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90화 (90/103)

90화. 일단은 한 대 때려줄 거에요.

“성 회장이 깨어났다고?”

보석으로 막 풀려난 성준범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하나 더.”

비서는 성준범에게 곤란한 소식을 전했다.

석민재가 정말로 ‘그 애’였다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 소영하와 사귄다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불길한 예감은 기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없어.”

조원식의 구속 소식만은 정말로 기분이 좋았지만, 그것 외에는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

특히나 그 여자의 지분이 인정되기라도 하면 제 몫은 현저히 줄어들게 될 터.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

“홍 여사와 함께 있다고 합니다.”

“젠장.”

그 여자만 얽히면 될 일도 꼬인다.

차라리 유언장에 있는 제 이름이 지울 수 없도록, 차라리 병원에 있는 성 회장 쪽을 접촉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쪽은 어때.”

“성 회장 의식이 돌아오며 삼엄하던 경계가 많이 풀린 것 같습니다.”

“그래?”

“접촉할까요?”

미리 준비한 것 같은 비서의 물음에 성준범은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관계자부터 매수해. 우리가 왔었다는 기록 같은 건 남지 않아야 하니까.”

어설프게 틈을 줬다가는 오히려 제 발에 걸려 넘어질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확인하라는 지시를 남기고 성준범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차라리 그때 죽어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더 일찍 손을 쓰지 못한 게 오히려 후회될 정도다.

양주댁도 독사파를 시켜 없애버렸으니까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준비됐습니다. 직접 가시겠습니까?”

“어떻게 할까.”

독사파마저 괴멸된 지금 남의 손을 타는 건 너무나 위험하다.

“직접 가시죠. 여차하면 병문안을 왔다고 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럴까.”

비서의 설득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도 명색이 아들인데 마지막 가시는 길에 인사라도 올리는 게 도리가 아닌가.

더 시간을 끌었다가 정말로 정신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그 교활한 여자는 어떻게든 제 이름을 유언장에서 빼려고 할 터.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조급해진 마음을 다잡으며 준범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

“이쪽입니다.”

비서가 미리 손을 써둔 건지 VIP 병동으로 가는 길목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저는 관리실에 가 CCTV를 정리하겠습니다.”

“그러지.”

두 사람 사이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거라는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그런 흔적이 남았다가는, 괜히 뒷일만 골치 아파질 뿐이니까.

오늘따라 알아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비서를 잠시 지켜보다 성준범은 조용히 병실로 향했다.

조용한 복도에는 성준범의 구두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겨우 의식을 차린 남편이 저세상으로 간 걸 알면 그 여자는 어떤 얼굴을 하게 될까.’

처참하게 일그러질 얼굴을 떠올리면 이 정도의 수고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이렇게 걷다 보니 처음 성 회장 저택에 발을 들이던 날이 떠올랐다.

새하얀 벽을 따라 걸으며 어린 준범은 달콤한 꿈에 부풀었었다.

‘나도 이런 집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바람이 현실로 이루어진 날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제 뜻대로 이루어질 줄만 알았다.

그 여자만 아니었다면.

그 여자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모든 게 순조로웠을 텐데.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주머니 속 얇은 장갑을 꺼내 지문을 가리고 병실 문을 열었다.

성 회장이 쓰러진 이후 처음이었다.

몇 달이나 의식이 없었던 탓인지, 고이 잠든 주름진 얼굴이 많이 상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애틋함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죽지 그랬어요.”

굳이 제 손을 더럽히고 싶진 않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가 무사히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정말 그 여자의 뜻대로 되고 말 것이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날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입에 꽂힌 산소마스크를 들어내고서,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연결된 관을 모조리 뜯어냈다.

삐, 삐, 하는 경고음이 울리고 그래프가 격하게 움직였다.

뒤에 꽂힌 콘센트마저 뽑아버리니 그마저도 잠잠해졌다.

비서가 CCTV 기록까지 완벽하게 지우고 나면 그가 다녀갔다는 흔적은 모두 사라질 터.

죽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시 의식 불명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충분하다.

이대로 조용히 숨이 끊어지기만을 기다리는데 등 뒤에서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형부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네가 그러는 건 아니지.”

“홍옥자?”

“어디 어른을 함부로 이름으로 부르고 그래. 응?”

“으…….”

고통스러워하는 성 회장을 향해 의료진들이 달려왔다.

