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91화 (91/103)

91화. 말했잖아. 욕심이라고.

헬기가 병원 옥상에 도착했다.

“이거 참,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미 열두 시간 넘게 비행을 마친 심장 전문의는 또다시 헬기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긴급 작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지만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무혁의 등을 두드렸다.

“로버트는 내 오랜 친구니까. 그 친구의 부탁이라면 들어줘야지.”

의사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미리 협의해둔 의료진이 배치되고 바로 수술 일정이 잡혔다.

수속을 위해 일 층으로 내려오자 초췌한 안 대표가 무혁을 마주했다.

“괜찮은 거냐?”

“힘들게 모셔온 분이니까요. 잘될 겁니다.”

“……알았다.”

법조계의 원로인 안 대표가 조원식을 처단하기 위해 힘을 쓸 동안 무혁은 미국에서 심장 전문의를 데려왔다.

어차피 홍 여사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나갔어야 했으니까.

겸사겸사 안 대표와의 거래도 충실이 이행했다.

“민재는 어디 있습니까.”

“봉구 놈이랑 같이 나갔어.”

병원 밖으로 나가니 홍옥자 여사가 서 있었다. 벌써 해가 졌는데, 그녀는 여전히 선글라스를 낀 채 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뭐야, 너 어디서 나타난 거야?”

무혁은 대답 대신 하늘을 가리켰다.

서둘러 선글라스를 벗고 홍 여사는 착잡한 얼굴로 무혁을 위아래로 살폈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었는데 어쩐지 얼굴을 보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미안해. 언니가 많이 서운해서 널 떼놓고 싶었던 모양이야.”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다고?”

“악역을 자처하는 건 익숙하니까요. 민재만 무사하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하나도 아랑곳하지 않는 무혁의 태도가 오히려 황당했다.

“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무슨 소리를 들어도 엷은 미소만 머금을 뿐, 진무혁은 그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다.

다 알면서도 일부러 당해준다는 건데 굳이 그 고생을 나서서 할 이유가 없다.

“미련한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글쎄요. 마음대로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무심하게 돌아선 채 무혁은 드높은 병원 건물을 올려다봤다.

성준범이 도끼로 제 발등을 찍어 줬으니, 이제 할머니의 수술만 무사히 진행된다면 위험 부담은 모두 사라지게 된다.

“진무혁!”

안 팀장의 차가 들어서고 창문 너머 민재가 보였다.

뭐가 그리 화가 난 건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반쯤 창문에 매달려 소리부터 질렀다.

트렁크에 숨겨둔 선물을 용케 찾은 모양이다.

알고도 모든 걸 숨겼으니 원망을 산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민재야.”

“이 나쁜 인간!!”

어느 부분에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다짜고짜 주먹이 날아왔다.

온몸으로 원망을 쏟아내는 민재라니,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모습은 무혁도 보기 드문 귀한 광경이다.

“미안해.”

“뭘 잘못한 건지는 알아?”

“그냥 다 내가 잘못한 거야.”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원망을 토로하면서도 민재는 무혁의 옷섶을 꼭 거머쥐었다.

한발 늦게 따라온 안 팀장은 품에 안은 꾸러미를 홍옥자에게 건넸다.

“이건…….”

“그건 홍 여사님께 돌려주세요.”

“민재야, 너…….”

“죄송하다는 말씀도 같이 전해주세요. 뭘 바라시는 건진 알겠지만, 전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요.”

행여나 또 어디론가 가버릴까 봐 민재는 무혁의 손을 꼭 잡았다.

분명 민재는 화를 내고 있는데도, 무혁은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런 거였구나.’

배냇저고리를 꼭 안은 채 옥자는 결심을 굳힌 제 조카를 마주 봤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북풍이 아닌 햇살이었으니까.

바보처럼 당해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완벽한 오산이었다.

진무혁은 기어코 석민재의 마음을 온전히 제 곁에 두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후회 같은 거 안 해요.”

시원하게 결론을 내 버리니 옥자도 차라리 웃음이 터졌다.

그래도 무사하다는 걸 확인 했으니까.

이미 다 커버린 조카를 보고 있자니 새삼 감개무량했다.

“언니 쪽은 내가 잘 설득할게.”

“사장님.”

“나는 충분히 만족해. 우리 아린이가 이렇게 잘 자랐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갓 태어나 겨우 눈을 떴을 때만 해도 그렇게 작은 아기였는데.

어른들 마음대로 휘두르기에는 너무 많이 자라버렸다.

“슬슬 들어가죠. 수술 시작했다는 모양인데.”

홍 사장은 일단 돌아가기로 하고 민재는 무혁의 손을 잡고 병원 계단을 올랐다.

하고 싶은 말이 정말로 많은데, 계단을 오르는 순간 문득 시야가 흐려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밥을 한 끼도 안 먹은 것 같은데, 무혁의 팔을 꼭 쥔 채 몸이 기우뚱 고꾸라졌다.

“석민재!!”

무혁의 듬직한 팔이 민재를 안았다. 익숙한 온기에 기댄 후에야 겨우 마음이 놓였다.

