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모든 걸 얻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흐응, 데릴사위다 이거지?”
옛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제법 활발하다.
본인은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오래 지켜봐 온 사람들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다.
“그러기엔 좀 아깝죠?”
“아깝지. 저 녀석은 천상 검사 체질인데 말이야.”
지금은 비록 그만두긴 했다지만 무혁은 수사 과정에 대해 제법 미련이 많아 보였다.
그때 문득 무혁의 옛 동료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 그래도 다행이네. 민재 씨가 정말 그 혜성 딸이었으면 무혁이는 완전히 피 보는 거였는데 말이야.
- 하긴, 검사가 재벌 딸이랑 결혼하고 무슨 뒷감당을 하라고. 안 그래?
진무혁의 특기는 금융 수사였다고 했다.
학창시절의 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사실 검찰 시절의 그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 진무혁이 특기가 금융범죄 잡는 건데, 부인이 재벌이면 말이 많을 테니까요.
본인은 전혀 내색하지 않지만, 민재는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흥미조차 없어 보이던 혜성의 법무팀에 제 발로 들어가겠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저 사람, 검사 시절엔 어땠어요?”
“치열하게 살았지. 독한 사건을 더 지독하게 수사하니 매번 살벌했어.”
금융 사기 사건은 대부분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제일 많았다.
특히나 진무혁은 윗선에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 탓에 초임 검사가 맡기엔 버거운 사건만 골라 맡았었던 모양이다.
“우리 변호사긴 하지만 문성희 그게 좀 독해야지.”
막대한 수임료를 대가로 문 변호사는 어떻게든 의뢰인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진무혁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옆에서 트집조차 잡을 수 없도록 완벽하게 포위망을 구축한 덕분에 무패 행진을 이어나가던 문성희조차 패배의 쓴맛을 봤다.
“네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어.”
무혁의 꿈은 언제나 올곧게 한 방향을 향해왔었다.
그랬던 그가 자신을 위해 망설임없이 다른 길을 택했다.
어째서일까.
그리 기쁘진 않았다.
***
“데릴사위로 들이라고 했다고?”
“응. 우리 집에서 아예 데리고 있으려고.”
협조적인 진무혁을 두고 홍 여사는 애써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언니를 보며 옥자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정말 무혁이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야?”
“그것도 어쩔 수 없지. 둘이 헤어질 생각은 없어 보이니 말이야.”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거라고 선을 긋고 있지만, 홍 여사도 무혁의 능력만은 일찌감치 인정했었다.
모로 봐도 민재는 경영에 영 흥미가 없어 보이니 성 회장은 냉큼 무혁을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다.
“둘이 그렇게 굳건하다면야 혜성 전체를 믿고 맡기는 것도 괜찮겠지 않을까 싶어.”
나름 포기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홍 여사는 잃을 게 없다.
너무 순순히 따르는 무혁의 반응이 영 수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옥자는 기운을 되찾은 언니의 모습이 그저 좋았다.
“저희 왔어요.”
때마침 민재와 무혁이 나란히 나타났다.
둘이 손을 꼭 잡고 들어오는 모습에 홍 여사는 반색하며 일부러 무혁을 더 챙겼다.
“우리 사위 왔구나!”
“네, 장모님.”
그렇게 미워할 때는 언제고. 옥자의 눈에 180도 달라진 언니의 태도가 놀랍기만 했다.
민재가 앞치마를 두르고 홍 여사에게 요리를 배우는 사이 옥자는 무혁의 옆구리를 툭, 쳤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짓이라니요?”
“우리 언니를 대체 어떻게 구슬린 거야?”
절대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사람이 아닌데. 진무혁은 다정해 보이는 모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조원식이 민재에게 한 짓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조원식?”
“예. 조원식이 민재에게 큰 상처를 안겨줬었죠.”
민재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 무혁은 그 무엇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조원식은 그런 민재를 찾아가 협박했고 민재는 어쩔 수 없이 무혁에게 쫓겨나듯 이별을 통보하고 모습을 감췄다.
“회장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민재를 위해서라도 제 손을 더럽히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조원식까지 포기하려고?”
아무리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한들 진무혁이 바라는 만큼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무혁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웃고 있는 민재를 바라봤다.
“모든 걸 얻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귀여운 앞치마 차림에 군데군데 밀가루까지 묻힌 채 민재는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맛은 기대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지켜보는 것만으로 배가 불렀다.
“참 예쁘네요. 저러고 있으니까.”
금방이라도 꿀이 떨어질 것처럼 달달한 눈빛으로 무혁의 눈동자는 하염없이 민재만을 쫓았다.
매사에 냉정한 인간이 왜 석민재만 보면 저렇게 되는 건지.
아직도 신혼 기운에 푹 빠진 진무혁을 보니 언니의 말도 이해가 갔다.
