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때까지는 부디 죽지 말아요.
남의 일처럼 냉정하게 말하는 무혁을 앞에 두고 조원식은 숨을 꼴깍 삼켰다.
언제나 제 앞에서 단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기에, 이 애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건 사고였으니까…….”
“방금 말씀하셨잖습니까. 일부러 죽인 거라고 말입니다.”
자기가 했던 말을 금세 번복하자 무혁은 그 시점부터 다시 짚어나갔다.
“세상에 우연 같은 건 없다고 믿습니다. 분명 동기가 있었을 테지요.”
자리에서 일어나 무혁은 초라해진 조원식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내부고발자를 비롯해 다른 이들의 죽음과 달리 제 아버지의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남아있다.
“검찰의 향한 본보기? 네, 그럴 수 있습니다.”
“무혁아, 나는…….”
“우연히 부부가 함께 있었으니까? 어머니는 어린 저 때문에 집 밖에 잘 나가지도 않던 분이었습니다.”
그동안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생각이었지만 민재를 지켜보며 무혁도 조원식의 발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일부러 제 어머니마저 죽인 이유는 생각보다 명료했다.
“굳이 부부를 모두 죽여야 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처음부터 질문이 잘못됐던 겁니다. 대체 왜 범인은 저를 살려뒀던 걸까요?”
필사적으로 민재를 잡으려던 홍 여사의 아집은 어쩐지 조원식의 그것과 무척 닮아 있었다.
“당신은 아버지를 무척 좋아했었죠.”
“그래, 맞아. 내가 이한이를 얼마나…….”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당신을 기소하려고 했습니다.”
독사파 뿌리에 조원식이 깃들어있다는 걸 눈치챈 아버지는 오랜 고민에 시달렸을 것이다.
진이한 검사의 사망 이후, 캐비닛 속에 숨겨진 당시의 사건 파일에는 낡은 만년필로 써내려갔던 아버지의 고뇌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우정과 책임 사이에서, 뼛속까지 검사였던 아버지는 결국 친구를 고발하는 길을 택했다.
“궁금했습니다. 죽일 만큼 미운 자의 자식을 왜 굳이 데려와 키운 걸까.”
“무혁아, 나는…….”
“그동안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진심으로 따르던 제 모습을 보는 게 즐거우셨겠지요.”
제 부모를 죽인 원수인 줄도 모르는 채로, 진무혁은 은혜를 갚기 위해 조원식의 아래에서 착실히 그의 이름을 빛내주었다.
진무혁은 조원식의 자랑인 동시에, 그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또 하나의 진이한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오해야, 내가 어찌 이한이를 해쳤다고…….”
“그렇다면 왜 친구를 죽인 범인의 변호를 맡으셨습니까.”
“그건!”
“항소심을 거치고 최종 대법원 상고 당시 당신의 이름이 변호인 명단에 올라 있었던 걸 확인했습니다.”
첫 재판은 제법 소란스러웠지만, 그쯤 진행되면 사건의 존재 자체가 잊히곤 한다.
몇 년 만에 변호인단으로 돌아온 조원식의 활약 덕분에 살인범은 불과 이 년의 수감생활을 거치고 소리소문없이 사회로 복귀했다.
“억측이로구나.”
“정말로 억측인지 아닌지는 특검 과정을 통해 밝혀지겠지요.”
조원식이 먼저 독사파를 배반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저쪽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
함정에 빠졌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무르익은 독을 목덜미 깊이 박아넣듯이, 진무혁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알아서 자수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뭐?”
“가족을 동시에 구속하는 경우는 드물죠. 아버지가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가면 딸까지 가두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토록 애틋한 딸이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직접 구해내라고. 조원식을 사지에 떨어트리며 무혁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굳이 입을 다물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특검이 시작되면, 수사는 대표님 선에서 멈추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교활한 조원식은 무혁이 무슨 말 하려는 건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제 뒤통수를 친 국무총리까지도 충분히 물고 늘어질 수 있다고, 그렇게만 된다면 적어도 제 형량이 조금은 가벼워질 여지가 있다.
어차피 기소가 불가피한 거라면 형량이라도 적게 나와야 하는 거니까.
“혼자 죽는 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적극적으로 수사에 협조한다면 아주 조금이나마 감경의 여지가 있을 거라고 여지를 남기고서 무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뵙는 날까지 몸 건강히 잘 계십시오.”
“내가 여기서 나가면 제일 먼저 너부터 가만두지 않을 거다.”
여전히 착각 속에 빠진 조원식을 앞에 두고 무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원식 본인이 내부고발자를 처단했었던 것처럼, 만약 그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 저쪽에서도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터.
누구든 먼저 입을 열고 협조하는 사람이 제일 가벼운 형량을 받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조원식에게는 아직 다 뒤집지 못한 여죄가 가득 남아 있다.
어설프게 거래를 성사시켜도 그 죄를 다 덮어주지는 못할 터.
