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외전 3
민재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건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지만 어째 하는 짓이 연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잘 돌봐주는 오빠에 가깝다.
“그건…….”
지난번 그 일 이후로 무혁은 민재에게 일절 먼저 다가온 적이 없다.
조르면 키스를 해주긴 하지만 거기서 끝.
심지어 민재가 침대에서 잠이 들었을 때도 무혁은 거실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
친구들과 헤어진 후에도 좀처럼 그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니 평소처럼 손을 잡고 걷고 있으면서도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다.
오늘따라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민재를 보며 무혁은 선뜻 이마에 손을 얹고 열부터 쟀다.
“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
“그럼 시험을 망쳤어?”
진무혁에게 족집게 과외까지 받았으면서 망쳤을 리가.
고개를 휘휘 젓고서 민재는 아예 턱까지 괴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선배는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밥을 잘 먹어서.”
언제는 예쁘다더니. 매번 물어볼 때마다 대답이 바뀌었다.
슬쩍 눈을 흘기고서 민재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괜히 콧방귀를 꼈다.
“언제는 예뻐서 좋다며.”
“여전히 예뻐서 좋지.”
귀엽다는 듯 뺨을 만지작거리면서도 그뿐, 이래서야 어쩐지 여자친구보다는 애완동물 같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선배한테 난 뭐예요?”
“응?”
“잘 모르겠어. 좋아하는 거랑 사랑하는 건 다른 거잖아요.”
입을 맞추고 손을 잡고 둘이서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지만, 결정적인 무언가가 빠져 있다.
이대로 손을 흔들고 돌아서서 헤어지면 그대로 끝나버릴 것 같은 미묘한 불안감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선배랑 키스하는 거, 되게 좋아하는데.”
처음에는 가벼운 입맞춤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농후한 키스를 나누는 것도 제법 짜릿했다.
가끔은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벽에 몰아세운 채 정신없이 숨결을 나누다 보면 민재는 저도 모르게 다음을 기대하곤 했었다.
하지만 언제나 거기에서 끝.
무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숨을 고르고서, 아쉬운 얼굴로 돌아서곤 했다.
“……내가 뭘 서운하게 한 걸까?”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이제는 좀 더 진도를 나가고 싶다는 말을 차마 제 입으로 할 수가 없다.
민재는 괜히 입술만 달싹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니까 내 말은.”
“사랑해, 민재야.”
손가락을 꼭 깍지를 끼고서 무혁은 지그시 민재의 얼굴을 응시했다.
사뭇 진지하기까지 한 그의 얼굴을 보며 민재는 저도 모르게 숨을 꼴깍 삼켰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릴 만큼 멋진 사람인데.
“나는 민재가 정말로 소중해. 앞으로도 쭉 언제까지나 같이 있고 싶어.”
빈말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며 무혁은 민재의 손등을 쓸었다.
은연중에 이어지는 스킨십에 왜 뺨이 달아오르는 건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저렇게 단언해주는 건 싫지 않았다.
“나도 선배랑 늘 같이 있고 싶어요.”
“어쩐지 서운한 걸, 민재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원인을 묻는 바람에 민재는 어쩔 수 없이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를 털어놨다.
“선배는 너무 담백해요.”
“담백하다고?”
이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차마 제 머리로는 정리가 되지 않았다.
“몰라! 바보!!”
제 마음도 모르는 바보 같으니라고. 민재는 눈물을 머금은 채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
“곤란하네.”
전화를 걸어 보지만 받지 않는다.
잠시나마 기다려줄 겸 친구와 바에 왔지만, 무혁의 눈은 여전히 폰만 바라봤다.
“석민재가 그렇게 좋냐.”
“귀엽잖아. 보고만 있어도 자꾸 웃음이 나는 걸 어떡해.”
말간 칵테일을 응시하면서도 입가에는 어느새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중증이네.”
완전히 푹 빠져버린 진무혁의 모습은 어쩐지 낯설기 짝이 없다.
매사에 쿨하기만 했던 남자가 석민재 얘기를 할 때면 제법 쉽게 웃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공주님처럼 가만히 모시고만 있는 거야?”
“민재는 아직 어리니까.”
겁먹은 눈동자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 후로 메시지를 몇 번이나 더 보내봤지만, 민재에게는 아무런 답도 오지 않았다.
“만나러 가야 하나.”
지금이라도 당장 보고 싶은데. 엘리베이터에 오른 채 무혁은 깊은 한숨만 쉬었다.
오늘은 취했으니 어쩔 수 없고, 내일도 연락이 오지 않으면 아예 찾아가 봐야 할지도 모른다.
고민이 이어지고 있는데, 문득 문 앞에 쭈그리고 앉은 그림자가 보였다.
“민재?”
