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소중하다면 아껴줘야지.
“에이, 설마요.”
살인적인 라면을 둘이나 맛봤더니 속이 멀쩡할 리 없다.
방에서 쫓겨나 문 근처에서 기웃거리는 두 사람도 뒤늦게 맛을 보고서 죽상을 하고 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아니거든, 옥자 때문이거든.”
“둘 다 조용히 못 해?”
점잖은 홍 여사가 화를 내자 홍옥자도, 제레미도 잔뜩 풀이 죽은 채 방 밖으로 쫓겨났다.
말썽꾼들을 내보내고서 홍 여사는 민재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다행히 열은 없는데.”
“저 진짜 괜찮아요.”
“요리는 할 수 있겠어? 힘들면 쉬어야지.”
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은 건 아닌데. 속도 가라앉았겠다 민재는 자리를 털고 있어났다.
“그래도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해요.”
“당연히 내가 와야지. 우리는 좋은 친구잖아.”
유난히 호의적인 홍 여사의 말에 민재는 쓴웃음을 삼켰다. 아마도 잃어버린 딸의 그림자를 보는 걸 테지만, 그래도 살뜰하게 챙겨주는 건 싫지 않다.
밑반찬을 비롯해 냉장고를 그득하게 채워주고서 홍 여사는 민재와 무혁의 결혼사진을 바라봤다.
“결혼식이 언제였다고 했지?”
“석 달쯤 됐어요.”
“……그랬었구나.”
어쩐지 안타까운 눈으로 홍 여사는 민재의 드레스 차림을 유심히 바라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서둘러 해버린 감도 없지 않아서 조금은 아쉽긴 했다.
조금 늦긴 했지만 그래도 남들이 다 하는 건 해보고 싶어졌다.
“그럼 이제 요리를 해볼까?”
부잣집 사모님답게 홍 여사는 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했다.
홍옥자 사장은 바쁘게 식재료를 사다 나르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둘이나 붙어 본격적인 냉장고 정리에 들어갔다.
“그래도 이 정도면 깔끔하네. 평소에 신경을 많이 쓰나 봐.”
“평소에는 그이가 다 알아서 해서요.”
깔끔하게 유통기한 라벨까지 붙여둔 치밀함이 진무혁답다고 해야 할지.
뭐든 대충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 무혁은 요리에서도 오점 하나 남긴 적이 없다.
그러니 더더욱 이번만은 민재가 해보고 싶다고 하니 홍 여사는 집에 있는 재료로 손님맞이용 메뉴 몇 가지를 알려줬다.
“아니면 당일에 내가 와서 도와줘도 되고. 혼자 하기는 너무 힘들잖아.”
“정말 감사해요.”
엄마가 있었다면 이럴 때 어떻게 할지 알려줬을 텐데.
하나부터 열까지 막막하던 것들도 이제야 겨우 해결책이 보였다.
“언제든 믿고 의지해요. 난 언제나 민재 씨 편이니까.”
유난히 다정한 홍 여사의 호의가 참 낯설긴 하지만 그래도 싫지 않다.
민재는 수줍게 웃으며 홍 여사의 손을 꼭 잡았다.
“민재, 나 배 아파.”
“응?”
아까까지 멀쩡하던 제레미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시위를 벌였다.
다짜고짜 소파에 드러눕고서 그는 자신을 간호하라며 대놓고 꼬장을 부렸다.
“병원은 싫어.”
“그러면 우리 주치의를…….”
“아줌마도 싫어.”
“제레미!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혼쭐이 나고서도 제레미는 쿠션만 끌어안은 채 배가 아프다고 칭얼거렸다.
“이분은 경호원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게 말이죠…….”
칭얼대는 제레미 때문에 배웅도 못 하게 생겼다.
지금은 사실상 아들이나 다름없어진 상황이긴 하다지만, 괴이한 짓을 설명할 길이 없어 민재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허우대만 멀쩡하지,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한 친구예요.”
막무가내로 징징대는 제레미의 성화에 홍 여사도 어쩔 수 없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돌보는 게 일이라니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또 봐.”
냉장고를 그득하게 채워주고서 그녀는 아쉬운 듯 집을 떠났다.
신세만 지고서 이게 무슨 민폐인 건지, 이쯤이면 행패가 도를 넘었다.
“제레미!!”
손님들을 보내고 들어오니 제레미는 아예 웃통을 까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 와중에 또 어디서 보고 온 건지, 민재에게 어서 오라며 손짓했다.
“어서 ‘엄마 손은 약손’ 해줘.”
너무 당당한 행태에 할 말을 잃었다.
뻔뻔함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손님들이 있을 때는 이래저래 훼방을 놓고 다닌 주제에 이제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해졌다.
“응? 나 배 많이 아파.”
“못 말려, 진짜.”
어쨌든 지금은 이 망나니를 돌보는 것도 일이니까.
민재는 어쩔 수 없이 제레미에게 무릎까지 내주고서 마지못해 배를 문질러줬다.
“제레미, 이건 과학적으로 아무런 효과도 없어.”
