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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결혼-89화 (89/103)

89화. 처음부터 나한테는 그 애뿐이었으니까.

성 회장을 옆에서 바라보다 민재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의자에 기대 잠이 든 모습이 애처로워서 홍 사장은 민재를 안아 침실 옆 보조 침대에 눕혔다.

“민재는?”

“잠든 것 같아.”

새근새근 숨소리를 들으며 홍 여사는 옆에 앉아 잠든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

“우리 아린이.”

삼십 년 동안 줄곧 꿈을 꿨었다.

언젠가 그 애가 돌아와 제게 엄마라고 불러주기만 한다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악마에게 제 영혼을 팔아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간절히 빌었는데.

끝끝내 찾아낸 딸을 보고 나니 자꾸만 욕심이 커졌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셈이야?”

“이 애는 우리 아린이야.”

“언니.”

“삼십 년 만에 찾은 내 딸인데, 왜 그 남자에게 보내야 하는 걸까.”

며칠 품에 끼고 사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행복만으로 가득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집 여기저기에 딸의 흔적이 남는 게 좋았다.

뭐든 맛있게 먹어주는 것도 보기 좋고, 은근히 게으름을 부리는 모습도 마냥 예쁘기만 했다.

아직 못 해본 게 너무 많은데.

그 남자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내 딸이잖아. 아직 해주고 싶은 게 많은걸.”

“해주면 되잖아.”

“그 남자가 미워.”

어디에 있는지만 알았더라면, 그 남자가 비집고 들어올 만한 틈 같은 건 보이지 않았을 텐데.

힘든 순간에 손을 잡아주는 것도, 괴로운 순간에 위로하는 것도 엄마인 제 역할이건만.

낳아준 자신보다 그 남자를 더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아 서러워졌다.

“그 남자만 없으면, 그러면…….”

“언니.”

삼십 년이 넘게 아이를 찾을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언니는 잃어버린 세월을 모두 보상할 마음만 가득한 것 같은데, 정작 민재 본인은 이미 홀로 꿋꿋이 자라 어른이 되어버렸다.

피를 나눈 가족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인 건지.

옥자는 여전히 그 마음을 알지 못했다.

‘이 일을 어쩐다.’

아무래도 언니의 반응이 심상치 않은데. 이대로 뒀다가는 무슨 돌발행동을 저지를지 모른다.

쓰린 속을 달래며 옥자는 마지 못해 병실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무혁에게 알리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전화를 걸어 보지만 비행 중이라 그런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사장님.”

성준범에게 붙여둔 비서가 보고를 위해 병실을 찾았다.

“어떻게 됐어.”

“준비 끝났습니다.”

일부러 경비를 허술하게 세우고, 성준범 측과 접촉한 의사의 존재를 알면서도 방치했다.

보석으로 나오자마자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 성준범 쪽의 동태로 보면, 조만간 분명 무슨 사달을 낼 게 분명하다.

그렇게까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옥자 역시도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

“선생님, 어서요!!”

갑자기 VIP 병동이 소란스러워졌다. 뛰어가는 의사와 간호사를 잡고 옥자가 물었다.

“무슨 일이죠?”

“회장님께서 깨어나신 것 같습니다.”

“형부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던 언니의 말이 사실이었나보다.

옥자 역시도 서둘러 병실을 향해 달렸다.

“회장님, 이거 보이십니까.”

제대로 된 의사표시도 할 수 없고, 그저 눈꺼풀을 뜬 정도지만 성 회장은 눈을 깜빡이며 의사를 표현했다.

민재는 눈물을 쏟는 홍 여사의 곁을 지켰다.

나란히 선 모녀를 보며 옥자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부디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옥자는 생전 찾지 않던 신을 찾으며 기도까지 했다.

***

“알겠습니다.”

오늘 내일 중이면 민재도 친자 검사 결과를 받아 들 것이다.

시애틀의 야경을 바라보며 그는 묵묵히 와인을 삼켰다.

아름다운 이 밤을 민재와 함께 보고 싶었는데. 어쩐지 아쉬움이 가시지 않는다.

“민재는 내 선물을 열어봤겠지?”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음료수를 마시며 제레미는 소파에 앉은 무혁의 다리에 머리를 기댔다.

“아직일걸. 민재는 트렁크를 여는 방법도 모르니까.”

“뭐?”

헝클어진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서 무혁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그게 없어도 유전자 검사 결과만으로도 충분할 테니 내버려 둔 것뿐이었다.

“나는 무혁이 잘 이해가 안 가.”

“무슨 말이야?”

“민재 옆에 있고 싶었던 거잖아. 그런데 왜 여기에 온 거야?”

“만날 사람이 있어서.”

제레미를 데려다준다는 건 반쯤 핑계였다.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무혁은 홍 여사의 막무가내마저 모두 들어줬다.

