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민재는 요리 잘해?
성 회장이 쓰러진 시점에서 혜성마저 성준범과 손잡은 조원식 손에 넘어가는 게 아니냐는 말이 파다했다.
하지만 무혁이 파둔 함정에 빠진 덕분에 그들의 계획은 매번 난항에 빠졌다.
“사칭범은 어떻게 됐습니까?”
“기각이야. 그런 사기는 쳐도 잡아떼면 그만이니까. 그 여자는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게 나았을 텐데.”
성아린을 사칭한 모델은 석방 이후 그대로 행방이 묘연해졌다.
가족들 손에 실종 신고가 접수됐어도 현재로서는 찾을 가능성은 한없이 희박하다.
누가 손을 쓰는 건지는 뻔히 알고 있어도 윗선에서 틀어막고 있으니 손도 댈 수 없다.
진무혁이 검찰을 떠난 것도 그 때문이니까.
선배는 술잔을 기울이며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너는 결혼한 지도 꽤 된 것 같은데, 집들이도 안 하냐?”
“집들이라…….”
“주 검사도 가끔 네 안부 물어보던데. 그래도 연수원 동기들은 한 번 불러야지.”
옛 동료들의 이름을 들으니 검찰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아닌 척 미련을 덜어보려 해봐도 무혁은 여전히 검찰에 미련이 남아 있다.
“지검장님은 네가 많이 아쉬운 모양이지만 난 네 입장 충분히 이해해. 미국 가서 돈도 많이 벌었다면서.”
“그렇게 됐습니다.”
“싫은 소리 들어가며 나쁜 놈들 잡아넣으면 뭘 해. 하느님은 조원식 같은 놈은 안 잡아가고 뭘 하는 건지.”
“열흘 붉은 꽃은 없잖습니까.”
“개뿔, 메인 몸인 나는 네가 제일 부럽다.”
검찰청 쪽으로는 거들떠보지도 말라는 선배의 자조적인 말에 속이 쓰렸다.
식사를 마치고 집에 가는 내내 무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제레미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치킨을 사서 들어가니 집 안에서는 벌써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무혁이다!!”
양손에 피자를 든 제레미는 무혁의 손에 들린 치킨을 보며 환호했다.
아직 베어 먹지 않은 쪽의 피자를 받아들고 들어가니 애보기에 지친 민재는 자리에 앉아 손만 흔들었다.
“이것 봐, 트리플 불고기 치즈 듬뿍 피자야.”
“민재한테 고맙다고 했어?”
며칠 전부터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오늘에서야 드디어 얻어먹은 모양이다.
“어차피 내 카드로 시켰는걸.”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으니까 앉아서 먹어. 돌아다니면서 다 흘리지 말고.”
벌써 잔소리꾼이 다 된 민재를 보니 자꾸 웃음이 났다.
식사를 마치고 투덜대는 제레미의 머리도 잔뜩 쓰다듬어주고 나서야 무혁은 설거지를 하고 있는 민재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저녁은 맛있게 먹었어?”
“응. 선배가 집들이는 안 하냐고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야.”
“집들이라.”
무혁의 말에 민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결혼한 지가 언젠데, 동기들 사이에서도 왜 소식이 없냐며 원성이 잦았다.
그동안은 바쁘다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한 번은 치르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집들이가 뭐야?”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한국어가 짧은 제레미를 앞에 두고 민재는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결혼 신고식? 일종의 홈 파티 같은 거야.”
말이 좋아 그렇지 사실상 두 사람이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통과 의례인 셈이다.
챙겨야 할 사람을 헤아리며 민재는 커다란 냉장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평소에는 무혁이 요리를 전담했으니 이럴 때만은 민재도 솜씨를 부려봐야 할 텐데.
“민재는 요리 잘해?”
“음, 그게 말이지.”
제레미 입에서 요리 얘기가 나오자 민재는 난감한 듯 시선을 피했다.
무혁은 폭소를 터트렸다.
***
특종을 내보내고 온종일 소영하의 이름이 실검에 오르내렸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이 상황을 보며 스타커넥트 김 기자는 연신 어깨를 들썩였다.
“대체 정보원이 누구야? 대단하네, 진짜.”
“절대로 말 못 하지. 내가 이번 기사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처음 준비했던 소영하의 기사 대신 자칭 성아린의 기자회견이 있었던 날, 김 기자의 메일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리조트에서 밀회 중인 두 사람의 사진을 보고서 바로 후배 기자들을 보내 밀착 취재에 들어갔다.
어쩐지, 굳이 제게 기삿거리를 줘가며 소영하를 싸고돈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그럼 이제 다음 기사를 준비해야겠지.’
소영하의 스캔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으니 이제는 석민재가 링 위에 오를 차례다.
소영하의 진짜 여자친구의 정체가 혜성 가의 숨겨진 상속녀라는 사실까지 폭로하게 된다면.
올해의 보도상은 응당 제 몫이 될 터.
‘그나저나 이상하단 말이지.’
