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98화 (98/103)

98화. 이제 자네도 내 기분을 알게 되겠군.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난 민재가 물었다.

“당신은 아들이 좋아, 딸이 좋아?”

출산이 얼마 안 남은 시점까지도 민재는 아이의 성별을 알려주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무혁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어느 쪽이든 좋은데.”

“그러지 말고 하나만 골라 봐.”

이상할 정도로 집요한 민재의 물음에 무혁은 숨을 꼴깍 삼켰다.

과연 무슨 대답을 해야 정답인 걸까.

한참 고민한 끝에 무혁은 결국 제 본심을 털어놓았다.

“나는 민재를 꼭 닮은 딸이 좋아.”

“아들이면 어쩌려고?”

역시나. 이상할 정도로 웃음을 머금은 채 민재는 만일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함정이 가득한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혁은 애써 태연한 척 매끄럽게 답을 이어나갔다.

“아들도 좋지. 민재를 닮으면 분명 씩씩한 아이가 될 거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그런지, 민재는 영 못마땅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렸다.

“당신 닮은 딸이면?”

“멋있겠네.”

“당신 닮은 아들이면?”

“엄마 말을 잘 듣겠지.”

“뭐야, 그게.”

대체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걸까. 뭔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민재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불만을 표했다.

“그냥 건강하게 태어나주기만 하면 충분하니까. 엄마 너무 아프게 하지 말고 무사히 태어나주기만 하면 돼.”

무혁은 동그랗게 부푼 민재의 배를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말을 걸었다.

이제야 흡족한 건지 민재는 표정을 풀고서 무릎에 누운 남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난 애 보는 건 자신 없는데.”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약속한 거야?”

“그럼. 물론이지. 우리 아이는 평생 내가 지켜줄 거야.”

출산이 가까워지며 무혁은 제법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혼란 속에서 조원식의 재판이 시작됐다.

법원 입구에는 벌써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소란과 함께 특검팀 브리핑을 맡은 안 팀장이 검사보 자격으로 기자들 앞에 섰다.

“오늘 재판, 어떻게 될 거라고 보십니까.”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특검이 조사한 조원식의 혐의는 스무 개가 넘지만 확실한 승소를 위해 죄목은 총 열 가지로 압축됐다.

살인교사와 폭행 사주는 물론 내부 정보를 빼돌려 주식을 투기하고 각종 입시와 취업 비리에 연루된 혐의까지 받고 있다.

“또한, 이십이년 전 불행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진이한 검사의 죽음 역시도 조원식의 사주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젊은 기자들은 그의 이름은 몰라도 중계를 지켜보던 법조인들은 탄식의 한숨을 흘렸다.

비리와 온몸으로 맞서 싸우고 권력에도 굴하지 않았던, 실로 의로운 검사 진이한의 죽음 배후에는 그의 친구였던 조원식이 있었다.

“그동안 사회지도층으로 존경받으며 큰 영향력을 미쳤던 조원식의 실체가 이번 재판을 통해 명명백백히 밝혀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브리핑을 마치고 정식 재판이 시작되었다. 평소라면 두 달로 끝났어야 할 특검 조사도 벌써 육 개월을 끌었다.

하필이면 재판장이 국무총리의 동향 후배인 탓에 사람들은 쉽지 않은 재판이 될 거라며 수군거렸다.

“흠…….”

재판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수만 쪽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며 재판부 역시도 특검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했다.

“이른바 독사파로 불리는 폭력 조직과 내밀한 유착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조원식이 연루되어 무마했던 사건 기록들도 더불어 재조사에 들어갔다.

저쪽에서 이미 배신했다는 사실을 듣고 독사파 쪽 역시 자신들이 아는 바를 줄줄이 털어놓았다.

그 과정에서 진이한 사건 역시도 하나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저를 불러 차 키를 건네주었습니다. 골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차가 오는 걸 보고 일부러 박았습니다.”

당시 과실치사로 이 년 형을 선고받았던 범인은 뒤늦게서야 모든 진실을 자백했다.

세세한 조원식의 지시에 따라 일부러 추돌사고를 일으킨 결과, 운전대를 잡고 있던 진이한 검사는 물론 그의 부인까지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차량에서 샌 기름이 폭발하는 걸 보고 저는 도망쳤습니다. 그러고 오 분쯤 지나니 사이렌이 울리고 소방차가 달려가는 걸 봤습니다.”

화재 때문에 부부는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유해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던 무혁은 증언을 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조원식이 먼저 조직을 배신했으니, 그들도 굳이 입을 다물어줘야 할 의리가 없다.

그 외에도 조원식이 개입했던 각종 의문사 사건들은 독사파 쪽 증인들의 입에 하나하나 폭로되었다.

“조원식의 사주로 죽였습니다.”

“조원식이 시켰습니다.”