자기 발로 지옥 불을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원식은 끝까지 자신만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럼 이만.”
성 회장이 깨어났으니 이제는 주가 조작과 관련해 조원식 쪽의 사모펀드를 털어줄 차례다.
십 원 한 푼 모두 받아내기 위해서라도 조원식의 목숨은 아직 단단히 붙어 있어야 한다.
“그때까지는 부디 죽지 말아요.”
모든 걸 잃기 전에, 함부로 자살이라도 해버리면 곤란하니까.
무혁은 태어나 처음으로 조원식의 안녕을 빌었다.
***
파격적인 특검 후보가 선정되었다.
과거 조원식의 계략에 휘말려 옷을 벗었던 전 서울동부지검장 김일훈에 대한 특검 임명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전문 수사팀이 꾸려지며 이례적으로 안 팀장 역시 검사보로 특검 팀에 합류했다.
“용케 안 갔네.”
거실에 나란히 앉아 티비를 보며 민재는 옆에 앉은 무혁을 힐끔 바라봤다.
“보통 저런 수사에는 판사나 변호사 출신들이 더 많이 가니까.”
거기다 현직에 있었더라도 조원식의 관계인이니 얼마든지 사건을 거절할 수 있다.
“흐응.”
아닌 것 같은데. 그리도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이 자신과는 일절 관계가 없다 해도 이미 늦었다.
살포시 무혁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서 민재는 손가락을 들어 가슴팍을 쿡 찔렀다.
“난 당연히 직접 나설 줄 알았거든.”
“내가 지금은 좀 바빠.”
그러면서 티셔츠 안으로 슬쩍 들어오는 손은 대체 누구 건지.
재미없는 뉴스를 돌려버리고서 무혁은 민재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간지러워.”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더 간지럽힐 거니까.”
아예 대놓고 나쁜 짓을 시작하는 걸 보니 퍽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지간하면 입을 열지 않는 그를 알기에 민재는 무혁의 무릎 위에 앉고서 넌지시 사건에 대해 물었다.
“조원식 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건 독사파가 어떻게 협력하느냐에 달려 있지.”
“그럼 독사파는?”
“그건 성준범 쪽의 움직임을 봐야 하고.”
“뭐야, 그게.”
“애초에 난 검사지 판사가 아닌걸.”
뒤늦게서야 놀리는 거라는 걸 알아차리긴 했지만, 성준범 얘기가 나오니 또 기분이 상했다.
“살인 사건은 또 뭐야?”
“삼십 년 전, 성 회장 딸 유괴 사건의 범인을 성준범의 지시로 죽였던 모양이야.”
“범인을 죽였다고?”
“그 부잣집 아이를 유괴했는데도 몸값 하나 요구한 적이 없어. 범인은 그럼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벌인 걸까?”
결과적으로 아기가 사라지고 가장 이익을 본 건 성준범이었다.
민재를 무릎에 앉힌 채 무혁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따뜻한 숨을 불어넣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무혁 씨.”
“오늘은 선배라고 불러도 돼.”
이렇게 서로를 안고 있으니 정말로 옛날 생각이 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저 서로만 바라봐도 웃음이 나던 시절이었는데.
민재는 무혁의 손을 꼭 잡고서 고민에 빠졌다.
“성 회장님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건 민재 뜻대로. 어떻게 하든 네 결정을 따를 거야.”
이제는 칼자루가 민재의 손에 넘어온 모양이다.
눈물짓던 홍 여사 떠올리면 모질어지기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무혁을 떼어놓으려 한 것만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사실 잘 실감이 안 나.”
“실감 나게 해줘?”
성 회장이 가진 본사 주식만 해도 대략 1조 7천억 정도에 홍 여사의 지분까지 합치게 된다면.
0이 열두 개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민재는 계산을 포기했다.
“이젠 성준범도 날아갔으니까, 상속받을 사람이 한 사람 밖에 안 남은 것 같은데?”
“……지금 농담하는 거지?”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여?”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무혁을 보며 민재는 혀를 찼다.
만약 이 비밀이 세상에 밝혀지게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럼 치킨도 매일 시켜 먹을 수 있겠네.”
엉뚱한 대답에 무혁은 그만 웃음이 터졌다.
치킨이 문제가 아니라 닭공장을 인수하고도 남을 텐데.
아무래도 오늘 배 속의 아기님께서 치킨이 드시고 싶으신 모양이다.
무혁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앞치마를 둘렀다.
“그 치킨은 제가 대접하죠. 사랑하는 후배님.”
***
“일 그만둔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얼굴이 제대로 폈네, 폈어.”
뽀얗게 살이 오른 민재를 보며 오 대리는 혀를 찼다.
“왔어?”
고작해야 길 건너에 있는 신혼집에 드디어 놀러와 보게 됐다.
