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흔들리지 말고 네 남편만 바라봐.
“아, 발 아파.”
홍 여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즐거웠지만 하이힐의 고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잠시 쉬고 싶다는 말에 홍 여사는 기꺼이 민재를 VIP 전용 휴게실로 안내해줬다.
“이거 마셔.”
“고마워요.”
괴팍하고 사고만 칠 것 같은 이미지라 걱정했는데, 제레미는 의외로 준수하게 경호원 임무를 수행했다.
보란 듯이 장신의 외국인을 경호원으로 데리고 다니는 데다 다들 홍연희 여사가 애지중지 여기는 모습을 봐버렸으니.
‘설마 저 여자가 진짜인 걸까?’
‘기자회견 때도 굳이 성준범 쪽에서 그렇게 난리를 쳤다며.’
이제는 눈빛만 봐도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은 아직 성아린의 대역으로 유용한 카드였나보다.
살뜰하게 챙겨주는 홍 여사를 보면서도 민재는 쉽사리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다.
어차피 자신은 가짜니까.
욱신거리는 발을 주무르며 민재는 화려한 방의 풍경을 애써 둘러봤다.
“아까 그건 뭐야?”
“자칭 진무혁 씨 약혼녀래요. 무혁 씨 키워줬던 사람 딸.”
“아, 그 껌딱지?”
참 지긋지긋하게도 들러붙는다지만, 그래도 장미가 홍 사장을 겁내서 다행이다.
또 괜히 울면서 불쌍한 척을 시작한다면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를 것만 같다.
네가 전부 나빴던 거라던 소영하의 말이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이제 와 사과해본다 한들 뇌리에 박힌 말들은 조금도 지워지지 않은 채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아까 그 남자는 옛날 애인이야?”
집요한 물음에 더는 말을 회피할 수도 없다.
아까부터 회장 안에서 계속 뒤따라오긴 했지만, 제레미는 눈치껏 핑계를 대며 민재를 빼내줬다.
눈치를 못 채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으니 못 알아보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미련이 남아서 저러는 거겠죠. 그냥 함부로 대할 여자가 필요했던 거니까.”
“그런 놈을 왜 만난 거야?”
“그러게요.”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건 대게 그 상황이 끝나고 나서야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진무혁을 도려낸 민재의 마음 안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채 텅 비어 있었다.
너무 목이 마를 때는 바닷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입술을 축이고 싶어지는 것처럼.
그 여백을 채우고 싶어서 안간힘을 써봤지만 누군가로 대신한다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너무 아팠으니까. 어쩌면 소영하는 민재에게 있어 살기 위해 억지로 들이켰던 짜디짠 바닷물 같은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그딴 걸 먹는 게 아니었는데.”
“그럼 무혁은?”
굳이 두 남자를 비교하길 종용하는 제레미의 눈동자가 한없이 천진하다.
외국인이라 그런지 서슴없는 질문에 민재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진무혁은 제게 어떤 존재일까.
“산소.”
물은 못 마셔도 한나절은 버틸 수 있지만 숨을 못 쉬면 그냥 그대로 죽어버릴 테니까.
담백하게 내린 결론이 못마땅한 듯, 그는 의자에 앉은 민재의 무릎을 제 무릎으로 툭 쳤다.
“난 아직 널 무혁의 아내로 인정한 적이 없어.”
“아이고, 무서워라.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인정해줄 건데요?”
제레미의 시비 정도야 이제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민재에게 물었다.
“무혁이 왜 한국에 온 건지 알고 있어?”
“그건 분명…….”
처음 이 가짜 결혼을 시작할 때 그는 분명 복수를 준비할 거라고 했었다.
실제로 혜성 가 문제를 놓고 무혁이 A&Z에 합류하며 조조와의 싸움은 이쪽의 우세가 더욱 확연해졌다.
그러니까 혜성을 성준범의 손에서 빼앗으면, 상속 문제를 매듭짓는 걸로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끝이 아니라고요?”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한심해하는 눈빛이 심히 거슬렸다. 속 모를 이야기로 사람의 신경을 잔뜩 긁어놓고서 제레미는 곱게 세팅해둔 민재의 머리를 한껏 헝클어트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건 네게도 마지막 기회가 될 테니까.”
“기회라고요?”
철없는 애처럼 굴던 제레미는 갑자기 어른의 얼굴을 하고서 차가운 경고를 날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걸까.
