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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결혼-72화 (72/103)

72화. 최종 병기 그녀.

불신임 건을 통과시키기 위해 A&Z 내부에서도 어마어마한 인력이 투입됐다.

사실상 대형 로펌 둘의 전면전이다 보니 이번 혜성 주주총회에는 막대한 관심이 쏠렸다.

“그래. 홍 여사 뒤에 딱 붙어서 제대로 존재감을 발휘하고 와.”

이건 좀 사기인 것 같지만, 홍 여사 본인의 요청이라고 하니 민재는 어쩔 수 없이 자료를 받아들었다.

돌발 상황을 대비해 민재는 무혁과 함께 회의장으로 이동했다.

“정말 내가 가도 되는 거야?”

“성준범을 압박하는 데는 제일 좋은 방법이 될 거야.”

“그런가.”

홍 여사와 어울리는 걸 껄끄러워하는 것 같았는데, 무혁은 의외로 군말 없이 안 팀장의 명령을 순순히 따랐다.

차 사고가 날 뻔했단 얘기도 그렇고 어쩐지 잘 풀리는 것 같으면서도 뒤숭숭한 분위기를 지울 수 없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나는 별일 없어. 민재 네가 문제지.”

“그냥 지난 번에 잘못 먹고 체해서 그래.”

며칠 사이 부쩍 토하는 일이 잦아졌지만 되도록 무혁에게는 비밀로 했다.

환절기라 그런지 입맛도 없고 기운이 빠져서 민재는 무혁의 어깨에 기댄 채 깜빡 잠이 들었다.

요즘 들어 이상하게 잠도 늘고 몸이 무거웠다.

아마 스트레스 때문일 테지만. 민재는 무혁의 팔에 꼭 기댄 채 드넓은 총회장에 발을 들였다.

“민재 씨.”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홍 여사가 버선발로 민재를 마중 나왔다.

단아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복장을 하고서 그녀는 민재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은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무혁 군이라고 했죠?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요.”

진무혁이 아니었더라면 이 정도로 뒤집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웬일로 환하게 웃는, 민재를 꼭 닮은 홍 여사를 앞에 두고도 무혁은 조금도 웃지 못했다.

“먼저 가 봐. 난 홍 여사님 옆에 있을게.”

“……수상한 사람 따라가지 말고. 누가 먹을 거 준다고 해도 함부로 먹지 말고.”

“내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알아?”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무혁은 민재의 두 뺨에 손을 얹었다.

“이따가 봐. 여보.”

“응?”

안 그래도 사람이 넘쳐나는 총회장에서 무혁은 보란 듯이 민재를 안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정말로 잠깐의 순간이지만 홍 여사를 도발하는 데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어쩌면. 요즘 젊은 사람들이란.”

“저희가 신혼이라 그래요!”

횡설수설하며 수습하기 바쁜 민재를 보며 무혁은 슬쩍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다른 변호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진 변이 애처가로 소문이 자자하더니. 아주 제대로 빠졌나 보군.”

“젊네, 젊어.”

이제는 나이 지긋한 임원들조차 한마디씩 보태는 통에 민재는 부끄러운 마음을 도통 지울 수가 없었다.

‘민망하게 이런 데서 뭘 하자는 거야.’

갑작스러운 무혁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어쩔 줄 몰라 부끄러워하는 민재를 보며 홍 여사는 어쩐지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남편이랑 사이가 좋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그게 그러니까, 제가 좀, 많이 좋아해요.”

어쩐지 말을 하면 할수록 잘 익은 토마토처럼 발갛게 익어가는 민재의 모습에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나 포커페이스로 소문난 민재였지만 이런 것만은 도저히 면역이 없다.

그래도 이미 결혼한 사이니까.

멀리서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훔쳐보며 민재는 손에 든 서류를 꼭 안았다.

“성 회장님도 홍 여사님을 많이 사랑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랬지. 프러포즈만큼은 참 잘했던 사람이니까.”

영원한 연인이 되고 싶다던 남편은 아이를 잃어버린 후에도 아내를 지키고자 발버둥 쳤다.

집안의 외압에 성준범을 집에 들인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지난 세월을 되짚으며 홍 여사는 민재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건,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어.”

수정일보 선대 사장이었던 아버지는 데릴사위를 들일 거라며 장녀의 결혼을 결사반대했다.

마지막 눈 감는 순간까지도 잃어버린 외손녀를 찾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홍 여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가 우리 아린이를 많이 아끼셨거든. 정말로 예뻐하셨는데.”

민재의 품에 기댄 채 홍 여사는 서글픈 눈물을 삼켰다.

이럴 때는 어찌해야 좋을까. 민재는 무어라 말을 보태지 않고 홍 여사의 등을 다독였다.

“힘내서 싸우셔야죠. 오늘이야말로 저쪽이랑 결판을 지어야 하니까요.”

“그럼. 그래야지.”