“민재가 만져줘야 안 아픈걸.”
옷 소매를 꼭 잡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떨어지기 싫은 모양인데, 몸은 다 큰 주제에 하는 짓은 다섯 살짜리 어린 애만도 못하다.
“아까는 왜 그런 거야?”
“난 그 아줌마 싫어.”
홍 여사를 잔뜩 견제하며 제레미는 민재의 품에 파고들었다.
다 큰 남자가 이러면 싫을 법도 한데, 하는 짓이 꼭 아들 같아서 뭐라고 잔소리 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제레미는 날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않아.”
“응?”
얼굴을 숨긴 채 제레미는 개미만한 목소리로 뭐라고 웅얼거렸다.
“……는 않아.”
“안 들려.”
“이……. 싫어! 민재가 제일 싫어!!”
제레미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너무나도 멀쩡해 보이는 복근을 빤히 보며, 민재는 이 모든 게 제레미의 꾀병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제레미, 배 아픈 거 아니었어?”
“안 아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제레미는 제 방으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몸만 컸지 아직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하는 짓이 참으로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채 민재는 제레미를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
“이런 젠장!!”
“대표님!”
잘 걷지도 못하는 조원식을 비서가 서둘러 부축했다.
골프채로 신나게 얻어터진 덕분에 얼얼한 엉덩이는 좀처럼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린 새끼가……. 윽!”
이 나이에 제 아들뻘인 놈에게 피떡이 되도록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욱신거리는 엉덩이 때문에 앉지도 걷지도 못할 처지라 그는 결국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엎드린 채 모든 업무를 돌봐야 했다.
차라리 확 죽여버릴 것을. 속이 부글부글 끓는 와중에 그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예, 조원식입니다.”
“이번에는 자네 공이 컸네. 덕분에 한 시름 놓았지 뭔가.”
“……별말씀을요.”
뒷걸음질을 치다 소를 잡는 격이라더니.
소영하와 장미의 스캔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자연스레 국무총리 아들의 마약 수사 관련 기사는 모조리 묻혔다.
비싼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그래도 정계와의 인맥만은 절대로 놓을 수 없다.
“지난번에 부탁드린 것, 잘 부탁드립니다.”
“암, 큰집에도 말씀 잘 드려 놓을 테니 염려 말게.”
빚을 지워뒀으니 저쪽에서도 자신에게 협력하게 될 터. 이 웃기지도 않는 촌극 속에서 조원식도 이제는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
‘이 방법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다만.’
고양이 새끼인 줄 알고 데려다 키운 게 사실은 호랑이 새끼인지라.
혜성 인수 건이 이렇게 뒤틀리게 될 줄은 조원식도 예상치 못했다.
정말로 다 된 밥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진무혁이 끼며 모든 것이 뒤틀렸다.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던 성준범의 평가가 나날이 추락하며 내부 여론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더 독이 오른 거겠지만, 상황을 긍정적으로 낙관하기에는 홍 여사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성 회장은?”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끈질긴 목숨 같으니라고.”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성 회장이 살아 돌아와 유언장을 고치지 않는 이상 사후 경영권은 성준범에게 가게 되어 있다.
갑자기 친딸이 튀어나오더라도, 유류분 소송은 몇 년을 끌 수 있으니 그때는 이미 혜성이 제 손에 넘어온 지 오래일 터.
그것만 아니었더라도 이 수모를 견디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사는 건 지긋지긋하니까, 혜성만 손에 넣어도 장미의 스캔들 정도야 얼마든지 잠재울 수 있다.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러니 제일 거슬리는 그 녀석부터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
그동안 오래 공을 들였다지만, 이토록 제 발목을 잡는 이상 더는 그 역시도 기회를 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 나다.”
조원식은 전화를 들었다. 위험부담이 크다지만 이제는 이 방법밖에 없다.
***
김 기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무혁은 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있었어?”
“말도 마. 제레미 때문에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목소리만 들어도 한바탕 뒤집힌 모양이다.
길길이 날뛰는 민재의 목소리를 들으며 무혁은 겨우 웃음을 터트렸다.
“딸기 우유 라면이라, 그건 별로 먹어보고 싶지 않은데.”
“웃을 일 아니야. 손님한테 시비를 걸질 않나. 아주 제대로 혼이 나야 했는데!”
투덜대는 목소리가 귀엽기만 하다. 그러다 문득 손님이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손님?”
“아, 집들이 때문에 고민하고 있으니까, 홍 여사님이 와서 도와주신다고 해서.”
“그쪽에서?”
“오늘 집에 오셔서 국이랑 밑반찬도 잔뜩 넣어주고 가셨어.”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는 민재야 그저 호의라고 보고 있지만, 무혁은 적극적인 저쪽의 행보가 달갑지 않았다.
너무 노골적인 태도만 봐도 이미 모두 알아챈 눈치다.
“마음에 들어?”
“예뻐해 주시니 나야 고맙지. 이래도 되나 싶긴 하지만, 그래도 좋긴 해.”
해맑은 민재의 말에 무혁은 애써 미소지었다.