머리카락을 다듬으며 민재는 그의 말을 애써 곱씹었다.
요 며칠 힘들어 보이긴 했다지만 그래도 금방 텐션을 되찾았었다.
아까 통화할 때만 해도 평소처럼 밝아 보여서 이상징후 같은 건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네 말, 네 기분, 네 행동. 네가 생각 없이 하는 모든 것에 그 남자가 미친 듯이 휘둘리고 있다는 건 생각도 못 하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흔들리지 말고 네 남편만 바라봐. 한 번만 더 무혁에게 상처를 주면, 그땐 내가 널 죽여버릴 거니까.”
쐐기를 박는 한마디에 심장이 얼어붙었다.
소영하가 뒤늦게 사과한다고 해서 눈길 하나 줄 생각도 없었는데 제레미는 그런 민재의 마음을 조금도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아주 조금이지만,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는 제레미야말로, 무혁 씨가 뭘 제일 좋아하는지 알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 문제로 남편 친구에게 훈수를 듣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다.
“제일 좋아한다니?”
“맞춰봐요. 그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게 나인지, 아니면 제레미인지.”
상대가 절친에 파트너라고 해도 민재는 엄연히 혼인신고까지 마친 진무혁의 정식 아내다.
비록 시작이 가짜였던 계약이었던 이제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어버렸다.
“너, 너, 비겁해!!”
“비겁한 건 제레미예요. 그리고 나한테 비겁하다고 했으니까 양념치킨에 불고기 피자는 없던 일로 해요.”
“먹는 거로 치사하게 이러기야?”
아쉬울 것 없는 제레미의 유일한 약점을 어찌 포기할까. 굳이 참아줘야 할 이유가 없으니 민재는 발끝을 들어 그의 머리를 있는 힘껏 헝클어트렸다.
“그리고 이건 아까 복수.”
찰랑거리던 머리카락을 잔뜩 망가트리자 제레미는 거울을 보며 괴성을 질렀다.
하여튼 저 인간은, 하는 짓이 얄밉긴 하지만 그래도 야생동물처럼 감이 좋은 모양이다.
애초에 빈정거리는 것밖에 못 하는 조장미는 그렇다 쳐도, 오랜만에 만난 소영하의 표정이 줄곧 눈에 밟혔다.
- 미안해 민재야.
조금은 철이 든 걸지도 모른다지만 그래도 다시 얽히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다.
그나저나 오늘 일을 무혁에게는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민재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
“오늘 소영하를 만났어.”
파티에 다녀온 후 민재는 무혁을 보자마자 대뜸 그 말부터 했다.
“소영하?”
“홍보대사였대. 미안하다고 했는데, 그냥 듣기 싫다고 하고 나와버렸어.”
넥타이를 다 풀기도 전에 민재는 오늘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모두 털어놓았다.
어차피 숨겼어도 제레미를 통해 다 들었을 테지만, 민재가 먼저 이렇게 자기 얘기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다.
“홍 사장은 별말 없고?”
“그다지, 아. 살쪘다고 놀렸어.”
이건 다 무혁이 잘 먹인 탓이라며 분노하지만, 무혁의 눈에는 그다지 달라진 점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생기가 넘치는 지금이 훨씬 더 사랑스러운데 왜 모르는 걸까.
무혁은 돌아서는 민재를 뒤에서 붙잡고서, 일부러 살이 오른 곳만을 골라 움켜쥐었다.
“난 좋은데.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그러지 마…….”
“이렇게 만지고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는데.”
노골적인 유혹에 민재는 눈만 흘길 뿐 못 이기는 척 순순히 침대에 누워줬다.
침실을 합친 이후로는 거의 매일 이런 식이라 오늘은 봐주려고 했는데, 민재의 뜻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다.
“열량은 태우면 사라지는 법이니까, 먹은 만큼 땀을 흘리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자, 잠깐만…….”
바둥대는 민재를 붙잡고서 무혁은 그대로 침대로 향했다.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아니긴. 다 알아.”
민재는 정말로 아니었겠지만, 무혁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민재를 눕히고 매끈한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귀여운 수면 양말을 벗기자 발에 붉은 상처 자국이 남았다.
어쩐지 걷는 게 불편해 보인다 했더니 하이힐 때문에 난 상처가 제법 깊어 보였다.
“많이 아팠어?”
“안 아파.”
“안 아프긴 뭐가 안 아파.”
발갛게 부은 자국부터 하나씩 따라 입을 맞췄다.