지난 번에 넘긴 자료만 봐도 홍 사장 쪽에서 이미 감을 잡은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저쪽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터트리는 것만 기다렸다가는 언제 특종을 잡을까.
눈물겨운 가족 상봉 장면을 찍기 위해서라면야 이 정도는 충분히 공을 들일만 하다.
후속 보도를 준비하며 콧노래를 부르는 데 지난번 조장미의 사진을 보내준 제보자에게서 또다시 메일이 왔다.
[석민재 관련해서 조사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배냇저고리의 행방을 알고 싶다면 오후 네 시까지 XX시의 물류창고에서 뵙지요.]
지난번 자료에 이어 이제는 석민재 건까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는 조금 더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만약을 대비해 후배 놈을 차에 두고서 그는 인적 드문 물류창고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스타커넥트 김영룡입니다. 계십니까?”
“여깁니다.”
폐창고 안은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무언가를 태우고 있는 드럼통의 불꽃 너머로 큰 키의 남자가 보였다.
반듯하고 곧게 뻗은 등과 날렵한 뒤태에 잠시 넋이 나갔다.
한 걸음 더 다가가자 남자의 옷깃에 붙은 변호사 배지가 보였다.
“당신은…….”
“얼굴을 보는 건 두 번째군요. 김영룡 기자님.”
자신을 닭 쫓던 개 신세로 만들었던 석민재의 남편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는 데 밖에서 창고의 문이 닫혔다.
졸지에 달아날 구멍도 없이 단둘이 됐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민재의 아파트에 몰래 침입하셨더군요.”
“그건…….”
보육원에서 말한 배냇저고리를 찾게 된다면 혜성 가에 직접 가져가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오래도록 집에 들르지 않는 걸 확인하고 잠시 들렸던 건데, 이 남자가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영문을 알 수 없다.
“어떻게 안 겁니까.”
“저는 한 번 본 사람은 반드시 알아볼 수 있습니다.”
경찰은 엘리베이터에 잡힌 수상한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무혁은 용의자의 신상을 추적하는 데 익숙했다.
홍 사장에게 모든 자료를 넘겼다고 했었지만, 그는 여전히 민재를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홍 사장도 이 일을 알고 있는 겁니까.”
“아니, 나는 그저…….”
“과한 욕심은 늘 화를 부르죠. 알 만한 분이 왜 이런 일을 벌이신 걸까요.”
“뭘 원하는 겁니까.”
굳이 다 알면서 자신을 불러들인 데에는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다.
원하는 걸 말하라는 김 기자를 앞에 두고 무혁은 단 한 가지 조건을 확실하게 못 박았다.
“파기하세요. 하나도 남김없이.”
언제 또 기자가 찾아올까, 민재는 습관처럼 불안에 시달리곤 했다.
소영하와 조장미를 엮어낸 것으로 충분하니 이제 더는 이 기자와 얽혀야 할 이유가 없다.
“내 입은 막는다고 쳐도, 언제까지 무마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지요. 내 아내가 누구의 자식이든, 본인이 굳이 알아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요.”
무혁은 김 기자의 손에 들린 폰을 빼앗아서는 그대로 불타고 있는 드럼통 안에 내던졌다.
“이런 일로 두 번 다시 뵙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지갑에서 수표 세 장을 건네고 무혁은 유유히 자리를 떴다.
전화기값은 넉넉히 받았다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어린 새끼가 건방지게.”
기기를 부순다고 해도 자료 대부분은 클라우드에 백업되어 있으니 기기를 부순다고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무혁이 나간 걸 확인하고 김 기자는 가방 안에 든 태블릿으로 서둘러 백업해둔 폴더에 접속했다.
“이게 뭐야.”
분명 가득 차 있던 파일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분명 몇 번이고 복사해둔 자료였건만 아무리 뒤져봐도 석민재와 관련된 자료는 메모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것 따위 없었던 것처럼.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슨 수로 그 많은 자료를 모조리 지워버린 건지, 김 기자는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
“흐암, 다 했다.”
“제레미. 다 했어?”
“피곤해 죽을 것 같아.”
집들이 준비도 할 겸, 민재도 오늘은 재택근무를 택했다.
미뤄둔 자료를 정리하고 제레미의 뒤치다꺼리까지 하고 나니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잠시만. 나도 팀장님한테 메일 보내고.”
“나 배고파. 밥 주세요.”
언제는 인정 안 한다고 큰소리를 빵빵 칠 때는 언제고.
제레미는 아주 껌딱지가 되어서는 민재의 옆에 꼭 붙어 응석을 부리기 시작했다.
다 큰 아들이 있으면 꼭 이런 기분일까 싶어서, 민재는 비비적대는 제레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난 제레미한테 그저 밥 주는 사람이지? 맨날 나만 미워하고 말이야.”
“안 미워해.”
“응?”
평소처럼 못생겼다느니, 포악하다느니 쓴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제레미는 어쩐지 진지한 얼굴로 다가와 민재를 꼭 껴안았다.
“민재는 좋은 사람이야.”