차가운 바닥에 웅크린 채 민재는 울먹이며 무혁을 올려다 봤다.
“선배.”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차갑게 식은 몸을 꼭 안고 일으켰다.
뭐가 그리도 서러웠는지 눈가가 빨개진 채 민재는 무혁의 목덜미를 꼭 껴안았다.
“선배는 내가 싫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돌이켜보면 낮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다. 한참 뜸을 들이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럴 거면 헤어져요.”
갑작스러운 선전포고가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무혁은 엉엉 우는 민재를 부둥켜안았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선배가, 선배가 너무 좋은데…….”
당돌한 도발과 적절히 오른 취기가 무혁의 인내심을 끊어놓았다.
더는 망설여야 할 이유가 없다면, 그 역시도 굳이 참아야 할 이유가 없다.
민재의 허리에 손을 감은 채 입술 틈 사이로 무혁의 숨결이 파고들었다.
“도중에 못 멈춰.”
“우…….”
“힘 빼.”
익숙지 않은 탓에 긴장이 역력하다. 한참 키스가 이어지고 숨이 가빠왔다.
그대로 민재를 안아 올려 침실로 향했다.
얼어버린 몸을 내려놓고서 무혁은 뻣뻣하게 굳은 민재의 단추에 손을 얹었다.
“확실히 말해두지만, 이건 분명 민재가 먼저 유혹한 거야.”
“그렇게 보지 마요.”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무혁의 심장을 더욱 뛰게 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인데. 얼어붙은 손을 녹이며 무혁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사랑해, 민재야.”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데, 그래도 그 말을 제일 먼저 하고 싶었다.
“선배…….”
대답 대신 입을 맞추며 무혁의 큰 손이 어느새 옷 틈새로 들어왔다.
아찔하게 이어지는 손길에 전율이 일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일렁이는 파도처럼 심장이 뛰는 소리가 커져만 갔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 엄습하며 민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선배는 나쁜 사람이야.”
목덜미에 울긋불긋한 입술 자국이 가득한 채 민재는 몸을 웅크리고 무혁을 노려봤다.
분명 안아달라고 해서 안아준 죄밖에 없다고 하고 싶지만, 자신이 과했다는 사실은 차마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그만 울어. 정말로 내가 나쁜 사람인 것 같잖아.”
“선배는 내 몸만 보고 좋아하는 거죠.”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온다고 하고서 민재는 그대로 가출까지 감행해 무혁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러니 바라는 대로 듬뿍 사랑해준 죄밖에 없건만.
‘어디서 본 건 있어서는.’
잡아먹을 듯이 달려든 건 제 잘못이긴 한데, 그래도 사실관계는 명확히 해둬야 한다.
무혁은 침대 옆에 걸터 앉은 채 시트로 몸을 꽁꽁 감싼 민재에게 슬쩍 다가갔다.
“좋아하는 건 맞는데, 그것만 좋아하는 건 아니야.”
“거짓말.”
“내 마음 알잖아. 민재한테 미움받는 건 너무 슬픈데.”
한참을 달랜 후에야 민재는 겨우 고개를 들어줬다.
역시 너무 서두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민재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
그냥 좀 투정을 부리고 싶었던 건지 민재는 잔뜩 골이 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무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선배!!!”
어쩔 줄 모르는 민재와 달리 무혁은 여유롭게 민재의 어깨를 꼭 안았다.
“소중해. 앞으로도 아껴줄 테니까 내 손 절대 놓지 마.”
다정하게 속삭일 때마다 민재의 어깨에서도 힘이 빠졌다.
“업어줄까?”
지금은 잘 걷지도 못 하니까, 너무 무리한 탓에 민재는 마지못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등에 닿는 따뜻한 체온이 좋긴 한데,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지만 아쉽게도 통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은 이따가 차로 데려다줄게.”
“일어날 힘도 없어요.”
응석을 부리는 민재를 안아 들고 무혁은 슬그머니 셔츠를 벗었다.
“왜 따라 들어오는 거예요?”
“씻을 힘도 없을 것 같아서, 도와주러 왔지.”
어쩔 줄 모르는 민재는 어쩌면 이리도 사랑스러운 걸까.
음흉함을 듬뿍 담은 채 무혁은 마음껏 민재를 씻기며 사심을 채워나갔다.
안 그래도 피곤한 데 체력을 더 빼놨으니, 민재는 조수석에 타자마자 금세 잠이 들었다.
도착한 후에도 한참 뜸을 들이다 민재는 밤늦게서야 겨우 집에 들어가게 됐다.
“잠시만.”
“왜요?”
“그냥. 좀.”
아직 통금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으니까. 무혁은 엉거주춤 선 민재를 꼭 껴안았다.
누군가와 체온을 나누는 게 이토록 가슴 저린 일인 줄은 몰랐었는데.
