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너 따위가 감히 내 딸을 농락해!
눈을 뜨고 며칠 후 성 회장이 의식을 되찾았다.
임원들의 병문안이 이어지며 한 일주일은 잊고 살았다지만 홍 여사는 여전히 속상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배냇저고리라. 그리운 물건이군.”
“당신은 웃음이 나와요?”
눈물로 호소한 끝에 이제 다 됐다고 확신했었는데.
갑작스러운 심장 수술 소식과 함께 민재는 아예 홍 여사에게 등을 돌려 완전히 달아나버렸다.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 건 모두 교활한 그 남자 때문이다.
마치 제 존재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자는 법조계의 원로인 안 대표와 손을 잡고 조원식을 향한 복수를 알아서 척척 진행해나갔다.
“뭐가 그리 화가 난 거야.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그건……!”
“그동안 혼자 많이 힘들었지?”
성 회장은 여전히 소녀 같은 아내의 손을 꼭 잡아줬다.
갑작스러운 병에 의식을 잃은 사이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믿었던 후계자 준범은 자신 몰래 회삿돈을 빼돌리고 있었던 것도 모자라, 외부 세력과 규합해 회사의 경영권을 탈취하려 들었다.
그 어리석은 아이는 차마 몰랐겠지만 지금도 상당히 많은 회사 주식이 정체 모를 사모 펀드 손에 넘어가 있다.
경영권이 정말로 넘어갔다면 저들은 제일 먼저 성준범부터 내쳤으리라.
“몹쓸 놈들에게 걸렸어.”
“괜찮아요. 어떻게든 해결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그 녀석이 도와준 거겠지.”
홍 여사도 차마 그 사실만은 부정하지 못했다. 민재와의 관계는 둘째 치더라도 ‘변호사’ 진무혁은 상당히 유능했다.
“까다로운 남자예요. 그런 남자는 여자를 힘들게 하는 법인데.”
“나도 까다로운걸?”
“그래서 내가 힘들었잖아.”
병문안을 온 임원들에게서 진무혁의 활약상은 익히 들었다.
유려한 학력에 사법고시 수석, 검찰 출신에 변호사 일도 제법 똘똘하게 잘한 모양이었다.
성준범에게 다 넘어간 회사를 찾아온 것도 그렇고, 혜성의 사위로 삼기에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 어째서인지 아내는 노골적으로 진무혁을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 아린이가 속은 것 같아서 그러지. 결혼 전에 이상한 계약서까지 썼다니까요?”
“계약서라?”
죽으라고 반대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말도 안 되는 결혼 계약서를 보고 얼마나 분통이 터졌었는데.
으레 제 편을 들어줄 줄 알았던 남편은 이야기를 모두 듣고서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야무진 녀석, 적당히 약은 게 더 마음에 들어.”
“뭐라고요?”
내쳐야 할 이유는 수십 수백 수천 개도 나올 것 같은데, 성 회장은 껄껄 웃으며 진무혁의 활약상을 전해 들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건 승부에 있어 가장 큰 관건이 되는 법이다.
하물며 곤경에 빠진 상대를 구슬려 제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것도 능력이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두 사람 다 첫사랑이라면서.”
“그건 그렇지만…….”
“억지로 떼놓으려고 했으니 기겁을 하고 달아났지. 이번 일은 당신이 잘못한 거야.”
어지간하면 좋은 말만 해주던 남편의 쓴소리에 홍 여사도 입을 다물었다.
억지로 잡아두고 싶어 용을 써봤지만, 제 딸은 속셈을 알아채고 냉큼 달아나버렸다.
“이제라도 찾았으니 된 거야.”
“억울해.”
하나뿐인 자식이었다. 애타게 찾아 헤맸던 만큼 찾아낸 그 아이도 응당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뭐든 다 해주면 자신을 따르리라 여겼건만 그 애는 끝내 그 남자의 손을 놓지 못할 모양이다.
씩씩대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성 회장은 웃음을 삼켰다.
비록 남편의 앞에서는 이리도 무장해제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언제나 꼿꼿한 혜성의 안주인 노릇을 거두지 않았다.
자신이 한 프러포즈는 세간에 제법 알려졌지만 정작 아내가 한 대답은 혼자만의 좋은 추억이 되었다.
- 내가 당신을 선택한 거야.
완벽한 대답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물론 동생인 옥자는 그를 죽여버릴 거라며 고래고래 고함까지 쳤지만, 홍 여사는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랬던 주제에.
본인도 말린다고 들을 성품이 아니었으면서 어찌 제 자식이 고분고분하기를 바랄까.
그래도 다행인 건 제 딸의 짝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점일지도 모른다.
“회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갑작스러운 방문에 홍 여사는 소매로 서둘러 눈물을 훔쳤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 회장님.”
“당신은…….”
