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그러니 있을 때 잘할 것이지.
어색한 만남이었다.
HS엔터 내부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홍 여사는 직접 소영하를 집까지 불러들였다.
“이쪽은 A&Z의 석민재 씨에요. 여러모로 제 일을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저분이 누군진 알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한류스타 소영하를 어찌 모를까. 민재는 애써 평소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소영하는 내심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두 사람을 두고 홍 여사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HS엔터 관련 보고는 민재 씨한테 먼저 얘기해줄래요? 주방에 잠시 봐야 할 게 있어서.”
홍 여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에 있던 도우미들마저 모두 자리를 비웠다.
얼떨결에 단둘이 남게 된 상황에서 소영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민재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적반하장이라고 해야 할지. 어떻게 된 거냐고 되묻는 게 오히려 기가 막혔다.
지금 민재가 누구 때문에 여기에 와 있는 건데.
민재는 팔짱을 낀 채 소영하를 노려봤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성준범이 아니었다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된 소영하는 뒤늦게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이나마 알아차렸다.
“현장에 있었던 거야?”
“죽을뻔했어.”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건지 소영하는 입술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말을 삼켰다.
싸늘한 민재를 앞에 두고 그는 일 이야기만을 어렵게 꺼냈다.
“몇몇은 해지하고 나가긴 했는데, 내가 남는다고 하니 다들 남는다고 했어.”
“의외네.”
“매니저 형이 고생을 많이 했지. 그래도 내가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해서.”
예전 같으면 제일 먼저 도망쳤을 위인인데. 본인도 책임감을 느끼는 건지 소영하는 차분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전했다.
“준범이 형, 성준범 이사가 없으니 내부 사정을 봐줄 사람이 필요해. 대외적으로는 내가 나서서 어떻게든 수습할 생각이야.”
“할 수 있겠어?”
“해 봐야지.”
정말로 예전과 달라진 걸까.
싸늘한 민재의 시선을 앞에 두고 소영하는 주먹을 거머쥐었다.
이건 속죄다.
“마음대로 해.”
무심하게 돌아서는 민재를 보며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돌아온 홍 여사에게 몇 가지 사항을 전달하고 소영하는 힘없이 저택을 나섰다.
믿고 맡기겠다는 홍 여사는 민재와 판박이처럼 닮아있는데, 정작 관심을 받고 싶은 이는 제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다른 곳만 보고 있다.
어째서일까.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어떻게 됐어?”
익숙한 매니저의 물음에 소영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성 이사의 폭주 이후 실장급 매니저는 소영하를 내세워 회사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를 여기까지 데려와 준 건데,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성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망한 거야?”
“아니, 잘됐어.”
“근데 왜 울어?”
“민재가…….”
일은 잘 풀렸다지만, 석민재의 이름이 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쪽은 제대로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뒤늦게 철이 들었어도 이제는 남의 아내가 된 여자인데, 여전히 잊지도 못하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젠 그만 잊어. 홍 여사 옆에 맨날 붙어 다니는 걸 보면 수양딸이나 마찬가지라며.”
“…….”
“그러니 있을 때 잘할 것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돌아온 매니저의 말이라 말에 더욱 뼈가 있었다.
애써 눈물을 닦고 소영하는 자리에 앉았다.
“회사로 가요.”
더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조금 더 강해지기로 마음먹었다.
***
FBI 국장 로버트 켈스의 내한 소식에 당국의 긴장이 더욱 거세졌다.
“훌륭한 성과입니다. 이번 적발을 통해 마약 사건에 대한 양국 간의 깊이 있는 교류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통역이 전한 찬사가 이어졌다. 국장과 검찰총장이 악수하는 사진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이번 사건은 국제적인 공조 수사 사례로 세간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그러니 더더욱 난감해진 건 성준범 쪽이다.
독사파의 상당수가 현장에서 체포되고 그동안 쉬쉬했던 악행들마저 모두 수면 위로 떠 올랐다.
평소라면 냉큼 달려와 변호할 조원식도 이번 일에는 손을 떼버렸으니 고립무원에 빠진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
‘그 자식, 설마 진짜였을 줄이야.’
해커 놈이 떠들던 헛소리를 곱씹었다. CIA니 FBI니 떠들기에 헛소리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을 줄이야.
“네놈들이 감히 날 함정에 빠트려?”
완전히 놀아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여자 하나쯤을 해치우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독사파는 본래 조원식이 받기로 한 지분을 넘겨달라 큰소리를 쳤다.
혜성이 제 발밑에 떨어지면 HS엔터 하나를 넘겨주는 것 정도야 애교다.
