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고마워, 남편.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다 싶더니 제레미를 데리러 갔을 때 만났던 바로 그 조폭이다.
“지난번엔 사람을 제대로 물 먹였지 뭐야.”
“뭐야, 너희는?”
괴한들의 등장에 안 팀장이 나섰다.
하지만 성질이 더러운 것과 별개로, 원체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귀한 막내둥이 도련님이신 지라.
“아저씨는 비켜.”
안 팀장은 조카뻘인 놈들에게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맥없이 고꾸라졌다.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늦은 밤이다. 겁먹은 민재를 구석에 몰아넣으며 조폭들은 하나둘 칼을 꺼내 들었다.
“미인이라 적당히 손만 봐주려고 했는데, 어쩌겠어. 네 팔자려니 해야지.”
겁에 질린 민재는 무혁을 떠올렸다.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는데.
아니, 죽을 때 죽더라도 단서는 남겨야 한다.
넘어진 안 팀장이 일어나는 걸 보고 민재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성준범이 보낸 건가요?”
“누구?”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정말로 모르는 눈치다.
상속 문제로 민재가 거슬려서 손을 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범인은 그 사람인가 보다.
“조원식이군요.”
대답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름을 듣자마자 눈빛이 바뀐 금목걸이 사내는 칼을 고쳐 쥐고서 곧장 민재의 뺨에 들이밀었다.
“눈치가 빠른 건 좋은데, 쓸데없이 입을 놀리면 곤란하지.”
“그런 거였군요.”
“이 자식들이!”
악에 받친 안 팀장이 뒤에서 조직원 하나를 걷어찼다. 그 틈을 타 민재는 옆으로 몸을 빼 그대로 골목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거기 서!!”
이제는 각자도생이다. 안 팀장이 반대쪽으로 뛰어가는 걸 보고 민재는 최대한 불빛이 보이는 큰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골목 어귀에 다다를 즈음 때마침 거구의 남자 무리가 보였다.
“도, 도와주세요!!”
필사적인 외침에 남자들은 걸음을 멈춰선 채 뒤따라오는 조폭들을 힐끔 바라봤다.
“너흰 또 뭐야?”
칼까지 들고 덤비는 상대를 보고도 이들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민재를 뒤에 숨겨줬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덜덜 떠는 민재를 진정시키며 남자들은 하나둘 외투를 벗기 시작했다.
“아가씨, 오늘 운 참 좋으시지 말입니다.”
“네?”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보자. 얘들아.”
소매까지 걷자 곧 건장한 팔뚝에 근육들이 불끈거렸다.
흉기를 보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그들은 손목을 돌리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아가들아, 너희 혹시 UDT라고 들어는 봤니?”
예전 군사 법원 관련 재판을 다루던 중 분명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해군특전단 UDT 씰, 육해공을 가리지 않는 특수부대로 이들의 주요 임무는 분명 대테러지원 및 경호, 그리고 직접 타격.
쉽게 말해 사람 때려잡는 무시무시한 특수부대원이라는 건데.
“저기, 제발 그냥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그냥 가던 길 그대로 가시죠?”
칼을 들고 위협하던 조폭들의 애원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예로부터 문제를 해결해주는 건 지나가던 선비, 지나가던 스님, 지나가던 할머니 등등 많고 많지만.
“어디 감히 민간인을 건드려?”
하필이면 인간 병기나 다름없는 지나가던 UDT를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민재는 기둥 뒤에 숨은 채 신나게 피떡이 되어가는 조폭들을 열심히 관찰했다.
***
밤늦게 걸려온 전화에 무혁은 심장이 떨어지는 줄만 알았다.
낯선 목소리는 자신을 경찰이라고 밝혔다.
“잠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급하게 액셀을 밟아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무혁은 서둘러 민재부터 찾았다.
“석민재 남편 되는 사람입니다만.”
“아,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이쪽으로 오시죠.”
급하게 양복까지 입고 달려왔는데 경찰은 무혁을 데리고 유치장쪽으로 향했다.
“아 글쎄, 내가 변호사라니까!”
“그렇다고 저놈들 뒤통수를 때리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냥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유치장에 갇힌 안 팀장을 보며 무혁은 이 사태가 어찌 된 일인지 도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저분, 아시는 분입니까.”
“소개가 늦었습니다. 법무법인 A&Z 소속 진무혁입니다. 저분도 저희 변호사님이시고요.”
“진짜 변호삽니까?”
하는 짓이 하는 짓이다 보니 오해를 사도 어쩔 수 없다.
신분 확인이 된 후에야 겨우 풀려난 안 팀장은 나가자마자 곧장 굴비처럼 묶인 조폭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이 자식들이. 아까 날 때린 복수야!”