“갑자기 네 엄마가 살아 돌아온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아?”

말을 꺼내기 무섭게 제레미는 오만상을 쓰고서 끔찍하다는 듯 무혁을 바라봤다.

제레미의 모친은 제 아들을 학대하고 죽이려 했었다.

“싫어.”

“너야 그렇겠지. 하지만 민재는 아니야.”

어설프게 숨기려고 해도 민재는 어떻게든 부모를 찾고 싶어 했다.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면서 애써 그리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니 차라리 그 부모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면 적어도 예상치 못한 변수에 가슴을 졸일 일은 사라질 것이다.

“어쩐지 나쁜 사람 같아.”

“원래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는걸.”

이토록 비뚤어진 사랑은 어쩌면 오랜 시간 함께해온 조원식을 닮은 건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감옥에 가 있는 상태에서 조장미에게 맡겨 두면 그 많은 재산을 몇 년 안에 탕진하고도 남을 터.

“복수한다고 해도 돌아가신 분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

조원식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는 건 그가 모든 걸 잃은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같은 수를 써서라도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이렇게 서서히 숨통을 조여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의외네. 무혁이 결정을 바꾸기도 하고.”

“나는 그 어떤 방해도 없이 민재 곁에 오래오래 있고 싶거든.”

정말로 모든 걸 다 잃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민재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들은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아줌마는 무혁을 싫어하잖아.”

곤란한 장모님의 투정을 생각하니 웃음이 터졌다.

지금쯤 어떻게든 무혁을 떨어트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테지만, 그에게는 아직 비장의 무기가 하나 더 남아 있다.

아마 지금쯤이면 한국도 아침이 됐을 텐데 정작 기다리던 민재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준비 끝났네.]

“일주일은 걸릴 줄 알았는데, 정말 빠르구나.”

“무슨 일이야?”

“켈스에게 선물이 도착했어. 이걸 받으면 민재도 좋아하겠지.”

홍 여사가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석민재의 마음을 움켜쥐면 된다.

사랑은 본래 그런 법이니까.

잠시 흔들리더라도 결국 석민재의 선택을 받게 되는 건 자신일 터.

“처음부터 나한테는 그 애뿐이었으니까.”

제레미의 배웅을 받으며 옥상에 도착하자 거대한 헬리콥터가 바람을 일으켰다.

이제 선물을 가지고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정리 잘해놓고 와.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까.”

“민재한테 내 선물 꼭 알려줘야 해!”

점점 멀어져가는 지상을 내려다보며 무혁은 앞을 바라봤다.

부디 늦지 않아야 할 텐데. 마음이 급해졌다.

***

이른 아침부터 똑같은 뉴스가 모든 매체를 잠식했다.

커피를 마시며 안 팀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채널을 돌려버렸다.

“성 회장이 깨어났으니 저쪽도 난리가 났겠군”

하루하루 사건 사고가 터지니 바람 잘 날이 없다.

“아버지는 벌써 나가셨어요?”

“많이 바쁘신 것 같아.”

요 몇 년 사이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는 모습은 처음 봤다.

예전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포자기하더니, 이제는 여러 유력 인사들을 설득하며 조원식의 특검 문제 때문에 몸소 저렇게 발로 뛰어줄 줄은 몰랐다.

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러는 걸까.

오늘도 그렇게 나간 아버지를 대신해, 그는 이른 아침 민재의 할머니를 찾아 인사를 올렸다.

“여사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야 잘 잤지. 오늘은 우리 민재가 오기로 했거든.”

바느질을 거의 다 마친 배냇저고리를 고이 개 놓고 민재의 할머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상황이 저렇다면 아마 석민재는 올 수 없을 텐데.

본인이 오고 싶더라도 홍 여사가 놔줄 것 같지 않았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늘 그렇지. 이 늙은이야 언제 가도 이상하지 않은 것을.”

“그런 말씀 마세요. 석민재가 들으면 울 겁니다.”

그래도 민재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대화를 나누기가 제법 수월했다.

“입사 초기에, 제가 민재를 좀 많이 괴롭혔습니다.”

“알고 있지. 민재가 거의 매일 전화해서 우는소리를 했는걸.”

“그랬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기에 신경을 안 쓰는 줄 알았더니.

그동안 모질게 괴롭힌 전적이 많았던 탓에 안 팀장은 머쓱한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했어. 항상 우리 민재를 지켜줘서 정말 고마워.”

“전 그냥 부려먹은 것밖에 없는 걸요, 뭘.”

“진심이야.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 민재를 잘 부탁해.”

다 마른 배냇저고리를 어루만지며 할머니는 서글픈 감정을 애써 삼켰다.

