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내 얼굴만 봐도 좋대요.
“할머니!”
퇴원한 할머니는 우아한 한복차림으로 민재를 맞이했다.
“짐 정리하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고생은 무슨. 이제 정말 괜찮은 거죠?”
안 대표의 고집 덕분에 할머니는 병원을 나와 성북동 저택에서 살게 됐다.
입구에서부터 으리으리한 규모를 보니 대단한 집안인 것 같은데.
이 집의 원래 안주인이라는 안 대표의 큰며느리는 손수 앞치마까지 두르고 나와 민재 일행을 반겨줬다.
“어머님께 이야기 다 들었어. 이제 한 식구가 됐으니 큰엄마라고 불러.”
안 대표가 막둥이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스스로 큰엄마라고 칭한 큰며느님은 벌써 손자까지 둔 할머니라고 했다.
“우리 형은 결혼은 일찍 했거든. 큰형수네 손자가 벌써 초등학생이니까.”
“우리 현수가 막내 도련님하고 동갑인 건 잊으셨나 봐요.”
그 나이에 갑자기 새로운 시어머니가 생기게 됐으니 이 집안도 족보가 만만치 않게 꼬인 셈이다.
“우리 아버님은 원래 사람 놀라게 하는 데는 선수신걸. 기껏 시집와서 애를 낳았더니, 시어머니랑 같이 손잡고 나란히 산후조리를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어허, 큰애 너는 조용히 해.”
민망한 안 대표가 대놓고 눈치를 줬다.
시아버지에게는 대놓고 핀잔을 주는 걸 보면 보통은 넘는 것 같은데, 그래도 할머니와는 제법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민재는 사기꾼이야. 밥은 주고 부려 먹어야 할 거 아냐.”
그 사이, 할머니의 짐을 옮기던 제레미는 불만이 가득한 채 민재에게 투덜거렸다.
“저 아가는 아직도 밥을 못 먹었어?”
“밥을 굶으면 쓰나, 어서 식사 준비할게요.”
밥 굶는 건 못 보는 할머니들의 성화에 엉겁결에 식사 자리가 마련됐다.
민재 부부가 나란히 앉고 할머니는 맞은 편에 앉은 제레미의 옆에 앉아서는 손수 간장게장을 가위로 잘라줬다.
“요게 아주 밥도둑이야. 많이 먹으렴, 아가.”
할머니가 손수 잘라준 간장게장을 보며 제레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무혁만 쳐다봤다.
“먹는 법을 모르나? 이건 이렇게 먹는 거야.”
큰엄마까지 가세하며 할머니 둘에 포위당한 제레미는 눈물을 머금고 게장과 함께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
두 눈을 질끈 감고 한 입 삼키자 오만상을 쓰던 제레미의 얼굴이 밝아졌다.
“맛있지?”
“이거 신기해.”
하여튼 맛있는 건 알아 가지고.
제레미가 게장에 허겁지겁 밥을 비벼 먹는 사이, 무혁은 얌전히 젓가락을 들고서 생선을 발라 민재의 숟가락 위에 얹어줬다.
“많이 먹어.”
그동안 너무 바빴던 탓일까, 어쩐지 가족에게 둘러싸여 식사하는 것 자체가 너무 오랜만인 것만 같다.
제레미 옆에서 잔소리까지 하며 즐거워 보이는 할머니를 보니 민재는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음식은 입에 맞고?”
어느새 큰엄마가 민재 옆에 와 앉았다.
“네, 맛있어요.”
“무혁이도 많이 먹어. 오랜만에 이렇게 얼굴도 보고 좋네.”
민재 대신 무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쪽은 구면인 건지, 큰엄마는 무혁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나도 두 사람 결혼식 때 잠깐 들렀었는데, 인연이 닿으니 이렇게 또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조급하게 올린 결혼식 날은 손님이 너무 많았던지라 누가 누구인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민망해서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데, 그 모습이 기특한 건지 큰엄마는 연신 웃으며 민재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안 그래도 우리는 아들만 셋이라 이렇게 예쁜 딸이 갖고 싶었는데. 아버님이 주신 선물 중에 제일 마음에 드네요.”
“암, 그렇고말고.”
은근히 뼈 있는 말인데 왜 안 대표만 모르는 걸까.
식사를 마칠 즈음 큰엄마는 슬쩍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고는 민재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은 자고 가. 민재도 오랜만에 할머니랑 같이 자면 좋을 거잖아.”
분위기를 보아하니 어른들끼리는 벌써 작당 모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가 반갑긴 하다지만 냉큼 그러겠다고 하기엔 무혁이 마음에 걸렸다.
“내일 데리러 올 테니까, 그렇게 해.”
“그래도 돼?”
“난 처리할 게 있어서 제레미랑 먼저 집에 갈게. 모쪼록 민재를 잘 부탁드립니다.”
산뜻한 허락이 오히려 예상을 벗어났다.
오늘 밤에는 무혁을 독점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건지 제레미는 벌써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약을 올렸다.