“쓸데없는 짓 좀 그만하시고 민재는 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저기.”
복도 맞은편 조사실에 가니 때마침 민재가 사건 관련 조사를 받고 있었다.
무혁은 변호사 자격으로 민재의 곁에 앉아 대강의 정황을 파악했다.
“운이 좋으셨던 겁니다. 때마침 그때 아까 그 양반들이 지나갔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다짜고짜 절 죽이겠다고 했어요. 누가 사주한 건지는 몰라도 확실하게 조치 부탁드릴게요.”
현장에서 가져온 칼까지 증거물로 내밀고 대강의 조사가 끝났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찾아왔으니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어떻게든 손을 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거기, 다들 모여 봐.”
“서장님께서 이 밤에 어쩐 일로…….”
어쩐지 경찰서 입구가 심히 소란스러웠다.
한참 경찰 조사가 진행될 즈음, 경찰서장은 손님과 함께 조사실로 찾아왔다.
서장 옆에 선 조원식을 보고서 민재는 무혁의 옷 소매를 꼭 쥐었다.
“저 사람이 시켰어.”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서 조원식은 현장에 있는 형사들과 악수까지 했다.
그러고는 민재와 무혁 쪽을 힐끔 보고서 대수롭지 않은 듯 미소지었다.
“술김에 잠시 시비가 붙은 모양입니다. 서장님.”
“아무럼요. 젊은 혈기에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서장님, 흉기도 나왔고 이건 분명…….”
젊은 형사 한 사람이 뭐라고 입을 열었지만, 옆에 선 형사가 발을 밟자 곧 조용해졌다.
민재를 조사했던 형사조차도 그 꼴을 보고서 어처구니없단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또 저러네요.”
“아는 얼굴이세요?”
“저놈들 다 독사파 출신이에요. 매번 어찌나 잘 빠져나가는지.”
원래 있던 독사파는 진이한 검사, 즉 무혁의 아버지의 손에 괴멸 직전까지 몰렸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을 계기로 조사는 어느샌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두목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은 대부분 징역을 살게 됐지만, 그들은 출소 후 다시금 조직을 재건해 여러 범죄에 관여하고 있다.
“걸릴 때마다 저 양반이 꼭 직접 와서 초를 치니 우리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랬겠죠.”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조원식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적당히 주취로 인한 난동 정도로 수습하고서 조원식은 태연히 걸어와 무혁의 앞에 섰다.
“오랜만이로구나. 무혁아.”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조사를 일방적으로 마무리 짓고 조폭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경찰서를 나섰다.
나중에 다시 조사한다고 해도 이렇게 되면 제대로 된 처벌은 기대하기 힘들다.
“요즘 들어 여기저기 장난질을 치고 다니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네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무혁의 자존심을 내리 짓밟고서 조원식은 옆에 선 민재를 힐끗 바라봤다.
여전히 공기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그는 민재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놀음은 그쯤 하면 됐으니 이만 정신 차려라.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고.”
“쓸데없는 짓인지 아닌지는 대 보면 알게 되겠죠.”
혹시라도 민재에게 손을 대지 못하도록 무혁은 조원식의 앞을 막고 섰다.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말로 아무리 구슬려본다 한들 무혁도 더는 곱게 넘어가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조원식은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대단하신 권력자셔서 그런지 이후의 상황은 일사천리다.
칼까지 들이민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지만, 오히려 다친 곳이 없다 보니 뚜렷한 피해가 없다며 담당 경찰은 사건을 적당히 얼버무렸다.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선생님.”
부당하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서장이 직접 저렇게 나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풀려난 두 줄 금목걸이의 사내는 민재 쪽을 힐끗 보고서 손가락으로 목을 그었다.
다음에 보면 정말로 죽여버릴 거라는 경고인가 본데.
‘나쁜 자식들.’
이번에는 불시에 당한 거라지만 그런다고 곱게 넘어가 줄 생각은 없다.
민재는 그에 질세라 보란 듯이 가운뎃손가락을 곧게 폈다.
“그 자식들이 풀려났다고?”
“대체 어딜 갔다 오신 거예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모조리 풀려났다는 민재의 말에 안 팀장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따위로 나온다 이거지?”
다음 달 인사 발령 문제로 어떻게든 조원식에게 비빌 모양이지만 하필이면 그게 안 팀장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려버렸다.
“CCTV랑 블랙박스부터 확보 들어갈 겁니다. 어디 한 번 끝까지 가봅시다.”
“아이고, 선생님.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무혁이 잠자코 있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무궁화 네 개를 단 총경급 경찰서장의 위에는 태극 무궁화의 경무관이 있다.
“형님. 접니다, 봉구.”
