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85화 (85/103)

85화. 이놈이 아주 못된 놈이라서.

지난번에도 유전자 검사를 부탁하더니, 홍옥자 사장은 아직도 잃어버린 조카를 찾는 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친자 증명이나 실종 신고를 푸는 건 유전자 검사 결과로 충분할 겁니다. 친자인 것만 밝혀지면 상속 비율이 바뀔 테니 그 정도라면 경영권을 빼앗기는 일까지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 더더욱 아린이를 찾아야 한다는 거구나.”

“성준범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죽이고 싶을 테고요.”

사람 하나가 있고 없고에 따라 물려받는 재산의 양이 전혀 달라지니까.

안 팀장이 그려준 표를 심각한 얼굴로 보던 옥자는 성준범의 이름 아래에 물음표를 그렸다.

“그럼 만약에 성준범이 아린이를 해치면?”

“들키지 않는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일단 죽이든 죽이려고 했든 유죄로 인정될 경우 모든 상속권이 박탈됩니다.”

“그래?”

“누구든 고의로 다른 가족을 해치려고 한 자는 상속인이 될 수 없으니까요.”

민법 제1004조 1항에 따라 ‘고의로 직계존속, 피상속인, 그 배우자 또는 상속의 선순위나 같은 순위에 있는 자를 살해하거나 살해하려 한 자’는 상속인이 되지 못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대로 성 회장이 죽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정말 성준범이 남은 재산을 모두 꿀꺽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단 말이지.”

“그래서, 조카분은 찾으신 겁니까?”

“찾았어. 조만간 정식으로 절차를 밟을 예정이야.”

“정말입니까?”

“그래.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평소의 홍옥자답지 않게 심각한 얼굴로 그녀는 성아린이라는 이름 옆에 동그라미 하나를 더 그렸다.

“아무래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아린이는 벌써 결혼까지 한 것 같더라고.”

“그것참 곤란하시겠군요.”

명백하게 불만을 드러내는 걸 보아하니 홍 사장은 상대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놈이 아주 못된 놈이라서. 우리 아린이가 혼자 힘든 사정을 알고 애를 속여서 결혼을 밀어붙인 모양이더라고?”

“그게 정말입니까?”

“내말이. 뭣도 모르는 애를 홀려다가는 덜컥 애까지 만들었다니까?”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홍 사장은 힘들게 찾은 조카의 남편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요즘 좀 흔들린다고 해도 엄연한 혜성의 상속녀인데.

만약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 접근한 거라면 일은 더더욱 꼬이게 된다.

“애는 몇 살인데요?”

“아직 임신 중이야.”

“아이를 건드리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배 속에 있는 아이도 엄연한 상속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만약 고의로 아이를 잃게 된다면, 그때는 위에서 말한 법과 같은 법이 적용되어 똑같이 상속권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럼 우리 아린이는 어떡해!”

“어쩌겠습니까. 본인이 마음을 돌리게 열심히 설득하셔야지요.”

적어도 성 회장의 목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기한이 정해져 있으니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에 따라 상속의 행방이 갈리게 된다.

“어느 쪽이든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 팀장의 경고에 옥자 역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

제레미는 심각한 민재를 보며 눈치를 살폈다.

“민재, 그건 뭐야?”

“과일. 집에 가서 깎아줄게.”

살벌하디 살벌한 분위기에 뭐라고 한마디 말도 꺼내기 어렵다.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그는 앞만 보며 엑셀을 밟았다.

평소처럼 속도를 낼 수도 없고 날이 선 분위기에 숨도 쉬기 힘들었다.

‘눈치챈 거구나.’

민재가 저렇게까지 화를 낼만 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어젯밤, 무혁은 분명 다른 여자 집에서 자고 왔다고 했다.

게다가 그 상대는 민재도 아는 사람이라니.

‘이게 말로만 듣던…….’

바람이 난 아빠와 혼자 남겨진 엄마라니. 남겨진 자신은 어쩌란 말인가.

혼자 자꾸 이상하게 웃으며 즐거워 보이던 무혁과 달리 민재의 기분은 지금껏 봤던 모든 순간을 통틀어 최악으로 보였다.

“이제 집에 계속 있는 거야?”

“싫어?”

“나는 좋아. 좋긴 한데, 지금의 민재는 너무 무서워 보여.”

“그런 말 많이 들었어.”

잘 웃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학 시절 온갖 시비에 걸렸다고, 민재는 창 밖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 있었어?”

“나중에 얘기할게.”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민재를 보며 제레미는 진심으로 심장이 떨렸다.

“내가 들어줄게. 이리 줘.”

“많이 무거울 텐데, 괜찮겠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이리 줘.”

평소라면 나 몰라라 했을 짐꾼 역할도 자처하며 제레미는 민재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서둘러 출근한 탓에 오늘은 집 안이 엉망이다. 텅 빈 냉장고를 채워 넣으며 민재는 어딘지 모르게 삭막해진 집 안을 빤히 바라봤다.

