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민재한테 사과해.
처음 장미가 찾아왔던 날부터 무혁은 줄곧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상할 정도로 야윈 몸, 창백한 인상, 그리고 신경질적인 태도까지.
자기만의 세상에 빠진 것처럼 남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장미와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어째서 장미가…….”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조만간 알게 될 겁니다.”
냉정한 한마디를 덧대고서 무혁은 전화를 끊었다.
지난 번 혜성 소속 연예인들의 마약 투약 사실을 밝혀낸 경찰은 치밀한 조사 끝에 조장미에게까지 조사의 끈이 닿았다.
무혁은 그저.
몇 가지 실마리만 던져줬을 뿐.
“협조 감사드립니다.”
“수사, 괜찮은 겁니까.”
고위층까지 여결된 마약 스캔들이 터지며 동부지검은 지금 지검장까지 옷을 벗게 생길 만큼 외압에 시달리고 있다.
담당 경찰은 쓴웃음을 지으며 지금까지 확보한 증거를 한 번 더 훑었다.
“어쩌겠습니까. 저희는 그저 일선에서 열심히 뛸 뿐입니다.”
판매한 쪽도 이미 자백했고, 독사파의 커넥션을 따라 전파된 사실이 명백하니 쉽게 묻히기는 힘들 거라고.
차라리 일을 더 키우게 된다면 그때는 조원식이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덮기는 어렵다.
“알겠습니다.”
검사 결과를 조작하지 않는 이상 장미의 유죄는 명백하다. 아마 이것을 시작으로 조원식도 하나둘 누리던 것들을 잃어갈 터.
“그래서, 속이 시원해?”
“나쁘진 않네.”
무혁은 그저 제 책상에 마약 관련 자료를 놓아둔 것뿐이었다.
몰래 들어온 장미가 그걸 훔쳐보고, 관련된 지식을 열심히 쌓은 건 엄연히 별개의 문제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제 발로 나락의 구렁텅이에 발을 들인 건 장미 자신이니까.
“조원식도 독사파가 제 딸에게 마약을 공급할 거라곤 예상 못 했을 테니까.”
“일부러 준 거야?”
“일종의 보험인 셈이지. 조원식은 애초에 자기 자신 말고는 누구도 믿지 않으니까.”
독사파 차원에서도 조원식을 도저히 믿을 수 없으니 저런 식으로라도 약점을 잡아두려 했을 터.
만약 저들의 계획이 모두 성공했다면, 성준범은 조원식에게 배신당하고 조원식 역시도 독사파에게 뒤통수를 맞았을 것이 분명하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악의 굴레다. 끔찍한 현장을 뒤로하고 무혁은 제레미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괜찮아?”
“차 사고가 나긴 했는데, 난 마침 다른 곳에 있어서 멀쩡해.”
“제레미한테 들었어. 진짜 괜찮은 거지?”
덩달아 창백해진 민재를 보며 무혁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요즘 들어 스트레스가 심한 건지 민재는 나날이 야위어 갔다.
밥도 제대로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어쩐지 멍하니 있는 시간만 길어져서, 무혁은 그런 민재가 더욱 걱정이었다.
“잘 찌워놨더니, 또 이렇게 야위어서 어떡해.”
“입맛이 없어. 과일은 좀 먹겠는데 나머지는 도통 들어가질 않아.”
“피자도? 그 맛있는 걸 왜 못 먹어?”
무신경한 제레미의 말에 민재는 듣는 것조차 느끼하다며 일찌감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요즘 들어 이상할 정도로 잠이 늘어난 터라 그 모습을 보는 무혁도 점점 애가 달았다.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그냥 좀 피곤한 거지 아픈 건 아니래. 병원이 싫은가 봐.”
“곤란한데.”
지검장과 얽힌 문제로 며칠은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하건만. 고민에 빠진 무혁을 보며 제레미가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야?”
“조원식은 쓰레기지만 제 딸은 아주 끔찍이 여기거든.”
“그거야 그렇겠지.”
모든 게 제 뜻대로 될 것처럼 굴던 그도 제 성이 모래처럼 흩날릴 거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을 터.
조장미라는 약점이 한 번 드러나기 시작한다면 그동안 제 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들도 차례로 등을 돌리게 될 테니.
그렇게 하나둘 끈이 끊어지고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을 때.
“그때,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만들면 되는 거지.”
섣불리 죽여버리는 정도로는 복수가 될 수 없다. 세상이 지옥으로 돌변한 후 오히려 죽음으로 도망치는 꼴 따위는 더더욱 용납할 수 없다.
모든 죄는 살아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니까.
굳이 죽여버린다거나, 그런 식으로 무리수를 둘 생각은 없다.
스스로 죽고 싶어질 만큼 괴롭힐 생각은 가득하지만.
“그리고는 민재에게, 그동안 잃어버린 모든 걸 되돌려 줄 거야.”
