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난 그런 나쁜 놈이 아니야.
보자기를 잘 챙기고 오랜만에 할머니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잠시 외출했다 돌아온 안 대표는 민재가 왔다는 소식에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아이구, 우리 손녀 왔구나?”
“안 대표님.”
“대표님이라니! 할아버지한테 섭섭하게 대표님이 뭐냐, 대표님이.”
지난번에 철없이 잠자리를 양보받았다가 그 사달이 났으니 안 대표는 아예 본가에 민재 방을 만들겠다며 아우성을 쳤다.
“우리 집도 형제고 손자고 죄다 아들이니까. 아버지도 어지간히 손녀가 갖고 싶으셨던 모양이네요.”
“시끄러워, 이놈아! 그게 싫으면 네가 결혼해서 손녀를 안겨주면 될 거 아니야!!”
언제 봐도 사이가 나쁜 부자다. 안 팀장과 안 대표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민재는 오랜만에 마음 놓고 밥을 먹었다.
“귀여운 우리 손녀, 오늘은 자고 갈 거지?”
“그게…….”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안 대표의 물음에 민재는 곤란한 웃음을 애써 삼켰다.
“꿈 깨세요. 벌써 무혁이 놈이 데리러 온 모양이니까.”
안 팀장의 태클이 떨어지기 무섭게 초인종이 울렸다.
아무래도 제레미가 연락한 모양인데, 막상 무혁에게 말할 걸 생각하니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괜찮아, 민재야.”
“할머니.”
“사실대로 모두 말해주렴, 무척 기뻐할 테니까.”
인자한 할머니의 미소를 보니 조금은 용기가 났다.
비록 시작은 엉망진창이었지만 이제야 조금은 진짜 부부가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민재를 데리러 왔습니다.”
“응, 집에 갈게요. 할머니.”
“오늘은 자고 가지 그래?”
사정을 아는 안 팀장이 민재를 위해 나서줬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제레미에게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은 건지 무혁은 별다른 말 없이 민재의 손만 꼭 잡았다.
“자고 갈 거야?”
“아니, 집에 갈래. 할 이야기도 있고.”
“그렇구나.”
눈치가 워낙 빠른 남자니 어쩌면 민재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무혁이 너, 부탁한 건 잘되고 있는 게냐?”
“조만간 해결될 겁니다.”
안 대표는 또 뭘 시킨 건지. 너무 바쁜 사람이라 괜히 서운한 마음이 배가 됐다.
저택을 나와 차에 탄 후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적막이 흘렀다.
“저녁은 먹었어?”
“아직, 방금 끝났어.”
굳어 있는 무혁을 빤히 바라봤다. 왜 여기에 온 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무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저 앞만 보고 운전에만 전념했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신호 대기를 받은 후에야 무혁은 겨우 옆을 돌아봐 줬다.
“왜 그렇게 봐?”
“아니 그냥, 옆에서 보니 더 멋있는 것 같아서.”
별 뜻 없이 한 말이었는데 갑자기 무혁의 두 뺨이 붉어졌다.
급하게 눈을 피하고 다시 앞을 보지만, 눈동자는 갈 길을 잃은 채 엉뚱한 곳만 보고 있다.
“왜?”
“화난 거 아니었어?”
민재만큼이나 무혁도 긴장했었나 보다.
어쩐지 둘 다 잔뜩 곤두섰던 게 바보 같아서 민재는 옆으로 몸을 기댄 채 무혁을 더 빤히 바라봤다.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하고 드디어 차에서 내려야 할 때가 왔다.
더는 미룰 수 없다. 먼저 차에서 내리는 무혁의 뒷모습을 보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언제나처럼 무혁은 민재를 위해 손수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눈을 마주하고 나니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
“나 임신했어.”
제대로 못 알아들은 걸까, 무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얼어붙은 무혁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민재는 한 번 더 명확히 말했다.
“7주쯤 됐어. 8개월 뒤엔 당신, 아빠가 되는 거야.”
***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은데…….”
다 식은 피자를 우물거리며 제레미는 완전히 침울해졌다.
집에 혼자 남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오늘도 혼자 집지키는 개 신세가 됐다.
‘이건 불공평해.’
무혁이 만들어준 추적 프로그램은 정작 진무혁의 행방을 추적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함부로 시도함과 동시에 바로 무혁 본인에게 알려질 테니 이대로는 상대 여자를 알아낼 방법도 없게 되어버렸다.
바람이라니, 대체 언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 걸까.
아무렇지도 않던 무혁과 달리 민재의 표정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실망한 민재는 안 팀장을 만나러 가버렸고, 무혁은 알겠다고만 하고 연락이 끊겨버렸다.
‘이건 분명 이혼이야.’
세 사람의 삼각관계 속에서 고통받는 제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정말로 무혁이 배신해서 둘이 헤어지게 되는 거라면 제레미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건 마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급의 심각한 문제다.
