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74화 (74/103)

74화. 나는 내 딸을 돌려받고 싶어요.

조사는 싱겁게 끝났다. 기세등등한 문성희 변호사는 지하에 내려온 후에야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나한테 빚진 거다?”

“왜 도와주신 겁니까.”

무혁에게 호의적일 이유가 없는 사람인데 굳이 도와준 이유를 알 수 없다.

여전히 굳은 표정의 무혁을 보며 문 변호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의뢰를 받았으니까.”

“의뢰?”

지하주차장으로 가니 선글라스를 낀 장신의 여자가 눈에 띄었다.

“꼴 좋구나.”

비웃는 홍옥자를 마주하고서 무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저는 먼저 실례하죠.”

무사히 무혁을 구해낸 문성희 변호사가 떠나고 난 후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홍옥자 여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없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녀는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와 무혁의 손에 들린 차 키를 빼앗았다.

“이 차는 집에 잘 갖다놓으라고 할 테니까, 넌 내 차에 타.”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언니가 널 만나고 싶어 해. 날 여기까지 보낸 것도 우리 언니인걸.”

너무나 노골적인 태도가 오히려 무혁의 목을 조였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랐을 민재 때문에라도 일찍 집에 가야만 하는데.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힐 줄은 몰랐다.

“이번 일은 어떻게 된 거야?”

“아무것도 문제 될 건 없습니다.”

“너는 무사히 빠져나간다 쳐도 네 옛 상사는 안 그래 보이던데.”

날카로운 조롱에 미간을 찌푸렸다.

일부러 자존심을 건드리는 언행만 보아도 홍옥자는 더는 무혁의 편이 아닌 듯 보였다.

‘들킨 거겠지.’

굴러들어온 돌을 찍어내고 화려한 저택에도 봄이 찾아왔다.

옥자를 따라 저택의 복도를 걷던 중 무혁은 벽에 걸린 어린아이의 사진을 발견했다.

동그란 이목구비가 민재를 꼭 빼닮았다.

자신도 이렇게 쉽게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친모인 홍 여사가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다.

“어서 와요.”

사람을 모두 물리고서 홍 여사는 손수 무혁에게 차를 대접했다.

분명 두 사람 다 구면이긴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서로를 마주하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오늘은 왜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한 번쯤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안 그런가요? 진무혁 씨.”

민재를 꼭 빼닮은 홍 여사가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우습게도 민재 생각이 났다.

아마 삼십 년 후에 민재의 모습이 꼭 저렇지 않을까.

시간이 흘러도 더욱 깊은 향기를 품은 것처럼 단아한 미모의 홍 여사는 모란이 새겨진 유리잔에 든 홍차를 가볍게 머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두 사람, 꽤 결혼을 서둘렀었죠. 피차간의 이해가 맞았으니까 그런 결정을 내린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여사님.”

“하지만 그 애는 내 딸이에요.”

찻잔이 딸깍, 내려앉았다. 홍 여사는 민재를 닮은 눈으로 싸늘하게 무혁을 노려보았다.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찾아오길 바라지 않았다.

“민재는 제 아내입니다.”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그 애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고작 사랑한다는 말 몇 마디 따위로 제 감정을 어찌 안다는 건지.

무혁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못한 채 옆에 앉은 홍옥자 사장을 노려봤다.

아무리 뒤늦게 혈육임을 알았다 해도 석민재는 어엿한 성인에, 두 사람은 혼인신고까지 마친 정식 부부다.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겁니까.”

“말 그대로, 내 딸의 남편이 이런 우스운 꼴을 당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요.”

조원식의 모함에 발목이 잡혀 검찰 조사까지 받았으니 꼴이 우스워지긴 했다.

어째서 순순히 조사에 응한 건지 몰라서 저러는 거겠지만.

그렇다고 홍 여사에게까지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번 일의 배후는 조원식입니다. 지난번 총회도 무사히 끝났으니 조만간 결판을 지을 생각입니다.”

“결판을 짓고 나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건가요?”

“그건…….”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가요?”

홍 여사는 옆에 놓인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보였다.

안에 적힌 첫 문장을 보는 순간 무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딸의 처지를 이용해, 아주 깜찍한 짓을 했더군요.”

치밀하게 쓰인 계약서에는 매우 상세한 조항들이 담겨 있었다.

사랑 없는 남녀가 서로를 이용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촘촘하게 쓰여진 세부 조항은 분명 제 손으로 기입한 것들이었다.