“조원식이 계획을 짰습니다.”

“이는 모두 검찰 측에서 일방적인 증언만을 기반으로 하는 악의적인 기소입니다!”

조원식의 변호인단은 혐의 대부분을 전면부인하며 모든 죄를 독사파의 독단적인 행동이라 설명했다.

하지만 재판장은 그런 조원식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길 잘했네.”

최종 선고일, 부푼 배를 안은 채 민재는 무혁의 품에 안겨 재판 결과를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봤다.

“피고의 경우 죄질이 심히 불량하며, 상당수의 증거가 나왔음에도 혐의를 부인하였고…….”

그동안 고의로 수사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람을 해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독사파의 자백 덕분에 방대한 혐의가 대부분 인정되며 판사는 엄중한 얼굴로 법봉을 들었다.

“피고, 조원식에게 징역 25년 형을 선고한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례적으로 높은 형량이 나온 덕분에 수군거림이 커졌다.

“피고의 손에 너무나 많은 이가 상처받았습니다. 그 고통을 모두 보상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죗값을 모두 치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대 이상의 성과에 특검 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미 육십 대에 접어든 조원식이 아무리 모범수로 감형된다고 해도, 형량이 저렇다면 최소 십 년 이상은 교도소에서 썩어야 할 것이다.

“이런 결과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항소할 겁니다.”

조원식의 변호인단은 과도한 형량이라며 어떻게든 감형을 주장했지만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한없이 희박했다.

“협조를 대가로 감형을 받기엔 죄가 너무 컸지.”

“그럼 이제 조조는 어떻게 되는 거야?”

“조원식이 없어졌으니, 이제 네 개 파벌로 갈라질 것 같아.”

무서운 속도로 A&Z를 쫓아오던 조조가 와해되기라도 한다면, 조원식의 가장 큰 지지기반도 함께 무너지게 된다.

“조장미는 어떻게 됐어?”

“풀려났어. 집행유예를 간신히 받아냈나 봐.”

물론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원한을 품은 독사파의 잔당들이 가만히 있을리도 없을뿐더러, 아버지인 조원식도 없는 상황에서 장미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마 그 애에게는 이제부터가 진짜 지옥이겠지.”

제 아버지에게만 기댄 채, 평생을 군림하며 자라온 그 애가 홀로 남은 이 상황을 제대로 견딜 수 있을 리 없다.

이제는 제대로 지탱해줄 아버지도 없으니 그냥 내버려 두기만 해도 알아서 착실하게 망가져 줄 터.

그렇다 해도 동정의 여지는 조금도 없다.

방청을 마치고 자리를 뜨면서도 무혁은 여전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저걸 보니 속이 시원해?”

“그다지.”

이례적으로 높은 형량이 나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합당한 대가를 받았다고 보기에는 한없이 부족하다.

아무리 징역형을 받는다 해도 조원식이 그동안 해온 짓에 대한 벌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약 검찰에 남아 있었더라면…….’

제 손으로 잡아넣지 못한 게 한스러울 따름이다.

미련을 애써 삼키며 무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내색하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검찰에는 미련이 남았다.

“일은 할 만해?”

법원 계단을 하나씩 내려오며 민재가 물었다.

성 회장의 권유로 혜성 본사 법무팀에 들어간 지도 근 반년쯤 됐다.

“그냥 하는 거지 뭐.”

대답의 무게가 전혀 다르다.

A&Z에 있을 때만 해도 제법 활기차던 사람이, 법무팀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어째 영 기운이 없어 보였다.

조원식이나 성준범을 때려잡을 때는 그렇게 힘이 넘치더니. 요즘 진무혁의 모습은 확실히 맥이 빠진 지 오래다.

“뭔가 재미없어 보여.”

“재미는 없지. 일을 재미로 하는 건 아니니까.”

교묘하게 돌려서 말을 하고 있지만, 역시 법무팀은 진무혁이 있을 곳은 아니었나 보다.

일찌감치 눈치챈 덕분에 민재도 이제는 무혁의 표정을 조금은 읽을 수 있게 됐다.

“있잖아…….”

뭐라고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려고 했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미묘한 고통에 민재는 습관처럼 제 배에 손을 얹었다.

“왜 그래?”

“나 어떡하지?”

아무래도 진통이 시작된 것 같은데.

식은땀을 흘리는 민재를 두고 무혁은 서둘러 차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재판을 마치고 안 팀장은 뒤늦게서야 소식을 들었다.

병원으로 달려오자마자 냅다 비상계단으로 뛰어올랐다.

네 개 층을 단숨에 뛰어 올라오니, 분만실 입구에는 정말로 많은 사람이 안절부절못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버지.”

“그래, 마침 잘 왔다.”

기도하는 할머니와 그 곁을 지키는 안 대표.