“오늘은 무혁이랑 같이 잘 거야.”
“웃기지 마. 오늘만 빌려주는 거니까 허튼짓하기만 해봐.”
“됐거든? 못난이. 다시는 오지 마.”
평소처럼 구박하는 제레미의 반응에 할머니의 표정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안 대표는 결국 또다시 지팡이를 들고서 제레미에게 응징을 가했다.
“아, 왜 때려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네놈이 제주 제씨면 단 줄 알아?”
앙숙처럼 싸우는 두 사람을 보니 어서 떼어놓는 게 나을 것 같다.
할 일이 많다는 말에 무혁을 배웅하고서 민재는 오랜만에 할머니와 함께 자기로 했다.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괜찮아, 어서 들어가 봐.”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 안 대표를 밖에 두고 민재는 할머니가 누운 안방으로 들어갔다.
퇴원하긴 했지만, 여전히 백 퍼센트 건강한 건 아닌 탓에 할머니는 저녁도 거의 들지 않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여기서 지내는 건 어때요?”
“현수 엄마가 어찌나 살뜰하게 챙기는지, 아주 지극 정성이 따로 없어.”
툭하면 폭주하던 고집쟁이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만난 뒤로는 사춘기 소년이 됐다.
말년에 두 분이 외롭지 않게 잘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큰엄마의 말에 이쪽 집안에서도 두 분의 재혼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됐다.
“이 댁 식구들은 진 서방 하고도 오래 알고 지냈으니, 여차하면 현수 엄마한테 의지해.”
“……할머니.”
눈물을 머금은 채 민재는 할머니를 꼭 껴안았다.
대놓고 말을 하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할머니는 줄곧 ‘할머니가 없을 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목숨은 유한하다지만 그래도 하나 남은 가족인 할머니가 사라진다는 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민재야.”
“나한텐 할머니밖에 없단 말이야.”
문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민재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 숨죽여 울었다.
할머니가 없었더라면 민재도 지금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늙은이가 짐이 되지는 말아야 했는데, 새파랗게 어린 것을 두고 그리 가버리니.”
“그러지 마.”
통곡하는 손녀를 다독이며 할머니는 민재의 왼손 약지에 있는 결혼반지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결혼하니 좋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민재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빈말로라도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할머니는 그런 손녀의 눈물을 닦아주고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줬다.
“그러니 이제 이 할미 걱정은 하지 말고 너희 걱정이나 해. 진 서방을 보니 아주 잠시도 눈을 못 떼던데.”
“그 사람한테는 내가 할머니 같은 존재인가 봐요.”
가족도 친지도 없이 복수만을 꿈꾸며 살아온 그에게 어쩌면 민재를 만나 사랑에 빠진 건 예상치 못한 사고였던 걸지도 모른다.
민재에게 할머니가 있어 버틸 수 있었던 것처럼, 진무혁도 힘들 때마다 민재를 떠올리며 버텨왔다고 했다.
하지만 그 탓에, 그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제레미와 함께 잘 지내던 그가 굳이 한국에 돌아오게 된 것도 이제는 민재 자신 때문이었을 거란 확신이 생겼다.
“내 얼굴만 봐도 좋대요. 옆에서 숨소리만 듣고 있어도 행복하대요.”
“정이 고픈 게지. 외로운 사람이니까, 그러니 민재 네가 항상 옆에 있으면서 잘 다독여줘야지.”
언제나 강한 줄만 알았던 무혁이 약한 소리를 하는 건 민재도 처음 봤다.
아니라고 농담하듯 스치긴 했다지만, 아까 그 얘기도 그렇고 무혁은 아직 검찰에 미련이 많이 남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조원식이 더 미워졌다.
“제가 뭘 할 수 있는 걸까요.”
복수를 계획 중인 그를 말리기에는 민재도 원한이 깊었다.
자신조차 하지 못한 용서를 무슨 염치로 그에게 강요할까.
약을 먹은 탓인지 할머니는 이야기하다 말고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
주무시는 걸 확인하고 방을 나가보니 잠옷을 입은 안 대표는 여전히 베개만 안은 채 문밖을 서성이고 있었다.
“들어가세요.”
“아니, 나는, 나는 그냥…….”
“전 다른 방에서 자도 괜찮아요.”
집주인을 안방에서 내쫓고 편히 잠들 수 있을 만큼 눈치가 없진 않다.
할아버지를 방에 들여보내고 난 후에야 정말로 실감이 났다.
두 분은 정말로 결혼한 거라는 걸.
부모님이 재혼했어도 이런 기분은 아닐 것 같은데, 할머니가 남의 식구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어째 싱숭생숭했다.
“여기서 뭐 하냐?”
“팀장님.”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트레이닝 복 차림의 안 팀장이 이 층에서 내려왔다.
원래는 노인들만 사는 집이라 다들 일찍 자러 가서 그런지, 안 팀장도 못내 지루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민재의 옆에 털썩 앉았다.
“너랑 이렇게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
“그러게 말이에요.”