불편해할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민재는 순순히 홍 여사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언제까지나 비밀로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무혁은 아쉬운 마음을 담은 채 민재에게 속삭였다.
“너무 좋아하지는 마. 그래도 민재의 첫 번째는 나였으면 하니까.”
“제레미도 그렇고, 오늘 진짜 다들 왜 그래?”
“제레미는 왜?”
말도 안 하고서 문을 틀어 잠그고 방에 들어가서는 쥐죽은 듯이 잠잠하다고 했다.
아무리 열어달라고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니 민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고 했다.
“전화 좀 바꿔줘. 내가 얘기해 볼 테니까.”
“내 말은 아예 들은 척도 안 해.”
“내 전화는 받을 거야.”
민재가 다시 문을 두드리자 제레미는 민재의 전화만 빼앗아 다시 문을 쾅 닫았다.
“무혁.”
“왜 그랬어.”
“그 아줌마 싫어.”
얼마나 운 건지 목이 쉬었다.
이야기만 듣는 제 심정도 편치 않은데, 옆에서 본 제레미는 더욱 노골적으로 홍 여사의 심기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민재가 슬퍼하는 건 너도 싫잖아.”
“하지만 난 민재를 빼앗기는 게 더 싫은걸.”
“그렇다고 민재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어느새 정이 들어서는, 제레미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울먹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소중하다면 아껴줘야지.”
막무가내라지만 제레미의 존재는 무혁에게도 도움이 될 터.
정에 약한 민재는 애처롭게 매달리는 제레미를 매몰차게 내치지 못할 터였다.
“사과할게.”
김 기자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 내 입은 막는다고 쳐도, 언제까지 무마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직은 때가 좋지 않은데, 제레미를 달래고 국도로 넘어오던 중 백미러 너머로 수상한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제레미, 지금 GPS 추적 가능해?”
새까맣게 선팅된 저 차량은 분명 조원식의 수하들이 애용하던 차였다.
보아하니 이번에는 목표를 무혁으로 바꾼 건지, 매섭게 따라붙는 차를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왜? 설마 시작한 거야?”
“그러게. 말벌이 붙은 것 같은데.”
제 부모님에 이어 이제는 제 목숨까지 노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피가 마른 모양이다.
‘민재야.’
아직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민재를 위해서라도 곱게 죽어줄 생각은 없다.
“우측에 일반 국도, 차가 제일 없는 곳을 찾았어.”
“알았어.”
교통 정보 시스템에 접속한 제레미의 지시에 따라 무혁은 바로 핸들을 꺾었다.
***
[도심에서 일어난 5중 추돌 사고로 두 명이 사망, 열 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저기, 어제 무혁 씨도 지나가다가 사고에 휘말릴 뻔했다더라.”
제레미와 싸운 김에 출근한 민재는 휴게실 TV를 보며 샌드위치를 오물거렸다.
“그래서, 애 보기는 끝난 거야?”
옆에 앉은 오 대리도 옆에 앉아 민재의 입술에 붙은 빵 부스러기를 떼줬다.
“좀 더 두고 봐야지.”
어제 싸운 이후로 도통 대답이 없다. 출근하면서 샌드위치를 두긴 했지만, 유난히 칭얼대던 제레미의 태도가 이상하긴 했다.
[신인 배우 A씨 마약 투여 혐의로 체포.]
“저거 이시준이래, 소영하네 기획사.”
연예계 정보를 모두 꿰고 있는 오 대리는 혀를 끌끌 차며 손가락질을 했다.
제레미가 약값이 어쩌고 하더니 저게 벌써 터진 모양이다.
혹시 무혁이 손을 쓴 건 아닐까 싶지만, 이런 흉흉한 이슈가 줄줄이 터지는 이상 2차 총회에서 성준범의 후계 안건은 완전히 물 건너가게 생겼다.
“소영하 스캔들 묻으려고 저러나 봐.”
“그 건은 어떻게 됐어?”
“그냥 또 흐지부지됐지 뭐. 일 때문에 만나러 갔다는데, 그 야심한 밤에 남녀가 둘이 만나서 뭘 했겠어?”
요즘 들어 제법 활발히 활동하던 소영하도 그 일 이후로 반강제로 자숙에 들어가야만 했다.
조금은 불쌍하다 싶지만, 민재는 굳이 동정하지 않기로 했다.
“저쪽도 이제 죽어나겠다.”
“소송 쪽은 잘 되어 가?”
“자료도 다 모았고, 불신임 건을 발의할 건가 봐.”
사실상 후계자는 성준범으로 낙점이 되어 있다지만, 혜성 그룹의 내규에 따라 이사 중 삼 분의 이가 동의한다면 탄핵할 수 있다.
A&Z에서 준비한 내부 비리 자료를 포함해 홍 여사가 이사들을 무사히 설득한다면, 성준범은 권력을 잃고 조원식의 계획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말인데, 석민재 네가 좀 다녀와야겠다.”
그리고 주주 총회 당일, 안 팀장의 말에 민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가요?”
“네가 우리의 최종 병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