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네놈들 따위가 뭘 할 수 있다고!
- 네가 안 대표님 댁 막내로구나. 참 똘똘하게도 생겼네.
어린 시절,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큰 손의 주인은 검찰 내에서도 괴짜로 소문난 검사라고 했다.
진이한 검사와 처음 만났던 날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반듯한 양복의 주름과 진한 눈매. 진중함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만들면 꼭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경망스러운 제 아버지와는 결이 다른 그 남자. 진이한은 어린 그의 마음 깊은 곳에 큰 충격을 줬다.
- 그래서, 검사 노릇을 계속하겠다는 거야?
- 제가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인걸요. 죽는 순간까지도 저는 검찰로 남고 싶습니다.
A&Z로 포섭하려는 아버지의 권유에도 그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가난했던 그는 아버지인 안 대표가 만든 A&Z 장학금을 받고 공부해 검사가 됐다고 했다.
임신한 아내와 함께 인사를 온 자리에서 남긴 그 말이 현실이 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 우리 무혁이를 동생처럼 귀여워 해주렴.
온 집안의 막내둥이인 안 팀장에게 어린 무혁은 친동생처럼 귀여운 존재였다.
크면서 한없이 얄미워지긴 했다지만, 그래도 조원식이 데려가지만 않았다면 아마 제 아버지는 기꺼이 무혁을 양자로 들여 제 동생으로 만들어줬을 것이다.
그래서 진무혁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내 것은 아니지만 다치면 너무나 아픈 손가락.
싫은 소리를 들을 걸 감수하고서라도 무혁의 편이 되어주기로 한 건 오로지 그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종지부를 찍어야 할 싸움입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대로 지켜보기만 하실 겁니까.”
“하지만 우리 입장은…….”
“그러다 무혁이까지 죽고, 모두가 침묵하는 날이 오면 그걸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매서운 힐난에 신 부장은 입을 다물었다. 마약 사건은 반부패수사부의 관할이지만, 그 역시도 하나의 창구일 뿐.
최종적인 결정은 어디까지나 윗선의 마음에 달려 있다.
“법무부 쪽에는 내가 따로 말씀드려놓지.”
“부장님.”
“나도 이번 달까지라서, 뭔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게 마지막이야.”
대검에서 전주지검으로 내려가게 됐다는 건 사실상 옷을 벗으라는 윗선의 압력이나 다름없다.
국무총리 건을 수사하던 검사들도 상당수 지방 발령이 났다는 소식에 안 팀장은 쉽사리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무혁이 검찰에 돌아온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본인도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진 검사의 죽음이 누구의 사주인지 뻔히 알면서도 내부에서는 해당 사건을 묻기에 급급했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았다.
누구도 맡고 싶어 하지 않았던 사건이지만, 그렇기에 누군가는 맡아야 했다.
하지만 진이한 검사의 죽음 이후로 모든 것은 어둠 속에 숨겨진 지 오래였다.
“뭘 하든 좋으니 부디 살아남으라고 전해주게. 진 선배 같은 일은 나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까.”
고지식하기 짝이 없던 제 아버지와 달리 무혁은 검찰을 떠난 후 본격적인 복수에 들어갔다.
조원식 쪽에서 억지로 얽어보려 한들 지금 상황에서 합법적인 루트로 진무혁을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니 언제나처럼 다른 곳으로 손을 뻗을 터.
잠재적으로라도 무혁의 편이 될만한 사람을 모조리 쳐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무혁 본인에게까지 생명의 위협이 퍼졌다.
“안 그래도 최근의 한강대교 차량 추락사고까지, 홍 사장이 얽혔으니 조용히 넘어가긴 힘들 겁니다.”
“전해 놓겠네.”
안 팀장이 해줄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니까, 이 이후는 모두 진무혁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착잡한 심정으로 대검찰청을 나서는 데 무혁에게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이놈도 양반은 아니네, 그래. 또 무슨 일이야.”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네가 시킨 대로 했어. 정말 괜찮은 거냐?”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심각한 그와 달리 전화 너머 무혁의 목소리는 꽤 명랑하기까지 했다.
지금은 도저히 웃을 상황이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해맑은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뭐 좋은 일 있냐? 왜 이렇게 밝아?”
“쉿, 민재가 지금 제 옆에서 자고 있어서요.”
이상한 꿈을 꾸는지 혼자 웅얼대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는 말에 안 팀장은 주먹을 꽉 쥐었다.
뭐가 그리 신이 난 건지 진무혁은 히죽 웃으며 제 아내에 대한 자랑을 늘어놨다.
“요즘 들어 잠도 많아지고, 오늘은 울먹이며 화도 내더라고요.”
“미친놈. 이 심각한 상황에 지금 그딴 소리가 나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조만간 또 시한폭탄 하나가 터질 테니까요.”
성준범은 서둘러 꼬리를 잘라버렸다지만 당사자들은 버젓이 살아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다.