“성공보수 3억이라. 내 딸의 가치가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거였다니 우습군요.”

“그게 지금 여사님 손에 있다는 거, 민재도 알고 있습니까?”

집들이를 돕겠다며 집에 드나드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의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제 계약서는 금고 안에 보관되어 있었으니 홍 여사가 가지고 있는 건 분명 민재가 가지고 있던 것일 터.

“그럴 리가요. 이건 그저 복사본이니까, 원본은 진작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은걸요.”

“이제 그 계약서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민재와 저는…….”

“궁지에 몰린 그 애를 손에 넣고 싶어서 이런 수단까지 쓴 것도 잘한 일은 아니죠. 안 그런가요, 진무혁 씨?”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무혁의 심장을 헤집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테지만, 민재를 꼭 빼닮은 저 눈. 저 눈동짜 때문에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말 그대로. 나는 내 딸을 돌려받고 싶어요.”

“하지만 민재는…….”

“그 애도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건가요?”

알고 있다. 친부모를 찾고 싶어 하는 것도 그렇고, 요즘 들어 민재는 홍 여사를 유난히도 더욱 잘 따르곤 했다.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기게 된다면.

적어도 미덥지 못한 안 대표 보다는 홍 여사 쪽이 훨씬 더 믿음직하다.

“일이 골치 아프게 됐네.”

밖에 나가 있던 홍옥자가 인상을 찌푸린 채 응접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네 차를 가지고 가던 우리 직원이 사고를 당했어. 차에 탄 채로 깔끔하게 한강대교 밑으로 떨어졌다는데?”

뒤따르던 직원들이 급하게 구조해내긴 했지만 차는 완전히 반파되어 한강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애를 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건 나도 들었어요.”

“누구의 소행인지도 알고 계시겠군요.”

“우리는 공통의 적을 두고 있는 거겠죠. 그때까지는, 나도 몇 번이고 무혁 군을 도울 생각이에요.”

조원식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라면야 기꺼이 손을 잡을 테지만 그 후로는 민재를 두고 제대로 갈등을 빚어보자는 건데.

무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건 분명 독이 든 성배일 테지만.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그 애는 분명 또 울게 될 테니까.

제 안에 품은 불안을 민재도 어느 정도는 알아차린 듯 보였다.

부모님을 찾지 않아도 괜찮다며 억지로 웃는 모습도 그렇고, 혼자 남은 민재가 우는 모습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제가 민재를 데리고 떠난다면요?”

“우리가 순순히 보내주더라도, 조원식이 무혁 군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텐데요?”

누구 하나가 죽기 전에는 절대 끝나지 않을 싸움이다.

냉정한 홍 여사의 목소리가 꼭 민재 같아서,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심장을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무슨 말씀인지는 잘 알아들었습니다.”

어차피 당장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문제니 무혁은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무혁은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집 안 곳곳을 훑어봤다.

만약 그 애가 무사히 이 집에서 자라났더라면.

아마 그랬다면, 평생 제 눈길이 닿는 일조차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불행이 오히려 제게는 기회가 된 셈이니까.

이 또한 참으로 아이러니인 셈이다.

“이만 실례하지요.”

무혁이 집을 나서자 어느새 집 앞에 새빨간 스포츠카가 서 있었다.

“늦어.”

GPS로 제 행적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유능한 파트너는, 일찌감치 제 위치를 파악하고 이렇게 먼저 마중을 나왔다.

“차 사고가 난 모양이야.”

“새로 사. 네가 뭐라고 해도 이 차는 내 거야.”

“치사한 놈.”

“흥이다.”

옥자는 제레미의 차가 떠나는 뒷모습을 잠자코 지켜봤다.

제 언니가 그리도 강경하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 진무혁이 저 모진 말을 얌전히 참아낼 줄은 더더욱 몰랐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그동안 다 알면서도 속이고 있었다는 걸 모두 들켰음에도 무혁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처음 계약서를 봤을 때는 정말로 죽여버릴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었는데.

그래도 오래 본 사이라 그런지 진무혁이 왜 그렇게까지 한 건지도 어렴풋이 짐작은 갔다.

“민재가 그렇게 좋을까.”

독점욕도 저 정도면 중증일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여기까지 끌고 온 건지 진무혁의 속셈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조원식의 행각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사장님, 지난번에 찾아왔던 기자 건으로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비서실장의 귓속말에 홍옥자 사장의 표정이 마구 구겨졌다.