독사파를 정리하고, 성준범을 파멸시키고 나면야 민재의 정체를 밝히는 것도 더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원식이 정리되고 나면, 제게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민재만은 행복해질 수 있게 해야 한다.
원래 제 위치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들 품에 돌아가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이 가짜 결혼도 막을 내리겠지.’
냉랭하던 홍 여사의 말이 뇌리에 남았다. 잠든 민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혁은 괴로운 마음을 애써 삼켰다.
“미안해.”
왼손에 낀 반지에 입을 맞추고 무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제 것이 될 리가 없는 행복이었는데.
곤란한 민재의 상황을 보며 문득 욕심이 생겼다.
만약 이 상황에서 손을 뻗게 된다면, 그렇다면 행여나 그녀가 제 것이 되지 않을까.
계획은 성공했고 민재는 일말의 의심 하나 없이 제게 마음을 열어줬다.
사랑한다고 속삭여줄 때마다 아리던 마음에 단비가 내렸다.
“너무 좋아서 그랬어.”
홍 여사의 말대로 민재에게는 어쩌면 부모님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다른 모든 건 줄 수 있다 해도, 무혁이 해줄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그의 발목을 잡게 될 줄은 몰랐다.
비록 자신이 없다고 해도 민재의 곁에는 여전히 가족들이 있을 테니까.
잠시나마 꿈을 꿨던 걸지도 모른다. 민재를 닮은 아이의 손을 잡고서, 셋이 함께 살아가는 행복한 꿈이었다.
만약 조원식이 쓰러지고 나면 그 역시도 무사할 수는 없을 테니까.
어차피 이 나라에 미련 따위는 없다지만, 굳이 돌아오게 된 건 오직 단 하나.
민재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안 자?”
언제나 깊이 잠들던 민재가 웬일로 잠까지 설쳤다.
무혁이 온 걸 알아차린 그녀는 비몽사몽 잠에 취한 채 무혁을 품에 꼭 껴안았다.
그녀의 향기가 이토록 달콤하다는 사실을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민재의 사랑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독처럼 지독하게 다디달았다.
“그딴 놈은 그냥 아주 본때를 보여줘야 해.”
“조원식?”
“조원식이든 성준범이든. 당신 괴롭히는 놈들은 다 부숴버릴 거야.”
꿈인 줄 아는 건지 평소보다 과격한 말에 웃음이 터졌다.
평소에도 이렇게 솔직하면 좀 좋을까. 적어도 민재가 이렇게 제 편으로 있어 주는 한, 무혁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래야겠지.”
다른 이는 몰라도 조원식만은 절대 편하게 죽을 수 없게 해주리라.
제게는 과분한 행복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민재가 두 번 다시 아프지 않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둬야 한다.
“미안해 민재야.”
아마 내 마음을 알게 된다면 넌 또 울게 되겠지만.
민재는 금방 자신 따위는 잊고,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잠든 민재의 뺨에 입을 맞추고서 무혁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
“젠장!!!”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집기가 부서졌다.
요즘 들어 더욱 신경질적인 성준범의 행태에 직원들은 연일 두려움에 떨었다.
“이사님 안에 계신가요?”
“소영하 씨.”
스캔들 이후 자숙을 겸해 소영하까지 쉬고 있으니 회사 내부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연일 이어졌다.
“제가 왔다고 전해주세요.”
“하지만 지금은…….”
내부 분위기가 영 좋지 않은데.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성준범은 좀처럼 분노를 식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들어갔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영하는 유유히 성준범의 사무실에 발을 들였다.
“오랜만이네요. 성준범 이사님.”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누가 들여보냈어?”
“얘기 들었어. 이제 혜성 후계자 자리도 간당간당한 거면 HS엔터에도 계속 있기 힘들겠네.”
“뭐야?”
대놓고 하는 반말과 조롱에 그는 대뜸 손부터 올렸다.
하지만 소영하도 곱게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뺨을 후려치려는 성준범의 손을 막아내고서 소영하는 예의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그를 조롱했다.
“형은 이미 끝났어.”
있는 힘껏 팔을 뿌리치고서 소영하는 자켓 안에 준비해온 서류를 들이밀었다.
곱게 접힌 내용을 확인한 성준범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전속계약 해지……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말 그대로. 전속계약 해지할 거야. FA시장에 나간다고 하니 부르는 곳도 많더라고.”
“네가 HS엔터를 떠난다고?”
빛 하나 못 보던 신인 시절부터 키워준 의리를 배신하고 뒤통수를 친다는 말에 목에 핏대가 절로 솟았다.
분노한 그를 앞에 두고 소영하는 차근차근 조항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위약금은 첫 계약금의 열 배. 오천만 원 정도지? 그 정도야 얼마든지 줄 수 있지. 그동안 의리로 일해온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어.”
그동안 별다른 조건을 달지 않고서 묵시적으로 계약을 연장해 왔으니 저쪽도 소영하가 이렇게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너 이 자식…….”
