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누구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 겁니까.
“뭐?”
경악하는 반응이 재미있어서 일부러 약을 올렸다.
“아침도 주길래 먹고 왔어. 그러니까 너도 알아서 챙겨 먹어.”
“뭐야, 대체 어느 여자랑 있다가 온 거야?”
“그러게, 누굴까.”
패닉 상태에 빠진 제레미를 내버려 두고 무혁은 눈을 감았다.
“이상하단 말이지.”
이 집이 넓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민재가 없으니 무언가가 심히 허전했다.
옛날 생각이 나서 더 그렇게 느껴진 걸지도 모른다.
“왜 자꾸 혼자 실실 웃어?”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들은 둘 사이의 주도권이 무혁의 손에 있다고 여기지만, 그는 한 번도 민재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딱 한 번 완전히 이성을 잃었던 건 아마 단 하루.
민재를 처음 가졌던 그때뿐이었다.
나란히 놓인 칫솔을 보니 또 괜히 민재 생각이 났다.
그때는 정말 둘 다 어렸으니까 치기 어린 제 모습을 떠올리며 괜히 웃음을 머금었다.
“곤란하네.”
찬물을 쏟아가며 열기를 식혀보려 했지만, 들뜬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민재를 울리는 게 더없이 즐겁던 시절이니까, 괜히 또 외로운 마음이 앞섰다.
무슨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민재만 생각하면 이리도 마음이 설레니 이것도 참 복잡한 심경을 숨길 길이 없다.
‘하지만 이대로는 곤란한데.’
홍 여사는 민재와 제 사이를 떼어 놓고 싶은 모양이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깊은 사이가 되어버렸다.
친모라는 사실을 언제 밝히면 좋을지. 무혁도 내심 고민에 빠졌다.
가능하면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민재를 데려가고 싶지만 강경한 홍 여사의 반응을 보면 그조차도 쉽지 않다.
마땅한 해법은 어디에 있을까. 찬물로 세수를 하고 무혁은 달아오른 열기를 애써 식혔다.
“전화 왔어!!”
막 욕실을 나오자 제레미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에게 전화를 넘겼다.
“왜 그렇게 봐?”
“바람둥이. 민재한테 다 일러버릴 거야.”
“민재도 아는 사람인데?”
오해를 부르는 무혁의 장난에 제레미는 이제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무혁은 전화를 건 사람의 이름을 확인했다.
목에 타월을 걸친 채 반듯한 자세로 전화를 받았다.
“네, 지검장님.”
여유를 부릴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회사 쪽에는 제가 직접 얘기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원식을 처단하는 게 우선이다.
웃음기를 거두고 무혁은 통화 내용에 집중했다.
***
아침 일찍 무혁을 보내고 민재는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점심때가 다 될 무렵에야 다시 일어난 민재는 제일 먼저 홍 여사를 찾았다.
“이걸 어쩌죠. 사모님이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 주무시는데요.”
홍옥자 사장도 외출하고 없으니 어제 일을 물어볼 사람이 없다.
점심을 먹고 세 시간이 넘게 기다렸지만 홍 여사는 도통 일어났다는 소식이 없다.
“민재 씨, 잠깐만 이리 와봐요.”
보다 못한 아주머니가 민재를 불러 사정을 들려줬다.
“꾀병이라고요?”
“응. 어제 일로 마음이 많이 상하신 모양이야.”
일부러 만나주지 않는 거란 말에 더욱 곤란해졌다.
민재는 어쩔 수 없이 나름대로 강력한 한 방을 먹이기로 했다.
“그럼 대신 말씀 좀 전해주세요. 저도 이만 집에 가보려고요.”
“뭐?”
말을 꺼내기 무섭게 방 안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곧이어 아직 잠옷을 입은 채 홍 여사는 서둘러 방문을 열었다.
“어딜 가려고?”
무혁은 홍 여사 옆에 있으라고 했지만, 민재는 진심으로 집이 그리워졌다.
여기가 편하긴 하지만, 무혁이 옷도 제대로 못 갈아입고 제 곁에 숨어 선잠을 자는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요 며칠, 친엄마랑 지내는 것처럼 정말 편하고 좋았어요.”
잠시나마 진짜 성아린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정도로 이 집에서 지내는 시간은 제법 행복했었다.
비록 무혁에게 못되게 굴긴 했지만, 눈에 서운함이 가득한 홍 여사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남 같지 않아서 미워할 수가 없다.
“자주 놀러 올게요. 다음에는 같이 쇼핑도 가요.”
행여 서운하지 않도록 민재는 최선을 다해 달래기에 들어갔다.
그러자 홍 여사는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민재의 손을 잡았다.
“그럼 문병도 같이 가줄 수 있어?”
“문병이요?”
“응. 우리 남편 문병.”
병원에 있는 성 회장님 이야기는 민재도 말로만 들었었다.
초반에 성준범을 빨리 막지 못한 것도 성 회장의 병세가 심각했던 탓이라고 했다.
