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그 얘기만은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볼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자 현관문 옆에 삐죽 튀어나온 롱스커트 자락이 보였다.
“거기 숨어서 뭐 해.”
“숨은 거 아니거든.”
누가 핏줄이 아니랄까 봐, 홍 여사와 똑같은 짓을 하는 민재를 보며 무혁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좀 봐줘. 방금 성 회장님께 실컷 혼나고 오는 길이니까.”
“병원에 갔었어?”
“상태는 괜찮으셔. 걱정할 만큼은 아니야.”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절연을 선언했지만, 민재는 그 소식에 제법 안도한 듯 보였다.
성준범 재판이 남은 이상 끝까지 척을 질 수는 없으니 무혁은 민재를 곁에 앉히고서 어깨에 슬쩍 손을 얹었다.
“유언장을 다시 쓰실 모양이야.”
“유언장을?”
“상속권도 박탈당하겠지. 존속 살해는 미수라고 해도 중죄니까.”
가족이 다른 가족 구성원을 살해하는 것을 용인할 경우 유산을 두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법이라는 건 어쩌면 그런 수많은 비극을 겪고 난 후에야 생겨난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성준범이 올 거라는 거 알고 있었어?”
“그것마저 없으면 그 남자한텐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을 테니까.”
절실할수록 시야가 좁아지는 건 진무혁도 익히 경험했던 일이다.
무릎에 민재를 앉혀 두고서 무혁은 나른한 미소를 머금었다.
따끈따끈한 체온이 닿으니 며칠 간의 피로도 함께 녹아들었다.
꼼지락대는 민재의 배에 손을 얹고서 무혁은 그만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뭐야, 자는 거야?”
씻기도 전에 이런 곳에서 잠이 들다니. 누적된 피로가 넘친 건지 사람이 완전히 뻗어버렸다.
안 그래도 무거운지라 민재는 아예 베개를 가져와서는 낑낑대며 소파에 그를 겨우 눕혔다.
“아, 힘들어.”
지난번에도 느낀 거지만 잠자는 진무혁을 옮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방석을 깔고 아예 바닥에 앉아서 민재는 고이 잠든 무혁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날렵한 콧날. 깊은 눈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참 긴 속눈썹까지.
평지풍파를 겪으며 인상이 사나워져서 그렇지, 어렸을 때는 제법 귀여웠을 법도 한데.
얼굴 구석구석을 뜯어보며 민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라.”
깊이 잠든 그의 몸에 담요를 덮어주고서 민재는 오랜만에 전화를 들었다.
부모님 문제로 연락하는 건 모두 무혁에게 맡겨뒀기에 민재가 직접 연락을 하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민재 씨구나. 오랜만이야.”
“잘 지내셨어요, 선생님.”
“지난번에 찾아온 사람들 이야기 들었지?”
“부모님을 찾긴 했어요.”
민재가 모르는 사이 홍옥자와 진무혁 사이에 제법 긴 술래잡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오래된 선생님들은 엄마가 봉사활동을 다니던 시절부터 꾸준히 알고 지냈던 분들이기에, 어린 시절의 민재에 대해서도 제법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제가 어릴 때, 결혼한다고 했던 남자아이. 기억나세요?”
“결혼? 아아, 그 잠깐 있었던 그 애 얘기인가?”
워낙 오래전 이야기라 선생님들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어나갔다.
“그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애 말하는 거 아니야? 아버지 친구라는 사람이 데려갔던 바로 그 애 말이야.”
“아, 그 이상한 사람.”
보육원에 이십 년 이상 근무하며 그런 진상은 손에 꼽혔다며 선생님들은 치를 떨었다.
안타까운 사연들이 모여드는 곳이지만 그 와중에도 그 애의 사연은 유독 안타까웠기에 선생님들은 제법 여러 가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꽤 잘나가는 사람이었다고 했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자마자 친척들이 막무가내로 버리고 갔었어.”
“그랬어요?”
“응. 애가 얼마나 조숙한지, 자기가 버려졌다는 걸 일찌감치 눈치챘던 모양이야.”
전화를 꼭 붙잡은 채 민재는 잠든 무혁을 바라봤다.
진무혁이 절대 제 입으로 말해주지 않을 그의 과거는 민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혈육도 아니고 막말로 생판 남인데, 그 애도 그다지 가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도 억지로 끌고 갔었거든.”
“끌려갔다고요?”
“애 눈에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변호사라는 사람이 서류를 잔뜩 들고 와서 따져대니 우리도 별수 없었지.”
조원식의 집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리도 싫어했던 걸까.
선생님들은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홍 여사의 말대로 무혁이 당시에 그 보육원에 있었던 건 확실해 보였다.
‘이것도 말 안 했어.’
머리를 확 뜯어버릴 수도 없고. 대체 뭘 얼마나 속인 건지.
오랜만에 꿈을 꿨던 탓인지 예전 그 남자아이에 관해 얘기했을 때도 진무혁은 절대 자기랑은 상관없다는 식으로 단호하게 선을 그었었다.
