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민재가 납치된 모양입니다.
검찰 조사를 받은 이후로 연일 온갖 소식이 줄을 이었다.
무혁은 쏟아지는 메일 내용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내분은 잘 이루어지고 있고.”
이시준의 폭로와 함께 HS엔터 내부의 비리가 함께 드러나며 성준범은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
조장미에게 마약을 넘긴 건을 들켰으니 독사파와 조원식의 사이도 완전히 뒤틀렸을 터.
물고 물리고. 저들끼리 상할 대로 상한 감정이 폭발하면 그동안 알고 있었던 약점들을 이용해 서로를 물어뜯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부터 저들에게 펼쳐질 미래는 한없이 저주에 가깝다.
이른바, 고독(蠱毒)이다.
해충들을 잔뜩 모아 한 항아리에 집어넣으면 그 안에서는 저들끼리 싸움이 벌어진다.
물 한 방울 주지 않고 서로를 잡아먹도록 내버려 둔다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가장 지독한 해충의 독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독사파와 조원식, 성준범. 독한 이들끼리 서로 싸워 마지막 하나가 살아남게 되면, 무혁은 그에게 정당한 법의 심판을 내리면 된다.
함부로 그런 더러운 일에 손을 더럽히기라도 하면 민재가 싫어할 테니까.
무혁은 곧고 길게 뻗은 제 두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바르고 올곧게, 국민을 위해 정의를 실현하는 훌륭한 검사가 되고 싶었다.
제 아버지가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살았던 아버지는 그토록 충성했던 조직에게 버림받은 것도 모자라 친구의 사주로 목숨까지 잃었다.
무엇이 그토록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
여기까지 온 이상 그 역시도 더는 예전의 고결함을 되찾을 수 없다.
‘이미 늦어버린 거겠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오늘따라 한없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감상에 젖어 있을 틈도 없이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성준범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저쪽도 조원식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는데, 이걸 어떻게 반격하게 될지도 새삼 기대가 컸다.
“그리고 소영하 말입니다만.”
“누구와 접촉했습니까.”
소영하가 사무실에 다녀간 이후로 성준범은 얼마 안 남은 집기까지 때려 부수며 패악질을 부렸다고 했다.
분명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셈인데. 다른 회사와 접촉하고 있다고 하니 조만간 FA시장에 나올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 죽어가는 성준범의 관짝에 못질을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터.
하지만 소영하가 접촉한 대상은 무혁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홍 여사?”
“정확한 내용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홍연희 여사도 민재와 소영하가 얽힌 사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텐데.
부른다고 그걸 또 따라가 줄을 댄 걸 보면 소영하도 어지간히 교활한 게 아니다.
홍 여사는 민재를 낳아준 사람이니까.
그녀를 독점하고 싶은 무혁에게는 다른 누구보다 위협이 된다.
안 그래도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홍 여사의 도발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저쪽은 차라리 내가 사라져주길 바라는 거겠지만.’
삼십 년을 찾아 헤맨 딸이니 얼마나 예뻐할지는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석민재가 진짜 이름을 되찾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제 손이 닿지 않을 먼 곳으로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혁 자신도 홍 여사의 의견에는 어느 정도 수긍했다.
그 애가 행복할 수 있다면, 민재를 위해 언제든 곱게 물러나 주려 했다.
자신은 그저 멀리서 민재가 잘 지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애초에 제 것이 될 리 없는 행복이었다 여기며 살아가려는 생각까지 했다.
- 약속해. 날 절대 혼자 두고 떠나버리거나 하지 않겠다고.
모처럼 큰맘 먹고 물러나 주려고 했건만, 사랑스러운 아내께서는 이런 갸륵한 마음도 모르고서 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울먹이던 민재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렸다.
불가항력인 걸 어쩌겠는가, 그가 없으면 민재가 외롭다는데.
이러면 놓아주고 싶어도 놓아줄 수가 없다.
석민재가 기꺼이 자신을 택해주었으니 무혁은 어디까지나 민재의 뜻에 따라 곁에 남을 뿐이다.
아마 이런 마음을 누군가 듣게 된다면 교활하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러고 보니 요즘 정말 이상하긴 한데.’
언제나 목석같기만 하던 여자가 신기할 정도로 애교가 늘었다.
이상할 정도로 잠도 많아지고 무엇보다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곤 했다.
진무혁의 늪에 푹 빠져버린 민재를 볼 때마다 자꾸 바보처럼 웃음이 나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해주는 일은 기적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이런 행복이 나에게 찾아온 걸까.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무혁은 괜히 제 뺨을 꼬집어 보곤 했다.
“진 변호사님?”
“아, 성준범의 행선지는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사무실 입구에 곱슬머리가 비쳤다.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에 무혁은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홍옥자 사장님.”