그러니 이제 다시는 어디에도 가지 말라고.

민재는 무혁의 옷자락만 꼭 거머쥐었다.

***

“임신성 빈혈입니다.”

응급실 이불 속에 숨어 민재는 얼굴도 내밀지 못했다.

“애가 무사한 게 용하네. 정말.”

한심하단 얼굴로 바라보는 안 팀장 앞에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다.

배가 고파서 쓰러진 거였다니. 링거를 맞으면서도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김밥 사 왔어.”

“참치김밥 맞아?”

“그래. 마요네즈 듬뿍 뿌린 참치김밥 맞아.”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 민재는 허겁지겁 김밥을 입에 넣었다.

체하지 말라며 무혁은 아예 사이다까지 준비해 옆에 놔 줬다.

“이게 그렇게 먹고 싶었어?”

“이상해. 안 먹으면 미칠 거 같은 걸 어떡해.”

반쯤 울 것 같은 얼굴을 보며 무혁은 웃음이 터트렸다.

아까는 그렇게 죽일 듯이 달려들더니, 화기애애한 두 사람을 보며 안 팀장은 괜히 오만상을 찌푸렸다.

“한심한 놈.”

병상 옆에 앉은 무혁의 엉덩이를 걷어차고서 안 팀장은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줬다.

괜한 화풀이를 당하는 걸 보면서도 민재 역시 슬쩍 무혁의 손등을 꼬집었다.

“왜 말 안 한 거야.”

“욕심이 났거든.”

“욕심?”

“응. 욕심이 나서 그랬어.”

일부러 말을 안 한 거라고 뻔뻔하게 고백하는 이 남자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병실에 누운 채 민재는 곁에 앉은 무혁의 뺨에 손을 얹었다.

“오는 데 얼마나 걸렸어?”

“열세 시간 정도?”

“안 피곤해?”

하루를 꼬박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진무혁은 평소와 다름없이 튼튼해 보였다.

완전히 뻗어버린 민재를 바로 눕히고서 무혁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과정을 일러줬다.

“급하게 전세기도 수배하고 도착하자마자 다시 헬기도 탔지. 거의 007급 작전이나 마찬가지였어.”

“정말?”

“안 대표님과 약속했거든. 민재가 우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고.”

이 남자는 대체 어디까지 계산하고 움직인 걸까.

정말 머릿속을 한 번 열어보고 싶을 정도다.

잘한 일이 있으면 좀 생색이라도 내면 좋으련만 그는 내색조차 하지 않고서 묵묵히 민재의 등 뒤를 지켰다.

“회사 일, 당신이 손 쓴 거였다면서.”

안 팀장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평생 모르고 살 뻔했다.

민재의 물음에 무혁은 잠시 손을 멈추고 슬그머니 응급실 밖으로 눈을 흘겼다.

“안 팀장이 말한 거구나.”

“날 원망한 거 아니었어?”

학교에서 손을 써준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는데, 가장 힘든 순간조차 무혁의 손길이 묻어 있을 줄은 몰랐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민재를 내려다보며 무혁은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말했잖아. 욕심이라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이대로 무혁의 손을 꼭 잡고 눈을 감으니 미뤄둔 잠마저 솔솔 밀려들었다.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마.”

어쩌면 둘 다 너무 먼 길을 돌아온 걸지도 모른다.

응급실의 딱딱한 베개에 누운 채 민재는 살그머니 눈을 감았다.

두근, 두근, 두근.

자그마한 심장 소리 하나가 민재의 심장 박동 위로 겹쳐지는 것만 같았다.

***

“수술은 무사히 잘 끝났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술은 아침이 밝고 나서야 무사히 끝이 났다.

평소 클라이밍 스포츠를 즐긴다는 심장 전문의는 열 시간이 넘는 수술을 마치고도 여전히 힘이 넘쳤다.

반면, 밤을 꼬박 새운 안 대표는 수술실 밖에서 아예 아들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고생 많이 하셨네요. 아버지.”

매번 한심하다고 여겼던 아버지의 이런 진중한 면모는 처음이라서.

안 팀장도 많이 늙은 아버지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줬다.

막 퇴원 절차를 밟은 민재 부부가 합류하며 할머니는 회복을 위해 병실로 옮겨졌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얼마나 무서웠는데.”

“형수도 참. 내가 제일 놀랐거든요?”

막말로 눈앞에서 쓰러지는 걸 본 건 물론이요 급하게 심폐소생술을 한 것도 자신이건만.

어쩐지 진무혁의 활약에 빛이 바랜 감을 지울 수 없다.

잔뜩 토라진 막내 삼촌을 위로하는 것도 결국은 민재의 몫이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너야 응급실에서 편하게 잤겠지. 난 이틀 밤을 꼬박 새우느라 죽을 것 같다고.”

“우리 삼촌, 많이 힘드셨구나.”

“이럴 때만 삼촌이라고 부르지!”

은근히 사이가 좋아진 두 사람을 보며 무혁은 시계를 확인했다.

“의사 선생님을 호텔까지 모셔다드리고 오겠습니다.”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고, 민재는 잠든 안 대표를 빤히 바라봤다.