민재의 응원에 힘입어 홍 여사는 당당히 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누가 봐도 닮은, 유독 친밀해 보이는 홍 여사와 민재를 보며 수군거림이 더욱 커졌다.

“저건 설마…….”

만약 정말로 친자식을 찾게 된 거라면 지분 상속에도 변동이 생길 테니 성준범 쪽이 한없이 불리해진다.

불신임 건에 대해 갈팡질팡하던 임원들도 민재를 보고 난 후 제법 충격을 받은 듯했다.

“성준범 이사 도착했습니다.”

좋지 않은 상황을 인식한 듯 성준범은 입장과 동시에 홍 여사 쪽을 노려봤다.

화려하게 부활한 양어머니와 그녀의 뒤에 선 석민재.

눈엣가시 같은 두 여자를 보는 순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다.

잊어야 한다고, 분명 그렇게 말했었는데.

지끈거리는 두통이 밀려오지만 수많은 사람 앞에서는 내색할 수 없다.

“그럼 총회의 시작하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이 자리에서 성준범 이사의 본격적인 승계 문제가 거론되어야 했다.

하지만 HS엔터 내부의 문제점들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며 승계 안건에 따른 불신임 건도 함께 제출되었다.

“HS엔터 소속 연예인들의 마약 투약 문제가 불거졌고, 소영하의 스캔들까지 터지며 전 계열사에 타격이 퍼진 상황입니다.”

알게 모르게 피해를 본 계열사들이 많은 만큼 그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다.

따가운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성준범의 시선은 오로지 홍 여사의 뒤에 선 석민재에게 꽂혔다.

정말로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목표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료 좀 주겠어요?”

“네, 여사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어머니께서는 뒤에 선 석민재에게 말을 걸며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분명히 호적상으로는 자신이 아들이건만,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저 여자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저런 눈빛으로 바라봐 준 적이 없었다.

제게는 그토록 어려웠던 것들이 석민재에게는 어째서 그리도 쉬운 걸까.

소영하를 가지고 논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신마저 파멸시키려는 저 여자가 끔찍하리만치 밉다.

딸깍, 딸깍, 펜 끝을 지그시 누르며 성준범은 석민재의 목덜미를 유심히 살폈다.

저 가느다란 목을 조르면, 그때는 저 여자가 자신을 보고 웃어줄까.

“주가 하락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어차피 루머로 인한 스캔들 역시도 일시적인 악재일 뿐, 경영 전반에는 어떤 타격도 없습니다.”

“마약 건은요? 이번에 걸린 이시준 말고도 몇 사람이 더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건 개인의 일탈 행위일 뿐입니다. 이미 당사자는 모두 계약을 해지했으니 저희 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악재들을 방어해봐도 검찰에서 이미 수사가 들어간 건이라 그냥 넘어가는 건 쉽지 않다.

구차한 변명조차 먹히지 않을 즈음 홍 여사 뒤에 잠자코 서 있던 석민재가 손을 들고 발언을 신청했다.

“이건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전달받은 HS엔터 내부 고발 자료입니다.”

화면에 띄워진 프레젠테이션 내부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회계 자료가 적혀 있다.

“저건!”

“지금쯤 본사 감사팀이 HS엔터 회계팀에 도착했을 테니, 진위 여부는 곧 밝혀지겠지요.”

본사에 보고되지 않은 각종 행사비를 비롯해 막대한 자금이 빠진 이중장부가 속속히 드러났다.

곧이어 송금 내역의 이름이 뜨는 순간 연로한 명예 이사 몇 명이 탄식을 터트렸다.

“저놈이 아직도 제 친모 밥그릇을 챙겨주려고 저렇게 안달이 났으니, 쯧.”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저 홍연희 고문은 성준범 이사에 대한 불신임 건을 제출하고자 합니다.”

석민재를 뒤에 세우고서 홍 여사는 기어코 성준범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눈앞까지 다가왔던 혜성의 주인 자리는 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끝끝내 제 발목을 잡은 저 두 여자가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

“참석자 중 삼 분의 이가 찬성하여, 불신임 건이 가결되었습니다.”

사회자의 엄중한 선언이 이어졌다.

혜성의 경영권 승계 다툼은 완벽한 홍연희 여사 측의 승리였다.

***

“혜성 건을 아주 기가 막히게 처리했다더니, 역시 우리 진 프로는 대단해.”

“암, 우리 검사님은 어디서든 큰 인물이 될 줄 알았지요.”

첫 집들이는 무혁의 옛 검찰 시절 동료들이었다.

검찰 내부에 친한 사람이 없다고 들었었는데, 수사관을 포함해 여덟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은 여전히 무혁을 진 검사라고 부르고 있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감사합니다. 제수씨도 이리 와서 앉으시죠.”

무혁의 연수원 2기수 위라는 강 검사는 민재를 허물없이 제수씨라고 불렀다.

