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외전 2
민재는 큰맘 먹고 백화점에 들러 향수를 샀다.
그리고 기다리던 무혁의 생일날.
축하해주는 많은 사람을 뒤로하고 무혁은 기꺼이 민재를 제 오피스텔로 초대했다.
마지막 용돈을 털어 산 조그마한 딸기 생크림 케이크에 초를 꽂고 민재는 조심스레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기쁘다. 민재가 이렇게 축하해주니까.”
“선물, 열어봐요.”
마음에 안 들어 할까 봐 아직 영수증도 가지고 있는데. 그의 손끝을 바라보며 조마조마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향수구나. 향 맡아봐도 돼?”
“응. 물론이죠.”
다행히 무혁의 반응이 퍽 마음에 들었다.
제법 시원한 향기가 마음에 든 건지 그는 바로 제 손목에 뿌리고서 민재에게 향을 맡아달라고 했다.
“마음에 들어?”
“응. 이게 선배랑 제일 잘 어울려.”
본인도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라서 민재는 그제야 제 가방에서 똑같은 향수병을 하나 더 꺼냈다.
“이건 내가 뿌릴 거예요.”
“이거 남성용인데?”
“선배가 전에 그랬잖아요. 내 향기를 잔뜩 묻혀달라고.”
지나가는 말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영역 표시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학교에서는 진무혁과 사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사소한 것 하나라도 ‘함께’인 것을 만들고 싶었다.
“나도 잠들기 전에 매일 뿌리고 잘 거예요. 그럼 어쩐지 선배랑 같이 있는 기분이 들 것 같아.”
배시시 웃으며 건넨 말에 무혁은 향수병을 꼭 쥐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자 괜히 너무 앞서간 걸까.
쓸데없는 말을 했나 싶었는데 다행히 무혁은 한 번 더 제 손목에 향수를 뿌리고서는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를 가득 머금었다.
“이 향기가 나랑 잘 어울린단 거지.”
“내 취향이 그런 것 같아요.”
“기쁘네, 진심으로.”
언제나 민재 옆에서는 웃는 얼굴이긴 했지만, 오늘의 진무혁은 유독 강아지처럼 즐거운 얼굴로 향수병을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다.
“초 다 녹을 것 같아. 어서 불어요.”
“응. 노래도 불러줘.”
사랑하는 진무혁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어설픈 노래를 마치기 무섭게 무혁은 환한 얼굴로 단숨에 촛불을 껐다.
“무슨 소원을 빌었어요?”
“앞으로 영원히 함께 있게 해달라고. 원랜 생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민재가 축하해주니 조금은 좋아질 것 같아.”
“왜요?”
태어난 날을 왜 싫어하게 되는 걸까. 영문을 모르는 민재를 두고 무혁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래도 언젠가는 해야 할 이야기니까. 무혁의 민재의 손을 거머쥔 채 괴로웠던 기억을 되새겼다.
“내일은 부모님 기일이거든.”
전날까지만 해도 제 생일을 축하해줬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밤중에 급한 연락을 받고 새벽에 나갔다 사고를 당했다.
집에 혼자 남았던 무혁이 정신을 차렸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초인종이 울리고, 친척들이 달려와 무혁을 부여잡았다.
- 통장이랑 집문서 어디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무혁을 내팽개치고 짐을 뒤적이는 모습은 흡사 악마 같았다.
살던 아파트와 부모님의 보험금을 빼앗긴 것도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그래도 슬프진 않아.”
조원식은 진심으로 저주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손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모조리 긁어내 스무 살이 되던 날 제게 돌려준 것만은 고마운 일이다.
그 돈을 받자마자 무혁은 재빨리 오피스텔을 계약하고 그 집에서 나왔다.
씁쓸했던 기억을 넘긴 채 무혁은 민재를 바라봤다.
그 일이 없었다면 널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이제는 민재가 있는걸.”
무혁은 벌써 울 것 같은 민재의 뺨에 손을 얹고 환하게 웃었다.
“어차피 누구나 언젠가는 겪게 될 일인 거니까.”
“선배.”
“그래도 이제 혼자는 싫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내 옆에 있어 줘.
민재의 손을 꼭 잡은 채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 입안을 하염없이 맴돌았다.
끔찍했던 기억은 악몽이 되어 매일 밤 무혁을 괴롭혀도 민재만 있다면 무사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축하해줘서 정말 고마워.”
어린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눈망울을 바라보며 무혁은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집까지 안 데려다줘도 돼요. 지하철만 타면 금방 가니까.”
“하지만…….”
“오늘만이라도 다른 거 하지 말고 푹 자요. 내일 또 만나야 하니까요.”