어떻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까.
대로로 나오자 빌딩 위에 우뚝 선 스크린에서 앵커의 브리핑과 함께 자막이 떴다.
[이시준 측, 마약을 권한 건 HS엔터 간부라 밝혀.]
“이건 대체…….”
“어차피 감옥에 갈 거라면, 억울한 건 풀고 가는 게 본인에게도 이로울 테니까요.”
추락하는 곳에 바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성준범은 어떤 얼굴을 하게 될까.
이걸로 혜성 내부에서도 더는 성준범을 감쌀 수 없을 터.
조사를 받는 와중에도 이상할 정도로 여유가 넘치더니, 그 태도는 허세가 아니었나 보다.
제 차가 박살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도 겁먹은 기색 하나 없이 무혁은 안 팀장에게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이제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요?”
***
이른 아침, 구속된 장미를 찾았을 때야 비로소 그는 제 딸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빠, 무혁 오빠 좀 데리고 와. 응?”
“장미야.”
“무혁 오빠는 알아. 오빠는 날 꺼내줄 수 있잖아. 난 진무혁이 필요해.”
철창에 매달려 소리를 지르자 지켜보던 간수들이 장미를 떼어냈다.
겨우 잠시나마 진정된 와중에도 장미는 제 아빠를 부여잡고서 울먹이듯 속삭였다.
“그 여자 때문이야. 그 여자만 없어지면 돼. 그 년만 없어지면 다 될 텐데, 아빠. 대체 뭐 하는 거야? 왜 아직도 못 죽인 거야?”
“조용히 해라.”
“죽여, 죽이란 말이야!!!”
책상을 내리치며 패악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 면회가 중단됐다.
저러다 몇 번이나 싸움이 붙을 뻔했다는 얘기는 경호원들에게도 여러 번 보고를 받긴 했다지만 실제로 상태가 이 정도까지 심각할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쳐 날뛰는 딸의 모습을 보며 조원식의 아내는 그에게 이혼을 통보했다.
“더는 못 하겠어.”
“뭐?”
“장미도 이제 스물아홉이야. 어린 애도 아닌데 싸고도니까 이렇게 된 거 아니야.”
“하지만 우리 장미는 아직 어린…….”
“진무혁 그 애는 대체 뭔데? 데려다 키운 것도 모자라 왜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지는 건데?”
제 딸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 배경에는 진무혁이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무혁을 물고 늘어지는 딸을 말려보려 노력했다지만, 오히려 조원식은 둘을 결혼시키겠다며 안달이 났다.
이제는 지쳤다는 아내의 통보에 조원식은 이를 악물었다.
제 딸의 치부가 전면적으로 드러나며 언제까지나 제 편일 줄 알았던 사람들도 하나둘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짜 그를 분노하게 한 건 따로 있었다.
‘감히 내 딸에게 마약을 권해?’
사방에서 악재가 터져 나오는 이 순간 조원식은 원망의 화살을 독사파에게 돌렸다.
만약 성준범이 발등을 찍고 나가떨어지고 나면 HS엔터라도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독사파 쪽에서 이렇게 제 뒤통수를 치는 건 곤란하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엉덩이 무거우신 우리 변호사님께서 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아무래도 따님 상태가 영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매번 굽신대기만 하던 행동대장의 태도가 오늘따라 매우 고깝다.
“너희 따위가 감히 무슨 염치로 내 딸을 들먹이는 거야.”
“암, 그러시겠지요. 저희는 어디까지나 대단하신 변호사님 뒤치다꺼리나 하는 몸이니까요.”
대놓고 던지는 비아냥이 심히 도를 넘었다.
멱살을 잡자 옆에 있던 조직원들이 조원식을 뿌리쳐 바닥에 밀쳤다.
“대표님!”
“벌써 두 명이 죽고 열 명이 넘게 체포됐습니다. 당신이 쫓으라고 한 놈, 별거 없다고 한 것치고는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건!”
“이제는 덮어주는 것도 정도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따님을 넘겼습니다. 덕분에 저희도 한시름 덜어낸 셈이지요.”
“뭐야?”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돌아가신 형님께서 부탁하셔서 저도 참아보려 했습니다만, 저도 이제는 대표님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HS엔터라도 손에 넣는 게 바로 코앞인 상황인데. 지금 제 귀에 들린 말이 무슨 말인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고작해야 주먹다짐이나 할 줄 아는 놈들이 저 없이 뭘 하겠다고.
분노한 조원식이 달려들어 보려 했지만, 덩치 큰 조직원들의 힘을 이겨내는 건 역부족이다.
“저희도 언제까지 음지에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네놈들 따위가 뭘 할 수 있다고!”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요. 애초에 저희는 대표님 댁 머슴이 아니니까요.”
기르던 개에게 목덜미가 물렸다.
이대로라면 혜성을 삼키려고 벌인 그 수많은 노력이 전부 독사파의 배만 불려주는 꼴이 되게 생겼다.