“옷장 정리를 할까 하는데, 세탁소 좀 다녀와 줄 수 있어?”

“세탁소?”

“물건 주고 맡기기만 하면 돼. 어렵지 않을 거야.”

오랜만에 돌아온 민재가 하는 부탁이니까. 제레미는 얌전히 커다란 옷 가방을 여럿 받아들었다.

“양이 많아서 왔다 갔다 몇 번 해야 할 거야. 이따가 피자 시켜 줄 테니까 그걸로 봐줘.”

제레미를 내보내고 민재는 본격적으로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서랍을 비롯해 안방의 드레스 룸 어디에도 할머니가 줬던 꾸러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서재 문을 열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컴퓨터 소리만이 고요한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없네.”

몇 개의 서랍을 열어봐도 대부분 서류밖에 없다.

제레미의 옷이 있는 곳까지 모두 살펴봤지만, 배냇저고리가 있는 꾸러미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티가 나지 않게 짐을 정리해두고 민재는 홍 여사가 준 보자기를 빤히 바라봤다.

아무래도 이 의문점을 풀어줄 수 있을 사람은 할머니밖에 없다.

“민재, 나 다 했어!”

“마침 잘 왔어.”

제레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일부러 자리를 비우게 하려고 심부름을 시킨 거였다.

그토록 좋아하는 피자를 두 판이나 시켜주고서 민재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잠시 나갔다 올게.”

“어딜 가게?”

“할머니한테 가려고. 팀장님 곧 퇴근하실 시간이라, 팀장님 차 얻어타면 돼.”

“무혁한테 얘기는 했어?”

아마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도 모를 테지만 아직 명확한 건 아니니 알릴 수는 없다.

아니 정확히는.

‘알고 있었던 걸까.’

이상할 정도로 미묘하던 홍 여사와 무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토록 불편해하는 걸 알면서도 굳이 자신을 맡긴 이유가 정말 그런 거였다면.

진무혁은 모두 알면서 민재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던 거다.

***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새로 바꾼 폰으로 연락을 하자 안 팀장은 퇴근 시간이 되기 무섭게 로비로 달려 나왔다.

“석민재, 네가 왜 여기에…….”

“할머니 좀 뵈러 가려고요. 팀장님 차 좀 태워주세요.”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진지한 얼굴로 대뜸 부탁부터 할 줄이야.

잘 있었던 거냐고 채 물을 겨를도 없이 안 팀장은 민재를 태우고 곧장 제 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성준범이 절 죽이려고 했어요.”

“널? 소영하 때문에 그러는 거야?”

고작 소영하 하나 때문에 그토록 집요하게 노린 건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민재가 정말 성아린인 거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저 있잖아요.”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대체 무슨 일이야.”

“어쩌면 제가 혜성 친딸일지도 몰라요.”

“뭐?”

표정을 못 숨기는 안 팀장은 황당하다는 듯 민재를 돌아봤다. 이게 정상이긴 한데.

민재도 차라리 이 모든 상황이 제 망상이길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넌 분명 여사님의, 아 맞다. 너 입양이라고 했었지.”

안 팀장도 뒤늦게서야 사태가 파악된 모양이었다.

무혁이 만약 고의로 이 사실을 숨긴 거라면, 지금 민재가 기댈 수 있는 건 안 팀장밖에 없다.

“아직 확실하진 않아요.”

“아니긴 무슨, 아까 홍 사장이 와서 왜 난리를 치고 간 건지 이제 알겠네.”

“난리라뇨?”

“됐다. 그래서 뭐, 하던 얘기나 계속해 봐.”

“제가 진짜 성아린이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안 팀장조차도 난감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만약 정말로 민재가 친딸이라면, 그리고 그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때는 정말로 일이 커지게 된다.

“기사 몇 줄 나오는 정도로 그치진 않을 거야. 재수 없으면 소영하랑 만난 사실까지 모두 까발려질 거고.”

“그렇겠죠.”

“무혁이 놈도 곤란해지겠지. 지금 특검에 들어가냐 마냐 얘기가 오가고 있어서, 그 자식 성격에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지.”

“특검이라뇨?”

“조원식을 합법적으로 처단할 사실상 마지막 기회니까.”

불법 청탁과 마약 거래, 그 외에도 여러 사법 거래가 이루어진 흔적이 남아 있으니 주범인 조원식은 절대로 그냥 빠져나갈 수 없다.

비록 무혁의 부모를 죽인 죄까지는 물을 수 없다곤 해도 지금까지 쌓아온 조원식의 입지를 무너트리는 건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조원식을 잡으려면 성준범도 같이 쳐야 하는데,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상황에 석민재 네가 성아린인 것까지 밝혀지면 당장 구설에 오르겠지.”

“이해충돌 때문인가요?”