“인사하러 왔지. A&Z가 좋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로 뒤집어줄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야.”
처음 수임 얘기가 나왔을 때만 해도 일 년이 넘게 가는 장기전을 예상했었다.
하지만 무혁의 활약 덕분에 불과 반년도 되지 않아 성준범의 불신임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아직 방심하기에는 이릅니다.”
“어차피 다 된 밥인걸. 그나저나 사무실에 있는 줄은 몰랐네.”
고마운 인사를 하러 온 것 치고는 태도가 영 이상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라 무혁은 그녀를 제 사무실로 들였다.
“할 말이 있는 겁니까?”
“눈치가 빨라서 좋다니까. 제레미인가, 그 자식은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언니에게 대놓고 시비를 거는 것도 모자라, 무혁도 없는 집에서 다 큰 남자와 매일 붙어 있는 것도 눈에 거슬린다고.
홍옥자 사장은 제레미의 존재 자체가 심히 언짢은 모양이었다.
“미국에서 온 제 손님입니다.”
“제레미 로즈펠트가 본명은 맞아?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정보가 안 나오는걸.”
“신상이 알려졌다간 무슨 보복을 당할지 모르니까요.”
조원식 따위조차 검찰 시절 동료들에게 손을 댈 정도로 악랄한 복수를 자행하고 있는데 그 애를 없애기 위해서라면 능히 암살을 도모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몇 가지 사법 거래를 통해 제레미는 실상 존재함에도 서류상으로는 아예 추적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그냥 못된 꼬맹이 정도로만 봐 주세요. 허우대만 멀쩡할 뿐 아직 철없는 어린애니까.”
“그래도 너무하잖아. 오늘 언니랑 만나기로 약속까지 했는데, 집에 가보니 민재를 데리고 아예 사라졌다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레미가 제 의지로 외출을 하려고 할 가능성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집 앞 편의점도 나가기 싫어하는 놈인데, 하물며 지금처럼 위험한 시기에 먼저 외출을 하자고 조를 만큼 멍청할 리 없다.
“민재가 언니랑 잠시 외출을 하고 싶다고 해서. 위험한 거 아니까 우리 쪽에서 차를 보냈는데 올라가 보니 집에도 없었단 말이야.”
성질 급한 홍 사장은 민재를 어디로 빼돌렸냐며 여기까지 찾아온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모양이라 무혁은 서둘러 제레미에게 붙여둔 위치 추적 장치를 살폈다.
“제레미는 보험이에요. 그 애만 옆에 있다면 민재는 분명 무사할 겁니다.”
“경호원이라는 게 진짜였어?”
“뭐, 비슷하다고 해 두죠.”
민재가 어딜 가든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을 테니 둘이 함께 붙어 있다면야 안전은 보장할 수 있다.
한 시간 반쯤 전, 강변북로를 따라 출발한 제레미의 흔적이 확인됐다.
폰은 일찌감치 빼앗겨 꺼진 모양이지만 다행히 제레미에게 붙여둔 발신기는 여전히 두 사람의 행방을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성준범의 행선지입니다.]
때마침 성준범에게 붙여둔 쪽에서도 연락이 왔다.
서울을 벗어나고 있는 GPS의 신호는 인천 부근을 향하고 있는데, 성준범의 행선지를 보니 아무래도 누가 범인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게 됐다.
“먼저 실례하죠.”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민재가 납치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다. 억지로 끌려간 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대는 작정하고 민재를 노린 모양인데.
“납치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무혁과 홍 사장이 함께 나오자 안 팀장마저 적잖이 당황했다.
무혁은 장소가 적힌 메모를 넘겨주고서 뒷 일을 떠넘겼다.
“실종 신고부터 하고 따라오세요. 힘 좀 쓰는 사람 데려오면 더 좋고요.”
옆에 제레미가 붙어 있다고 해도 안심하기는 이르다.
제레미에게는 적당히 쓰라고 했지만, 지금은 무혁도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운전은 맡기겠습니다. 방해가 없도록 잘 방어해주세요.”
“뭔진 모르지만 맡겨 둬.”
홍 사장의 리무진에 오르자마자 무혁은 노트북을 켰다.
“신호등이 왜 저러지?”
“뭐야, 또 왜 저래?”
갑자기 파란 불 일색이 된 도로 위에서 리무진은 인천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으…….”
납치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정신을 차리자 민재는 어느새 손이 뒤로 묶여 있었다.
실눈을 뜨고 앞을 보자 가방에 들어 있던 폰은 진작에 뺏겨 운전석 옆에 놓여 있다.