상사와 가족이 된다는 건 참으로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칠 년 넘게 일을 함께하긴 했지만, 사적으로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두 사람 다 처음이었다.
“같이 편의점이나 갈래? 여긴 먹을 게 없어서, 원.”
“그럴까요.”
노인들만 사는 집이라 군것질거리가 없다며 안 팀장은 맥주라도 사 오자며 흔쾌히 외출을 제안했다.
인적 하나 없는 골목길을 걸으며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눴다.
“팀장님은 왜 판사를 그만두셨어요?”
“돈 벌고 싶어서.”
“정말요?”
“거짓말이야.”
불같은 성격만 봐서는 오히려 검사도 잘 어울렸을 것 같은데 판사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민재도 적잖이 놀랬었다.
일부러 휴학까지 하고 군대를 다녀온 무혁과 달리 안 팀장은 스물두 살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원하는 보직은 얼마든지 골라갈 수 있었던 그가 굳이 판사를 하게 된 것도, 그만둔 사연이 궁금했다.
“판결을 어떻게 내리는지는 알지?”
법무관 시절을 빼더라도 안 팀장은 십 오 년 가까운 시간을 판사로 지냈다.
“내 결정 한마디에 그 사람의 미래가 결정되는데, 내가 뭐라고 이 사람을 심판할까. 그런 사건이 있었어.”
“무슨 사건이었는데요?”
“이십 년 동안 고아들을 돌봐온 보육교사가 사람을 죽였어. 피해자는 미성년자를 몇십 명이나 상습 강간한 보육원 원장이었고.”
부모도 없는 어린아이들은 갈 곳이 없어질까 두려워 탄원서를 보냈고, 원장은 명백한 범행 증거를 앞에 두고도 서로 사랑해서 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할아버지뻘 되는 늙은이가 민증도 안 나온 애를 잡고 그런 짓을 했어도, 법이 바뀌지 않는 이상 판사는 법대로 판결할 수밖에 없어.”
법에 나와 있는 대로 술을 먹고 한 일이니 감형, 피해자와 합의를 했다는 이유로 감형, 아이들을 시켜 받아낸 탄원서로 또 감형.
몇 번의 항고 끝에 보석으로 풀려난 후에도 그의 범행은 법의 눈을 피해 또다시 반복됐다.
보다 못한 보육교사는 결국 원장을 죽였다.
국선변호인은 우발적인 사고를 주장했지만, 평소 원장의 행동을 보며 분노했다는 동료 교사의 증언으로 계획 살인 혐의가 추가되고, 유족과 합의를 못 한 탓에 형량은 더욱 늘어났다.
“하필이면 두 사건 다 내 담당이었어. 그 선생은 변명 한마디 하지 않고 재판 내내 내 눈동자만 똑바로 보고 있었지.”
법에 근거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이성적 판단을 해야 하건만 그때 그 눈동자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만약 범인에게 더 강한 형을 선고했다면.
어쩌면 그 보육교사는 원장을 죽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재판이 끝날 때쯤 마지막으로 물었지. 어떻게든 형량을 깎아보려고 했는데, 그러더라고.”
자신은 법이 심판하지 못한 악마를 제 손으로 죽였으니 그 어떤 후회도 하지 않는다고.
반성하지 않았으니 마지막 감경 사유조차 제 발로 차버렸다.
[성범죄자의 편에 선 미친 판사는 물러가라!]
분명 법과 절차에 따라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비난은 거셌다.
최종 십 년 형을 선고하고 법원을 나오던 안 팀장은 법원 앞을 지키던 시위대가 던진 썩은 달걀 세례를 맞았다.
“그 사람들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 교사가 뭘 잘못했던 걸까.”
법이라는 건 대체 뭘까.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그는 한평생을 끼고 산 법전을 내려놓고 미련 없이 사표를 썼다.
“형들은 다 다른 일을 하니까 아버지는 A&Z를 내가 맡으면 되겠다고 좋아하셨지.”
“그랬었군요.”
직접적인 소송이 아니더라도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 일의 후유증 때문인지, 기업의 법률자문 업무를 주로 담당하는 안 팀장은 아직도 법원 쪽은 아예 거들떠보지 않았다.
“판사는 명예라도 있고 변호사는 돈이라도 있지. 검사는 자부심 하나로 버티는 건데, 진무혁이 그놈만 해도 그래.”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무혁의 이름이 나왔다.
“이래저래 핑계가 많아도 그 녀석, 검찰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거겠지.”
안 팀장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가 유독 침울해진 원인을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아까 차에서 했던 말이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 나 같은 가짜와 달리 저 녀석은 진짜니까.
그 일에 대해 좀 더 물어보려는 데, 갑자기 골목 앞에 세워진 차 한 대가 나와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거기 석민재 씨, 오랜만입니다?”
차에서 내린 남자의 얼굴이 어째 낯이 익었다.
가로등 아래 반짝이는 불빛 아래, 목에 걸린 두 겹의 금목걸이가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