찌감치 조원식의 출소 소식을 알고 있었다.

“독사파 쪽은 어때?”

“당장은 조용해. 성준범 때랑 달리 바로 건드리진 않을 건가봐.”

이 년 전, 감옥에서 출소한 성준범은 두 달도 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표면상으로는 실족사로 처리되긴 했지만, 그간의 패턴은 독사파와 연루된 죽음과 상당 부분 일치했다.

사적으로 유용했던 재산들은 혜성 법무팀과 A&Z의 손에 가압류 되어 빈털터리가 됐고, 성준범의 부모 역시도 횡령 및 배임 혐의로 체포됐었다.

그나마 기댈 구석이었던 성준범마저 죽고 없으니, 그들은 출소한 후에도 여전히 빚쟁이들에게 쫓겨 소식조차 끊긴 지 오래였다.

“어떻게 할 거야?”

“조장미 쪽은 어때?”

“슬슬 집에도 가압류가 들어오려나 봐. 그동안 많이 해 먹었지.”

조조가 해체되고 난 후에도 조장미는 예전처럼 화려한 생활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하더니, 제 아버지가 평생을 걸쳐 모아둔 재산이 꽤 많았는지 장미가 모두 탕진하는 데 십 년이나 걸린 건 예상 밖이었다.

“뭐, 그것도 얼마 못 가겠지만.”

조장미 쪽에서도 제 아버지의 출소를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장미는 나쁜 유혹에 쉽게 넘어가곤 하는지 금세 제레미가 쳐놓은 미끼를 냉큼 물었다.

“너무 쉬워서 놀랐어. 설마 저쪽에서 먼저 자기 아버질 죽여달라고 할 줄은 몰랐지 뭐야.”

“무서웠겠지.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려먹은 걸 알면 아무리 조원식이라도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직접 갈 거야?”

가능하면 민재가 이번 일을 모르길 바라지만. 무혁은 어깨를 으쓱 하고서 명확히 대답하지 않았다.

“쉿.”

방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제레미는 눈치껏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무혁은 조심스레 안방 문을 열었다.

“일어났어?”

“내가 언제 잠든 거지, 애들은? 재혁이가 없어.”

여전히 비몽사몽하는 민재를 보며 무혁은 괜히 웃음이 터졌다.

“아까 옥자 이모님이 오셔서 데려가셨지.”

“아, 맞다. 오늘 엄마한테 맡기기로 한 날이었지.”

“많이 피곤했나 보네. 안 팀장님한테 한마디 해야겠어.”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민재는 여전히 늘어져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런 민재의 곁에 다가가 무혁은 슬며시 제 무릎을 내줬다.

남편에게 몸을 기댄 채 민재는 반쯤 잠에 취해 뺨을 비볐다.

“나 오늘 소송, 이겼다?”

“그래?”

“응. 원장이 성폭행 건도 입증했고, 그 과정에서 내부 고발자들 협박한 것도 인정받았어.”

안 팀장의 아픈 손가락 같던 사건은 돌고 돌아 민재의 손에 들어왔다.

굳이 이 건이 아니더라도 성 회장은 유독 험한 사건만 골라 맡는 딸을 무척 안타까워 하곤 했다.

하지만 무혁은 그런 민재가 더욱 자랑스러웠다.

“고생 많았어.”

“그래서, 오늘 축하 파티 해 주려고 애들도 보낸 거야?”

“생일이잖아.”

무혁의 말에 민재는 날짜부터 확인했다.

재판일은 기억해도 자기 생일은 기억 못 하는 것도 민재 답다고 해야 할지.

벌써 십 년이나 챙겼는데도 민재는 좀처럼 진짜 자기 생일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까맣게 몰랐어. 상상도 못 했네.”

“케이크랑 와인도 준비해놨어. 오늘 밤에는 아무도 우릴 방해하지 못할 거야.”

“플라티나 호텔까지 다녀온 거야?”

무혁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야 그 정도 수고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오늘 밤만은 민재를 오롯이 독점할 수 있을 테니까.