하루라도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지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더욱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런 말씀 마세요. 석민재가 애 낳는 것도 보셔야죠.”

“정말로 그러면 좋을 텐데 말이야.”

배냇저고리를 고이 개 놓고 할머니는 안 팀장에게 무명으로 만든 손수건을 건넸다.

“이건.”

“자투리로 만든 거라 볼품없지만 그래도 가지고 다녀.”

섬세하게 자수가 들어간 손수건은 한땀 한땀 정성이 가득 들어갔다.

범상치 않은 손재주에 마음 씀씀이까지, 갑자기 재혼하겠다며 난리를 친 아버지가 왜 그리도 이 할머니에게 빠진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석민재가 왜 그렇게 자란 건지도. 정말로 좋은 사람인데, 그래서 더더욱 안 팀장은 지금 상황에 대해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만약 석민재가 친부모를 찾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찾았다고 하던가?”

“가정입니다. 확실한 건 아니고요.”

너무 놀라는 바람에 적당히 얼버무렸다.

다른 집도 아니고 홍 여사라면 힘으로라도 민재를 빼앗아갈 게 분명한데 한참을 고민한 끝에 할머니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내 몸만 성했어도, 보내기 싫다는 말이라도 한마디 해볼 텐데.”

차마 본인 앞에서는 드러낼 수 없었던 미련을 가득 담았다.

기른 정과 낳은 정, 무엇이 깊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어느새 할머니의 이마에는 식은땀까지 맺혔지만 더는 숨길 수 없다.

“친부모가 누구인지는 찾은 것 같습니다.”

“그래?”

“다만 찾는 게 꼭 석민재에게 좋은 일이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홍 여사가 뜻하는 바가 진심인 거라면, 석민재에게는 오히려 큰 화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 안 팀장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부모 쪽에서 무혁이를 영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여사님께서 민재를 잘 잡아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통하지 않아도 할머니의 말이라면 분명 통할 거다.

무혁의 편이 되어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일이 순탄치 않아 보였다.

“윽…….”

이야기를 마치고 방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털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예감에 뒤를 돌아보자 민재의 할머니가 심장을 부여잡았다.

“여사님!!”

숨을 고르지 못하는 모습에 안 팀장은 서둘러 119에 전화를 걸고서, 곧장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

꼬박 밤을 새우고 민재는 이른 새벽에야 겨우 홍 여사의 집에 도착했다.

“옆에 있어 줘, 응?”

“그럴게요.”

많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어쩔 수 없이 민재는 홍 여사의 곁을 지켰다.

“홍 사장님은 어딜 가셨어요?”

“준범이에 대해 알아보러 나갔어.”

달력의 날짜를 보니 오늘은 할머니에게 가기로 한 날인데.

어째서인지 제 전화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 제 전화기 못 보셨어요?”

“모르겠는데. 혹시 병원에 두고 온 거야?”

원래대로라면 오늘은 할머니를 만나러 가기로 했었는데 정신이 없어서 잃어버리고 만 모양이다.

“일단은 좀 자, 전화는 찾아오라고 할게.”

아이를 가진 몸으로 밤까지 꼬박 새웠다.

이대로 뭔가 하다가는 또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민재는 어쩔 수 없이 잠시나마 눈을 붙였다.

민재가 잠든 걸 확인하고 홍 여사는 가방을 열었다.

전원이 꺼진 민재의 폰은 이곳에 고이 잠들어 있다.

이런 핑계를 대서라도 보내고 싶지 않은 제 마음을 아는 걸까.

아니, 알면 안 되니 더 속이 쓰렸다.

“언니, 나 왔어.”

외출했던 옥자가 돌아왔을 때 민재는 벌써 깊이 잠이 들었다.

“어떻게 됐어?”

“저쪽도 슬슬 움직일 것 같아.”

만약 성 회장이 깨어나 유언장이라도 고치게 되면 골치가 아플 테니 그 녀석도 조만간 움직이기 시작할 거였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성준범은 영원히 혜성 가에 얼씬조차 할 수 없게 될 터.

그때까지는 소중한 딸이 다치지 않도록 제품에서 단단히 보호해야 한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꺼진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홍 여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전화는 민재가 일어나면 돌려줘.”

“언니.”

“적어도 그때까진 푹 잘 수 있게 두고 싶어.”

제 아이의 자리를 빼앗아간 교활한 뻐꾸기 새끼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홍 여사는 기꺼이 함정을 팠다.

- 이번에는 아예 성 회장님을 노릴 겁니다. 유언장을 고치기라도 하면 정말로 곤란해지니까요.

진무혁의 말대로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무래도 예상은 빗나가지 않을 것 같다.

“그 애가 일어날 때쯤엔 모든 게 끝나 있을 테니까.”

그녀 역시도 물러나 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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