할머니의 소중한 사람이니까. 영원히 적응이 안 될 줄 알았었는데 이제는 이 호칭도 익숙해질 것 같다.

“할아버지, 일어나세요.”

“응?”

“할머니 수술 잘 끝났대요. 어서 가보셔야죠.”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는 노인의 뒷모습을 보며 민재는 어쩐지 자꾸 웃음이 났다.

“홍 여사한테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한 번은 가 봐야죠.”

“그쪽에서 널 쉽게 놔주지 않을 텐데.”

“제가 도망치는 거 하난 자신 있거든요.”

진무혁을 피해 열심히 도망을 다녔던 전적이 화려했던 만큼 홍 여사도 어떻게든 설득해보는 수밖에.

게다가 성 회장의 병실에 찾아온 사건도 검찰에 넘겨진다면 목격자인 민재도 증인석에서 당시 있었던 일을 모두 증언해야 할 터였다.

“잘해 봐야죠.”

가뿐한 마음으로 기지개를 켜고 민재는 병원 밖으로 나섰다.

며칠 동안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래도 아침 해가 뜬 하늘은 참으로 푸르고 아름다웠다.

어쩐지 긴 꿈을 꾼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저 멀리 무혁이 걸어오고 있다.

“무혁 씨!”

계단을 뛰어내려 민재는 달려가 무혁의 품에 뛰어들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은 더없이 싱그러웠다.

***

“피고, 조장미를 징역 2년에 처한다.”

판사봉을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판결이 내려졌다.

집행유예를 기대하던 조조의 변호인단도 조장미 본인도 당혹을 감추지 못했지만, 단순 투약만 했다는 항변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약물 관리법 위반?”

“마약 유통도 일종의 카르텔이거든. 장미의 권유로 주변에서 시작한 사람들이 꽤 많았었나 봐.”

“그래서 실형이 나온 거였구나.”

“자백도 안 했으니까. 끝까지 억울하다고 우겼으니 재판부도 괘씸죄를 적용할 수밖에 없지.”

감형의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조장미는 끝내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며 모든 것을 합리화했다.

금단 증상 탓인지 안 그래도 창백하던 피부가 더욱 야위었다.

저지른 죄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운 형량이겠지만 막상 감옥에 들어간 조장미는 그다지 안녕해 보이지 않았다.

죄는 안 짓는 게 낫겠구나. 그렇게 재판 참관을 마치고 민재는 무혁과 함께 법정을 나섰다.

“조원식 형량은 얼마나 나올 것 같아?”

“적게 나오진 않을 거야. 저쪽도 일을 수습하려면 하나라도 제대로 처벌해야 하니까.”

이 혐의 저 혐의를 모두 덜어내더라도 독사파와 연루된 부분이 드러난 이상 쉽게 넘어가긴 힘들 터였다.

특히나 독사파의 기존 범행들에 대한 수사 무마 연루까지 언급되며 조원식의 입지는 날개 없는 새처럼 한없이 추락했다.

“아쉽지 않아?”

“어쩔 수 없지.”

피해자의 상처에 비해 가해자에게 내려지는 처벌이 너무 가볍다.

문서 위조와 주가 조작 등의 혐의를 모두 더하더라도 기껏해야 십 년 남짓일 테니까.

그래도 그 정도라면 조원식의 거품이 꺼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우선은 홍 여사님부터 찾아가야겠지.”

배냇저고리를 돌려준 이후로 홍 여사 쪽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것 치고는, 어쩐지 싱거울 정도로 연락이 딱 끊겼다.

“성준범 소송 때문에라도 한 번은 만나야지.”

“그건 그런데.”

“그분들을 너무 미워하지는 마.”

사람이 무슨 보살도 아니고.

누명까지 씌운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무혁은 담담히 홍 여사의 편을 들었다.

이 남자는 정말 호구에 바보인 걸까.

민재는 무혁의 뺨을 있는 힘껏 꼬집었다.

“또 무슨 꿍꿍이야?”

“들킨 건가.”

이 집요한 남자가 이토록 너그럽게 구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의심하는 민재를 앞에 두고 무혁은 애써 웃음을 삼켰다.

제 쪽으로 완전히 마음이 기운 민재를 보는 게 기분이 좋긴 하지만, 홍 여사는 지금쯤 지옥을 헤매고 있을 터.

이 정도 심술은 충분히 부릴만 하다.

“그냥 좀. 이제는 착하게 살아야 할 것 같아서.”

“그동안은 못되게 산 거야?”

“아주 못되게 살았지. 특히 석민재만 보면 자꾸 나쁜 짓을 하고 싶어져서 말이야.”

요즘 들어 유난히 신사적인가 싶더니 못된 손버릇은 조금도 나아진 게 없다.

나쁜 손과 나쁜 입술이 민재의 예민한 부분에 얹혔다.

“아빠는 정말 나쁜 사람인가 봐.”

속셈을 숨긴 채 무혁은 민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 게임의 승자가 진무혁이라는 사실은, 석민재만 모르는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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