분명 다 알고서 숨겼던 걸 텐데. 민재는 무혁의 날렵한 콧날을 꾹 눌러 뒤집어봤다.
다 알고 있다고 따져 물어봐야 또다시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갈 게 뻔하다.
“사진 같은 건 없나요? 기록이라도요.”
“글쎄. 워낙 오래된 일이라.”
“찾아봐 주세요.”
명백한 물증도 없이 저 능구렁이를 포획하는 건 쉽지 않을 터.
매번 이런 식으로 입을 다문다면 민재가 알아서 수사에 나서면 된다.
비밀을 말하지 않는 이 입은 혼내줘야 하니까.
민재는 살짝 눈을 감고 잠든 무혁에게 진득하니 입을 맞췄다.
***
섬뜩한 꿈을 꿨다. 무혁은 머리를 짚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최악이군.”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시절, 조원식을 친아버지처럼 따랐던 제 모습을 떠올리면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워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는 악몽 같은 옛 기억을 지우려 애를 썼다.
“꽃무늬 담요?”
소파에서 잠이 든 걸 보고 민재가 덮어준 모양이었다.
뭘 하나 했더니 민재는 야무지게 방석까지 가져와 바닥에 앉은 채 무혁이 누운 소파에 머리를 기대 잠이 들었다.
어쩌면 이렇게 예쁜 짓만 골라서 하는 건지, 무혁은 민재를 방에서 재우고 서재로 돌아왔다.
조원식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고 얼마 후 그는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게 됐다.
- 네가 무혁이지. 조 변, 조 변호사 좀 만나게 해 다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초조해 보이던 한 남자는 무혁을 잡고 조원식의 행방을 물었다.
-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며칠 후, TV에서 그때 그 남자의 사망 소식이 흘러나왔다.
모 국회의원의 보좌관이었던 남자는 내부 비리를 고발하려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다고 했다.
‘교통사고. 아버지와 같아.’
사건의 핵심 증인인 그 남자가 죽으며 수사 역시 난항에 빠졌다.
마지막 증인마저 사라지며 조원식은 기어코 제 의뢰인에게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이제는 그 자리에서 내려올 때가 됐지.”
조원식의 승리는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수많은 의문사를 뒤로한 채 조원식은 최종 판결에서 늘 원하는 결과를 얻어왔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
그자도 이제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받을 때가 왔다.
다만 한 가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다.
‘왜 굳이 아버지를 죽였던 걸까.’
어린 자신조차도 속았을 만큼, 조원식은 아버지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 본인조차도 두 사람이 친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을 어째서 죽인 걸까, 아니 어째서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
그 사고가 고의였다는 정황 증거는 넘치도록 많지만, 그것이 고의였다고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조원식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만약 조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모든 진상은 어둠 속에 묻혀버릴 테니까.
“그럼 이제 어느 독주머니를 풀어 볼까.”
일단은 제 입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인하게 만들어야 한다.
독사파와 조원식의 과거 추한 행적들이 속속들이 나오게 된다면, 그때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역시도 어느 정도 세상에 알려질 수 있을 터.
그러니 적어도 그때까지는 목숨을 붙어 있어야 한다.
부디 가장 치명적인 독을 조원식의 숨구멍에 불어 넣어줄 수 있기를 바라며 무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파일을 클릭했다.
***
“대체 일을 어떻게 했길래!”
실형 선고가 떨어지고 조장미는 곧바로 항소심 준비에 들어갔다.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 어떻게든 법정 구속은 면했지만, 그마저도 특혜 논란에 휩싸이며 하루라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조조의 변호사들은 어째서 이리도 무능한 건지. 금단 증상에 떨면서도 장미는 제일 먼저 진무혁부터 찾았다.
“무혁 오빠한테 연락해 봐. 내가 한 건 분명 괜찮을 거라고 했었단 말이야.”
그냥 무혁의 가방에서 가져온 걸 호기심에 자랑했던 것뿐이었는데, 일이 커지자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은 다들 장미를 주범으로 몰았다.
초조해진 장미가 무혁에게 도움을 청해봐도 그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건 말도 안 돼.”
딸의 재판 결과 소식에 조원식 역시도 피가 말랐다.
처음 체포될 때만 해도 곧 풀려날 줄 알았건만 특검 이야기가 시작되며 수사에 불이 붙었다.
성준범 건으로 시작해 독사파가 함께 물렸고, 과거 사건이 재조명되며 화살은 독사파를 변호했던 조원식에게로 향했다.
‘빌어먹을 늙은이.’
점점 좁혀져 오는 포위망의 배후에는 A&Z의 안 대표가 있었다.
그동안은 언제나 한발 물러나 관망만 했던 주제에.
과거 진이한의 죽음조차도 외면했던 자가 어째서 이리도 열심히 나서는 건지.
아무리 뒷방 늙은이로 전락했다 하나 그는 법조계의 원로이기에 조원식도 거기에는 손을 댈 수 없었다.