경찰청 본원에 실시간으로 민원을 넣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며 서장은 안 그래도 없는 머리숱을 쥐어뜯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러게, 왜 풀어준 건데!”
진상에는 진상으로 맞대응하는 악랄한 수법을 보며 민재는 무혁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어째 조용하다?”
“응?”
“조원식, 왜 그냥 보낸 거야?”
안 팀장이 칼춤을 추는 것과 별개로, 별말 없이 조원식을 보내준 게 이상했다.
치밀한 진무혁이 이런 일을 이토록 쉽게 넘어갈 리가 없는데, 무혁은 민재의 손을 꼭 잡고서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저쪽은 곧 핵폭탄이 떨어질 거라서.”
“핵폭탄?”
“깜짝 선물을 준비했어. 받아보면 분명 마음에 들 거야.”
“무슨 선물이길래?”
뜻 모를 미소만 머금은 채 무혁은 민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손등을 몇 번이나 쓰다듬고서 손가락을 깍지까지 끼고 꼭 거머쥐었다.
갑자기 경찰에서 연락이 왔으니, 급하게 달려오면서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떨리는 손을 꼭 쥐고서 문득 할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외로운 사람이니까, 여차하는 순간 제일 먼저 진무혁 생각이 났다.
“스포일러 좀 해봐. 궁금하잖아.”
“깜짝 놀랄 조합이라고만 해둘게.”
“응?”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 무혁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서둘러 회수된 CCTV와 블랙박스 자료까지 확보하자 서장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제대로 조사할 테니 오늘은 제발 돌아가 주세요.”
“허튼수작 부리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아무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서장이 머리까지 숙이고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며 형사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아마 조만간 제대로 콩밥을 먹일 날이 올 모양이다.
“집에 가자.”
“응.”
할머니 옆에는 안 대표가 있으니 이제는 민재도 한 시름 덜었다.
물론 아주 조금은 서운하지만, 그래도 이제야 새삼 더욱 확신하게 됐다.
이제 민재의 집은 할머니의 곁이 아닌 진무혁과 함께 사는 바로 그 집이니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그런 거였구나.’
할머니가 없이도 꿋꿋하게 잘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하다.
오래된 추억을 뒤로하고서 민재는 무혁의 차에 올랐다.
이제 앞으로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은 이 사람이니까. 민재는 그의 팔에 살짝이 머리를 기댔다.
“졸려?”
“응. 나 잘래.”
“편하게 자.”
민재는 배시시 웃고서 기꺼이 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완연한 달빛 아래 경계심을 완전히 푼 채 민재는 핸들을 쥔 무혁의 팔에 살짝이 머리를 기댔다.
“고마워, 남편.”
“별말씀을.”
위기의 순간 달려와 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토록 안심이 된다.
왜인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 민재는 고양이처럼 무혁의 팔에 기대 머리를 비볐다.
***
“죄송합니다, 아가씨.”
벌써 몇 번째 꼬리를 잡아보려 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이상할 정도로 느려진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며 장미는 제 앞에 무릎 꿇은 남자의 손등을 구두 끝으로 지그시 밟았다.
“난 무능한 사람은 필요 없어.”
손등에서 피가 날 정도로 세게 밟고도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았다.
대체 석민재 그 여자가 뭐길래 매번 미행에서 놓치는 건지.
오늘도 코앞에서 놓쳤다는 말에 장미는 잔뜩 심통이 난 채로 죄 없는 베개만 퍽퍽 때렸다.
“그나저나 소영하는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지?”
지난번 자선 파티에서 마주쳤을 때도 소영하는 눈인사도 건네지 않은 채 차갑게 자리를 떴다.
석민재 일로 손을 잡기로 한 주제에.
차라리 못 나갈 때라면 이미 퇴물이 됐다며 후려치기라도 편할 텐데 요즘 들어 소영하는 일에 미친 사람처럼 스케줄을 잡은 탓에 이제는 좀처럼 만나볼 수도 없는 사람이 됐다.
“어쩔 수 없네. 내가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이렇게 된 이상 삼자대면이라도 시켜줘야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남녀 세 사람의 아슬아슬한 치정극을 기대하며 장미는 신나게 미리 조사해둔 소영하의 집으로 찾아갔다.
HS엔터에 심어둔 매니저 말로는 집에 있다고 했다.
언제나처럼 장미는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서 있는 힘껏 손이 부서질 정도로 철문을 열심히 두드려댔다.
“……뭡니까?”
진무혁이 그랬던 것처럼, 소영하 역시 부스스한 몰골로 문을 열었다.
자다 깬 것 같은 그를 마주하고서 장미는 벌겋게 부어오른 제 오른손을 당당히 들이밀었다.
“손을 다쳤어요. 치료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