조심스레 옆을 짚어보니 제레미 역시 민재와 마찬가지로 손을 뒤로 묶인 채 옆으로 고꾸라져 있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혼자가 아닌 건 정말로 다행이지만 이대로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민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떻게든 허벅지로 밀어 제레미를 깨워보려 애를 썼다.
“여깁니까?”
“그래. 인천항 3부두 창고. 이사님께서 진작 오셨다니 서둘러야 해.”
운전석 쪽에 앉은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사님이란 말만 듣고도 범인이 누구인지는 금방 짐작이 갔다.
‘어떡하지.’
아무래도 성준범에게 잡혀 온 것 같은데, 이러다가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민재는 묶인 손목을 풀어보려 힘을 줬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 제발 좀.’
열심히 깨워보려 했지만, 옷 소매가 축 늘어진 채 제레미는 여전히 의식도 없이 기절한 지 오래였다.
차가 멈추자 곧 대기 중인 사람들이 차 문을 열고 의식을 잃은 두 사람을 창고 안으로 옮겼다.
얼핏 봐도 오십 명은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제레미가 무사히 깨어나도 혼자 저 정도 숫자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은데, 속 편한 그는 완전히 축 늘어진 채 구겨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젠장, 뭐 이렇게 커.”
“조심해서 다뤄. 이사님 말로는 이 자식 해커라는데?”
“해커?”
“A&Z가 미국에서 모셔온 천재 해커래. 내부 자료 빼돌린 놈도 이놈이라는 모양이야.”
제레미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비밀로 하고 있었건만 회사 내부에 여전히 저쪽의 끈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바닥에 쓰러진 척하며 민재는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어쩐지 내부 사정을 소상히 안다 했더니, 곧 저쪽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비싸 보이는 구두의 주인은 성준범이 분명했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벌써 죽은 건가?”
“아닙니다. 마취제로 잠만 재워둔 상태입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청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민재는 바닥에 내버려 두고 성준범은 옆에 쓰러진 제레미 쪽을 힐끔 가리켰다.
차가운 물세례가 퍼부어지고 곧 제레미가 정신을 차렸다.
“이건 뭐야?”
“그쪽이 그렇게 대단한 해커라면서?”
성준범은 직접 무릎까지 꿇고 앞에 서서는 제레미의 머리를 힘껏 낚아챘다.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조사는 해 봤지. 그런데 참 이상하단 말이지, 입국 기록부터 시작해서 우리도 구할 수 있는 건 모조리 구해봤는데도 이 정도로 흔적이 남지 않는 건 처음 봤거든.”
CCTV에서도 노골적으로 삭제되어 있기 일쑤에 평소에는 집 밖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뭔가 흔적을 찾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해봐도 이상할 정도로 어느 지점 이상 지나면 꼬리가 잘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누구인지 알아야 손을 쓸 텐데. 이렇게 뒤져봐도 나오지 않는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다.
“얼마면 돼?”
제레미를 바닥에 앉히고 성준범은 거래를 시도했다.
“뭘 시키려고?”
“말 그대로. 지금 네가 우리 쪽에서 자료를 빼낸 것처럼, 나도 저쪽의 약점이 몹시 궁금하거든.”
필요한 자료만 구해준다면 뭐든 다 해주겠다고.
성준범은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으며 제레미의 마음을 흔들어댔다.
“돈 아니면 여자? 네가 원하는 건 뭐든 구해다 주지.”
“정말 뭐든 다 구할 수 있어?”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해 와야지. 너 하나만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 정도 공은 들이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말이야.”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일축할 줄 알았는데, 어쩐지 제레미는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하며 한참 뜸을 들였다.
“새 요트를 가지고 싶긴 한데.”
“얼마든지. 해운대 앞에 바로 대기시켜 줄 수도 있어.”
“그럼 무혁의 손에서 민재를 빼앗아 줄 수 있어?”
저쪽은 민재를 당장에라도 죽여버리고 싶을 텐데. 제레미가 너무 당당히 요구하자 성준범도 이번만은 퍽 당황한 눈치였다.
“이 여자는…….”
“원한다면 당장 청와대 CCTV도 빼내 줄 수 있어. 그리고 난 민재랑 요트를 타고 떠나면 되겠네.”
제레미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밝았다.
얼토당토않은 요구에 성준범은 이를 악물고 되물었다.
“그 여자를 달라고?”
“응. 난 민재가 좋거든.”
그러니 해치지 말라는 의도가 명백하다. 요구를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하던 순간 성준범은 서둘러 제레미의 손목을 낚아챘다.
제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릴 수 있도록,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가 빛을 발했다.
“너 이 새끼, 설마…….”
“어쩌지. 우리가 여기 있는 거 이미 다 알고 있을 텐데.”
제레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보란 듯이 손목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