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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결혼-64화 (64/103)

64화. 아직 어려서 그래.

상쾌한 아침. 생기 넘치는 무혁과 달리 민재는 다 죽어가는 얼굴로 침대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소영하라는 말에 속이 상해서 요 며칠은 평소보다 집요하게 굴었다지만, 민재는 싫은 소리 안 하고서 무혁의 어리광을 모두 받아줬다.

‘이상할 정도로 얌전하단 말이지.’

조금은 무리한 요구조차도 오냐오냐해주는 것도 모자라 어제는 제법 적극적으로 제 위에 걸터앉기까지 했다.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며 유혹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이성을 잃고 자제하는 법조차 잊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그러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버릴 것처럼 민재는 무혁의 품 안에 안긴 채 밤새 흐느꼈다.

기력이 쭉 빠진 채 흐느적거리는 걸 보니 보약이라도 해서 먹어야 할 것 같다.

머리맡에 둔 물을 한 모금 머금고서 그는 메마른 민재의 입술을 촉촉이 적셔줬다.

결혼한 지 삼 개월, 벌써 계절이 바뀔 시즌이 찾아왔다지만 무혁은 매일 아침이 참으로 신기했다.

이제는 적응될 법도 한데 그는 늘 습관적으로 제 품에 안긴 민재를 찾아 헤맸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예쁠 수 있는 걸까.

새근새근 잠든 숨결을 따라 움직이는 속눈썹도, 동글동글한 콧날도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다.

앙증맞은 손톱마저도 한입에 삼키고 싶을 만큼 달콤하기만 하니 정말로 곤란하다.

잠들면 업어가도 모를 아내를 보며 무혁은 아쉬운 마음을 애써 삼켰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시트를 덮어주고서 무혁은 유유히 거실로 나왔다.

커피를 한 잔 내리고 있자니 오늘따라 제법 멀끔한 행색의 제레미가 벌써 외출 준비까지 마쳤다.

“언제 출발해?”

“출발하다니?”

“오늘 짐 옮기라며. 민재가 도와줘야 피자를 사준다고 했어.”

어디까지나 피자를 얻어먹기 위한 조건이라는 걸 강조하는데, 어느새 그 까다롭던 제레미조차 완전히 민재의 페이스에 넘어온 모양이다.

처음 민재의 존재에 대해 알려 줬을 때만 해도 제레미는 민재를 무척 싫어했었다.

어떤 의미로 찰거머리처럼 집요하게 구는 조장미만큼이나 미웠던 모양인데.

그랬던 주제에, 막상 두 사람을 붙여놓은 뒤로는 큰 잡음 없이 순탄하게 넘어가는 듯했다.

“그 일은 어떻게 됐어?”

“말 그대로. 본인도 금방 수긍했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제레미조차 찾을 방법이 없다고 못을 박았으니 한동안 친부모 문제는 잠잠할 것이다.

“저쪽에서는?”

“별말 없었어. 그냥 그 아줌마가 무지 예뻐한다는 걸, 남들이 보기에도 유난히 티를 내는 정도?”

키가 작은 쪽이라는 걸 보니 언니 쪽인가 본데.

정황상 민재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텐데도 홍 여사 쪽에서는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미친 망아지처럼 거침없는 홍 사장이 잠잠해진 것도 그렇고, 그 사람을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니 배후에 있는 건 분명 언니 쪽일 터.

만만치 않은 상대다.

남편이 쓰러지고 한동안 잠잠해졌다지만 홍연희 여사는 복귀를 선언한 이후, 외부 활동을 이어나가며 혜성의 곳곳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석민재, 생각보다 인기가 많던데?”

홍 사장에 이어 그 사람의 눈에 들기까지 했으니 사람들은 이제 석민재가 누군지 더욱 관심을 보이게 됐다.

차라리 그렇게 눈에 띄는 편이 안전할 거란 생각에 제레미를 붙인 거지만 솔직히 말해 이 상황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

“골치가 아프단 말이지.”

회사에서는 안 팀장은 어서 민재를 복귀시키라며 떼를 쓰고 있고, 홍 사장은 뜬금없이 조장미는 대체 뭐 하는 인간이냐며 전화를 걸어왔다.

소영하 이야기는 모두 들었지만, 민재는 조장미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뒤틀린 제 속내로는 그런 사소한 그것들조차도 모두 알고 싶건만.

민재는 굳이 그 부분은 언급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넘겨버렸다.

“조장미도 슬슬 정리할 때가 됐지.”

이쯤 하면 곱게 물러날 줄 알았지만, 아직도 포기가 안 되는 거라면 제 손으로 보내줄밖에.

순진한 척 눈동자를 굴리며 교활한 입을 놀리는 조원식의 딸은 제 아비를 닮아 역겹기 짝이 없다.

한 번쯤은 자기들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테니까. 주말이 끝날 즈음, 곤란한 상대를 한 방에 보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소영하는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조사받는 중이라던데. 지금쯤 풀려났을걸?”

“조사?”

“뒤를 졸졸 따라오길래 일부러 얽어버렸지.”

