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아직은 아니야.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이게 다 소영하 씨가 문을 늦게 열어서 다친 거잖아요?”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에 소영하의 미간이 구겨졌다.
대놓고 불쾌해 보이는 그를 앞에 두고도 장미는 생글생글 웃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할 말이 있는데, 여기 계속 이렇게 세워둘 건 아니죠?”
보안이 철저한 곳이지만 이웃 주민들의 시선까지는 차단할 수 없다.
혹시나 누가 보면 곤란하니 그는 어쩔 수 없이 장미를 집에 들였다.
“어머, 의외네요.”
지난번에 왔을 때도 느낀 거지만,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기엔 어쩐지 어색한 물건들이 여럿 보였다.
모노 톤의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는 프릴이 가득 달린 쿠션이나 벽에 걸린 풍경화나, 사소한 소품 하나마저 얼핏 보기에도 심히 이질적이다.
소영하가 저런 걸 살뜰히 챙길 성격은 아니니 아마 그 여자의 취향일 것이다.
“이거 귀엽다.”
테이블 위에 놓인 특이한 화병을 집자 소영하가 건드리지 말라며 바로 빼앗아들었다.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
“구경만 하는 건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요?”
언짢은 소영하의 표정을 살피며 장미는 화병을 살펴보는 척하다 일부러 바닥에 떨어트렸다.
산산조각이 난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장미의 다리에도 박혀 피가 흘렀다.
“아, 손이 미끄러졌네.”
그 와중에도 장미는 새침한 얼굴로 소영하의 반응을 살폈다.
처참하게 깨진 조각을 보며 절망하는 걸 보니 저건 분명 그 여자가 사준게 맞는 모양이었다.
“아파요.”
“여긴 대체 뭐 하러 온 겁니까?”
“나 손님인데요. 다리도 다쳤는데 차도 한 잔 안 주고 그냥 보내려고요?”
조각이 깊이 박혀 피가 뚝뚝 흘렀다.
일부러 상처를 냈다는 걸 뻔히 알고 있지만 소영하는 묵묵히 손수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치웠다.
장미는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진무혁에게도 몇 번이나 했던 짓이지만, 남자를 휘두르는 데는 이만한 방법이 없다.
“차 같은 건 안 마셔서 없으니까, 이거 마시고 치료는 병원가서 하세요.”
얼핏 봐도 머리끝까지 화가 난 소영하는 테이블 위에 찬물 한 잔과 수표 몇 장을 건넸다.
이깟 돈 몇 푼으로 넘어갈 모양이지만 장미를 집에 들인 시점에서 이미 저쪽의 패배다.
일부러 깨지지 않을 플라스틱 컵을 가져온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나한테 협력하기로 한 거 잊어버린 거예요?”
“협력은 무슨.”
뻔뻔한 조장미의 태도에 소영하는 욕이 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차에서 쪽잠을 자며 몇 주 만에 처음 얻은 휴일이었다.
당장 내일도 촬영이 있어서 일찌감치 잠들었는데, 초대받지 못한 손님은 제 잠을 깨운 것도 모자라 뜬금없는 소리만 늘어놨다.
“나더러 뭘 어쩌란 겁니까?”
“메시지 보냈잖아요. 설마 일부러 못 본 척하는 거예요?”
일 때문에 바쁠 때는 폰을 볼 시간에 차라리 잠을 잤다.
촬영에 들어가면 언제나 이런 식이라 여자친구가 생길 때마다 그 문제로 늘 싸우기 일쑤였다.
바쁘니 어쩔 수 없는 거라며 이해해 준 건 석민재가 유일했는데.
이제는 그 여자마저도 자신을 떠나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됐다.
“언제 보낸 겁니까?”
“잘 찾아봐요. 괜히 바쁜 척 유세 부리지 말고.”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얄밉기 그지없다.
소영하는 없는 인내심을 모조리 발휘해가며 그동안 온 메시지들을 훑어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조장미에게 온 메시지는 보이지 않는다.
“뭘 보냈단 겁니까?”
“석민재가 다시는 성가시게 하지 않게 손 쓸 거라고 했었잖아요.”
“손을 쓰다니?”
자신이 그랬다면 모를까 민재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장미는 예쁘게 손질한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이를 갈았다.
“우리 아빠를 적으로 돌리고도, 그 여자가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화사한 미소로 던지는 서늘한 경고 안에 뼈가 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소영하도 그 말을 듣고 새삼 깨달았다.
무언가가 완전히 잘못됐다는 걸.
‘젠장.’
이 여자의 말만 듣고서 오해한 것도 모자라 멋대로 찾아갔으니 민재가 진절머리를 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갑자기 마주친 순간, 서둘러 건넨 사과에도 민재는 이제 지긋지긋하며 냉정하게 돌아서기 바빴다.
“이제 그만하죠. 그쪽에서 뭘 하든, 난 이제 이 일에서 빠질 겁니다.”
“뭐?”
