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오프 더 레코드
영산강에서 발견된 여자의 시신은 양주댁으로 밝혀졌다.
몇 번이나 찾아갔던 홍옥자 여사 역시도 재판 전 검찰에 조사를 받았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성 회장 댁 영아 납치 사건의 범인이었단 말씀입니까?”
“네. 양주댁이 아이를 훔치고, 남편에게 넘겼습니다.”
남편은 아이를 보육원에 버렸고 그 아이는 석민재라는 이름을 받아 다른 가정에 입양됐다.
유전자 검사까지 받아 밝혀낸 검사 결과서를 보고 검찰은 고민에 빠졌다.
“납치를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나온 겁니까?”
“글쎄요.”
말년의 양주댁은 직업도 없이 모아둔 돈으로 전전했다지만 그래도 제법 부유했던 시절이 있긴 했었다.
그 돈을 대준 사람이 배후일 터.
이후의 조사는 검찰의 몫이다. 옥자는 기꺼이 입을 다물었다.
“확인했습니다. 조서 확인하고 서명하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한 말에 거짓이 없다는 내용을 모두 검토하고 옥자는 유려한 필체로 서명했다.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장님. 석민재 씨에게 전화가 왔었습니다만.”
“민재한테?”
그때 그 일 이후로 무척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홍 여사는 냉큼 민재의 집으로 향했다.
지하주차장에 먼저 내려와 있는 민재를 보는 순간 젊은 시절의 언니를 보는 것 같았다.
“민재 씨.”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이모.”
잠깐 뜸을 들이긴 했지만, 민재는 분명 이모라고 불렀다.
검사 결과를 받아 보았을 테니 혈육이라는 건 서로가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새삼 어색함이 맴돌았다.
“옥자 이모라고 불러도 돼.”
“네?”
“내 이름이 홍옥자인 건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인걸. 어서 옥자 이모, 하고 불러 보렴.”
오늘따라 유난히 인자하고 너그러워 보이는 홍옥자 사장의 모습에 민재보다 비서들이 더 놀라버렸다.
“옥자 이모.”
“응. 옥자 이모야.”
이름으로 부르면 죽일 듯이 달려들던 자칭 루비 홍조차도 조카 앞에서는 완전히 경계가 풀려버렸다.
반가운 조카의 손을 잡고서 홍 사장은 대뜸 백화점으로 향했다.
“옷부터 살까? 요즘 예쁜 임부복이 그렇게 많이 나온다는데.”
“아직 배가 안 나와서 괜찮아요.”
“금방 나오겠지. 애들은 원래 또 금방금방 자라는 법이거든.”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옥자가 아는 거라고는 언니의 임신 시절에 들은 이야기가 전부였다.
이제 슬슬 입덧이 가라앉고 식욕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옥자는 냉큼 식품관부터 들렸다.
“먹고 싶은 거 있어?”
“복숭아…….”
계절에 맞지 않는 건 아는데 이상할 정도로 복숭아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언니도 그랬어. 입덧이 심할 때는 거의 복숭아만 먹고 지냈을 정도였거든.”
말갛고 탐스러운 복숭아를 보자마자 군침이 돌았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아직은 엄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민재의 물음에 옥자는 쓴웃음을 머금고 홍 여사의 근황을 알려줬다.
“형부도 무사히 깨어났으니까. 언니도 덩달아 아주 바빠졌어.”
“그렇군요.”
“무혁이에게 모질게 군 건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아.”
함부로 서둘렀다가는 또 무슨 사달이 날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옥자는 은근히 분위기를 잡으며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니까 둘이서 한 번 얼굴이라도 비춰주면, 무척 좋아할 것 같은데.”
“그럴까요?”
지금쯤이면 충분히 반성했을 터. 얼굴 한 번 비춰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삼십 년이 넘게 충분히 피가 말랐을 테니까.
민재도 한 번은 엄마를 용서하기로 했다.
“조만간 민재 널 세상에 소개해야 할 것 같아.”
“아,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건 견뎌낼 수 있지만 한 가지만은 피하고 싶었다.
민재의 속삭임에 홍 여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문이 있는 줄은 몰랐네.”
“기왕이면 큰 스캔들이 번지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암. 안 그래도 생각해둔 게 있어.”
옥자는 자신만만하게 큰소리를 쳤다.
아무리 민재의 존재를 공표한다고 해도 이 계획이 성공하게 된다면 화제성은 응당 제 몫이 될 터.
“미리 말은 적당히 맞춰 둘게. 지금 그쪽은 우리 말을 거스를 형편이 못 되는 거니까.”
“괜찮으시겠어요?”
“맡겨만 둬. 오랜만에 아주 재밌겠네.”
적당히 다른 이슈를 일으켜서라도 제게서 사람들의 눈을 돌려달라고.
무엇보다 혜성 친딸과 소영하가 만난다는 루머만은 어떻게든 잠재우고 싶었다.