여전히 빨갛게 점멸하는 CCTV 카메라를 보며 성준범은 이를 악물었다.

“날 속인 건가?”

“떡밥을 덜컥 문 건 네 잘못이지.”

“경찰입니다.”

의식 불명 환자의 생명유지장치를 현장에서 떼어냈으니 살인 미수 혐의까지도 충분히 가능할 터.

웃고 있는 홍옥자를 본 순간, 자신을 찾아왔던 진무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 궁지에 몰리기 전에 동아줄을 잡아야지. 안 그래?

제 손에 쥐어진 건 설마 썩은 동아줄이었던 걸까.

조원식이 구속됐다는 소식에 너무 마음을 놓았던 모양이다.

“저 여자 짓이야.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그건 CCTV를 확인해보면 알게 되겠죠. 이리 오세요.”

“이거 놔!!”

연행하려는 경찰들을 뿌리치고 성준범은 홍옥자의 멱살을 잡았다.

모든 일을 꾸민 배후에는 이 여자가 있을 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를 마주하고서 옥자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저번 달에 영산강 부근에서 시체 하나가 떠올랐어. 어제 막 신원을 찾았다더라고.”

“뭐?”

“양주댁, 기억하지? 때마침 독사파 중 한 명이 자기가 양주댁을 죽였다고 인정한 모양이야.”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떨궜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 같은 건 없다.

“난 모르는 일이야.”

“그건 조사하면 밝혀지겠지, 독사파 쪽에서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까지 모두 털어놓은 모양이거든.”

양주댁의 죽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면 성아린의 실종 건도 자연스럽게 연결이 될 터.

그 아이가 왜 사라졌는지만 밝혀진다면 다른 범죄 역시도 상당 부분 동기가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적어도 십오 년은 감옥에서 썩어야 할 터.

그때쯤이면 모든 게 해결되어 있을 것이다.

때마침 안 팀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안 팀장. 마침 잘 걸었어.”

“지금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석민재를 대체 어디에 둔 겁니까?”

“민재는 왜? 지금 언니네 집에서 자고 있을 텐데.”

“할머니가 쓰러지셨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에 옥자의 눈앞도 덩달아 캄캄해졌다.

연락을 전해줘야 하는데 정작 민재의 폰은 제 손에 있다.

“이런 망할.”

성준범을 처리했다고 희희낙락할 시간이 없다.

민재의 폰을 꽉 쥔 채 옥자는 미친 듯이 뛰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응급처치는 했어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안 팀장은 어떻게든 의식을 챙기기 위해 열심히 말을 걸었다.

“여사님, 정신 차리세요.”

“민재는?”

“곧 올 겁니다. 조금만 버티세요.”

급한 불은 껐다지만 임시방편일 뿐, 지금은 혈관을 봉합하는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국내 병원에서는 이런 복잡한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없다.

“연세가 있으시니까요. 해외에서라면 몇 번 성공 사례가 있지만 지금 저희 기술로는 무리입니다.”

“이게 어찌 된 게야!”

자리를 비웠던 안 대표마저 돌아와 할머니의 곁을 지켰다.

만약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채 이번 주를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만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주게, 부탁일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만 저희로서는 역부족입니다.”

안 대표의 애원에도 의사는 명확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답답함에 발을 구르는 사이 뒤늦게 도착한 민재가 응급실로 달려왔다.

“할머니!!”

홍 사장에게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지만 그래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머리가 다 헝클어진 채 달려온 손녀를 앞에 두고 할머니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해, 할머니. 제발 일어나.”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민재는 울음을 터트렸다. 굵은 눈물을 애써 닦아주며 할머니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 친부모를 찾았다면서.”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누구도 막지 못했다.

울부짖는 민재의 손을 꼭 잡고서 할머니는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너희 둘이 헤어지고, 그 애가 날 찾아왔었단다.”

무혁에게 이별을 고했던 날, 대체 밖에서 무슨 소리를 듣고 온 건지 민재는 온종일 울기만 했다.

민재가 홀로 곤란한 사정을 수습하러 뛰어다니는 사이, 무혁은 어떻게 안 건지 입원한 할머니의 병실을 찾아왔었다.

“미안하다고 하더구나.”

“네?”

“지금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었지.”

손녀의 뜻을 존중해 할머니도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않았지만, 눈치 빠른 무혁은 벌써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한 것처럼 보였다.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했어.”

돌아서는 그 뒷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할머니는 쉽게 진무혁을 잊을 수 없었다.