“그래서, 정말 후계자 노릇이라도 하겠단 거야?”
“글쎄요.”
뜨뜻미지근한 대답만 남긴 채 무혁은 열심히 뭔가를 섞는 민재 옆에 다가갔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엉망진창인 것 같은데, 무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걸 또 받아먹었다.
“설탕이 조금 많이 들어간 것 같은데?”
“많이 달아?”
“살짝만 조절해보면 좋을 것 같아. 잘하고 있어.”
아무래도 진무혁의 현재 포지션은 석민재 남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은데.
“있지, 나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나중에 같이 가줄 수 있어?”
“그럼. 얼마든지.”
“다른 사람 차 타고 갈 거야. 그러니까 어디냐고 절대로 물어보면 안 돼.”
오늘따라 어쩐지 민재도 유난히 신이 났다.
여전히 다정한 두 사람을 보며 홍 여사는 슬쩍 동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왜, 형부랑 저러고 싶어?”
“아니 그냥. 둘이 참 서로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마냥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옥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소영하를 거의 반 협박하듯 불러내서는, 일부러 사실무근의 기사를 퍼트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슬슬 공개할 때도 됐지?”
“응. 재판 때 증인으로 참석하면, 그때 엠바고도 같이 풀 예정이야.”
성 회장이 딸을 찾았다는 소식은 알음알음 전해지고 있지만 그게 석민재라는 사실은 어떻게든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집요했던 김 기자와 거래까지 해가며 옥자는 필사적으로 조카를 보호하려 애를 썼다.
만약 성 회장의 숨겨둔 자식이라는 게 세상에 알려지면, 그때부터는 세상이 저 애들을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옥자는 마냥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을 그저 말없이 묵묵히 지켜주기로 마음먹었다.
***
성준범 재판의 첫 공판이 열렸다. 민재 역시 증인 자격으로 재판에 참석했다.
“그때 창고에서 성준범을 목격한 사실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일행에게 GPS 기록 역시 남아 있습니다.”
검사가 증거물을 제출하고 판사는 방대한 사건 기록을 검토하며 성준범과 관련된 내용을 살폈다.
횡령과 차명거래, 개인정보보호법 위번은 물론 살인 교사와 납치, 살인 미수까지.
복잡한 사건이 여럿 얽혀 있는 탓에 공소장의 두께만 해도 가히 살인적이었다.
“흐음…….”
가운데에 앉은 부장판사의 미간이 퍼질 겨를이 없다.
아직 미결수이기에 연하늘색 죄수복을 입은 성준범은 포박된 채 변호사와 함께 피고석에 앉아 있었다.
‘또 저런 식으로 쳐다보는구나.’
소영하와 만날 때도 사람을 무슨 버러지보듯 노려보곤 했었는데, 이제는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피고 성준범은 석민재를 죽이려고 한 사실을 인정합니까?”
“죽이려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럼 납치는 인정합니까?”
성준범은 검사의 함정에 걸려들었다.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성준범은 오만상을 쓴 채 이후 같은 말만을 되풀이했다.
“형사소송법 148조에 따라 묵비권을 행사합니다.”
불리한 증언은 하지 않겠다며 입을 다물었지만 검찰 측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검사는 기다렸다는 듯 성준범 앞에 보란듯이 그동안 확보한 증거들을 들이밀었다.
“저건…….”
“이 화면을 보시죠.”
조잡하게 쓰여진 글씨체는 분명 성준범도 기억하는 것이었다.
틈만 나면 돈을 달라며 투서를 보내왔던 바로 그 글씨체는 죽은 양주댁이 쓴 게 분명했다.
“삼십 년 전, 성아린 납치사건과 관련된 내용이 적힌 피해자의 자필 일기장입니다.”
“웃기지 마, 다 거짓말이야.”
“피고, 정숙하십시오.”
“보시다시피 모든 정황이 친필로 적혀 있습니다. 필적 감정서 역시 함께 제출했습니다.”
죽은 양주댁의 것이 확실하다는 증명서와 함께 안에는 아기를 납치하게 된 정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양주댁이 아이를 빼낸 것은 전날, 그리고 다음날 새벽 아기는 보육원 앞에 버려졌다.
검사는 끝내 아이를 죽이지 못한 남편의 심약함을 책망하는 문장들을 읽어내렸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사주한 건 피고 성준범의 모친이며, 그 역시 해당 행위에 가담했습니다.”
어린 준범과 마주쳤을 때만 해도 모든 게 끝났다고 여겼지만, 그가 입을 다물며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이 사건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버렸다고 해도 이후 일어난 살인 사건에 충분한 동기를 부여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이 입금 내역을 확인 부탁드립니다.”