지난번 행사 이후로 오래 생각했다.
이젠 제 얼굴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민재를 보며 깨달았다.
석민재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어쩌면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무심코 흘렸던 징조들을 곱씹을수록 짚이는 기억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사귀는 것도, 결혼 얘기도 전부…….’
민재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흥미 따위는 없었다.
잘못한 게 있다면 그저 소영하를 믿은 것, 감언이설에 넘어간 게 죄라면 죄인 셈이다.
‘만약, 그때 내가 약속을 지켰더라면…….’
그는 그저 민재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으니까.
그때도 언제나처럼 잔뜩 기대하게 만들고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깼다.
어차피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니 여느 때처럼 그냥 넘어가 줄 거라고 믿었다.
‘쓰레기 같은 새끼.’
뒤늦은 자기혐오가 밀려들었다.
처음에는 배신감에 눈이 뒤집혔지만, 결과적으로 미련이 남은 건 자신 혼자뿐이다.
뒤늦게 용서를 구해본다 한들 석민재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됐다.
- 사랑해, 무혁씨.
통화를 엿듣는 내내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석민재는 저렇게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속삭일 만큼 귀여운 여자가 아니었다.
차갑고, 무뚝뚝하고, 무심한 듯하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 보여주는 미소가 참 예쁜.
자신은 그토록 보기 힘든 민재의 웃음이 그 남자에게는 어째서 그리도 쉬웠던 걸까.
“그쪽의 목적이 뭐든, 이제 더는 날 끌어들이지 마세요.”
차라리 미워한다고, 죽으라고 저주를 했더라면 미워할 수라도 있었을 텐데.
민재는 돌아서는 마지막 순간조차 그저 제 시야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해 보였다.
알아서 살라고. 대신 너무 잘 살지는 말라고.
이젠 정말 모든 걸 잊어버린 것 같은 뒷모습을 보며 알았다.
더는 석민재의 세계에는 소영하란 이름 석 자조차 남길 곳이 없다.
‘민재야.’
그녀가 사라진 이후 죽을 것 같은 자신과 달리, 오랜만에 본 민재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생기 넘치는 뺨과 밝은 표정을 보니 괜히 자꾸 미련이 남았다.
한마디라도 말을 걸고 싶어서, 뒤를 따라가다 영문도 모른 채 조사까지 받았다.
대체 왜 남의 부인을 따라다닌 거냐는 물음에 비로소 이성이 돌아왔다.
“석민재한테 복수하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요?”
“복수는 내가 아니라 민재가 해야 하는 거겠죠. 먼저 배신한 건 민재가 아니라 나였으니까.”
단호한 소영하의 태도에 장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 손을 잡는 건 그쪽 마음이었어도, 놓는 건 아니지.”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그럼, 못 할 것 같아?”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방에서 울리는 진동에 소영하는 잔뜩 독이 오른 조장미를 외면하고 전화를 받으러 갔다.
“어, 무슨 일이야.”
“형님.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매니저의 다급한 말에 잠시 머리를 짚었다.
지난번 조사 건인가 싶어 그는 적당히 둘러댔다.
“그냥 실수였어. 별일 아니라고 확인도 받았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너무 빼도 막도 못 할 사진이라 외부에서 난리도 아니에요!”
전화를 끊고 소영하는 메시지 속 사진을 확인했다.
서둘러 방을 나온 그를 보며 조장미는 오만한 미소로 그를 올려다봤다.
“무슨 일이 있나 보네요?”
“제정신이야?”
“내가 뭘? 난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방금까지 그냥 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을 때는 언제고 아무것도 모른다며 시치미를 뗀다.
가증스러운 여자.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라며 소영하는 조장미의 앞에 제 전화를 들이밀었다.
“이래도?”
화사하기만 하던 조장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지간하면 놀라는 일이 없는 법이 없는 장미도 사진 속에 제 얼굴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게 뭐야.”
선뜻 문을 열어 주는 소영하와 해맑게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장미의 모습이 고스란히 찍힌 사진 아래에는 두 사람이 열애 중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아빠]
곧이어 장미의 전화 역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
“소영하랑 조장미를 엮을 거라고?”
“응. 조만간 제레미 녀석이 한 건 저지를 거야.”
집에 도착할 즈음 잠에서 깬 민재의 성화에 무혁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계획을 실토했다.
제레미는 분명 잔소리를 할 테지만 무혁은 언제나 민재 앞에서는 한없이 물렀다.
“웃기긴 하겠다.”
“조원식이 장미에게 딱 하나 허락하지 않은 게 남자 문제였거든.”
어린 시절부터 세뇌에 가깝게 무혁만 바라보라고 해놓은 탓에 장미는 태어나서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감정 자체를 알지 못하는 그 애가 생각지도 못한 소영하와 스캔들이 난다면 뭐라고 할까.
