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어릴 때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제레미의 사정을 알게 된 건 하버드에서 만난 교수의 소개였다.
- FBI에서 의뢰가 들어온 건인데, 무혁도 함께 보겠어요?
정체불명의 해커로부터 수상한 접속 기록이 이어졌다.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공조수사를 통해 수사팀은 도체스터 인근의 슬럼가를 찾았다.
안전하기로 소문난 보스턴 내에서도 치안이 유독 좋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추적한 현장에서는 나이든 남자의 시체가 발견됐다. 범인은 그의 아내였다.
난도질당한 사체에서 흐른 피로 현장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자욱한 피내음이 가득한 흉흉한 현장을 불러보던 중 무혁은 어둠 속에서 낯선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 잠시만.
뒤늦게 발견한 경찰은 소년의 손에 들린 흉기를 보고 곧장 총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먼저 내보내고 무혁은 직접 교섭을 시도했다.
-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아.
짐승의 눈을 한 소년은 여전히 겁에 질린 채 흉기를 쥐고 떨고 있었다.
- 너는 나를 해치지 못해.
무혁의 말은 마치 주문처럼 현실이 됐다.
반쯤 혼이 빠진 소년의 손에서 흉기를 빼앗고 무혁은 상처 입은 소년을 직접 어깨에 멨다.
제 어머니의 칼에 찔려 복부는 이미 자상으로 인한 출혈로 흠뻑 젖어 있었다.
혈액형이 같았던 덕분에 수혈까지 해주며 무혁은 필사적으로 제레미를 살렸다.
“그 여자는 왜 남편과 자식을 죽인 거야?”
“바람난 상대가 자기를 버리는 바람에, 그걸 모두 남편과 자식에게 풀었다나 봐.”
어째서 그럴 수가 있냐는 말을 하기에는, 민재도 현실의 참혹함을 수없이 봐 왔다.
국가대표조차 그만두고 친모의 손에 학대당하며, 고립된 아이는 주워온 부품으로 개조한 컴퓨터를 이용해 정부 전산망을 휘젓고 다녔다.
그게 살려달라는 신호라는 걸 알아본 건 진무혁 한 사람뿐이었지만.
그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죽었거나 감옥에 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돌봐줄 사람이 없는 저 녀석의 후견인은 내가 맡았지.”
아직 법적 권리를 모두 확보하지 못한 제레미는 보호 감찰 처분에 빠질 뻔했다.
하지만 복잡한 절차를 모두 감수하고서 무혁은 정식 보호자 권리를 양도받았다.
무혁은 일찌감치 제레미의 재능을 알아봤다.
감찰 처분이 풀린 직후, 두 사람은 팀을 이뤄 곧 합법과 불법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걸쳐 막대한 돈을 쓸어 담았다.
“수익은 정확히, 1센트 단위까지 반으로 나눴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니까, 나머지 로열티는 모두 제레미 녀석의 법인에 넣어줬지.”
로비와 서류 작업, 때로는 위험한 업무에서 당위성을 증명하는 것까지.
실질적인 업무는 모두 무혁이 감당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비즈니스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 애는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었던 거네.”
민재의 말에 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구대비 사기 범죄 1위의 영광에 빛나는 한국에서 온갖 금융범죄를 수사했던 진무혁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저 어리숙한 천재를 등쳐먹는 건 어린애 손목 비틀기보다 쉬웠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무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백미러 너머 고이 잠든 제레미를 바라봤다.
“어릴 때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만약 제게도 주변에 자신 같은 어른이 있었다면 조금은 낫지 않았을까.
적지 않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무혁은 언제나 제레미를 대등한 파트너로 대우했다.
“저 녀석은 앞으로도 충분히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을 거야. 나 같은 가짜와 달리 저 녀석은 진짜니까.”
“무혁 씨가 왜 가짜란 거야?”
민재는 아직 자신의 사정에 대해 알지 못했다.
무력한 검찰로의 복귀를 거절한 것도, 공직자로서는 해서는 안 될 사적 복수를 계획하고 있는 것도.
“나는 훌륭한 검사가 될 수 없었거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소중히 품었던 꿈도 이제는 빛이 바랜 유리 조각처럼 낡아버린 지 오래다.
어린 시절에는 미래란 그저 눈부시게 빛나기만 할 줄 알았는데.
덧없는 환상처럼 내려놓은 정의를 뒤로 한 채 무혁은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난 이제 석민재 남편으로 만족해. 이번 일만 끝나면 아예 백수 노릇을 할까 고민 중이야.”
“진심이야?”
요 며칠 힘든 기색을 내비친 탓에 민재는 진심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은근히 놀려먹는 재미가 있으니 무혁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청산유수 같은 시나리오를 펼쳤다.
“능력 좋은 민재가 날 먹여 살리면 나는 집에서 밥도 하고 애도 키우고. 얼마나 좋아.”
“난 당신이 버니까, 그거 믿고 로스쿨에 가려고 했는데. 잠시만.”