낯선 사람은 싫다며 제레미는 아예 호텔을 잡고 나가버렸고 무혁은 갓 완성된 감바스를 가져오며 강 검사에게 핀잔을 줬다.

“여기 감바스 알 아히요, 만들어 왔습니다.”

“과연 우리 동부지검의 진 장금. 네가 여자였으면 내가 냉큼 데려다 와이프로 삼았을 텐데.”

“그런 끔찍한 소리는 일 절만 하시죠.”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민재를 보고 옆에 앉은 안경 쓴 여자 검사가 이리 오라며 자리를 만들어줬다.

“워낙 같이 고생을 많이 해서 사이가 좋아요.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거니 그러려니 해 주세요.”

“아, 감사합니다. 주 검사님이라고 하셨죠.”

“이런 자리에서 무슨 검사예요. 그냥 서희라고 불러주셔도 괜찮아요.”

무혁의 사법연수원 동기라는 주 검사는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의 미인이었다.

무표정해도 기본적으로 동글동글한 인상인 민재와 달리 저쪽은 매서운 눈빛이 강렬한 카리스마가 돋보였다.

“그렇게 나란히 앉으니 주 검사랑 제수 씨가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민재 씨 쪽이 훨씬 더 미인이죠.”

“그거야 그렇긴 한데. 둘이 서원대 시절부터 알아주는 CC였다면서? 그래서 우리 진 장금이가 주 검사를 잘 챙겼던 건가?”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과음하셨다며 옆에 있는 수사관들이 강 검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놀란 민재와 달리 주 검사는 코웃음을 치며 맞은 편에 앉은 무혁을 힐끔 바라봤다.

“저 인간은 그냥 조별 과제 점수 때문에 그랬던 거고요. 낙오자 생기면 벌점 준다고 교수님이 엄포 놓으신 건 기억 안 나세요?”

“아, 아, 맞아. 맞아. 그랬었지 참.”

의심받는 것조차 싫다는 듯 주 검사는 딱 잘라 무혁과의 스캔들에 선을 그었다.

진무혁이 그럴 사람이 아닌 건 알지만 그런 모습까지 카리스마가 넘치는 게 부러웠다.

“마실 것 좀 가져올게요.”

즐거워 보이는 검찰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어째 속이 또 울렁거렸다.

잠시 부엌에 들려 민재는 차분히 속을 가라앉혔다.

실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질 리가 없다고 자부했지만, 민재의 현실은 느긋하게 시험 준비를 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민재 씨?”

“아, 네. 뭐 필요하세요?”

뒤따라온 주 검사의 물음에 민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러면 누구도 제 속마음을 엿볼 수 없다. 언제나 그랬다.

“강 선배가 한 말 때문에 혹시 마음이 상하셨나 해서요.”

“아,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고백은 했었어요.”

차분한 주 검사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미동도 없는 민재를 보며 주 검사는 민망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얘기에 익숙하신가 보네요. 뭐라고 말 붙일 겨를도 없이 차였어요. 자기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건…….”

“조원식 때문에 헤어진 척만 한 건 줄도 모르고,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제는 기억도 안 날 오래된 흑역사라며 주 검사는 괜히 제 두 뺨을 몇 대 때리고 얼음을 받아갔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무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말하는 것만 봐도 미련이 뚝뚝 흘렀다.

저것만 봐도 정말로 좋아했었던 모양인데.

“뭐 필요해?”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주 검사가 나오는 걸 보고 무혁이 주방으로 달려왔다.

홍 여사의 도움으로 다른 건 거의 다 준비하긴 했지만, 무혁은 굳이 도와주겠다며 앞치마를 두르고 손을 보탰다.

“강 선배 얘기는 너무 신경 쓰지 마. 아무 일도 아니었으니까.”

“주 검사님한테 들었어.”

검찰 쪽 사람들도 민재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혼자 열심히 잊어보려 보내온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무혁은 한순간도 자신을 놓은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연수원에서부터 임자 있는 몸이라고 하고 다녔다면서?”

“뭐, 그렇지.”

“흐응. 그거 조장미 얘기야?”

옆구리를 쿡 찌르자 무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부러 산통을 깨는 소리를 던지고서 민재는 음료수를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석민재, 너……!”

“그건 그렇고 혜성 얘기나 좀 해봐요. 성준범이 그 자식이 그동안 얼마나 우리 속을 썩였는데, 이번에 제대로 물을 먹였다면서요?”

성준범이 변명 한마디 못 해보고 불신임을 받은 건에 대해서는 외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때마침 보도자료에 나온 사진에 민재가 함께 실리는 바람에, 흐리게나마 민재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은 사람들도 속속들이 나왔다.

“그래도 다행이네. 민재 씨가 정말 그 혜성 딸이었으면 무혁이는 완전히 피 보는 거였는데 말이야.”

“하긴, 검사가 재벌 딸이랑 결혼하고 무슨 뒷감당을 하라고.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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