“내가? 언제는 마귀할멈이라고 해놓고서는.”
“좋아해. 민재. 무혁만큼은 아니지만.”
“뭐라는 거야. 무거워. 저리 가.”
이거 놓으라며 잔소리를 해도 제레미는 민재의 목덜미를 꼭 안은 채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 탓인지 그 후로 제레미는 줄곧 어미 새를 따라다니듯 민재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 손님 오기로 했는데.”
“누구?”
“내가 왔다!”
양반은 아닌 건지 오늘도 홍 사장은 언니를 대신해 쿠키를 전해주러 왔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쿠키를 맛보고 있자니 집들이에 대한 부담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집들이?”
“바쁜 건도 해결됐으니 그래도 할 건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아서요.”
하지만 민재의 요리 솜씨는 가히 테러에 가깝다. 유난히 자신 없어 하는 민재를 보며 홍 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제 언니 자랑을 늘어놓았다.
“언니 특기가 요리인걸. 우리 언니한테 배우면 되지.”
“그래도 될까요?”
“그럼. 민재라면 언제든 환영인걸. 언니더러 당장 여기로 오라고 할까?”
배우는 처지에 오라 가라 할 수는 없다지만 그래도 당장은 외출이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되냐고 묻자 홍 사장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전화부터 걸었다.
“언니가 정말 기뻐할 거야.”
“바쁘실 텐데, 괜히 폐가 될까 걱정이네요.”
“폐는 무슨. 메뉴 골라봐. 언니는 뭐든 다 만들 수 있으니까.”
정말로 사이좋은 자매인 건지, 언니 예찬을 늘어놓는 홍 사장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니면 할머니도 퇴원하셨겠다 성북동 안 대표 댁에 연락을 넣어볼까 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낯선 사람들보다는 차분한 홍 여사 쪽에 내심 마음이 갔다.
민재가 메뉴를 고르는 사이 제레미는 잔뜩 심통이 난 채 홍옥자 사장에게 시비를 걸었다.
“옥자도 요리 잘해?”
“암.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야. 뭐든 다 잘해.”
“뭘 할 줄 아는데?”
“라면도 할 줄 알고. 짜장 라면도 만들 줄 알지.”
“에이, 그 정도는 나도 하겠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찬 홍 사장과 나잇값 못하는 제레미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대충 이 정도면…….”
메뉴를 찾아보고 돌아온 민재가 주방에 들어서자 사방에서 라면 냄새가 진동했다.
“뭐가 더 맛있는지 민재한테 심사해달라고 할 거야. 옥자 거보다 내게 훨씬 맛있어.”
“네가 라면을 알아? 새파랗게 어린 게 까불고 있어.”
아수라장이 된 가스레인지를 보며 민재는 머리를 짚었다.
누가 더 잘 끓이는지 내기를 했다며 두 사람은 곧 민재 앞에 각각 끓인 라면을 들이밀었다.
“우선 내 거부터. 홍옥자 스페셜 소시지와 소고기, 트뤼프 오일을 넣고 끓인 슈퍼 리치 라면이야.”
“앗 그건…….”
아껴놓은 재료가 홍 사장 손에 거덜이 났다.
곧이어 용암처럼 끓고 있는 제레미의 라면에서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건 딸기 우유 라면이야. 민재가 좋아하는 아몬드 초콜릿도 듬뿍 넣었으니 분명 맛있을 거야!”
“저기, 둘 다 맛은 봤어요?”
“무조건 맛있어!”
뻔뻔하게 심사를 요구하는 통에 민재는 어쩔 수 없이 두 라면의 국물만 억지로 한 입씩 떠먹었다.
“우욱…….”
느끼함과 달콤함이 뒤섞인 끔찍한 맛에 민재는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갔다.
입을 몇 번이나 헹궈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언니!!”
뒤늦게 도착한 홍 여사가 만신창이가 된 주방을 살폈다.
물도 못 넘기고 구역질을 하는 민재를 서둘러 침실로 옮겼다.
“옥자가 나빠. 저런 기름 덩어리를 어떻게 먹으란 거야.”
“네 건 어떻고. 어떻게 딸기 우유로 라면을 끓여.”
“시끄러워. 두 사람 다 나가 있어.”
매서운 축객령을 내리고서 홍연희 여사는 민재 앞에 갓 끓인 미역국을 들이밀었다.
“이건 먹을 수 있겠어?”
고소한 냄새에 눈이 떠졌다.
올라오던 게 거짓말처럼 내려가서 민재는 홍 여사가 준 미역국을 한 대접 모두 깨끗하게 비웠다.
“정말 맛있어요.”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속이 부대끼긴 했었다.
겨우 속을 가라앉히고 안도하는 데 홍 여사는 걱정 어린 얼굴로 민재의 손을 꼭 잡았다.
“민재 씨, 이건 내가 설마 해서 하는 말인데.”
이상할 정도로 심각해진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홍 여사는 몇 번이나 뜸을 들이고서 민재에게 물었다.
“혹시 임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