성준범은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지만, 검찰은 성준범의 모친 명의로 입금된 양주댁의 계좌까지 내놓으며 맹공에 나섰다.
삼십 년 간, 십오억이 넘는 돈이 송금되었지만 몇 년 사이 뜸해졌다.
양주댁을 왜 죽였는지 명백히 보이는 물적 증거를 앞에 두고 성준범은 변명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시선을 피해버렸다.
“최종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과거 혜성 내부에서 있었던 내부 감사자료를 비롯해 그의 범행에는 너무나 많은 물적 증거가 남아 있었다.
또한 양주댁을 실제로 살해한 독사파의 조폭은 이미 재판을 받았기에 성준범의 판결 역시 신속하게 나왔다.
“피해자가 유독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 역시 피고의 사주였던 점, 그 사실을 은닉, 방조를 넘어선 적극적 공모행위가 있었다고 인정되는 바…….”
실제 살인범이 십오 년 형을 받았기에 많이 받아 봐야 십 년 이하일 거라는 예측이 있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냉혹한 눈빛으로 엄한 판결을 내렸다.
“이러한 연유로 보았을 때 검찰 측의 공소 내용이 대부분 인정되는 바, 피고 성준범에게 징역 이십오 년을 선고합니다.”
탕, 탕, 탕. 법봉이 내려쳐지고 소란이 거세졌다.
성아린 납치사건의 범인을 죽은 것과 양부인 성 회장을 살해하려고 한 것까지.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는 점을 들어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강력한 판결을 내렸다.
“이럴 수는 없어!!”
항소하겠다며 성준범은 발버둥쳤지만, 그 자리에서 다시 구치소로 끌려갔다.
또한, 이 재판에서 나온 죄상들을 근거로 성준범의 친부모 역시도 빠져나갈 구멍이 사라졌다.
“오늘 기사 나갈 거야.”
“응.”
재판이 끝난 뒤에도 민재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사람들이 모두 나간 후 옆에 앉은 무혁은 가만히 민재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선글라스를 끼고서 민재는 무혁과 함께 법정을 나섰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자신이 버려지게 된 계기는 알면 알수록 더욱 씁쓸했다.
“쉽게는 못 뒤집겠지?”
“죄질이 워낙 나쁘니까. 항소하더라도 승산은 제로에 가까워.”
오히려 괘씸죄로 더 높은 형량이 부여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A&Z 변호사들과 진무혁의 공통된 결론이었다.
하물며 성준범의 부모마저도, 남의 자식을 죽이려 한 것도 부족해 제 아들을 팔아 그동안 호의호식했으니 결코 수사망을 빠져나갈 수 없을 터였다.
“그쪽도 잘 체포하면 좋을 텐데.”
“유괴 건은 공소시효가 지나버리기도 했고.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어.”
“그렇구나.”
무혁의 팔에 살짝이 기댄 채 민재는 긴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긴 악몽에서 깨어난 기분이 들었다.
“저건…….”
법원 지하 주차장 어귀에 긴 코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얼굴을 감추고 있지만 민재는 한 눈에 그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소영하.”
왜 갑자기 또 여기에 나타난 걸까. 금방 소영하도 민재 쪽을 알아봤다.
나쁜 짓을 하러 온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처럼 그는 손에 든 봉투를 보여주며 두 손을 들었다.
“민재에게 줄 게 있어서 왔어요.”
“제게 주시면 됩니다.”
무혁이 나섰지만, 소영하는 고개를 젓고서 민재 쪽을 똑바로 마주했다.
“민재에게 주고 싶어요. 할 말도 있고.”
사뭇 진지하기까지 한 그의 말, 표정, 태도마저도 예전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지난번 홍옥자와의 스캔들 건도 있으니 민재는 별수 없이 무혁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만 들을 거야. 멀리 가진 마.”
“보고 있을게.”
무혁은 민재의 뜻을 금방 헤아려줬다.
홍옥자와 소영하의 스캔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결과적으로 소영하와 혜성 딸의 염문설도 함께 사그라들었다.
그 일을 완벽하게 매듭짓기 위해서라도 민재는 소영하와의 만남을 수락했다.
무혁이 잠시 자리를 비켜준 후에야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물이야, 열어 봐.”
소영하가 넘긴 봉투를 열어봤다.
무슨 기록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안에 있는 건 유흥업소에 앉은 중년 여자의 사진이었다.
눈이 반쯤 풀린 채 젊은 남자들과 얽혀 있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이 누군데?”
“성준범의 친엄마. 증거로 쓰면 도움이 될 거야.”
“이걸 어떻게 구한 거야?”
“이걸로 성준범을 막아보려고 했어.”
비록 그 노력은 헛수고가 되고 말았지만, 그는 입술을 깨문 채 앞에 선 민재를 바라봤다.
“이렇게라도 널 지키고 싶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