언제나처럼 얄미운 얼굴로 나타난 진무혁을 앞에 두고 홍 여사는 노골적인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온 건지.
달갑지 않은 손님이기에 냉대당할 것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무혁은 뻔뻔스러우리만치 당당한 정면돌파를 택했다.
“자네가 진무혁 군이로군.”
아내의 반응만 보고도 성 회장은 저 사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가슴에 찬 변호사 배지에 날카로운 눈매. 어딘지 모르게 능숙해 보이는 태도까지.
얼굴만 봐도 위험한 향기를 풀풀 풍기고 있으니 다람쥐 같은 아이를 한입에 집어삼키는 건 일도 아니었을 터.
부모와 떨어져 있는 사이, 그만 고약한 남자에게 걸려든 모양이다.
성 회장은 그저 쓴웃음을 머금었다.
“여기는 왜 온 거예요?”
“정식으로 인사는 드리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뭔데!”
“얘기부터 들어 보지.”
경계하는 홍 여사와 달리 성 회장은 능숙하게 공간을 내주었다.
원래 막무가내로 밀어내는 적보다, 이렇게 대놓고 판을 벌여주는 상대가 더욱 위험한 법이다.
어디 한번 이야기라도 들어보자고. 남편의 설득에 홍 여사는 눈을 흘기고 방을 나가버렸다.
“허허, 이것 참.”
원래는 저렇게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매일매일 피가 마르던 시절보다는 훨씬 더 사람답게 보이긴 했다.
한참 어린 아내 앞에서는 마냥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는지라 성 회장은 멋쩍은 듯 대신 사과를 전했다.
“우리 아린이, 지금은 민재라고 했었지.”
“석민재라고 합니다.”
무혁은 예전 민재가 A&Z에 제출했던 이력서를 가져와 성 회장 앞에 내밀었다.
민재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지표니까.
단아한 글씨체로 빼곡하게 적어낸 자기소개서만 봐도 그는 제 딸이 어떻게 자랐는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A&Z라, 이런 내부 문건은 어디서 구한 건가?”
“제가 낙하산으로 꽂았으니까요.”
“뭐라?”
어차피 민재에게 걸렸으니 굳이 숨겨야 할 이유는 없다.
석민재를 가장 곁에서 지켜온 건 자신이었으니까, 이제 와 혈육의 손에 밀려나야 할 이유는 없다.
권리 앞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을 수 없다. 그것도 장인의 앞에서라면 더더욱.
“물론 지금까지 버텨온 건 그 애의 공입니다만. 적어도 지금껏 따님을 지켜온 사람은 저였다는 점을 확실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네, 사람이 참 얄밉군.”
“그런 말 많이 들었습니다.”
“그것참,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비록 낳아준 부모라 할지라도 그 애의 마음속에서 제 몫의 지분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는 건데.
무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히 성 회장의 말을 맞받아쳤다.
이제는 재계의 원로가 된 그를 상대로 이토록 대담한 승부를 걸어오는 상대는 참으로 오랜만이라서.
그동안 잠자고 있던 호승심에 불이 붙었다.
“만약 우리가 억지로 그 애를 데려온다면 어떻게 할 건가?”
“그때는 외국으로 데려갈 겁니다.”
“내가 못 찾을 것 같나?”
“방법은 많습니다. 제게도 쓸 수 있는 패가 제법 있으니까요.”
“오만한지고.”
검사 출신 변호사라고 들었는데. 무슨 믿는 구석이 있기에 이리도 당당한 건지 알 수 없다.
본인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테지만 그에게서 조원식의 냄새가 풍기긴 했다.
“길러준 사람을 더 많이 닮은 건 자네도 마찬가지인가 보군.”
일부러 아픈 구석을 노골적으로 긁었음에도 무혁의 눈썹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특검 문제로 안 대표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은 성 회장도 익히 들었다.
“안 대표는 어떻게 구슬린 건가?”
“그분은 제게 마음의 빚을 지고 계셔서요.”
“빚이라?”
“제 아버지를 막지 못한 걸 후회하고 계셨습니다. 지금까지도.”
독사파 수사에 휘말려 죽은 검사가 있다는 건 성 회장도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이후로는 그다지 들은 적이 없었지만, 나름 법조계 내부에서는 제법 화제가 된 얘기였다고 했다.
“그런 자네는 어떤가? 자네 아버지가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글쎄요.”
옳은 일을 위해 죽음조차 불사한 아버지였지만 그 덕분에 무혁의 유년 시절은 엉망진창이었다.
장미가 가득 피어 있던, 조원식의 저택에는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다.
특히나 조장미는. 무혁에게 있어 이제는 악몽 같은 기억으로 남았다.
“누군가를 감히 평가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못 되어서요.”
“잘 빠져나가는군. 미꾸라지가 따로 없어.”