소영하는 제레미의 옆에 있는 민재를 따라왔을 테지만, 비밀리에 경호하던 요원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다지 의미가 없는 기호 몇 개를 끄적여 슬그머니 떨어트리자 뒤따라오던 소영하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주웠다.

아마 지금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암호를 전달한 거냐며 치밀한 추궁을 받고 있을 터.

제레미와 접촉하려던 스파이가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 딱 좋을 테니 상대를 골탕 먹이는 데는 제격이다.

“그래도 미행이 덜해지긴 했어.”

처음 공항에서 붙었던 무리를 비롯해 대부분이 조직폭력단 소속에 하필이면 제레미를 상대로 시비가 붙은 건이 더해지며 저쪽은 제법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아야 했다.

국제 공조가 이루어진 경호팀이 직접 적발한 건이다 보니 저쪽은 조원식의 뒷배를 쓰고도 좀처럼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여자가 날 끌어들이면서까지 지킬 가치가 있는 거야?”

“그럼. 물론이지.”

“그 여자는 네 옆에 있을 자격이 없어.”

입이 벌써 댓발로 튀어나온 걸 보니 오늘은 투정을 부리려고 작정한 것 같은데, 무혁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놓고 제레미의 속을 긁었다.

“없긴 뭐가 없어, 저렇게 귀여운데.”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면서도 민재는 끝내 무혁의 음험한 소망에 장단을 맞춰줬다.

요즘 들어 이상할 정도로 고분고분하다 했더니 아무래도 제레미가 뭐라고 쓴소리를 한 모양이다.

“귀엽고, 똑똑하고, 예쁘고, 인기도 많고. 게다가 사랑스럽기까지 하지.”

“토할 것 같다는 말, 이럴 때 쓰는 거지?”

대놓고 염장을 지르다 못해 칼부림해대는 무혁의 만행에 제레미도 거세게 맞받아쳤다.

“그래서, 나랑 쟤랑 물에 빠지면 그땐 누굴 먼저 구할 거야?”

잔뜩 심술이 난 파트너의 귀여운 투정질에 웃음이 터졌다.

평소라면 예쁘지도, 귀엽지도 않다고 생트집부터 잡았을 녀석이 오늘따라 서운함만 드러내며 이를 가는 모습이 어째 낯설다.

속이 훤히 보이는 제레미는 거짓말 같은 건 할 줄 모르니까.

토를 달지 않는 걸 보니 민재가 귀엽다는 점에는 공감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느새 속정이 드는 줄도 모르고 투덜대는 저 녀석이 어쩌면 좋을까.

무혁은 뻔뻔스러운 얼굴로 솔로몬의 판결을 내렸다.

“민재는 내가 구하고, 네가 날 구해주면 되겠네.”

“뭐?”

“수영은 네가 훨씬 더 잘하잖아. 그리고 내 등 뒤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사람도 제레미, 너밖에 없으니까.”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배신하더라도 제레미만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제게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민재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빈말 같은 건 하지 않는 지독한 성질머리를 알기에 제레미는 입술만 삐죽했다.

“이런다고 화가 풀리지 않아.”

“귀여운 녀석.”

잔뜩 토라진 파트너의 머리를 비벼주자 그는 군말 없이 주방에 들어가 우유를 꺼내 마셨다.

처음에는 분명 어떻게든 둘을 갈라놓을 속셈이었을 테지만 애초에 민재는 제레미의 심술 따위에 눈 하나 깜짝할 만큼 약한 여자가 아니다.

“민재가 미워.”

“사실은 마음에 든 거잖아.”

“아니거든. 싫어해.”

솔직하지 못한 저 녀석은 끝내 자기감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싫은 주제에 제레미는 굳이 자는 시간까지 바꿔가며 제 발로 이사를 돕겠다고 나서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왜 미운 건데?”

“그건!”

하던 일도 내버려 두고 온종일 제 곁에 붙어 시중을 들어주는 데도 뭐가 그리 불만이라는 건지, 무혁의 추궁에 제레미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남자, 소영하라고 했지.”

뭔가 들은 게 있는 걸까. 제레미는 침울한 얼굴로 소파에 앉은 무혁의 곁에 바싹 다가와 앉았다.

“그 남자는 아직도 민재를 좋아해.”

“그리고 민재는 날 사랑하지.”

“하지만 그 남자, 무혁보다 훨씬 잘 생겼는걸!”

“뭐?”

이건 좀 그냥 흘려듣기 힘든 말인데.

무혁이 화가 난 줄도 모르고서 제레미는 눈치 없는 말을 마구 쏟아냈다.

“상대는 톱스타야. <연하 남편의 유혹>도 그렇고, <인어 왕자님>도 그렇고.”

“그걸 다 봤다고?”

일을 시키려고 불러놨더니 제레미 녀석은 며칠 사이 소영하의 필모그라피를 모조리 훑은 모양이었다.

어느새 팬이 되어버린 건지 제레미는 주먹을 꽉 쥐고서 무혁의 가슴을 마구 때렸다.

“이대로라면 민재가 떠날지도 몰라.”

“걱정하지 마. 그럴 일 없으니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민재가 우리 엄마처럼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 어떡해?”