만약 이대로 두 사람이 정말 헤어진다면, 제레미는 무혁을 따라가야 할 테니 민재와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건 싫은데…….”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민재는 언제나 제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줬다.
괴팍하게 심술을 부리면 조금은 미워할 법도 한데, 민재는 그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괴롭힌 건 맞지만 그것도 진심은 아니었는데. 안절부절못하는 와중에 갑자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민재!!”
문이 열리자 무혁이 민재를 안고 들어왔다.
심각한 얼굴로 안방을 향하자 제레미는 현관문까지 대신 닫고 뒤따라 뛰었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 일도 아니긴.”
정말로 괜찮다는 민재와 달리 무혁은 심각한 얼굴로 민재를 살폈다.
“얌전히 누워 있어. 꼼짝도 하지 말고.”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러는 건지. 심각한 분위기에 공기마저 얼어붙었다.
“제레미, 할 말이 있어.”
드디어 올 것이 온 모양이다.
잠시였지만 심각하게 고민해 결론을 내렸다.
“나도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어쩔 수 없지. 나도 어른이니까 이해할 수 있어.”
정말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니까. 제레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애써 눈물을 삼켰다.
“난 민재를 따라갈 거야.”
“뭐?”
“무혁이랑은 어차피 일 때문에 계속 만나야 하는걸. 그러니까 난 민재 옆에서 나쁜 놈들이 오지 않게 지켜줄래.”
행여 다른 남자가 얼씬거리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물어뜯어서라도 어떻게든 쫓아낼 거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무혁이 나빠! 바람이나 피우고 다니는 주제에, 저리 가!!”
“바람을 피웠다고?”
경악하는 민재를 돌아보며 무혁은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민재야, 그게 아니라…….”
“임신한 부인은 남의 집에 맡겨놓고, 당신은 다른 여자를 만나러 다녔다 이거야?”
말도 안 되는 누명이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나란히 앉혀두고 무혁은 진지하게 어떻게 상황을 수습할지 고민에 빠졌다.
“어제 외박한 것 때문에 제레미가 오해한 것 같아.”
“오해 아니야. 다른 여자 집에 갔다 온 거라고 자기 입으로 그래놓고!”
“그런 거였구나. 아빠는 벌써 바람이나 피우고 완전 나쁜 사람이네.”
제레미의 오해를 알아챈 민재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장단을 맞췄다.
나라 잃은 얼굴로 울고 있는 저 바보도 문제지만 민재는 또 그걸 다 받아주고 있다.
“안 되겠어. 애는 제레미랑 둘이 키워야지.”
두 사람 다 어쩌면 저리 죽이 잘 맞는 건지 무혁은 어째 좀 서러워졌다.
“애는 내가 만들었는데?”
“제레미라면 좋은 삼촌이 되어줄 것 같은걸. 무심한 아빠랑은 다르게 말이죠.”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제레미는 그렇다 쳐도 민재는 다 알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다.
사이가 좋아진 건 다행이라지만, 저 까다로운 녀석이 이토록 따르게 될 줄은 몰랐다.
“난 남편이잖아. 제레미가 못 해주는 것도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데.”
“어떤 거?”
“민재가 좋아하는 거.”
나른한 눈빛으로 목덜미를 만지며 무혁은 보란 듯이 민재에게 입을 맞췄다.
저 녀석에게도 민재는 절대 양보할 수 없으니까.
“바람은 무슨.”
눈을 가린 척하며 열심히 훔쳐보는 제레미를 내버려 둔 채 무혁은 오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
임신 소식을 알리고 진무혁의 태도가 돌변했다.
우선 첫 번째, 주말에도 쉬는 날 없이 바쁘게 움직이던 무혁이 드디어 휴가를 냈다.
평소라면 출근해야 할 시간인데 그는 알람도 제 손으로 꺼버리고 다시 잠을 청했다.
‘이 남자도 이럴 때가 있구나.’
언제나 칼 같던 사람이 어쩐 일로 게으름을 부리는 건지.
민재는 이불 틈새로 슬쩍 손을 뻗어 잠든 무혁을 관찰했다.
하늘하늘 내려온 앞머리 끝을 톡, 건드려보며 민재는 배시시 웃었다.
좀 더 살펴보고 싶었는데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아 서둘러 이불 안으로 숨어버렸다.
“잘 잤어?”
어느새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를 간질였다.
일부러 자는 척하고 있었던 걸 그새 또 들켜버렸나 보다.
눈치 빠른 남자. 더는 모르는 척할 수 없어서 민재는 이불 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무혁 씨는?”
“나도 잘 잤지. 오랜만에 정말 푹 잤어.”
이불 속에서 나란히 눈을 맞췄다.
둘이서 이렇게 있는 게 얼마 만인지 오랜만에 되찾은 일상은 참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이따가 병원 가야지.”