“본업이 이러니 어쩔 수 없습니다.”
차라리 몰랐다면 모를까. 알면 알수록 무력한 제 처지를 원망했었다.
아무리 공부해본들 조원식을 얽어낼 구실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미워했던 상대를 닮아가는 제 모습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무혁은 이제 제 안의 어둠을 인정하기로 했다.
“적어도 저는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게 낫지. 내 딸이 남편을 잃는 꼴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으니 말이야.”
뜻밖의 호응에도 무혁은 쉬이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속을 읽기 어려운 남자다.
제게도 이럴 정도라면, 아마 검찰 시절 어지간한 피의자들은 그의 앞에서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을 텐데.
“그래서. 오늘은 왜 찾아온 건가?”
“장인어른께 제대로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 왔습니다. 겨울이 될 즈음에는 할아버지가 되실 테니까요.”
“뭐?”
그래도 자신만은 두 사람을 응원을 해주어야겠거니 여겼다.
그런데 할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나니 순간 머리가 띵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모르셨습니까?”
병문안을 몇 번 왔었다곤 하는데 제대로 대화 한 번 나눠볼 기회가 없었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딸의 임신 소식에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 장인이 누구셨는지 혹시 알고 있나?”
“수정일보 전 사장님이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주 성질이 불같은 분이셨지. 결혼하고 싶다 나섰던 자리에서 효자손으로 등짝에 피가 나도록 두들겨 맞은 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
- 네놈도 똑같이 당해봐야 내 마음을 알게 될 거다!!
막 아린이 태어났을 때, 돌아가신 장인은 귀여운 손녀를 두고 사위에게 저주 같은 말을 퍼부었었다.
그때는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영문을 몰랐었는데.
이 뺀질뺀질한 놈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는 순간 잠잠하던 혈압이 미친 듯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결혼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아이는 최대한 많이 낳을 생각입니다. 저희 둘 다 많이 외로웠으니까요.”
애써 이성을 찾고 웃어보려 노력은 하고 있는데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래? 그래야지. 그러겠다 이거지.”
손 한 번 제대로 못 잡아본 외동딸인데.
홍 여사가 왜 그리도 치를 떨며 분노한 건지 이제야 뼈저리게 공감할 수 있었다.
“골고루 잘 낳을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
“이, 이 자식!!”
성 회장이 집어던진 베개가 무혁을 향해 날았다.
푹신한 촉감을 가볍게 받아내고서 무혁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방어에 나섰다.
“네가, 너 따위가 감히 내 딸을 농락해!!”
“장인어른이라면 제 마음을 이해해주실 줄 알았는데. 서운하군요.”
“장인은 무슨 얼어 죽을 장인이야, 썩 꺼져. 아니 내 딸은 내놓고 꺼져!!”
입을 여는 족족 신경을 긁어대니 분노와 함께 혈압도 함께 상승했다.
“회장님!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또 쓰러질까 봐 놀란 간호사들이 달려와 무혁을 내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홍옥자는 입을 가린 채 터지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희대의 싸가지가 또 한 번 빛났다.
옥자는 손뼉까지 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얄밉기만 하던 형부에게 짜릿한 복수를 해준 셈이다.
“이제야 성이 풀리십니까?”
“형부가 저렇게 망가지는 건 처음 봤어. 과연 진무혁이야.”
“이런 건 왜 시키는 겁니까?”
지난번에는 미안했다며, 아군을 자처한 홍옥자 여사께서는 그동안 자기 형부에게 쌓인 원한이 많았던 모양이다.
“두고 봐.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 홍옥자 님께서 널 혜성 사위로 만들어 줄 거니까.”
별로 되고 싶다고 한 적은 없긴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사심을 채우는 용도로 악용되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이미 사위 아닙니까?”
“하여튼, 뻔뻔한 놈이야.”
성준범에게서 회사도 지켜줬고 민재도 무사히 손에 넣었으니까.
진무혁이 왕자님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실컷 쓴소리를 듣고 돌아서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발걸음은 가벼웠다.
‘저건.’
저 멀리 복도 너머, 원망하는 홍 여사와 눈이 마주쳤다.
열심히 숨으려고 노력해도 다 보이는데.
무혁은 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홍 여사를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남겼다.
“뭐 해?”
“귀여워서요.”
“뭐?”
토라진 모습이 어쩐지 민재를 닮았다.
정확히 말해 더는 못되게 굴지 않기로 했으니까 심술은 그만 부리기로 했다.
‘그래도 장모님이시니까.’
억지로 떨어트려 놓으려고 한다면야 무혁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겠지만 홍 여사도 이제 더는 반대할 명분이 없다.
어째서 토라진 표정조차 저리도 닮은 건지, 홍 여사의 투정도 무혁의 눈에는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