“그럼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네. 용식이네 사무실에 신세를 질까?”
나중에 실컷 놀려먹기 위해 무혁은 기꺼이 자신이 쥔 패를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사뭇 진지한 무혁의 말을 듣고서 민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네. 일단은 내 월급으로 버티는 수밖에.”
이러니 소영하 따위에게 뒤통수를 맞았지.
지난번에 분명 재산이 얼마인지 알려줬음에도 민재는 혼자 외벌이를 할 생각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 고지식한 여자를 대체 어쩌면 좋을지.
심각하게 앞날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무혁은 참지 못한 웃음을 터트렸다.
***
“오랜만, 콜록, 콜록.”
한동안 발을 들이지 않았더니 문을 열자마자 먼지가 자욱했다.
자다 깬 제레미와, 장난을 치다 들켜 한 대 맞은 무혁을 저 멀리 보내두고 민재는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안이 왜 이렇지?”
아직 부동산에 내놓기도 전인데 어쩐지 거실에 사람 발자국이 남아 있다.
뒤에서 현장을 본 무혁은 민재를 뒤로 물리고서 바로 전화부터 꺼냈다.
“잠시만 기다려.”
명백하게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이었다.
경찰까지 출동해 현장 감식에 들어가자 낯선 이들의 발자국이 곳곳에서 나왔다.
“할머니 패물은 그대로 있어. 통장도 인감도 무사하고.”
“그럼 재산 피해는 없으신 겁니까?”
여기저기 뒤진 흔적은 있지만 정작 사라진 물건이 없다. 피해가 없다는 말에 경찰들도 일단은 순찰을 강화하겠다고 하고서 그대로 돌아갔다.
“누가 다녀간 거지?”
“그것보다는 뭘 찾으려고 한 건지가 더 중요하겠지.”
현금까지 무사한 걸 보면 돈이 목적이 아닌 것 같은데. 민재는 나머지 짐들을 챙기며 불안한 감을 지우지 못했다.
“도둑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냐?”
밑에서 철수하던 경찰차를 본 건지, 할머니의 짐을 가지러 온 안 대표는 유난히 호들갑을 떨며 민재에게 달려왔다.
“안 대표님, 오셨어요?”
“대표는 무슨, 우리 민재는 이제 날 할아버지라고 불러줘야지.”
어쨌든 할머니와 함께 혼인신고까지 했으니 호적상으로는 할아버지가 된 건데. 민재는 내키지 않지만,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음, 그럼. 내가 이제 우리 민재의 할아버지지.”
언제부터 그렇게 예뻐했다고. 아주 꿀이 떨어질 것처럼 예뻐하는 게 오히려 부담스럽다.
“너도 이젠 우리 식구가 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렴. 이젠 봉구, 아니 너희 막내 삼촌이 민재 널 물심양면으로 돌봐줄 거란다.”
“저희 팀장님이요?”
“팀장은 무슨. 앞으로는 그냥 이제는 어디서나 막내 ‘삼촌’ 하고 편하게 불러야지.”
“그래서 아버지는 이 황금 같은 주말에, 나까지 짐을 옮기라고 부른 거예요?”
쉬는 날에 강제로 끌려온 탓인지 안 팀장은 벌써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제 아버지를 노려봤다.
아까부터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제레미는 좀처럼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민재는 가족 없잖아. 왜 저 할아버지가 민재 할아버지야?”
“뭐야? 예끼, 저 양놈이. 족보도 없는 주제에, 어디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어?”
발끈한 안 대표가 오랜만에 지팡이를 휘두르며 시비를 걸었다.
하지만 제레미는 한마디도 져주지 않고 뻔뻔스럽게 맞받아쳤다.
“족보 뭔지 알아. 나는 제주 제씨 제레미예요.”
“뭐? 제주 제씨?”
고성 제씨, 칠원 제씨, 태원 제씨까지는 들어봤어도 제주 제씨는 처음 들어본다며 안 대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제일 나빠.”
“아이고, 나 이것 참.”
뭐라고 반박을 해야 하는데.
제주 제씨 제삼공 파라는 말까지 들먹이니 안 대표는 그게 정말 존재하는 성씨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우린 이거 버리고 올게.”
“응. 다녀와.”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나면 또다시 지팡이 세례가 이어질 테니 무혁은 잠자코 제레미를 불러 장롱을 옮길 겸 슬쩍 자리를 비웠다.
무혁이 떠나고, 민재는 안방에 들어가 본격적인 짐 정리에 들어갔다.
정든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해묵은 미련들도 함께 정리할 수 있었다.
진작 버려야지 하면서도 미련을 놓지 못했던 이유가 뭐였을까.
어쩌면 아직 응석을 부리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엄마와 아빠의 흔적이 가득한 이 집은 정말로 소중한 기억이지만, 이제는 민재에게도 민재만의 생활이 있다.
“정리는 잘 되어 가?”
일차로 꺼내놓은 짐을 차에 싣고 온 안 팀장이 도와주겠노라며 방에 왔다.