아침 뉴스에서 성 회장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변호사 면회입니다.”
밖에서도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한데, 조원식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며 면회장으로 걸었다.
“네가 여기 어떻게…….”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반항하던 시절과 달리 깍듯한 태도의 무혁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토록 저를 피해 다녔던 녀석이 왜 갑자기 자신을 만나러 온 걸까.
“잘 지내셨습니까.”
“여긴 어쩐 일이냐?”
“길러주신 은혜는 갚아야 하니까요.”
싹싹한 태도가 심히 낯설지만 그래도 지금은 더운밥 찬밥을 마다할 형편이 못 된다.
초조한 마음으로 조원식은 장미의 재판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전해 들었다.
“다른 놈들이 먼저 불었단 거지.”
“먼저 걸린 쪽에서 공급책으로 장미를 지목했고, 독사파 역시도 장미를 통해 소개받은 건 인정했었으니 그 혐의는 빠져나가기 힘들 겁니다.”
장미는 무혁의 물건을 언제나 탐내곤 했다.
그래서 일부러 자연스레 장미가 접할 수 있도록 위험한 물건들을 가방 속에 넣고 다녔다.
마약 사건과 관련된 상세한 기록이 하룻밤 사라졌다 돌아온 날, 장미가 미리 파악해둔 거래상과 접선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었다.
호기심은 언제나 무서운 법이니까. 약에 빠진 이후로 장미는 더욱 야위고 창백해졌다.
약에 절어 말라가는 모습을 조원식은 더 예뻐졌다며 추켜세우곤 했으니까.
장미는 멈춰야 할 시점을 몰랐다.
“그리고 성준범이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장미의 이야기는 접어두고, 무혁은 성준범에 대한 반가운 소식 하나를 더 전달해줬다.
“존속 살인 미수면 상속도 날아가겠군.”
“네. 완전히 끝난 겁니다.”
가만히 앉아만 있었어도 어떻게든 유류분을 건질 수 있었겠지만, 조급해진 마음이 일을 그르쳤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까지 벌일 위인일 줄은 몰랐는데.”
“모르지요. 주변의 부추김이 있었을지도.”
“하긴, 성 회장이 의식을 차렸으니 골치가 아프긴 했겠지.”
영영 죽었다면 모를까, 그동안 한 짓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든 상속에서 밀려났을 터.
혜성을 잠식하려던 계획도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설마.’
혜성 건을 전면에서 맡았던 건 진무혁이었다.
그 점만 생각하면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도 그다지 곱게 볼 수 없다.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조원식은 장성한 친구의 아들을 마주했다.
“그래서, 네가 바라는 게 뭐냐?”
“장미는 살려둘까 합니다.”
실형만은 면하게 해주겠다는 제안에 조원식의 눈이 커졌다.
그 여리디여린 딸이 옥살이를 견뎌낼 리가 없다.
“그 애는 억울해. 날 건드리려고 그 애까지 덤터기를 씌운 거야.”
“그런 거였습니까?”
의외로 무혁은 순순히 수긍하자 조원식 필사적으로 설득에 나섰다.
“네 동생 같은 아이잖느냐. 그 애는 아무것도 몰라. 그냥 주변에서 부추겨서 넘어간 거지, 아무 잘못이 없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건 맞는 것 같더군요.”
“필요하다면 다른 것도 넘기마. 그러니 우리 장미만은 어떻게든 빼내 다오.”
그래도 딸이라고, 자식 얘기가 나오자 조원식은 독사파의 과오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냈다.
“독사파 쪽의 책임을 더 강하게 묻는다면, 장미도 어떻게든 집행유예로 만들어볼 수 있겠지요.”
“암, 그렇고말고. 애초에 네 아버지를 죽인 것도 독사파니까.”
필사적인 항변을 이어나가며 조원식은 드디어 미끼를 물었다.
“그런 거였습니까?”
“그래. 당시 수사망이 조여오는 게 두려웠던 건지 독사파가 사람을 매수해 네 아버지를 죽였다.”
“어찌 그리 확신하시는 겁니까.”
“그건!”
본인도 아차 싶었던 건지 금세 다시 입을 닫아버렸다.
그 얘기만은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드디어 조원식이 입에서 아버지의 죽음의 실마리가 터져 나왔다.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무혁은 차분히 조원식이 한 이야기들을 되짚어나갔다.
“그동안 보통 독사파가 연루된 사건에서는 당사자만 건드릴 뿐, 가족까지 건드렸던 경우는 거의 없었죠.”
“그건…….”
“독사파와의 연계를 폭로했던 경찰은 저수지에서 익사했고, 사건을 파던 기자는 어느날 갑자기 호텔 방에서 목을 맨 체 발견됐습니다.”
그동안 누적된 의문사들은 매우 다양했지만, 제 아버지의 죽음만은 유독 이상했다.
“왜 부모님이 두 분 다 함께 돌아가셨던 걸까. 수사를 방해할 거라면 아버지 한 사람만 없애도 되는 거였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