“내가 그동안 왜 그리도 빈번하게 조장미를 만났을까? 한 번 생각이라도 해 본 적은 있어?”
대형 기획사라고는 해도 간판이나 다름없는 소영하가 발을 빼게 된다면, 회사가 기울어지지는 않아도 이미 위태로운 성준범에게는 사실상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그러게, 민재한테 왜 그랬어.”
돌이켜 곱씹을수록 소영하의 머릿속에는 미련만이 남았다.
민재를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언제까지나 제 곁에 있어 줄 거라는 생각은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이제는 제 얼굴조차 봐주지 않는 민재를 보고 깨달았다.
그러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쓰린 속을 안고서 소영하는 성준범 앞에 반반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민재한테 사과해.”
“뭐?”
“나와 계약을 해지할 건지, 아니면 민재에게 정식으로 사과할 건지. 알량한 자존심을 지킬지 자리를 지켜낼지 선택하라고 했어.”
영악한 소영하는 자신이 가진 무기를 효과적으로 휘두르는 법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함부로 손을 대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 성준범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소영하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지금 아주 간이 배밖에 나왔구나?”
“형이 나한테 손을 대는 순간 그나마 오천도 못 받는 수가 있어. 우리 매니저들도 팼다며? 진단서 다 나한테 있는데.”
완벽하게 덜미를 잡히고 나니 형세가 역전됐다.
지금도 경영권 문제로 궁지에 몰린 성준범에 소영하까지 나가게 된다면, 이제는 그 자리조차 부지하지 못하고 쫓겨나게 될 터.
“잘 생각해봐.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저 성질머리에 민재에게 순순히 사과하는 모습은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든 다른 길을 강구하다, 또 헛발을 디뎌 결국 제 발로 나락에 떨어지게 될 터.
썩어서 끊어질 동앗줄이라면 놓아버리는 게 낫다.
최후통첩을 날리고 건물을 나서며 소영하는 물끄러미 밤 하늘을 올려다 봤다.
- 저게 북두칠성이야. 서울에선 보기 힘든데, 오늘은 잘 보이네.
아무도 없는 밤에는 모자를 눌러쓰고 민재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연애였기에,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외출은 고작 그 정도였다.
- 북두칠성?
- 그리고 저기 W 모양이 카시오페이아자리. 나쁜 왕비는 포세이돈의 미움을 받아 평생 거꾸로 앉은 채 밤하늘에 매달리는 벌을 받았다고 했어.
- 민재는 참 아는 게 많아. 정말 대단해.
- 이런 걸 그렇게 재밌어하는 사람도 당신뿐일걸?
일찌감치 학교도 때려치운 자신과 달리 민재는 아는 게 많았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뭐든 재미있어서 함께 있으면 언제나 시간 가는 줄도 모를 만큼 즐거웠다.
“미안해, 민재야.”
몇 번이고 후회해 본들 이미 늦었다지만 그녀가 없는 밤은 너무나 외로워 견딜 수 없다.
매니저도 바뀌었고, 이렇다 할 친구도 없다.
제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가식적으로만 그를 대했고, 약간의 약점이라도 보였다가는 어떻게 물어뜯길지 모르니 그 역시도 속내를 내보이지 않았다.
그런 제 속을 모두 내보일 수 있는 상대는 오직 석민재 하나 뿐이었는데.
“나 너무 외로워.”
뒤늦게 후회해 본들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됐다.
화려한 가로등의 불빛을 피해 빌딩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데 양복 입은 남자 하나가 소영하에게 다가왔다.
“소영하 씨, 맞습니까.”
“네. 저 소영하예요.”
“함께 가시죠. 홍연희 고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준범의 파멸을 위해서라면야 그 역시도 기꺼이 힘을 보탤 의향이 있다.
침몰하는 배에 남아서까지 지켜야 할 의리는 없으니까, 소영하는 거대한 HS엔터 빌딩을 뒤로하고 자신을 마중 나온 차에 올랐다.
***
“어지러워.”
빈혈기가 심해진 민재는 아예 병가를 내고 쉬기로 했다.
검찰 조사에 얽히며 바빠진 무혁 대신 제레미가 병상에 누운 민재의 곁을 지켰다.
“병원 가자. 내가 데리고 갈래.”
“하지 마.”
민재는 비틀대며 거실로 나와 찬물로 겨우 속을 달랬다.
아직은 시기가 좋지 않으니까, 소파에 앉아 TV를 켜자 마침 뜻밖의 뉴스가 흘러나왔다.
[경찰은 상습적으로 필로폰을 투여한 혐의로 대형 로펌 대표의 자녀, J모 씨를 긴급 체포하였으며…….]
자료화면 속 긴 생머리의 여자가 낯이 익었다.
바로 시선을 돌리자 제레미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저게 뭐? 난 아무것도 몰라.”
차라리 대놓고 말을 하지. 속이 훤히 보이는 수작에 민재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