“혼자 가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래. 민재 씨가 함께라면 좀 덜 무서울 것 같아.”
“그럼요. 제가 같이 가 드릴게요.”
“응. 우리 남편도 민재 씨를 만나면 분명 좋아할 거야.”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혼자 이 많은 사람을 책임져야 하는 홍 여사의 어깨가 심히 무겁다.
짐을 꾸리는 걸 도와주며 아주머니들도 내심 민재가 가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민재 씨가 있어서 우리도 한결 지내기가 편했는데.”
“우리 사모님이 요즘 얼마나 좋아했는데. 아쉬워서 어떡해.”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침울하던 저택에도 민재가 온 이후로 제법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게 됐는데, 막상 떠난다고 하니 다들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제레미한테 데리러 오라고 하면 되니까 차는 따로 안 보내주셔도 돼요.”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렴.”
챙겨줄 사람도 없는 집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을 게 분명하다며 홍 여사는 또 바리바리 음식을 싸기 시작했다.
며칠 사이 민재의 식성을 모두 파악한 덕분에 반찬은 물론 과일도 잊지 않았다.
지난번에 잘 먹었던 복숭아를 꺼내고서 홍 여사는 낡은 수 보자기를 꺼냈다.
보통은 겉면이 비단으로 되어 있는데, 이 보자기는 비단 안감을 대고 겉에는 화려한 수를 놓았다.
그런데 어쩐지 겉에 수놓아진 무늬가 눈에 익었다.
“이건 뭐예요?”
“돌아가신 우리 친정엄마가 물려주신 거야.”
친정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라며 홍 여사는 민재 앞에 보자기를 펼쳐줬다.
결혼하던 날 할머니가 준 꾸러미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날은 정신이 없어서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분명 배냇저고리 주변에 수놓인 문양과 매우 비슷했다.
어째서 이게 여기에 있는 걸까.
“왜,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전에 어디서 비슷한 걸 본 것 같아서요.”
“신기하네. 이건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거였거든.”
자수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던 홍 여사의 어머니는 딸을 위해 손수 도안을 만들었다.
임신한 딸이 무사히 아이를 낳고, 태어난 손주가 무사히 자랄 수 있도록 품이 많이 가는 수고도 서슴지 않았다.
“우리 아린이의 배냇저고리도 다 같은 무늬였지. 이거면 그 애를 지켜줄 수 있을 줄 알았었는데.”
“배냇저고리…….”
아이가 사라졌던 날, 입고 있었던 배냇저고리에도 같은 무늬가 있었다고 했다.
단언하는 홍 여사의 말에 심장이 뛰었다.
“맛있게 먹고 보자기는 천천히 돌려줘. 소중한 물건이니까.”
평소라면 사양해야 옳지만, 민재는 묵묵히 보자기를 받아들었다.
‘설마…….’
꾸러미를 꼭 끌어안은 채 민재는 입술을 깨물었다.
***
성준범에 이어 조원식까지 모두 구속되며 A&Z 내부에서도 화색이 돌았다.
“늦게 터진 거지. 이제라도 터졌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윗선의 심기를 건드려 버려졌다는 평가가 대다수긴 하지만, 그래도 상대가 저렇게 됐으니 혜성 소송은 완벽한 A&Z의 승리로 끝날 확률이 더욱 높아졌다.
모든 게 순조롭다. 이번 승소를 계기로 위상을 되찾은 덕분에, A&Z는 잠시나마 조조에 밀렸던 업계 부동의 1위 자리를 탈환했다.
“요즘처럼만 살맛 나면 참 좋을 텐데.”
몸은 바빠도 자존심은 세웠다며 들뜬 문성희 변호사와 달리 안 팀장은 난감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특검 말입니까?”
“한 번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걸세.”
높으신 분의 전화에 안 팀장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조원식 건이 불거지며 일명 독사파 사건에 대한 대규모 조사가 불가피해졌다.
‘하필이면 국무총리가 엮였으니까.’
조원식의 배후에 있는 거물들을 비롯해 이번 동부지검 수사 개입 건까지 사건의 규모가 너무 커졌다.
특검, 일명 특별 검사 제도.
검찰 내 고위 간부나, 수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고위 공직자가 연루된 경우 사건의 중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검찰 소속이 아닌 ‘특별 검사’를 임명해 수사하게 된다.
자칫 일개 검사가 독사파 건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예전 진이한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될지도 모르니까.
검찰 동료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수뇌부에서도 사건의 규모를 고려해 특검 도입을 적극 찬성하고 나섰다.
“어디까지 올라가는 겁니까.”
“올라갈 수 있는 곳은 모두 올라가 봐야지.”
국무총리 아들의 마약 건부터 시작해 독사파의 마약 고리는 성준범을 타고 HS엔터까지 고루 퍼졌다.
게다가 펀드 사기까지 얽혀 있으니 그만큼 까다로운 수사가 될 터.