상처 많은 제레미의 물음에 무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심하게 챙겨주는 민재에게서 제레미는 제 어머니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요즘에는 제법 어른 흉내를 내고 있지만, 이 녀석은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했다.

아직은 사랑이 고플 나이니까.

비 맞은 강아지처럼 풀이 죽은 제레미는 무혁의 품에 안겨 연신 입술을 깨물었다.

“민재가 우릴 버릴지도 몰라.”

“민재가 정말로 좋아진 모양이네.”

“아니, 싫어. 정말 너무너무 싫어해.”

강한 부정은 되려 긍정이건만 단도직입적인 무혁의 물음에 제레미는 절대로 그럴 일이 없다며 굳이 사족을 달았다.

“치킨도 안 사주고, 성격도 드세고, 자기밖에 모르고, 못생겼고. 마음씨도 개차반이야.”

“그런 단어는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아주 요망해. 악랄한 마귀할멈이야.”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언제 일어난 건지 민재는 단추도 덜 여민 잠옷 차림을 하고서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노려봤다.

실컷 성질을 부리다 당사자가 나타나자 제레미는 숨겨지지도 않을 덩치로 무혁을 끌어안은 채 타조처럼 머리를 숨기기 바빴다.

“잘 잤어?”

“잘 못 잤어. 누구 때문에.”

아침 댓바람부터 남의 남편 옆에 딱 붙은 것도 모자라, 침실까지 다 들리게 제 욕을 쏟아내다니.

이를 바득바득 갈며 민재는 제레미의 코앞에 그토록 못생겼다는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날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민재. 그게…….”

“도와달라고 말한 건 내 실수야. 그러니까 가서 잠이나 자요.”

“어…….”

이러려는 게 아닌데. 제레미는 가지 말라고 잡아보려 했지만, 민재는 변명 한마디 들어주지 않고서 곧장 안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잠겼다.

잔뜩 날이 선 걸 보니 무혁도 어깨만 으쓱할 뿐, 별말을 하지 않은 채 곧장 아침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오늘은 우리 둘이 다녀올 테니까, 넌 집에서 다 못 본 소영하 영화나 봐.”

“나만 빼고 그러는 게 어딨어?”

“치킨은 네 손으로 시키면 되잖아. 배달 앱도 있는데 뭐가 문제야.”

원한다면 모르는 사람과 얼굴 하나 맞대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제레미는 죽어도 싫다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낯가림이 어마어마하게 심한 주제에 그보다 더한 허세로 숨기는 저 녀석을 대체 어쩌면 좋을지.

아직 중2병이 다 낫지 않아 센 척하던 제레미는 본전도 찾지 못한 채 민재가 있는 안방 문을 열심히 두드렸다.

“민재, 화났어?”

때늦은 오해를 풀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그렇게 좋으면 좋다고 솔직하게 인정할 것이지.

뒤늦게 울고불고 애원을 해봐도 이미 늦었다.

식사 준비가 끝날 때까지도 굳게 닫힌 안방 문은 좀처럼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성격 진짜 이상해!”

문 앞에서 엉엉 우는 제레미를 보고도 민재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빈 후에야 제레미는 뒷좌석에 찌그러진 채 겨우 짐 정리에 따라올 수 있었다.

“좀 봐 줘. 말은 저렇게 해도 저 녀석, 일부러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는걸.”

“그래서 지금은 다시 곯아떨어진 거고?”

워낙에 긴 다리 탓에 제레미는 다리를 웅크린 채 찌그러져 잠이 들었다.

정말로 화가 나 있던 민재도 막상 저런 꼴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직 어려서 그래. 저 녀석, 이제 겨우 만으로 스물이 된걸.”

“뭐라고?”

액면가로는 당연히 무혁의 또래라고 생각했는데 대충 계산해봐도 민재보다 거의 열 살쯤 차이가 나는 셈이다.

저 키에, 저 외모에, 저 목소리에 그 나이라니.

기가 막힌 민재를 두고 무혁은 불쌍하게 찌그러져 자는 제레미를 힐끔 봤다.

“저 녀석, 제 엄마 손에 학대당하고 있던 걸 내가 구해줬었거든. 덕분에 재주는 많아도 사회생활은 젬병이야.”

“국가대표였다면서?”

“청소년 대표팀 소속이었지. 해킹이 취미였다고 했는데 막상 하는 걸 보니 쓸 만해 보여서 내가 빼 왔어.”

마냥 철없어 보이던 제레미에게 그런 과거가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실상 보호자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라며 무혁은 제레미의 사정을 넌지시 알려줬다.

“저 녀석은 돈이 되니까. 운동하는 녀석이니 제 엄마에게는 손도 댈 수 없어서 당하고만 있었지.”

상습적인 폭행에 몸이 망가지니 결국은 대표팀에서도 쫓겨났다.

아마 무혁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제레미는 지금쯤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무혁에게는 너무나 애틋한 부모님이지만, 세상에는 남보다 못한 가족도 존재하는 법이다.

때로는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게 나은 부모가 있다는 걸 그도 제레미를 보며 여실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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