“그래. 성준범과 성아린은 둘 다 성 회장의 상속인이니까. 수사 과정에서 성준범이 자칫 상속권을 잃게 된다면 성아린이 이익을 보게 되니, 남편이 수사하는 건 여러모로 곤란하지.”

진무혁이 얼마나 복수를 위해 칼을 갈아 왔는지는 민재가 더 잘 알고 있다.

안 팀장은 이번 특검이 영 달갑지 않은 눈치였지만, 적어도 조원식에 관련된 수사는 진무혁 이상으로 잘할 만한 사람이 없다.

“수사팀에서도 무혁이 놈을 바라는 눈치긴 한데. 이게 밝혀지면 무혁이 놈의 복수는 완전히 물 건너가겠지.”

“그런 거군요.”

“수사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면 곤란하니까. 아마 상세하게 파고들기 시작하면 나까지 배제되겠지.”

“팀장님까지요?”

“석민재 막내 삼촌이잖아. 좋든 싫든 말은 나올 수밖에 없어.”

침울한 민재의 기색을 읽었는지 안 팀장은 오른손으로 민재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가방에 든 보자기를 꼭 안고서 민재는 심란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할머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리운 할머니를 만났다.

손녀의 임신 소식에 오매불망 기다리던 할머니는 갑작스러운 민재의 방문에도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게 얼마 만이야, 우리 강아지.”

할머니가 알면 걱정하실 테니 그때 일은 급한 일이 생겼다며 적당히 둘러댔었다.

임신 소식은 정말로 할머니만 알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도 알지 못했다.

“몸은 좀 괜찮고? 입덧은 괜찮아?”

“할머니…….”

순간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민재는 할머니의 품에 꼭 안긴 채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정리해나갔다.

“오늘은 이거 때문에 왔어요.”

보자기를 펼쳐 놓자 할머니는 깜짝 놀라 문양을 세세하게 살폈다.

아무래도 민재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거, 분명 그…….”

“부모님을 찾은 것 같아요.”

친부모를 찾았다는 말에 할머니의 눈동자도 커졌다. 분명 축하해야 할 일이지만 할머니는 쉽게 웃어주지 못했다.

“그랬구나.”

“근데 모르겠어요. 지금은 좀 아닌 것 같아.”

“기쁘지 않은 거니?”

언젠가 부모님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지만 어째서인지 생각만큼은 기쁘지 않다.

민재는 할머니의 품에 안긴 채 곱게 수 놓인 보자기를 막연히 바라만 봤다.

“무서워요.”

“그렇게 힘들 때도 약한 소리 한 번 안 하더니, 진 서방이 좋긴 좋은 모양이구나.”

“응?”

“바쁘다는 얘긴 들었어. 아이 가진 것도 아직 얘기 못 한 거지?”

할머니는 정말로 민재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다.

배에 손을 얹고서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여전히 고운 빛깔을 띠고 있는 보자기를 어루만졌다.

“이 보자기가 특별한 게 뭔지 아니?”

보통은 겉이 화려해 보이기 위해 비단을 쓰지만, 수 보자기는 반대로 겉면은 빳빳한 면에 놓았고, 안에는 고운 비단을 덧댔다.

“이렇게 고운 천으로 감싸면 속의 물건이 상하지 않고, 자수가 오래가려면 질긴 무명을 써야 하거든.”

“그래서 반대였군요.”

“그럼. 소중한 딸을 먼 집에 보내는 건데, 평생 쓸 수 있도록 한땀 한땀 오죽 정성이 들어갔을까.”

할머니는 잠시 서랍을 뒤져서는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펼치자 그 안에는 민재의 것과 제법 비슷한 배냇저고리가 들어 있었다.

“이건…….”

“내가 산다 한들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니. 손주 얼굴을 못 보게 되더라도 이것만은 만들어 주고 싶어서, 며칠이면 금방 다 완성할 수 있을 거야.”

아무리 많이 나았다고 해도 할머니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언젠가 떠나야 할 때를 대비하며 할머니는 아직 어린 손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무슨 오해가 있는지는 몰라도 네게 해가 될 일을 할 사람은 아니야.”

못 미덥기만 하던 손녀가 엉뚱한 사내를 데려왔다면 할머니가 먼저 결혼을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무혁이라 마음이 놓였다.

“그러니 믿어 주렴. 네 부모가 누구든 무혁이, 그 아이만은 언제까지나 네 곁을 지켜줄 테니까.”

대학 시절, 둘이 사귈 때부터 할머니만은 두 사람이 만난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 들켰을 때, 무혁이 민재를 바라보던 애틋한 눈빛도.

두 사람이 헤어진 후 민재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마저도 할머니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정성으로는 그렇게 못 해. 그러니 이 할미 말을 믿으렴.”

“응, 그럴게요.”

실컷 울었더니 배가 고팠다. 만약 아이가 생긴 걸 알게 된다면 어떤 얼굴을 하게 될까.

무혁의 반응을 기대하며 민재는 겨우 웃을 수 있었다.

분명 기뻐해 줄 테니까.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