막상 돌려보내려니 좀처럼 놓아주기 힘들다.
“사랑해, 민재야. 푹 쉬고 내일 봐.”
“……응.”
멀어져가는 뒷모습이 야속하기만 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머릿속에는 온통 민재 생각만이 가득했다.
엉망이 된 시트를 내려다보며 무혁은 텅 비어 있는 이 집이 유독 공허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빨리 결혼하고 싶어.”
매번 집에 돌려보내는 게 싫어서라도 어서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잠시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괴로운 제 마음을 모르는 건지 민재는 잘 자라는 인사만 남기고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한동안 무혁은 민재를 만날 수 없었다.
[오늘은 동기끼리 모임이 있어서 좀 바빠요.]
[엄마 심부름 때문에 파주에 가게 됐어요.]
이성을 잃은 건 제 죄가 맞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버림받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대체 왜.’
며칠이 넘도록 민재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니 금단증상처럼 숨이 막혔다.
[도서관만 잠시 들를 거에요. 방해 안 할 테니까 공부 열심히 해요.]
방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메시지를 보자마자 무혁은 서둘러 도서관으로 달려나갔다.
때마침 건물을 나오던 민재가 무혁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거기서, 석민재.“
그대로 도망치려는 걸 겨우 멈춰 세웠다.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민재는 무혁의 눈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시선을 돌렸다.
그게 너무 아팠다. 일부러 자신을 피한다는 게 너무 적나라하게 보이니 무혁은 입술을 깨물고 민재에게 물었다.
“변명이라도 좋으니까. 뭐든 말 좀 해봐.”
“딱히 할 말 같은 거 없어요.”
“내가 그렇게 별로였어?”
눈도 못 마주치고 어떻게든 도망가려는 것만 봐도 그것 외에는 결론이 나지 않는다.
진심으로 상처받은 무혁의 말에 민재는 깜짝 놀라서는 어쩔 줄을 몰라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로.”
“그럼 대체 왜 날 피하는 건데?”
민재는 절대 아니라며 완강히 부인하지만, 그러니 더 야속함이 배가 됐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그를 앞에 두고 민재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겨우 이유를 털어놨다.
“나는 그냥, 선배가 날 싫어하게 될까 봐.”
“뭐?”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민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두 뺨을 감싸 쥔 채 민재는 고개를 숙이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니까.”
“안 들려.”
“너무 좋았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민재는 머리를 감싸 쥐고 무혁을 원망했다.
“선배가 날 변태로 만들었어.”
순간 주어가 바뀐 건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을 책망하는 줄 알았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하지만 민재는 심각한 얼굴로 곤란한 제 사정을 털어놓았다.
“집에 오고 난 뒤부터 계속 야한 꿈만 꿨단 말이에요. 자꾸 생각나는 걸 어떡해.”
“생각나다니?”
“선배가, 그러니까 그때…….”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 굵직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셔츠를 벗자 평소 가려져 있던 잔근육들이 꿈틀대는 모습이 눈에 새겨졌다고.
막상 앞에서는 투덜거렸다지만, 묵직한 둔통조차 그와 맺어졌다는 증거 같아서 좋긴 한데.
“자꾸 시도 때도 없이 같이 있고 싶은걸. 고시 공부도 해야 하는데, 나 때문에 방해하는 건 싫단 말이야.”
민재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무혁을 올려다봤다.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을 보니 겨우 마음이 놓였다.
고작 그런 이유였다니. 비록 만나지 않았을 뿐 연락을 꼬박꼬박 하긴 했었다.
“내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선배를 왜 싫어해. 몰라, 책임져요.
이런 책임이라면야 얼마든지 져줄 수 있다.
때마침 방학이니까, 여유로운 시간은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핑계가 되어줬다.
처음에는 수줍던 민재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대담해졌다.
“거기는, 그러면 안 돼…….”
민재가 수치심에 발버둥 칠 때마다 무혁의 호흡은 더욱 가빠졌다.
서로의 온기에 기댄 채 설렘만이 가득했던,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
***
미국에 넘어온 후로도 무혁은 때때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민재야.”
그리움을 담아 불러봐도 이제는 제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속이 쓰렸다.
“훌륭해, 아주 훌륭해. 자네, 이대로 여기에 정착하는 건 어때?”
제레미와 함께 투입된 큰 임무에 성공할 즈음이었다.
미국 변호사 자격도 땄고, FBI 국장 로버트 켈스는 시민권까지 주겠노라며 무혁이 미국에 남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그 즈음 한국에서 비보가 들려왔다.
[석민재 결혼한다는 데 너 알고 있었어?]
안 팀장의 메시지를 보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분명 좋은 기회지만 진무혁은 머리 대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자네, 후회할 걸세.”
“후회하지 않습니다.”
켈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혁은 무작정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