부모님의 추억 탓에 찔끔 난 눈물을 훔치고 민재는 애써 밝게 대답했다.
“거의 다 했어요, 팀장님.”
“팀장은 무슨, 삼촌이라고 불러 봐. 석민재.”
이건 명령이야. 굳이 사족을 덧붙이는 상사의 말씀에 민재는 어쩔 수 없이 호칭을 정리하고 나섰다.
“막내 삼촌……?”
“흥, 무혁이 놈이랑은 이혼하면 끝이지만, 넌 이제 내 조카니까 가족인 내가 더 가까워진 셈이지.”
이게 무슨 개족보란 말씀이신지.
어째 순순히 따라왔다 했더니, 그는 아무래도 제 아버지와 한편이 되어 민재를 되찾는 쪽을 택한 모양이었다.
“삼촌의 명령이야. 석민재. 저 멀대 같은 외국 놈은 당장 어디 한강 고수부지 같은 데다 갖다 버리고, 월요일부터는 당장 사무실로 출근해.”
“제가 없어서 그렇게 힘드셨어요?”
처음 입사했을 때 안 팀장의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어질러진 쓰레기와 서류가 뒤섞이고 쏟아지는 자료에 깔려 죽기 일보 직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너 없이는 안 돼.”
“이젠 정리도 잘하시면서, 안 되긴 뭐가 안 돼요.”
“안 해, 아니 못 해.”
무혁과 제레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안 팀장은 어떻게든 민재가 돌아와야 한다며 난동을 부렸다.
제 주변엔 왜 다 이런 인간들밖에 없는 건지.
저 없이는 못 산다고 시위하는 상사를 앞에 두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여사님이 그러셨어. 네가 결혼을 서두른 게 못내 아쉬우시다고.”
“저희 할머니가요?”
“그러니까 차라리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아. 할머니 계시는 동안에는 함께 있어야지.”
예전 같았으면 덥석 받아들였을 제안이지만 민재는 어쩐지 이 말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이미 결혼식까지 올렸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제안을 했다는 걸 보면, 어쩌면 할머니는 모두 알고 계셨던 건지도 모른다.
왜 결혼을 서두른 건지, 어째서 이런 방법을 택한 건지마저도.
“앞으로 자주 놀러 갈게요.”
“진무혁 저 녀석 때문에 그래?”
할머니도 소중하지만, 울먹이던 무혁이 더욱 눈에 밟혔다.
만약 할머니만 생각해 냉큼 떠나버리게 된다면 그 사람은 홀로 그 넓은 집에서 외톨이로 남을 것이다.
그토록 가족을 찾고 싶은 거냐고 애원하던 무혁의 두려움이 어디에서 온 건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부부는 어차피 타인과 타인이 맺어진 거니까.
영원하기로 맺은 계약도 때로는 파국에 치닫는 법이라지만, 민재는 무혁을 혼자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저희 아직 신혼이에요. 요즘엔 제레미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둘이 있는 시간이 너무 좋은걸요.”
“진심이야?”
부랴부랴 서두른 결혼이었으니 다들 민재의 사정을 알게 모르게 눈치챘던 모양이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을 테지만 민재도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엄마 아빠의 유품을 챙기며 민재는 제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이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요.”
정말로,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니까.
한 번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만큼 이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다.
“후회하지 않겠어?”
“그러실 시간에, 저기 걸린 시계나 좀 내려주세요.”
팔이 닿지 않는 위치에 걸린 시계를 가리키며 민재는 당당히 지시를 내렸다.
졸지에 짐을 옮기며 안 팀장은 기가 막힌 듯 대놓고 눈을 흘겼다.
“너 지금 상사를 부려먹겠단 거야?”
“지금은 보스가 아니라 삼촌이라면서요. 막. 내. 삼. 촌.”
신입 시절 모질게 구박당한 서러운 기억은 여전히 민재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똥개 훈련을 불방케 하는 모진 괴롭힘에 안 팀장은 눈물을 머금고 민재의 명령에 따라 짐을 날랐다.
“너무하는 거 아니야?”
“너무하는 건 삼촌이죠. 삼촌, 파이팅!”
졸지에 안 팀장은 본전도 챙기지 못하고서 일개미로 전락했다.
노인만 빼고, 야무지게 세 남자를 부려먹는 민재를 보며 안 팀장은 무혁의 옷자락을 거머쥐었다.
“너 이 결혼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 저 녀석 진짜 지독해.”
“왜요, 예쁘기만 한데.”
“그치, 우리 남편 눈에는 내가 제일 예쁘지?”
이미 콩깍지가 씔 대로 씐 무혁은 민재가 무슨 말을 하든 황홀하단 눈빛을 보내고 있다.
그 꼴을 보고 있는 제레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안 팀장은 처음으로 이 외국인이 마음에 들었다.
‘너도 저 틈바구니에 끼여서 참 고생이겠구나.’
사랑이 넘치는 부부 틈새에 낀 보릿자루들은 묵묵히 짐을 나르며,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을 애써 못 본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