너무 늦기 전에 돌려보내야 하지만 오늘만은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전 일을 떠올리며 무혁은 애써 인내심을 갖고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온전히 제게 올 수 있도록 무혁은 끝내 인내하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어서 차를 사야겠어. 그러면 직접 집에 바래다주면 되니까.”
헤어지기 전 이마를 맞대고 가볍게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입술을 맞대자 민재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목에 손도 감았다.
“좋은 꿈 꿔요.”
“응. 민재 꿈.”
역까지 배웅하고 난 후에도 무혁은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은데.
한참 지하철역 앞을 서성거리다가 제법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집에 돌아왔다.
손목에 남은 향기가 여전히 짙었다. 뜻밖의 선물에 오늘은 왠지 자꾸 웃음이 났다.
그런데 오피스텔 입구에 까맣게 선팅한 검은 외제차가 보였다.
누구인지 뻔히 알기에 무혁은 웃음기를 거두고 차 쪽을 노려봤다.
“늦었구나.”
“무슨 일이십니까.”
“네 생일이잖니. 내가 아무리 바빠도 그것까지 잊어버렸을까.”
식사 초대는 진작에 받았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조원식은 언제나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서 무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녀석, 기특하게 잘하고 있다는 얘기 들었다.”
“…….”
“이건 선물이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원식은 무혁의 앞에 자동차 키를 내밀었다.
버튼을 누르자 조원식의 차 바로 뒤에 세워진 새하얀 색의 세단에 불빛이 일었다.
“관리하기 편할 거다. 보험이나 이런 건 내가 다 알아서 해 놨으니, 그냥 타고 다니면 돼.”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차는 그래도 좋은 걸 타야 하지 않겠어.”
최근에 몰래 면허를 따고서, 중고차를 알아본 것까지 금방 귀에 들어갔었나 보다.
차를 알아봐 줄 테니 기다리라고 했던 선배 하나가 떠올랐다.
금방 구해줄 거라고 하더니, 그걸 또 냉큼 조원식에게 일러바쳤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얼맙니까.”
“무혁아.”
“빚지고 싶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
이런 식으로 하나둘 허용하기 시작하면 조원식은 어느새 혼자 힘으로는 일어설 수조차 없도록 길들일 것이다.
이재에 밝은 이 남자가 제게 아무 대가 없이 무언가를 베풀 리가 없다.
“한 달에 한 번, 장미랑 같이 식사만 해 달라는 게 그렇게 힘들었던 거냐?”
“바쁘다고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장미와의 식사는 매번 불쾌한 결말을 맞았다.
제 아빠가 이 식사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알기에 장미는 매번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무혁의 자존심을 사뿐하게 즈려밟곤 했다.
언젠가 장미와 결혼시키기 위해서, 이토록 물밑작업을 벌이는 걸 누가 모를까.
“제가 받을 물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조원식은 키를 거머쥔 채 안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그러고는 라이터를 켜고 자동차 쪽으로 손을 뻗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주택가에서 저런 짓을 했다간 차량이 폭발할지도 모른다.
당황해 라이터를 빼앗는 모습을 보며 조원식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게 주려고 산 차인데, 주인이 없어졌으니 어떻게 처분하든 그건 내 마음이지.”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장미랑 식사하라는 말도 하지 않을 테니 받아두렴. 오늘은 네 생일이고, 내일은 내 친구의 기일이니까.”
기어이 제 아버지까지 들먹이는 모습을 보며 무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학생 시절, 이미 사법고시에 합격했던 지금의 안 팀장에게서 그는 제 부모님과 관련된 사건의 기록을 모두 전달받았다.
‘아버지가 겪은 것은 가여운 사고였고, 친구를 위해 자신이 직접 변호를 맡았다고 했지.’
범인은 한 집안의 가장이라고 스스로를 포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몇 년 후 조직폭력배 일제 단속에서 독사파의 일원임이 밝혀졌다.
그때 변호를 맡은 것도 법무법인 조조의 변호사였다.
“아버지처럼 널 돌봐주는 게 이한이 그 친구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속죄니 말이야.”
친구를 구하지 못했던 것이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며 예쁘게 포장하지만, 무혁은 그 말이 거짓 하나 없는 진실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가 조사하고 있었던 건 독사파의 불법 도박 카르텔이었다.
지방의 대부호였던 아버지의 재력에 힘입어 유명 로펌 출신 경력으로 이름을 날리던 조원식 변호사는, 고교 동창이었던 당시 독사파의 두목과 일찌감치 유착 관계를 맺었다.
서울에서 조원식이 사법 거래를 이어나가는 동안 독사파는 지방 조폭을 넘어선 전국구급 규모로 발전하며 첫 전성기를 맞았다.