그러니 안 팀장을 특검 후보에 올리는 한편, 저쪽에서는 검사 출신 변호사를 한 사람 더 합류시키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누구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 겁니까.”
“진무혁 변호사와 함께했으면 싶네.”
“하지만…….”
판사 출신인 안 팀장이라면 몰라도, 무혁 본인이 얽히게 된다면 어떻게든 구설이 터져 나올 터였다.
조원식의 끄나풀이라고 보는 사람과, 조원식에 대한 사적 원한을 품었다고 보는 사람.
어느 쪽이든 무혁 혼자 뭇매를 맞을 여지가 충분하다.
“혜성 건 얘기는 들었네. 이번 사건 뒤에 그 친구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그 친구는 안 됩니다. 지난번 동부지검장 건만 해도 보셨지 않습니까.”
“그 친구 없이 조원식을 잡아넣을 수 있겠나?”
가까스로 구속에 성공했지만 언제 또 어떤 식으로 빠져나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비록 잠시 틀어졌다고 해도 지금 상태라면, 윗선의 한마디로 얼마든지 수사가 뒤틀릴 여지가 충분하다.
사실상 조원식에게 법의 심판을 내릴 마지막 기회다.
“사상 최연소 특별검사보의 탄생이지. 그 정도 흥행은 있어야 수사에도 힘이 붙지 않겠나.”
진무혁이 특검팀에 합류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적어도 이프로스(검찰 내부 통신망)가 뒤집히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윗선이야 그렇게라도 해서 조원식을 잡아내고 싶을 테지만.
그걸 그대로 받았다가는 진무혁의 희생이 너무 크다.
“본인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제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네 말이라면…….”
“차라리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조원식은 적이 많지만, 그만큼 그에게 기생해서 살아가는 존재들도 많다.
이제 겨우 평화를 되찾았는데. 그 애를 또다시 그 구렁텅이 안에 몰아넣고 싶지 않다.
“무혁이 부인, 제 부하직원입니다. 지난번에 성준범하고 얽힌 건도 일부러 묻었는데 이것까지 불거지면 그 애까지 다칠 겁니다.”
“그건…….”
“이번 건 수사하다 무혁이 놈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진 검사님처럼 되면 그땐 누가 책임져주는 겁니까?”
안 팀장의 완강한 반대에 상대도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번 일은 본인에게 알리지 않는 편이 낫다.
진 검사의 선례를 진무혁이 그대로 밟게 된다면 석민재의 얼굴을 어떻게 보란 말인가.
그래서 차라리 자신이 들어가겠노라 큰소리를 쳤어도 막상 말을 하고 나니 제일 걸리는 문제가 있다.
‘특검 팀에 합류하게 되면 아마 머리도 잘라야 할 텐데.’
지금이야 사무실과 대학 강의 정도만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기꺼이 장발을 유지하고 있다.
만약 특검 팀에 합류하기라도 하게 된다면. 아버지가 당장 바리캉을 들고와 제 머리를 박박 깎아버릴 모습이 눈에 선했다.
대체 왜 다들 이 장발의 멋을 알아주지 않는 건지.
‘괜한 소리를 했어.’
어차피 둘 다 알아주지도 않을 텐데. 텅 빈 사무실을 보며 안 팀장은 괜히 울적해졌다.
귀엽던 동생은 어느새 제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뭔가를 꾸미고 있고, 곁에 두고 나름대로 애지중지 키워온 부하 녀석은 아예 휴직계까지 내버렸다.
“안녕, 안 팀장!”
“아, 깜짝이야. 제발 노크 좀 하고 들어오세요, 홍 사장님.”
갑자기 쳐들어온 홍옥자 때문에 아련하던 감정마저 완전히 뒤틀렸다.
그래도 고용주님께서 오셨으니 안 팀장은 바로 사업가로 돌변해 서류를 들고 거래에 들어갔다.
“과연 A&Z야. 성준범을 날리는 건 다들 반신반의했었는데, 이대로라면 걱정할 건 없을 것 같아.”
HS엔터 하나가 위태롭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성준범의 입지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사회에서도 불신임을 제출한 이상 회사가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아직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하지만 본 게임은 지금부터다. 안 팀장은 펜을 들고서 현재의 지분 구조도를 차곡차곡 그려나갔다.
“쓰러진 성 회장님께서는 어쨌든 성준범을 후계로 고르셨습니다. 그래서 유언장에 자신의 지분과 관련된 내용을 따로 기록해두신 거 저희도 확인했습니다.”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불신임이 발동됐다고 해서 상속권까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성준범이 아무리 밉다고 하셔도, 엄연히 양자로 입적된 이상 유산의 상속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거야 그렇지.”
성준범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만 해도, 성 회장은 그가 후계자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유언장에는 이미 해당 내용이 올라가 있는 이상 성준범이 지분을 확보해 경영권을 탈취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말인데. 만약 우리 아린이가 살아 있는 거면 어떻게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