그런데 어째 홍 사장은 지나칠 정도로 자신만만하다.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건지 민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
유난히 날씨가 좋은 날, 성 회장은 기력을 회복해 조금씩 재활 치료를 시작했다.
회사를 너무 오래 비운 탓에 대내외적으로 상황이 말이 아니다.
특히나 해이해진 기강 때문에라도 한 번 엄격하게 잡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비서가 가져온 난감한 소식이 그는 뒷목이 뻐근해짐을 여실히 느꼈다.
“이게 정말인가?”
태블릿 액정 속 여자의 뒷모습은 너무나 익숙했다.
보란 듯이 입고 온 새빨간 정장과 사자의 갈기처럼 화려하게 흩어진 머리카락.
젊은이 못지않은 탄탄한 뒤태마저도 무척 눈에 익숙하다.
선글라스를 끼고 노골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저 여자는 분명 제 처제가 확실했다.
“갑자기 스캔들이라니?”
“남자 연예인과 사진이 찍히신 모양입니다.”
나이 오십에 첫 스캔들이 난 것도 문제지만 문제는 열애설의 상대다.
사진 속 선글라스를 끼고 걸어가는 젊은 남자는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봐도 누구인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흐릿했다.
일부러 남자 스타 A씨라고 얼버무렸지만, 모자 브랜드와 피어스의 위치만으로 팬들은 기어고 오빠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데 성공했다.
“이게 소영하라고?”
“네, 기자 쪽에선 오프 더 레코드로 이미 소영하를 지목한 모양입니다.”
“처제가 협박이라도 한 건가?”
그러지 않고서야 저 스캔들을 말이 안 된다.
“이번 사장 임명 건 때문에 확인차 만나신 모양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기사가 나?”
업무 협력 차원에서 만남을 가진 건 내부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지만, 이번 건은 홍옥자의 허락 없이는 아예 불가능한 보도다.
“글쎄요.”
“벌써 노망이 난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류스타 소영하라니.
처제의 깊은 뜻도 알지 못한 채 성 회장은 못마땅한 듯 화면을 꺼버렸다.
“회장님, 손님이 왔습니다.”
“어서 들어오라고 해.”
그가 아침 일찍부터 움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젯밤, 그 남자는 대담하게도 성 회장에게 거래를 시도했다.
최대한 조용하게, 가능하면 홍 여사조차 없이 만나고 싶다고.
아내의 일은 이미 전해들은 바가 있기에 성 회장은 망설임 없이 거래를 수락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연분홍색의 정장을 입은 여자를 보는 순간 숨이 멎는 줄만 알았다.
순간 젊은 시절의 아내가 돌아왔나 싶을 정도였는데, 잘 보니 군데군데 제 모습도 보였다.
“너는…….”
“석민재라고 합니다.”
반듯한 자세만 보아도 가정교육을 아주 잘 받은 것 같았다.
사진으로 얼핏 보긴 했지만, 진짜 딸을 마주하고 나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좀 더 가까이 오라며 손짓하고서 고운 두 뺨에 손을 얹었다.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온 게야. 얼마나 애타게 찾았었는데.”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움이 배가 되었다. 요모조모 뜯어보아도 어여쁘기만 한 딸을 만져보며 성 회장은 뒤에 선 무혁을 바라봤다.
분하지만, 정말로 얄밉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저 남자가 제 딸을 여기까지 데려다 줬다.
“화가 많이 났었다면서.”
“사랑의 도피라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었어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말에 옷 소매만 꼭 붙잡고 성 회장은 힘들게 찾은 딸을 꼭 껴안았다.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삼십 년을 떼 놨는데 얼마나 더 기다리라고.”
몇 번이고 등을 토닥여주며 성 회장은 뒤에 선 무혁을 바라봤다.
정말로, 너무나 미운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놈이 없으면 민재도 여기에 머물러주지 않을 터.
“고맙네. 사위.”
“과찬이십니다.”
어차피 떼어놓을 수 없다면 단단히 묶어놓아야 한다. 애써 못마땅한 내색을 숨긴 채 성 회장은 뒤에 선 무혁을 찬찬히 훑어봤다.
얄밉긴 하지만, 그래도 빈틈없는 저놈의 활약상은 후계자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아빠, 라고 불러주지 않겠니?”
귀여운 딸 앞에서는 자존심도 뒷전이 됐다. 민재는 무혁 쪽을 한 번 힐끔 보고서 살며시 입을 열었다.
“아빠.”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딸이 앞에 있으니 모든 것이 뒷전이 됐다.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옆에 민재를 앉혀두고서 성 회장은 완전히 기운을 회복했다.
“우리 딸, 뭐 가지고 싶은 건 없어?”
“조만간 운전면허를 따고 싶긴 해요.”
“그래? 그럼 아빠가 최고의 선생을 붙여주마.”
당연히 진무혁에게 배울 생각이었는데. 무혁 쪽을 힐끔 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오랜만에 만난 아빠 앞에서 이 정도는 양보해주려는 건지.