외동딸인 장미는 남자 손 한 번 못 잡아본 요조숙녀라며 자랑하던 조원식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혁과의 혼사도 완벽하게 파투가 나며 조원식은 제법 이름난 재벌가에 장미와의 혼담을 제안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안 그래도 없는 머리숱을 쥐어뜯게 될 모습이 눈에 선했다.
“때리고 싸우고 그런 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야.”
“차라리 한 대 맞고 끝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태연한 무혁과 달리 민재는 적어도 이번 일 만은 조장미가 정말로 불쌍해졌다.
아마 조장미뿐만 아니라 소영하에게도 평생 가는 꼬리표가 될 것이다.
언제나 팬들만 바라본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소영하에게 좋은 집안의 일반인 여자친구가 있다는 기사가 나오게 된다면 자연스레 민재와 있었던 일까지 장미에게 덮어 씌워질지도 모른다.
“동정하지 마. 이건 다 자업자득이니까.”
“그건 그렇지.”
냉정한 무혁의 말에 이성을 찾았다.
죽을 뻔한 걸 생각하면 이 정도 복수는 오히려 귀여운 축에 속한다.
다만 한 가지, 사과하던 소영하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게 정말 다 연기였을까.’
아무리 연기력이 늘었다고 해도 그 정도로 애절하게 할 수는 없을 텐데.
적당히 화를 풀어주려고 핑계를 댄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이번만큼은 사뭇 달랐다.
“민재야.”
“어?”
무혁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새 갓길에 차를 세우고서 무혁은 그대로 엔진조차 꺼버렸다.
“왜 그래?”
“할 말이 있어.”
“할 말?”
“네 부모님 얘기.”
그러고 보니 보육원을 비롯해 친부모를 찾는 문제는 모두 무혁에게 일임했었다.
제레미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지만, 못 믿을 인간이다 보니 금방 또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친 걸지도 모른다.
“찾은 거야?”
“완전히 찾은 건 아니지만…….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어서.”
“무슨 문제?”
“아까 집에 들어온 흔적 있었던 거. 없어진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었지.”
“자잘한 건 모르겠지만 돈 되는 건 다 그대로 있었어.”
오래도록 집을 비워야 하다 보니, 처음 무혁의 집에 들어오던 날 모두 정돈해뒀었다.
패물은 물론 현금에도 무엇하나 손댄 흔적 하나 없이 깔끔했었으니 민재는 그 흔적조차도 제 기우인줄 알았다.
하지만 무혁의 생각은 달랐다.
“어쩌면 그 사람들이 찾는 건 다른 거였을지도 모르지.”
“다른 거?”
“할머니가 그러셨어. 네가 버려졌을 때 있던 배냇저고리가 부모님을 찾는 단서가 될 거라고.”
“그건…….”
분명 결혼 전에 할머니가 그런 말을 했었는데, 정작 민재는 옷장 안에 대충 처박아두고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본 기억이 없긴 하다.
“그걸 훔치러 온 거라고?”
“이건 그냥 의심이야.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조심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무혁의 말을 듣고 나니 소영하 따위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무혁이 차를 대는 사이, 민재는 한발 먼저 올라가 서둘러 제 옷장부터 뒤졌다.
“어디 간 거지.”
“무슨 일이야?”
허겁지겁 달려와 서랍을 뒤지기 시작하니 막대사탕을 물고 있던 제레미가 안방까지 들어와 물었다.
“뭘 찾는 거야?”
“혹시 여기 안에 있던 거 못 봤어?”
서재 외에 안방에는 근처에도 오지 않았으니 제레미는 아닐 테지만, 분명 어딘가에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뭔데?”
“내 부모님을 찾으려면 그게 있어야 하는데, 금색 보자기에 싸인 아기 옷이야. 도대체 어디에 갔는지 안 보여.”
할머니가 그동안 애지중지하며 보관해 온 물건이었는데.
이걸 이렇게 잃어버릴 줄은 몰랐다.
“무슨 일이야?”
차를 대고 올라온 무혁이 뒤늦게 안방에 들어왔다.
하지만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제레미는 울상 짓는 민재를 달래기 시작했다.
“천천히 찾아봐, 어딘가에는 있겠지.”
“그런가…….”
서둘러 민재를 욕실에 밀어 넣고서 제레미는 무혁의 손을 잡아끌었다.
제 방까지 달려와 문까지 걸어 잠그고, 그는 서랍 안에 넣어둔 보자기를 찾아 무혁에게 내밀었다.
“이건 여기 숨겨놓을 거야.”
“그건 왜?”
“쉿.”
이 배냇저고리는 어쩌면 날개옷이 되어 민재를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버릴지도 모르니까.
손을 뻗으려는 무혁을 막아서고서 제레미는 망설이는 무혁을 설득했다.
“어차피 없애버리는 것도 아니잖아.”
“제레미.”
“민재를 빼앗기는 건 싫어.”
그저 잠깐, 시간을 벌면 되는 거라고.
그러니 아직은 조금 더 여기에 잠들어 있으면 되는 거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