그리고 반대쪽에는 아직 휠체어를 탄 성 회장과 홍 여사가 기도하고 있다.

홍옥자는 그 와중에도 전화를 붙들고 누군가에게 열심히 화를 내고 있었다.

“열 시간이 넘게 애가 안 나오는 걸 그럼 나더러 어떡하라고!”

아무래도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다.

“무슨 일이에요?”

“초산이 원래 난산이라곤 하던데…….”

벌써 열 시간 째 진통만 거셀 뿐 애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다들 말 못 할 불안감에 휩싸였다.

기다리다 못 견딘 무혁은 결국 옷까지 갈아입고 분만실로 직접 들어갔다.

“산모님, 정신 차리셔야 해요.”

“민재야!!”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기진맥진한 민재도 무혁을 보고서야 겨우 눈을 떴다.

“나 너무 아파.”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아이를 많이 낳고 싶다고 했던 건 모조리 취소다.

떨리는 손으로 무혁은 민재의 손을 꼭 잡았다.

“민재야. 나 여기 있어. 제발 나 좀 봐.”

애타는 목소리가 민재의 귓가에 맴돌았다.

아직 못 한 말이 있는데, 지금은 의식을 유지하는 것조차도 힘에 부쳤다.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정말 이대로 죽기라도 하면 이 남자는 어떻게 될까.

그 생각을 하니 죽을 수도 없다.

민재는 애써 숨을 고르며 무혁에게 눈을 돌렸다.

“검찰로 돌아가고 싶은 거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너무 아파서 그래.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말해둘래.”

아니면 정말로 후회할 것 같아서, 민재는 힘을 주며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아이 머리 보입니다!! 조금만 힘내세요!”

“당신은 검사가 더 잘 어울려.”

손톱이 무혁의 손에 파고들어 피가 났다.

죽을 만큼 아픈 것도 힘겹게 참아내며 민재는 곁에 선 무혁을 똑바로 바라봤다.

“당신 꿈이었잖아.”

요즘처럼 맥빠진 진무혁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을 꼭 쥔 채 민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으아아아앙!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민재는 힘이 풀린 채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아버님, 이쪽으로 오세요.”

의료진이 상태가 나빠진 민재를 확인하는 사이, 간호사가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아기를 무혁의 품에 안겨주었다.

아버님이란 호칭이 낯설다.

그토록 안아보고 싶었던 아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제 혈육은 너무나 작고 가벼웠다.

“축하드려요. 예쁜 따님이에요.”

이상할 정도로 싱글벙글 웃던 민재가 떠올랐다.

제 마음을 전부 다 알면서 그랬던 걸까.

“아내는 괜찮은 겁니까?”

“잠깐 탈진하신 거예요. 쉬고 나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다행히 민재는 그냥 지친 것뿐이라고 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힘겨워 보이는 민재의 곁에 선 채 무혁은 제 품의 아기를 보여줬다.

“민재야, 우리 아기야, 정말 예뻐.”

손도 발도 너무 작아서 부서질 것만 같다.

갓 태어난 핏덩이 같은 아이를 앞에 두고 민재는 힘겹게 미소지었다.

“예쁘다. 우리 아기.”

“응. 정말 예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할 정도로, 자그마한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전율이 일었다.

“이리 주세요.”

금방 간호사의 손에 넘겨줘야 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손에는 여전히 아기의 따스한 체온이 남았다.

“이제 옷 갈아입고 나가셔야죠. 여기서 우시면 안 돼요.”

“죄, 죄송합니다.”

진무혁이 우는 걸 보고 민재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애써 참았다.

감동의 바다에 채 빠질 틈도 없이 무혁은 그대로 분만실에서 쫓겨났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오는 모습에 놀란 안 팀장이 서둘러 달려왔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딸이에요.”

“딸?”

“잘 태어났어요. 손가락도 발가락도 다 열 개고 숨도 잘 쉬어요.”

“민재는?”

“무사해요. 좀 지친 거뿐이래요.”

긴장이 풀린 홍 여사는 하느님을 찾으며 동생에게 안긴 채 울음을 터트렸다.

모두가 기뻐하는 사이 성 회장은 휠체어를 탄 채 무혁에게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딸이라고 했지?”

“네, 딸입니다.”

“참 잘됐군. 우리 민재를 닮았으면 참 귀여울 거야.”

“지금도 귀엽습니다.”

벌써 딸 바보 기질이 다분해 보이는 진무혁을 앞에 두고서 성 회장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이제 자네도 내 기분을 알게 되겠군.”

의미심장한 미소에 무혁은 순간 멈칫했다.

만약 저 작고 예쁜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 나중에 다른 사내놈을 데려오기라도 한다면.

그놈이 좋다며 손을 잡고 떠나갈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날을 기대하지.”

다분히 악의적인 장인의 말에 무혁은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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