웬일로 아량 넓게 구는 남편이 신기하기만 했다.
“몸은 이제 좀 괜찮으신 거예요?”
“그럼. 하나도 아프지 않아.”
민재를 아예 업고 날아다닐 것처럼 구는 성 회장의 모습은 비서들조차 생경했다.
두 사람만 있게 해주기 위해 무혁도 잠시 자리를 비켜줬다.
“회장님의 저런 밝으신 모습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동안 정말로 애타게 찾아다니셨습니다. 따님을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비록 홍 여사가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긴 하지만 성 회장이 사위로 인정한 이상은 누구도 무혁과 민재를 갈라놓을 수 없을 터였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글쎄요.”
제 앞에서는 제법 딱딱하게 굴고 있었지만, 민재는 성 회장 옆에서 제법 밝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함부로 데려갈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뭐, 데릴사위도 나쁘진 않겠죠.”
제 실력은 충분히 보여놨으니 장모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자신을 반대하지 못할 터.
무혁은 흐뭇한 얼굴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봤다.
***
“팀장님. 저 왔어요.”
병문안을 마치고 얼마 후, 민재는 안 팀장을 위로하기 위해 특검 팀에 방문했다.
산더미 같이 쌓인 서류 더미 안에서 그는 눈 밑이 시커메진 채 다 죽어가고 있었다.
“진무혁, 이 나쁜 자식. 너만 빠져나가니 좋아?”
“이해관계인이 수사에 낄 수는 없으니까요.”
“시끄러워! 이 나쁜 자식. 나만 고달프고. 젠장.”
챙겨주는 사람 하나 없으니 꼴이 엉망인 채 안 팀장은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조원식이 태도를 바꾸며 수사에 큰 진전이 있지만, 그렇게 배신한 덕분에 로펌 조조는 완전히 눈 밖에 나 버렸다.
“자세한 건 기밀이지만 그래도 잘 풀리고는 있어. 조만간 눈에 보이는 결과도 나올 거야.”
“고생이 많으시니까 이거 좀 드세요. 집에서 직접 만든 쿠키에요.”
함부로 뭘 사다주는 것도 조심스러운 상황이라서 민재는 아예 집에서 먹을 걸 다 준비해 왔다.
그렇게 기껏 열심히 준비한 성의도 몰라주고서 안 팀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네가 만든 거야?”
워크숍 때 라면을 끓여보려다가 아예 라면 국을 만들었던 화려한 전적이 있다.
안 팀장은 그 뒤로 민재에게 다시는 식사 당번을 시키지 않았다.
“제가 아니라 저쪽 분이 만드신 거라서요.”
민재는 저 멀리 선 진무혁을 가리키고서 자신의 무죄를 설파했다.
한때 동부지검 장금이로 불리던 진무혁이 만든 거라고 하니 다들 슬금슬금 다가와 하나둘 쿠키를 입에 물었다.
“이건 좀 먹을 만하네.”
석민재의 살인 라면은 그야말로 살해 도구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악몽 같았던 워크숍을 떠올리며 안 팀장은 아예 대놓고 면박을 줬다.
“팀장님도 참.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시끄럽고, 성 회장은 뭐래?”
“일이 좀 꼬여버렸어요.”
성 회장의 건강문제가 제일 마음에 걸렸던 거지, 사실 상속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마음은 또 다른 모양이었다.
“땅?”
“네. 갑자기 땅이 최고라고 그러시더라고요.”
무슨 선물 세트 고르듯이 뭘 원하냐기에 알아서 해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뒤 무혁은 이미 모두 처리된 서류 몇 개를 가져와 민재 앞에 내밀었다.
“건물주?”
“그렇게 됐어요.”
상속세까지 깔끔하게 모두 낸, 제 이름으로 된 건물을 보며 민재는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대체 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진무혁은 뻔뻔스러운 얼굴로 자신이 행동을 정당화했다.
- 인감이 나한테 있어서, 내가 대신 처리한 것 뿐이야.
지난번 아파트 문제로 진무혁의 손에 들려준 인감이 문제였다.
원래는 그리도 사이가 나빠 보이던 성 회장과 무혁도 어쩐지 이 일에 한해서만은 지독할 정도로 장단이 잘 맞았다.
“석민재, 너 괜찮겠어?”
“글쎄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되어버렸다지만 그래도 무혁에 대한 마음의 빚이 조금은 사라졌다.
요즘 들어 무척 즐거워 보이는 무혁을 보고 있자니 무겁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서, 뭐래. 성 회장이 너더러 혜성을 받으래?”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아이 때문에라도 무리하는 건 민재 쪽에서 사양하고 싶을 정도다.
다만 한 가지, 성 회장은 무혁을 세워두고 무척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했었다.
“혜성 법무팀부터 차근차근 올라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너?”
“아뇨. 저 말고.”
무혁을 가리키며 민재는 어깨를 으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