소영하를 보내버리는 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쭉 민재의 뒷조사를 해온 것도 모자라 기사까지 준비하고 있다는 말에 눈이 제대로 뒤집혔다.

“당장 그 자식 들어오라고 해!!”

“네, 사장님.”

오늘은 어째서인지 누구 하나를 죽여놓아야 성질이 풀릴 것 같은데.

때마침 만만한 먹잇감이 생겼으니 어쩔 수 없다.

피의 축제를 벌일 생각을 하며 홍옥자 사장은 열심히 주먹의 근육을 풀었다.

***

“아무래도 기자가 꼬리를 문 것 같습니다.”

한참 어린 독사파 행동대장의 보고에 조원식은 인상을 찌푸렸다.

“기자?”

“저희 쪽에서 손을 쓰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입니다.”

석민재를 죽이려고 했던 시도는 몇 번이나 실패했다.

안 그래도 내부에서 불만이 많았는데, 지난번 진무혁의 차에 따라붙을 때는 조직원 두 명이 사고에 휘말려 죽기까지 했다.

오늘만은 기필코 성공할 줄 알았는데 차 안에 타고 있었던 건 하필이면 홍옥자 쪽의 사람이었다.

어물쩍 넘어가기에도 사고가 너무 빈번하게 터지니 이제는 조원식의 권력으로도 더는 말이 새는 걸 막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대로는 곤란합니다. HS엔터 쪽으로도 아예 숨통이 막혔고요.”

내부 감사 이후로 이쪽으로 들어오던 자금 줄이 막히고 사실상 성준범은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됐다.

혜성만 손에 들어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조직 내부에서도, 이제는 하나둘 고깝지 않은 발언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진무혁은?”

“다른 차에 미행을 붙였지만, 또 신호등이 이상해져서 놓쳤습니다.”

“그렇다면 우연이 아니라는 건데…….”

무혁의 옆에 붙었다던 이상한 외국인의 존재가 아무래도 거슬렸다.

아무래도 그자가 누군지 제대로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진무혁, 이 개새끼가.”

대체 무슨 짓을 꾸민 건지 검찰 조사 역시 불발로 끝났다.

“혜성 쪽에서 내부 공유된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구속을 연장하는 건 무리입니다.”

성급하게 시작한 수사에서는 아무리 털어도 터럭 한 올 떨어지는 게 없다.

어떻게든 별건을 더해보라며 압력을 넣어보지만, 그 탓에 일선 검사들의 불만이 더더욱 커져만 갔다.

“평생 도움이 안 되는 것들!”

분노를 애써 삼키며 조원식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성준범이 혜성을 물려받으면 그 이후로는 모두 일사천리였을 텐데, 코앞까지 다가왔던 모든 영광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어그러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석민재에 정신이 팔려서 더욱 근본적인 원인을 보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진무혁, 네놈이 나를…….”

어쩌면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것마저도 제 아비를 꼭 빼닮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조원식은 전화를 들어 무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정상적으로 신호음이 가며 곧 전화를 받았다.

“진무혁입니다.”

“……지금 어디냐.”

“보내주신 선물을 잘 받았습니다.”

“진무혁!!!”

악에 받친 그와 달리 무혁의 목소리는 평이하기 짝이 없다.

굳이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감정의 골은 한없이 깊어진 지 오래다.

“이번에는 누구를 건드리실 참입니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다시금 고쳐 잡았다.

제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진무혁은 제 아픈 속만을 날카롭게 할퀴고 들었다.

“제 아내, 제 상사, 제 친구. 이제는 저까지. 눈앞에 거슬리는 사람은 모두 치워버려야 성에 차실 텐데 안타깝게 됐습니다.”

“지금 어디야!!”

“글쎄요. 지금 제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거 놔!!!”

전화 너머로 이질적인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네, 네놈, 대체 장미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그건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무리 못 미더운 딸이라고 해도 제게는 하나뿐인 자식이다.

만약 진무혁이 장미에게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한다면.

“당장, 당장 집으로 사람을 보내!!”

인질까지 잡는 교활함이라니.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조원식은 무혁에게 매달렸다.

“대체 그 애를 어쩔 셈이야!!”

“장미의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 정말 모르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뭐?”

여전히 예쁘고, 여전히 귀엽고, 제 말을 좀 안 듣긴 해도 제 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분명 그런 줄만 알고 있었는데.

“조장미 씨, 당신을 필로폰 투약 혐의로 체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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