“정말 출근 안 해도 괜찮아?”
“유능한 안 팀장님이 알아서 다 해주실 거야.”
그 말은 곧 마법의 주문이 됐다.
아침 9시가 되기 무섭게 안 팀장에게서는 [살려줘]라는 메시지 하나만 도착하고 그대로 연락이 끊겼다.
지금쯤 지옥을 경험하고 있을 테지만 어쩔 수 없다.
‘미안해요, 팀장님.’
쉬는 동안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누운 채 무혁은 민재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그동안 쌓인 이야기들을 하나둘 털어놨다.
“특검을 시도는 하겠지만, 쉽진 않을 거야.”
“어째서?”
“국무총리 본인이 물러나지 않는 이상은 무리야. 안 팀장에게 안 팀장의 비리를 고발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지금은 비록 조원식이 말을 듣지 않으니 내쳤다지만, 이게 언제까지 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에 무혁에게 온 특검 제안도 진작에 거절했다.
“아쉽지 않아?”
“난 석민재 남편이 더 적성에 맞아.”
“검사가 꿈이라고 했었잖아.”
대놓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누구나 그렇게 알고 있다.
민재 역시도 어쩐지 아주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그러는 민재는, 왜 법학과에 왔던 거였어?”
“어째서였더라.”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던 무혁과 달리 민재는 딱히 대단한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쩐지 가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죽도록 공부하긴 했지만, 어째서였는지 도통 이유가 기억나지 않았다.
대체 왜 굳이 서원대 법학과였던 걸까.
“맞아! 옛날에 무지무지 재수 없는 남자애를 만난 적이 있었어.”
“응?”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 그랬었다.
자존심이 완전히 상해버려서 그때 이후로 민재는 이를 악물고 매일 공부에 혼을 불태웠다.
“사람을 무슨 바보 취급하면서. 무시하는 거 있지?”
“그, 그런 일이 있었어?”
“나이도 어린 게 허세가 얼마나 심한지. 넌 내 마음을 몰라, 이러면서 면박을 주는데. 말리다가 무릎도 다치고 엄마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몰라.”
상처가 너무 컸던 말이라 한마디도 잊어버릴 수 없다.
대체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민재는 제법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날 막 무시하잖아. 자기는 서원대 법학과에 가서 검사가 될 건데, 난 못 할 거라고 말이야.”
“…….”
“뭐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긴 했는데.”
떨어지는 게 무서워서, 그때는 학교를 마치는 것만으로도 벅차던 시절이었다.
침울해진 민재를 두고 무혁은 애써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그 멍청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그래.”
“그치? 그런 거지?”
물론 이렇게 말하면 최악의 경험이긴 하지만.
이제는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그 남자애를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 진짜 첫사랑은 그 애였지.’
첫 남자친구는 무혁이 맞지만, 첫눈에 반한 건 그 애가 처음이었다.
민재 혼자 먼저 그 애와 결혼할 거라고 노래를 불렀던 탓에, 엄마는 가끔 그때 이야기를 하며 민재를 놀리곤 했다.
결혼이라니.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 애를 왜 그렇게 좋아했던 걸까.
그래도 다행인 건 그때 그 툴툴대고 못되게 굴던 놈이 아닌 다정한 진무혁을 만난 거겠지만.
“그런 앨 왜 좋아한 걸까? 아무래도 내가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그랬나 봐.”
“그놈이 나쁜 거야. 민재는 아무 잘못도 없어.”
다른 남자와 결혼까지 생각했단 얘긴데
어째 무혁은 오늘따라 토 하나 달지 않고 뭐든 다 받아줬다.
어쩐지 평소라면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그래서 어쩐지 심술이 돋았다.
“그래도 엄마가 그랬어. 내가 커서 그 애랑 결혼할 거라고 그랬다고.”
“그럴 수도 있지.”
“질투 안 해?”
아무리 어린 시절 이야기라도, 평소라면 대체 그놈이 누구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사람이 오늘따라 영 반응이 담백하다.
정말로 물어볼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민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무혁의 반응을 살폈다.
“질투를 왜 해. 옛날 일이라며.”
“그러고 보니 무혁 씨랑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얼굴 취향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건가.”
오기가 생긴 민재는 아예 턱을 잡고 꼼꼼히 얼굴을 뜯어봤다.
설마 알아볼까. 무혁은 진심으로 피가 말랐다.
차라리 다 잊어버린 게 나을 정도로, 최악의 첫인상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난 그런 나쁜 놈이 아니야.”
“그건 그렇지. 그래서 결혼했지.”
뭐가 그리 심각하냐며 민재는 폭소를 터트렸지만, 무혁은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등줄기로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만약 민재가 옛날 일을 기억해내기라도 한다면.
‘절대 안 돼.’
들켰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무혁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평정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