안 그래도 바쁜 회사가 더 바빠져서 죽어가는 자신에 비해 민재는 이제 분위기마저 완전히 느긋해져 버렸다.
“집 좋다!”
폭신폭신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으니 곧 민재가 갓 내린 커피를 가져다줬다.
“향이 좋네, 뭐야?”
“무혁 씨한테 핸드 드립 배웠어. 원두도 아침에 막 갈아둔 거라 맛있을 거야.”
“진짜 제대로 호강하시는구나. 사모님.”
회사에서 늘 무표정하던 민재였지만 집에서는 제법 편안하게 웃기도 했다.
달라진 분위기를 보니 부럽기 짝이 없다. 피곤한 오 대리는 아예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바빠?”
“말도 마. 죽을 맛이야.”
민재가 휴직하고 진무혁도 곧 A&Z의 파트너 자리를 내놓았다는 소식이 돌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혜성 건 때문에 합류한 거란 추측은 확신으로 변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 팀장마저 특검 팀에 가 버렸다.
“새로 부임하신 문성희 팀장님을 찬양해야지 뭐. 성준범 부모의 은닉재산 소송도 문 변이 맡았잖아.”
“해외로 도망가지 않는 한 떼먹을 수는 없겠네.”
안 그래도 아들이 감옥에 있는데, 횡령의 주체 중 하나인 부모가 집요한 문 변의 추적에 어떻게 당해낼지 혀를 찼다.
“용식 씨는 아직도 거기 있어?”
“요즘 완전 잘 나가. 본인은 큰 회사 체질이 아니라고 하는데. 뒷조사를 너무 잘하니까 다른 변호사님들이 놔주질 않는 거 있지?”
성준범 건만 끝나면 도망가시겠다던 한용식은 기어코 A&Z에 말뚝을 박게 됐다.
뜻밖의 다크호스를 건진 셈인데, 민재를 빼가는 대신에 한용식을 줬으니 진무혁이 하는 일에는 정말로 빈틈이 없다.
“그나저나 조원식, 어마어마하더라. 원래도 뒤가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진짜 심하던데?”
“그렇지 뭐.”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가며 매일 그의 비리 보도가 줄이어 터져 나왔다.
특히나 조직 폭력배와의 연루설은 법조계 내부에서도 큰 충격을 일으켰다.
국무총리와 대법관을 비롯해 유력 국회의원들까지, 자식들의 취업부터 위장 서류를 부탁해온 사실이 줄줄이 밝혀졌다.
“집사 변호사가 따로 있겠어? 아주 화장실에서 휴지도 대신 닦아 주겠던데.”
“서류 위조 같은 건 애교일 정도니까. 조용히 넘어가긴 힘들 거야.”
그동안 법조계의 원로 행세를 하던 조원식의 명예는 이제 길 가던 어린아이조차 비웃을 만큼 하찮은 오명이 되고 말았다.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더니, 예전 자신을 협박하던 모습 떠올리니 쓴웃음이 절로 났다.
“소영하가 사장된 건 들었지?”
“뜻밖이긴 했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민재는 시치미를 뗐다.
처음 홍 여사가 소영하에게 HS엔터를 맡긴다고 했을 때만 해도 금방 망하게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굴러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잘 나가는 모양이던데. 그러게 소영하는 왜 그랬대.”
만약 그때 소영하가 약속을 깨지만 않았더라도,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딱히. 지금이 더 좋아.”
하지만 민재는 딱히 그에 대한 미련이 조금도 없었다.
할머니를 위해 서둘렀을 뿐. 그때만 해도 상대가 굳이 소영하여야 할 이유는 없다.
슬쩍 배를 쓰다듬으며 민재는 커피잔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소영하, 혜성 쪽이랑 말이 많더라. 혜성 친딸이랑 사귄다는 얘기도 있고.”
“뭐?”
“전에 기자회견 한 그 가짜 말고. 진짜 혜성 딸이 따로 있대.”
말이 또 언제 새어나간 건지 머리를 짚었다.
마냥 미룰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아무래도 그런 헛소문은 확실하게 바로잡고 가는게 나아 보였다.
“아닐걸. 그 여자 유부녀야.”
“유부녀라고?”
“멀쩡히 결혼도 했고 임신도 했다던데.”
아마 오 대리가 진상을 알게 되면 기겁을 할 테지만 민재는 시치미 뚝 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또 소영하가 혜성 사위 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그럴 리가 있나. 그 집 사위는 엄청 유능한 사람이거든.”
무혁이 만들어 두고 나간 샌드위치 오물거리며 민재는 홍 여사가 준 보자기를 만지작거렸다.
‘나도 만나 봐야 하는 거겠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민재도 더는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하물며 혼자 보냈다가 문전박대당했단 소식에 마음이 쓰였다.
세간엔 이미 다 알려진 모양인데 적어도 소영하와 얽히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
“저 석민재인데요.”
민재는 용기를 내 홍옥자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