소영하까지 나가고 나면 완전히 쭉정이가 될 회사니 기꺼이 넘겨주고 눈엣가시 같은 석민재를 제대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이래서 더러운 일하는 놈들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독사파의 마약 창고가 털리며 졸지에 현장에서 마약 거래 혐의까지 덮어쓰는 처지가 됐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필사적인 그에게 변호사의 면회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면 그렇지. 자리가 날아가도 제게는 아직 성 회장의 유언이 남아 있다.
불신임으로 쫓겨나게 될지언정 제 몫의 지분은 어떻게든 상속받게 될 터.
그 떡고물을 얻어먹기 위해서라도 누구든 제게 손을 내밀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는…….”
“A&Z 변호사 진무혁입니다.”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다 입을 닫았다. 왜 하필이면 이놈이 온 걸까.
언성을 높이려다 애써 참았다. 지금 여기서 난동부려봐야 좋을 게 없으니 그는 눈치를 살피고 교도관들이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네놈이 왜 여기에 온 거야?”
어디서 본 것 같다 싶었더니, 분명 체포 현장에서도 봤던 놈이다.
그동안 지분 문제로 치열하게 다퉜던 주제에 갑자기 제 변호사를 자처하고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없다.
“날 이런 우스운 꼴로 만들어 놓고서 비웃기라도 하려는 건가?”
“천만에요. 저는 성준범 씨를 보석으로 나가게 해드리기 위해 온 겁니다만.”
“뭐?”
접견실 안은 철저하게 기밀이 유지되는 만큼 성준범은 대놓고 무혁의 속내를 물었다.
“날 일부러 여기에 쳐넣은 주제에 네 손으로 날 내보내 주겠다고?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란 거야?”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네. 삼십 년 전, 성아린이 사라졌던 날. 그날 당신이 본 것에 대해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성아린이라는 이름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정원에서 열린 파티 때문에 집 안에 남아 있던 건 아이를 돌보던 도우미 둘과 어린 성준범. 셋뿐이었다.
- 전 아무것도 못 봤어요.
고작해야 여덟 살이었던 성준범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로 애써 회피했지만, 그날의 일은 여전히 악몽처럼 남았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이건 권유가 아니라 협박입니다. 성준범 씨.”
사늘한 진무혁의 말에 위압감이 실렸다.
평생을 오만무도 안하무인으로 일관해온 성준범도 그 기백에 밀려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말 그대로.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 내가 아는 내용과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다 알고 왔다는 뉘앙스를 보니 이건 협박이 맞다.
하지만 만약 이 일이 세상에 드러난다면 그의 입지는 진정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말씀하실 생각이 없다면 이만 실례하죠.”
자신만만한 진무혁은 대놓고 그에게 선택을 종용했다.
협박이라고 하더니, 정말 조원식도 없는 지금 상황에서 무작정 입을 다물고 있다가는 제가 죽게 생겼다.
정말로 나가버리려는 건지, 문 앞까지 간 진무혁을 보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조원식이 시킨 건가?”
그 말에 걸음을 멈추고서 무혁은 뒤를 돌아 그를 바라봤다.
정곡이 찔린 건가 싶었는데, 그는 성큼 다가와서는 곧장 성준범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지?”
회사는 이미 각자도생을 시작했고, 현장에서 체포된 이상 혜성에서는 진작 그를 버렸다.
언제고 그를 쫓아낼 날만 기다리는 홍 여사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이상, 완전히 버림받은 그를 구치소에서 꺼내줄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건만.
처절하게 현실을 인식시켜준 후에야 성준범은 완전히 겁에 질려 꼬리를 내렸다.
“네놈이 원하는 게 뭐야.”
“당신이 감옥에 있는 사이에, 성 회장 유산이 얼마나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홍 여사가 그 전에 모두 매각이라도 해버린다면, 그쪽은 완전히 빈털터리가 된다는 뜻이야.”
숨이 끊어지기 전에 성 회장 명의의 재산이 모두 사라진다면, 아니 빚이라도 만들게 된다면 오히려 감옥에 갇힌 성준범만 바보가 된다.
그렇게 되면 제게는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건데.
“궁지에 몰리기 전에 동아줄을 잡아야지. 안 그래?”
“넌 대체…….”
악마의 유혹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손을 뿌리치기에는 제 사정이 너무나 여의치 않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도망칠 구멍 하나 없는데.
“빌어먹을.”
“그러니 말해. 그날 뭘 본 건지.”
이대로 감옥에 갇혀 있다가는 정말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릴 거라고.