“개자식들. 네놈들이 감히…….”
“성 이사님과의 일도 저희가 직접 조율할 테니 대표님께서는 이제 슬슬 은퇴하고 물러나시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배알이 뒤틀린 성준범이 자신을 따돌리고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는 몰라도 이대로 그냥 물러나 줄수는 없다.
자존심이 제대로 상한 조원식은 이를 악물었다.
“네놈이 그렇게 나온다면야.”
어쩔 수 없다. 그 역시 반격을 준비하는 수밖에.
“나다. 이시준 기자회견 준비시켜.”
성준범이 쓰다 버린 이들을 주워놓은 건 이때를 위해서였다.
아들뻘인 성 이사에게 엉덩이를 맞은 사실을 차마 언급할 수는 없으니 대신 소영하의 매니저들이라도 포섭할 생각이었는데.
어쩐지 소영하 쪽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하기만 했다.
“네놈이 날 무시하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진무혁을 손봐주는 것도 일단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이상할 정도로 교묘하게 잘 빠져나가는 비법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럴수록 내분부터 정리해야 한다.
‘그나저나 저놈들이 뭘 믿고 저러는 거지.’
성준범 쪽에서 굳이 무리해서 이렇게 움직이는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소영하의 이름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기껏해야 성 이사가 기르는 새끼 고양이 주제에, 그런 놈이 저를 길러준 주인을 물어뜯을 수 있을 리 없다.
어떻게든 누가 우위에 서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조원식은 제대로 이를 갈았다.
***
“잠시 병원에 다녀올게.”
아무래도 임신이 분명한 것 같다.
안 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민재는 결국 휴직계를 쓰기로 했다.
어차피 제대로 출근도 못 하고 안전 문제로 업무에서는 거의 배제된 상황인 데다, 일단 무리해서 아이에게 해가 가는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다.
‘이 아이는…….’
무혁은 애써 괜찮다고 말했지만, 할머니의 말이 눈에 밟혔다.
외로운 사람이니까 그 누구보다 제 핏줄을 원할 거라고.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만약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면 너무 좋아서 펑펑 울지도 모른다.
“혼자는 절대 못 보내.”
“그럼 홍 여사님하고 같이 다녀올 테니까, 제레미는 집에 있어.”
“그 사람은 안 돼, 싫어.”
“왜?”
이상할 정도로 홍 여사를 싫어하는 제레미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죽어도 따라가겠다고 오기를 부리는 바람에 별수 없이 백기를 들었다.
“제레미도 바쁜 거 아니었어?”
“지금은 딱히. 파트너도 없는 난 반쪽짜리일 뿐인걸.”
“그게 무슨 말이야?”
“비밀.”
민재를 놀려먹는 게 그리도 즐거운 건지, 제레미는 깔깔거리며 민재를 꼭 껴안았다.
그렇게 싫다고 투덜거릴 때는 언제고 한 번 들통나니 이제는 속내를 숨기지도 않았다.
“무혁의 말이 맞아. 민재는 귀여워.”
“마귀할멈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그런 식으로 아부해도 소용없어.”
“말만 그렇게 하지 상냥하잖아. 나도 민재 같은 엄마 밑에서 태어나면 좋았을 텐데.”
갑자기 훅하고 치고 나오니, 또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오늘만은 제대로 한 마디 해주려고 했는데 이러면 또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제레미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
“무혁도 좋고, 민재도 좋아.”
“그런 의미 말고. 좋아하는 여자 말이야.”
외국 애들은 좀 더 빠르다고 했었는데. 제레미를 보고 있으면 진짜 꼭 아들 같아서 괜히 마음이 쓰였다.
민재의 물음에 제레미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며 버럭 화부터 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 요즘엔 유치원에서도 서로 사귄다는데. 설마 연애해본 적 없어?”
제레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민재의 폰을 가져다줬다.
“전화나 받아.”
“여보세요.”
“홍 여사님이 보내셨습니다만.”
“벌써 오셨어요?”
연락한 지 채 십 분도 되지 않아 홍 여사가 차를 보냈다.
제레미는 제 차로 가면 된다며 입이 댓 발로 나왔지만, 민재는 손을 한 대 톡 치고서 눈을 흘겼다.
“싫으면 제레미는 혼자 와.”
“따라가면 될 거 아니야.”
투덜대며 제레미는 주섬주섬 무언가를 챙기기 바빴다.
여전히 잔뜩 날을 세운 제레미는 홍 여사가 보낸 차조차도 못마땅한 듯 노려봤다.
“지난번 그 차가 아닌데.”
“제발 조용히 하고 타.”
평소와 달리 일반 세단을 보낸 건 좀 의외지만, 민재는 의심 없이 차에 올랐다.
지하 주차장을 벗어나는 순간 익숙한 리무진이 창문 옆을 스쳐 지나갔다.
“어?”
순간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차량의 문이 잠겼다.
함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