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민재가 외로워지는 일은 없을 거야.
둘이서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건 민재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 확실한데, 진무혁은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테니 만만한 제레미를 공략하기로 했다.
“솔직하게 말해. 저건 대체 누가 꾸민 짓이야?”
“난 모른다니까. 가, 가까이 오지 마.”
민재가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제레미는 겁에 질린 눈으로 뒷걸음질 쳤다.
저렇게 속이 훤히 보이는 주제에 어설픈 거짓말이나 해대는 버릇은 일찌감치 고쳐줘야 한다.
옆구리를 신나게 간질이기 시작하자 제레미는 미친 듯이 웃으며 결국 백기를 들었다.
“항복, 항복할 테니까 살려줘.”
“어서 말해. 한 마디도 빠짐없이 전부!”
“말한 거 들키면 무혁에게 혼날 텐데.”
울먹이면서도 제레미는 지금껏 꾸몄던 음모에 대해 소상히 털어놓았다.
조장미의 검찰 조사를 시작으로 성준범 역시 조만간 소환 조사가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횡령?”
“응. 혜성 내부에서 배임 혐의로 고소 들어갈 거야. 친부모 명의로 돌려놓은 재산만 엄청나더라고.”
“왜 그런 짓을…….”
“무혁이 그랬어. 탁란이라고.”
“탁란?”
어미 새가 먹이를 구하러 간 사이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있는 알을 모조리 둥지 밖으로 밀어낸다.
그리고는 다른 새의 둥지에 제 알을 낳는다.
제 알이 바닥에 떨어져 깨진 줄도 모르고서, 둥지의 주인은 뻐꾸기 새끼를 친 자식인 양 정성껏 키운다.
“패러사이트, 기생충 같은 거라고 했어.”
결과적으로 어미 새는 완연히 자란 뻐꾸기를 보고 나서야 제 새끼가 아님을 알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누가 뭐라 해도 성준범은 성아린 실종의 가장 큰 수혜자였으니까.
“그렇다면…….”
“화가 난 어미 새가 뻐꾸기를 물어 죽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니까.”
영롱하게 빛나는 제레미의 눈동자에는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무혁이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으레 짐작이 갔다.
성아린이 사라진 시점에서,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혜성을 제 것처럼 차지했으니까.
결과적으로 그 결정은 혜성의 몰락을 터트린 시발점이 아닐 수 없으니 이건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이제 괜찮은 거야?”
“주주총회까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번 HS엔터가 휘청이며 주가가 내려간 사이 특정 사모펀드가 주식을 대량으로 매입한 흔적이 나타났다.
만약 그게 독사파 쪽의 자금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그래서 그렇게 바쁜 거구나.”
“검찰 조사 건이 끝났다고 한가해지는 건 아니래. 저쪽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내부감사 자료까지 모두 넘어간 상황이지만 김일훈 지검장에 대한 구속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A&Z와 혜성 측의 적극적인 항의로 무혁의 이름이 공개되진 않았다지만, 검찰 내부의 상황이 제법 복잡해 보였다.
“잠시만.”
민재는 동기 몇 명에게 전화를 걸어 동부 지검 내부의 사정에 대해 물었다.
검사 시보 중인 동기는 혀를 끌끌 차며 지난번, 집들이를 왔던 검사들의 행방에 대해 알려줬다.
“강 검사는 영월 지청, 주서희 검사는 포항 지청으로 발령 났어. 사실상 좌천이지.”
“좌천이라고?”
“두 사람 다 내부에서는 일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인데. 한직으로 쫓겨난 걸 보면 뻔한 거잖아.”
특히나 강 검사는 동부지검에 온 지 반년 만에 방출이라고.
동기도 길게 말할 수 없다며 말을 아끼고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남들도 다 쉽게 알 수 있는 사실만 알려주고 더 말도 잇지 못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대로 입막음을 시킨 모양이었다.
“괜찮을까?”
“어차피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니까, 미련 따윈 없을걸?”
정 안되면 함께 미국으로 가면 된다는 제레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미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을 만큼, 조원식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라지만.
‘그럼 나는.’
무혁을 선뜻 따라나서겠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심각해진 민재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제레미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벨뷰(Bellevue)에 있는 내 아파트가 얼마나 큰데. 민재만 좋다면 거기에서 제일 햇살이 잘 드는 방을 내줄 수도 있어.”
“나 싫어한다며.”
“그, 그건!”
“내 얼굴도 보기 싫어하면서 방까지 내준다는 건, 나랑 같이 살고 싶다는 뜻 맞아?”
무심결에 속내를 드러내 버린 제레미는 민재의 도발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싫어한다고 미워한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른 주제에.
이 까탈스러운 존재께서는 그나마 민재에게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연 듯했다.