비록 진이한 검사는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손에 기소된 핵심 간부 대다수가 감옥 신세를 지게 됐다.
조원식은 진 검사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조리 항고해 두목 본인을 제외하고 나머지의 형량을 대폭 줄이는 데 성공했다.
‘그마저도 작전이었을 테지만.’
변호사인 고향 친구를 친형제처럼 믿었던 독사파의 두목은 결국 십 년 형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감옥 안에서 죽었다.
그렇게 조원식은 자연스럽게 독사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그들을 제 수족처럼 부리기에 이르렀다.
필요하다면 소꿉친구마저 잔인하게 손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유독 제게만 호의적으로 구는 게 달가울 리가 없다.
“받아둘 테니 이만 돌아가세요.”
“그래. 진작 그랬어야지.”
오늘도 이런 식으로 제 뜻을 이루고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지독한 인간. 끔찍한 인간. 손에 차 키를 들고서 무혁은 비참한 제 처지에 이를 악물었다.
오피스텔에 돌아오자마자 차 키를 내동댕이치고 그는 민재가 안고 있었던 쿠션을 꼭 끌어안고 숨을 죽였다.
“그냥 죽여버릴까.”
주먹을 꽉 쥐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끔찍한 인간.
모든 걸 알면서도 참는 사이 무혁의 속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다.
[선배, 나 도착했어요.]
민재에게 도착한 메시지를 보며 무혁은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건지 민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금방 전화를 받았다.
“잘 도착했어?”
“응. 아파트 앞. 뭐 하고 있어요?”
“누워 있었어, 쿠션 안고.”
대답이 없는 걸 보니 혼자 또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토록 끔찍한 순간도 민재를 떠올리면 조금은 숨을 쉴 수 있다.
“솔직히 말해요. 나 집에 보내기 싫었죠?”
“들켰네.”
“우리 엄마 아빠는 그렇게 엄한 분들 아니니까. 시험 기간에는 아예 학교에서 밤새운다고 하면 돼요.”
지난번 중간고사 때도 같이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긴 했었다.
새벽에 민재의 아버지가 차를 몰고 학교 앞까지 데리러 오긴 했는데.
괜히 인사라도 했다간 당장 통금이 걸릴 거라고 말리는 바람에 그때는 제 존재조차 알리지 못했다.
“우리 집에서 시험공부 해도 괜찮지.”
“재밌겠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이 마냥 행복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수화기 너머 민재의 목소리가 들떴다.
“선배, 잠깐 집에 불 다 끄고 하늘 좀 봐봐요.”
“하늘?”
“응. 거실 창에서 잘 보일 거예요.”
여전히 가로등의 불빛이 밝아서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민재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별자리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기 네모난 별자리 보여요? 페가수스 사각형인데, 좀처럼 안 보이더니 오늘은 운 좋게 보이는 것 같아요.”
“그렇구나.”
서울의 중심부에 있는 제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외곽에 있는 민재네 집에서는 보이는 모양이었다.
“정말 예뻐요. 선배랑 같이 보고 싶었는데.”
“다음에는 꼭 같이 보자.”
“응. 그래요.”
“민재 너, 거기서 뭐 해?”
앗,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굵직한 중년 남자 목소리였으니 분명 민재의 아빠일 것이다.
민재는 열심히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무혁은 아직 보지 못한 민재의 부모님이 벌써 보고 싶었다.
따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면 뭐라고 하시게 될까.
한 대 맞게 되더라도 당당하게 만나고 싶었다.
언젠가 따님을 주십시오, 라고 민재의 부모님 앞에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무혁은 언제까지나 느긋하게 기다릴 작정이었다.
***
“민재 너 어째 어제랑 옷이 같다?”
살인적인 기말고사 시험을 앞두고 모두가 초췌해지는 시기가 찾아왔다.
빽빽한 프린트를 뒤적이며 민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제 선배네 집에서 잤거든.”
“뭐, 무혁 선배네 집에서?”
“응. 같이 공부하다가 나만 먼저 잤어. 선배는 꼬박 밤새운 것 같더라고.”
공부도 하지 않고 맨날 이상한 화면만 보는데 무혁은 이번에도 과탑을 차지할 거라는 소문이 벌써 자자했다.
“아무 일도 없었고?”
“선배가 야식으로 떡볶이도 해줬어. 무혁 선배 요리 진짜 잘해.”
라면도 못 끓이는 자신과 달리 말하면 뭐든 척척 만들어 준다며 자랑을 했는데.
은근한 남자친구 자랑에 동기들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며 민재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민재 넌 아직 애구나?”
“어휴. 난 또 뭐라고.”
명실공히 법학과 공식 커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무혁 선배, 남자친구치고는 너무 담백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