“네가 회사에 들어갈 즈음 한 번 연락이 왔었단다. 네가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퍽 반가웠던 모양이야.”

“그거, 무혁이가 부탁한 거였습니다.”

지켜보던 안 팀장이 입을 열었다.

진무혁은 절대 자기 입으로는 말하지 않을 놈이니까 안 팀장은 약속을 깨고 민재에게 사실을 알려줬다.

“팀장님?”

“버릇없는 낙하산이라면 내쫓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잘 버텨서 내버려 뒀습니다.”

“그래서 절 그렇게 괴롭히신 거였어요?”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만약 그 누가 방해한다 해도 절대 흔들리지 않도록, 할머니는 민재의 마음을 단단히 다잡아줬다.

“네가 선택한 사람이야. 그러니 믿어주렴.”

“할머니.”

“그 애가 있으니, 나는 언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어.”

할머니는 안 대표 쪽을 보고 애써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마주하며 안 대표도 힘겹게 억지로 웃으려 애를 썼다.

“고마워요.”

“…….”

“이 나이에 또 사랑 같은 걸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한 손을 민재에게 남겨둔 채 할머니는 안 대표의 손을 꼭 잡았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민재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민재에게 무혁의 존재가 그러하듯, 할머니에게도 이제는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

‘그런 거였구나.’

친부모님을 찾는다고 해서 할머니가 소중해지지 않는 건 아닌데.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은 가셨다.

애써 눈물을 닦으며 민재는 두 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전화는 왜 안 받아?”

“석민재는 잘못한 거 없어.”

차를 대고 온 홍옥자 여사가 민재를 변호하고 나섰다.

다행히 발작이 가라앉은 건지 할머니는 안 대표의 손을 잡은 채로 겨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까딱 잘못하면 정말로 눈앞이 아찔해질 뻔했다.

“어제 실수로 전화를 병원에 두고 와서요. 홍 사장님이 찾아주셨어요.”

민재의 대답을 듣고도 안 팀장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팀장님.”

“언니가 무혁이를 안 좋아해. 그래서 그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가 치료실로 들어가는 걸 보고 세 사람은 응급실 밖으로 나왔다.

옥자는 저 멀리 보이는 VIP 병동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혁이가 떠난 거 언니가 시킨 거야.”

“그게 무슨…….”

“마침 잘됐네. 한 시간 전에 검사 결과가 나온 모양이야.”

홍옥자 사장의 비서가 선명하게 프린트된 검사 결과지를 전해 줬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맨 보람이 있었어.”

옥자는 검사지를 든 민재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욕심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넌 우리 언니 딸이잖니.”

“사장님.”

“빼앗기고 싶지 않은걸. 네가 너무 소중하니까.”

무혁에게 시선이 갈 때마다 딸을 빼앗긴 기분에 속이 타들어 갔다고.

민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그 화살은 모두 무혁에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팀장님, 저 차 트렁크 여는 법 좀 알려주세요.”

“트렁크는 갑자기 왜?”

“확인할 게 있어요.”

유난히 홍 여사를 싫어하던 제레미의 태도가 눈에 밟혔다.

만약 두 사람 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라면.

“여기에 숨긴 거였구나.”

안 팀장과 함께 지하주차장에 돌아와 민재는 제레미가 남기고 간 빨간색 스포츠카의 트렁크를 열었다.

보자기와 똑같은 배냇저고리의 무늬를 보며 애써 이를 악물었다.

진무혁. 이 바보 같은 인간.

“넌 임신한 인간이 뭐 이렇게…….”

“진무혁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요?”

“한참 전에 출발한다고 연락왔어. 몇 시간 안에는 도착할 거야.”

“온다고요?”

민재와 연락이 두절된 사이에도 진무혁은 안 팀장과 착실히 연락을 주고받았던 모양이다.

울기 직전인 민재를 앞에 두고서 안 팀장은 슬쩍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저는…….”

“혜성의 상속녀 정도면 이젠 얼굴 보기도 힘들어질 것 같은데.”

친부모를 찾으려고 할 때마다 초조해 보이던 그의 모습도 그런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조차도.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더는 같은 후회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으니까.

“일단은 한 대 때려줄 거에요.”

앞으로 다시는 그 무엇도 숨길 수 없게 단단히 혼을 내줘야 한다.

흘러넘친 눈물을 닦고 민재는 무혁이 있을 저 하늘 너머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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