“따, 딱히! 갈 곳 없는 민재는 불쌍하니까 내가 거둬주겠다는 것뿐이야.”
“내가 왜 갈 곳이 없어?”
“무혁이 여기까지 정리하면 읍…….”
뭐라고 말을 하다 말고 제레미는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이 집을 정리한다니. 고개를 갸우뚱하는 민재 앞에서 제레미는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손을 버둥거리며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하긴, 이제 혜성 건이 마무리되면 굳이 여기에 살 이유가 없긴 하겠네.”
예전 한용식 변호사랑 했던 이야기처럼 무혁도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굳이 A&Z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는 건 알고 있지만.
“서운해.”
“민재, 아니, 그게 그러니까…….”
“다녀왔어.”
민재가 병가를 쓴 탓에 무혁의 귀가도 덩달아 빨라졌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무혁의 눈에 울먹이는 민재와 어쩔 줄 모르는 제레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아, 일해야지. 일. 일할 거야.”
제레미가 쌩하고 방으로 도망가버리자 어색하게 둘만 남았다.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서 무혁은 잔뜩 풀이 죽은 민재의 앞에 섰다.
“몸은 좀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야?”
무슨 일이 있는 것만 같은데, 무혁은 민재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뉴스에 나온 조장미 이야기에 관해 묻자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말 그대로, 경찰에서 조사하다가 거기까지 타고 올라간 거뿐이야.”
“하지만…….”
“지검장님도 조만간 풀려날 거야. 조원식이 여러모로 손을 쓴 모양이지만, 조장미 일이 터지면서 저쪽도 슬슬 초조해진 상황이거든.”
“정말?”
불안해하는 민재를 침대에 눕히고 무혁은 재킷만 벗은 채 민재의 옆에 기대 누웠다.
채 벗지 못한 넥타이를 풀어주며 민재는 염려 섞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어디 가는 거 아니지?”
“내가 널 두고 가긴 어딜 가.”
“무서워.”
이대로 이 사람이 떠나버린다면 그땐 정말 외톨이가 될지도 모르는데.
요즘 들어 몸이 이상해진 탓인지 민재는 무혁만 보면 자꾸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혼자 있기 싫어.”
“오늘따라 우리 민재가 왜 이렇게 귀엽게 구는 걸까.”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민재는 무혁의 품에 와락 안겼다.
따뜻하고 넓은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서 민재는 아까 들은 이야기들을 차분히 정리했다.
무혁의 동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현실적으로 무혁의 검찰 복귀 역시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본인은 괜찮다고 해도, 이 상황이 달가울 리 없다.
“약속해. 날 절대 혼자 두고 떠나버리거나 하지 않겠다고.”
“우리 민재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그건…….”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사람처럼 진무혁을 여기에 잡아둘 빌미가 없다.
민재가 할머니 때문에 힘든 A&Z 생활을 버텨왔던 것처럼.
그가 지금의 이 수난을 버티며 여기에 있는 이유 또한 하나뿐일 터.
“외로워서.”
할머니의 재혼이 결정된 이후로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해졌다.
진심으로 할머니를 좋아하는 안 대표의 모습도 그렇고, 할머니에게는 분명 잘된 일이겠지만 그 모습을 보며 민재는 더욱 외로워졌다.
“나한텐 이젠 당신밖에 없는데…….”
울먹이는 민재의 등을 토닥이면서도 무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민재가 우는데 난 왜 이렇게 기쁠까.”
“나빴어, 진짜!”
베개로 한 대 때려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무혁은 재빠르게 피하고서는 민재를 번쩍 들어 제품에 꼭 껴안았다.
“우리 민재. 얼음 공주 시절은 어디로 가고 왜 이렇게 귀여워진 걸까.”
“놀리지 마. 요새 자꾸 이상해져서 그런 거니까.”
“난 진심으로 기쁜데. 좀 더 응석 부려줘.”
뺨에 살짝이 입을 맞추며 무혁은 몇 번이고 더 말해달라며 떼를 썼다.
무혁의 품에 안겨 있으면 울렁거리던 속도 좀 가라앉는 것 같아서, 민재는 그의 목덜미를 꼭 껴안은 채 몇 번이고 속삭였다.
“옆에 있어 줘.”
“응.”
“아무 데도 가지 마.”
“이번 일 끝나면, 난 언제까지나 민재 옆에 있을 거야.”
“정말이지?”
“그럼, 물론이지. 대신…….”
은근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무혁은 민재의 셔츠 안에 손을 넣었다.
무혁의 눈동자 안에 제 모습이 가득 비치는 게 좋아서 민재는 그런 무혁의 셔츠 단추를 풀며 생긋 웃었다.
“밝히긴.”