지켜줘야 할 의리 따위는 없으니 성준범은 이를 악물고 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아이를 데려간 여자는, 분명 양주댁이라고 했다.
-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아이를 데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누군가가 제게 단단히 입막음을 시켰다.
분명 성아린을 빼돌린 건 일개 고용인이었지만, 방에서 아이를 데리고 내려온 사람은.
그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엄마.’
아이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제 엄마는 어찌할 줄 모르는 제 아들을 있는 힘껏 껴안고 속삭였다.
- 잊어버려. 이 일만 잘되면, 넌 앞으로 평생 이렇게 좋은 집에 살 수 있게 될 거야.
이 모든 건 너를 위한 거라며, 제 무능한 부모는 누구에게 기생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알을 깨트리고 둥지를 차지한 뻐꾸기는 본가에 아들을 팔아넘긴 대가로 성 회장에게 빌딩까지 받았다.
- 준범아. 엄마만 믿어. 그 집 식구들은 절대 네 편이 되어주지 않을 거야.
어차피 낳아주지도 않은 저들을 어찌 믿겠냐는 엄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준범은 친부모의 명의로 막대한 금액을 빼돌렸다.
언제 내쳐질지 모르는 신세니 그 정도는 당연한 보험이라 믿었다.
물론 그 부모가 제 발목을 잡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차피 공소 시효도 지난 일인데, 애를 빼돌린 사람은 그 양주댁…….”
“알고 있습니다.”
아이는 분명 죽었다고 했다.
유난히도 싸늘한 날, 눈 오는 길에 아이를 버리고 왔다는 남편을 제 손으로 죽인 후 양주댁은 대가로 받은 금액을 독차지했다.
물론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돈이 떨어질 때마다 그녀는 준범의 모친을 찾아와 협박을 일삼았다.
- 이제 그 일을 아는 건 사모님과 도련님, 그리고 저뿐이죠.
도망자 신세가 된 여자의 입을 막는 건 돈보다는 힘이었다.
매번 맡겨둔 것처럼 찾아와 협박해댔지만, 공소 시효가 끝난 이후로는 굳이 상대할 이유가 없었다.
- 목숨이 아까우면,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머리 꼭대기에 앉아 약점을 틀어쥐고서 돈을 요구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제대로 깨닫게 해줄 필요가 있다.
그나마 목숨이나마 부지하게 해주는 제 아량에 고마워하지나 못할망정.
그 여자는 결국 함부로 입을 놀려 비밀을 발설한 모양이었다.
성아린 하나가 사라지고 많은 이들의 삶이 바뀌었다.
그중 가장 수혜자였던 성준범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침묵을 택했다.
“홍옥자가 다녀갔다고 해서 이미 죽여버렸는데. 네놈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
“그랬습니까.”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해도 무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원하는 이야기를 모두 들어서인지 진무혁은 태연히 성준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석 신청은 며칠 내로 처리될 겁니다.”
“네놈은 대체…….”
정말로 약속을 지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문을 열기 전 진무혁은 걸음을 멈추고 성준범을 힐끔 바라봤다.
“조원식에게 모든 걸 빼앗기기 싫다면, 서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뭐?”
“침몰하는 배에서는 쥐새끼가 제일 먼저 도망가는 법이니까요.”
홍 여사는 두말할 것도 없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뒀다가는 그동안 일궈온 모든 것이 모조리 조원식이 독차지하게 될 터.
성준범은 구치소에 와 있고 독사파는 괴멸 직전에 달했으니, 지금 이 순간 가장 웃고 있을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조원식일 것이다.
“빌어먹을.”
그것만은 막아야 하는데, 어서 빨리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울부짖는 성준범을 뒤로하고 무혁은 유유히 구치소를 빠져나왔다.
“멍청한 놈.”
이게 함정이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데, 서로 죽고 죽이고 나면 결국은 한 놈만 남게 될 터.
지금 이대로라면 조원식에게 너무 유리하니 진무혁은 기꺼이 항아리 안에 독을 풀었다.
그 독을 누가 먹든 그가 손해 볼 일은 없으니까.
“어차피 너흰 모두 끝났어.”
복수를 향한 광시곡은 이제 막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전화 속 민재의 사진을 바라보며 무혁은 새 차에 시동을 걸었다.
“민재야.”
위험한 요소 따위는 하나도 남겨두지 않아야 한다.
독을 문 성준범의 이빨이 앞으로 누구를 향하게 될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 터.
[미끼를 물었습니다.]
무혁은 입술을 깨물고 홍옥자 사장에게 메시지를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