케이크에 예쁘게 초를 꽂고서 무혁은 둘 만의 파티를 준비했다.

“샴페인도 있으니까, 오늘은 잔뜩 취해도 좋아.”

“내가 누구 좋으라고 취해. 하여튼 엉큼하다니까.”

무혁의 속셈을 뻔히 읽고서도 민재는 잔을 거부하지 않았다.

하나씩 초를 꽂고서 무혁은 민재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언제나 변함없이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사랑해 민재야.”

“여보.”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잘 지내자. 난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케이크 위에 흔들리는 불빛을 보며 무혁은 살며시 민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달콤한 입맞춤을 마치고 민재는 조심스레 촛불을 후, 불었다.

“맛있겠다.”

“그럼, 정말 맛있지.”

크림을 가득 떠서 무혁은 손수 민재의 입술 틈 사이로 먹여줬다.

혀가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한 맛을 느끼며 민재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입술 어귀에 묻은 크림을 핥으며 무혁은 슬그머니 넥타이를 풀었다.

온전히 손에 넣은 이 행복은 제 것이니까.

누구의 손에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무혁 씨…….”

“눈 감아.”

목덜미를 살짝 깨물며 무혁은 민재의 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벌써 결혼한 지도 십 년이 훌쩍 넘었지만 부부 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못이기는 척 민재의 두 팔이 무혁의 목을 감싸안았다.

“하여튼, 엉큼하다니까.”

“그러게 누가 이렇게 예쁘래?”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향긋한 내음을 한껏 삼켰다.

여전히 싱그러운 그녀의 향기를 느낄 때마다 전율이 일었다.

“내일은 좀 늦을 것 같아.”

“무슨 일 있어?”

“약속이 있어서. 먼저 처가댁에 가 있어. 나도 그쪽으로 퇴근할 테니까.”

“약속이라니, 누구랑?”

“오래된 친구랑 만나기로 해서.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올게.”

악몽 같은 추억이 되살아나지 않도록 제 손으로 매듭을 지어야 한다.

누구도 알지 못하게.

제레미가 뒤에서 서포트 해 줄 테니 누구도 무혁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 검찰로 돌아가길 잘했지?”

“그렇지.”

한 걸음 더 내디딜 수 있는 용기는 모두 그녀에게 받았다.

차마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했지만.

민재가 등을 떠밀어 준 덕분에 무사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앞으로 보기 좋게 출세하셔야죠. 당신, 벌써 차기 검찰 총장감으로 오르내리고 있다면서.”

“누가 그런 소릴 해?”

“누구겠어. 우리 팀장님이지. 그렇게 악명이 높았던 주제에 특검 쪽 사람들하고는 아직 연락하고 지내는 모양이더라고.”

그토록 까칠하던 안 팀장도 사람이 제법 말랑말랑해졌다.

누구의 영향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것 참 다행이네.”

“당신은 검찰이 제일 잘 어울려. 재희도 커서 검사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

“흠,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은데.”

험한 꼴도 많이 보는 일이니 굳이 딸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은 직업은 아니다.

민재에게 허락을 구하고서 무혁은 힐끔 시계를 봤다.

“잠시만, 이리 와 봐.”

적당히 취기가 오른 채 무혁은 민재의 손을 잡아끌었다.

화려한 빌딩 숲 사이로 어느새 눈부신 보름달이 동쪽 하늘 어귀에 걸려 있었다.

“예쁘다.”

“같이 하늘을 보기로 한 약속, 잊어버린 건 아니지?”

자기 입으로 말했던 주제에. 민재는 완전히 잊어버렸단 얼굴로 무혁을 올려다 봤다.

정말로 무심한 아내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걸지도 모른다.

“기, 기억나. 기억하고말고!”

“암, 그러시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무혁은 민재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아마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두 사람을 위협할 것들은 모두 사라지게 될 테니까.

“생일 축하해, 민재야.”

“고마워, 여보.”

민재의 손을 꼭 잡은 채 무혁은 눈을 감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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