“싫어?”
부드러운 입술을 살짝 핥으며 민재는 고개를 저었다.
탐욕 섞인 그의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허전해진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이러는 거, 다른 사람들도 알아?”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민재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무혁은 곧게 뻗은 손목의 선을 따라 키스를 흩뿌렸다.
목선을 따라 훑으며 무혁의 숨결이 의식을 메워나갔다.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그는 언제나 공들여 민재의 반응을 살피곤 했다.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혼자서는 못 보내.”
어느새 중독되어버린 것처럼 민재는 무혁의 품에 안긴 채 참지 못한 신음을 쏟아냈다.
그냥 이대로 단둘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함께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무혁이 어째서 그토록 불안해한 건지도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런 거였구나.’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시간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며 민재도 어느새 조금은 무혁의 마음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건지.
어째서 이 사람이어야 하는 건지.
“사랑해, 무혁 씨.”
그의 텅 빈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게 자신뿐인 거라면.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나면 제게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진무혁을 만나고 난 이후로 점점 욕심이 생겼다.
원래도 불규칙하던 생리가 요즘 들어 더욱 늦어지는 것도 그렇고.
이상할 정도로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거꾸로 날짜를 계산해 보니 리조트에서 돌아온 이후와 얼추 날짜도 맞다.
‘만약 정말 아이가 생긴 거라면, 기뻐해 줄까?’
배에 손을 얹은 채 민재는 물끄러미 무혁을 바라봤다.
“아이, 갖고 싶다고 했었지?”
“이제 그 문제는 신경 쓰지 마. 그러지 않아도,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하니까.”
“하지만!”
“그냥 좀 욕심을 부린 것뿐이야.”
무혁은 민재의 잘록한 허리에 손을 감고서 동그란 배꼽에 입을 맞췄다.
아직은 독점하고 싶다며 엉겨 붙는 통에 무어라 쉽사리 말을 꺼내기도 어려워졌다.
“제레미 하나로도 벅찬데 아이가 생기면, 그땐 민재랑 둘이 있을 시간이 더 줄어드는 거잖아.”
“둘이 있을 시간은 있고?”
민재는 제레미에게만 맡겨두고 매일 바쁘게 돌아다녔던 주제에.
잔뜩 눈을 흘기자 무혁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민재를 제 위에 앉혔다.
“뭐가 어떻게 되든, 민재가 외로워지는 일은 없을 거야.”
“정말?”
“그럼. 물론이지.”
그제야 겨우 민재도 웃을 수 있었다.
만약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혁은 언제나 곁에 있을 테니까.
지금은 아직은 확실하지 않으니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민재는 조심스럽게 무혁의 심중을 떠봤다.
“무혁 씨는 딸이 좋아, 아들이 좋아?”
“민재를 닮았다면 어느 쪽이든 좋아.”
“날 안 닮고 무혁 씨만 닮으면 미워할 거야?”
“그럴 리가.”
이제 그 문제는 신경 쓰지 말라며 민재를 꼭 껴안아 줬다.
“절대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맹세처럼 몇 번이고 되뇌는 그 말의 진짜 의미가 뭐였는지.
당시의 민재는 전혀 알지 못했다.
***
안 팀장은 오랜만에 제대로 양복을 갖춰 입었다.
다시는 이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으리라 맹세했건만, 그래도 오늘은 엄연한 A&Z의 대표 자격으로 대검찰청까지 왔다.
“내가 우리 안 판사를 다 불러보고, 사람이 살다 보면 참 별일이 다 있어.”
대검찰청 반부패부장 신혁준은 악명 높은 후배를 앞에 두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오늘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거지만 그래도 진무혁의 거취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그러니까 A&Z 쪽은 아니라는 거지.”
“혜성 쪽에서도 충분히 해명했는데, 이런 일로 계속 불려 다니게 된 게 오히려 당황스럽습니다.”
“진무혁이 검찰로 돌아온다는 건 사실인가?”
어차피 돌아와 봐야 일개 검사일 뿐일 테지만, 적어도 진무혁이 검찰에 있으면 조원식의 입김을 덜어낼 수는 있다.
알게 모르게 외압이 가해진 탓에 검찰 내부의 불만이 나날이 커지자 저쪽도 애써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무리수를 둔 셈이다.
“제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데, 그 자식이 어떻게 검찰로 돌아갈까요.”
“그 일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진이한 검사 혼자 뒤집어쓴 이유가 뭐였겠습니까.”
독사파와 검찰의 대립은 뿌리 깊은 원한으로 남았다.
괴멸 직전까지 몰렸던 조직원 중 대부분은 가벼운 복역을 마치고 지금은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와 여전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저는 못 말립니다. 무혁이가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는 부장님도 알고 계실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