“그렇게 보지 마.”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데?”
노골적인 무혁의 물음에 민재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차마 자기 입으로 말도 못 할 거면서.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민재는 무혁의 노골적인 애정 표현을 몹시 부끄러워했다.
일부러 발가락 끝을 살짝 깨물자 민재는 밀려드는 수치심에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채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더러워, 하지 마.”
“안 더러운데? 우는 걸 보니까 더 하고 싶기도 하고.”
기왕 우는 거, 더 울어보라며 무혁은 앙증맞은 발바닥을 더 집요하게 괴롭혔다.
이게 뭐가 그리 부끄럽다는 건지 민재는 치마가 다 뒤집힌 것도 모르고서 눈만 가린 채 어쩔 줄을 몰라 당황했다.
“나쁜 사람이야 진짜.”
“그걸 이제 알았어?”
애초에 좋은 사람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궁지에 몰아넣지 않았을 테지만.
복숭아뼈를 시작으로 무혁의 진득한 키스가 이어졌다.
반쯤 뒤집혀 구겨진 플레어스커트의 지퍼를 내리고, 무혁은 민재의 티셔츠에 손을 얹었다.
“아까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시작할까?”
“이 변태가 진짜!”
요즘 들어 블라우스를 찢는 재미에 푹 빠진 무혁이 망가트린 옷만 해도 열 벌이 넘는다.
그 취미가 티셔츠로까지 옮겨가면 곤란하니 민재는 어쩔 수 없이 순순히 무혁의 뜻대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참 예쁘단 말이야.”
황홀하단 눈빛으로 브래지어를 빤히 보는 통에 민재는 더더욱 난감해졌다.
때로는 터치보다 노골적인 시선 쪽이 더욱 적나라하게 다가오는 법이라.
무혁은 민재의 위에 걸터앉은 채 뽀얗게 드러난 살결을 흡족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푸딩 같아.”
손가락 끝으로 톡, 톡, 건드릴 때마다 민재의 몸이 움찔거렸다.
민재의 두 팔을 한 손으로 거머쥔 채, 무혁은 짓궂은 손장난을 부지런히 이어나갔다.
“으…….”
연분홍빛으로 물든 입술에 제 손가락을 물렸다.
하얀 치아 끝이 제 손을 깨물 때마다 무혁은 깊은 환희에 젖은 채 민재를 더욱 괴롭혔다.
“날 미워해도 돼. 화를 내도 좋고.”
민재의 눈이 눈물로 가득 얼룩진 모습을 보고서야 그는 손가락을 빼고서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그렇게 울지 마.”
“나도 울고 싶어서 우는 거 아니야.”
좋아서 우는 거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입으로는 한없이 부끄러워해도 민재의 몸은 어느새 무혁에게 딱 맞게 길이 들었으니까.
오랜만에 안았음에도 쓸데없는 버릇이 생기지 않은 건 싫지 않았다.
“그럼 더 울어.”
흘러내린 눈물방울을 입술로 훔치고 무혁은 더욱 격렬한 움직임을 이어나갔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민재는 제 입을 가린 채 어떻게든 버텨보려 애를 썼다.
어차피 지금쯤 제레미는 이어폰을 끼고서 모니터를 보느라 여념이 없을 테지만.
“그렇게 크게 울면 저쪽 방에 들릴지도 몰라.”
그것만은 싫다며 고개를 젓는 모습마저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자신을 버린 대가를 톡톡히 몸으로 갚고 있는 아내를 내려다보며 무혁은 뒤틀린 제 속내를 새삼스럽게나마 실감했다.
이것도 어쩌면 복수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이제 다시는 다른 사람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무혁은 집요하리만치 민재의 안에 제 존재를 각인시켰다.
“흑…….”
절정에 치달은 순간, 맑은 눈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민재를 진정시키며 그는 천천히 여운을 즐겼다.
“쉬이, 착하지.”
“완전 변태 짐승이야.”
집요한 장난질 덕에 이제는 아예 인간 이하로 강등당했다.
칭호에 걸맞게 그는 슬그머니 민재에게 기댄 채 대놓고 응석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걸 이제 알았다니, 실망인데.”
“아주 자랑이지. 진짜.”
기진맥진한 민재는 무혁에게서 등을 돌렸다.
평소보다 좀 더 심하게 몰아붙인 탓에 토라진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놓아줄 생각은 없다.
여전히 납작하기만 한 배에 손을 얹고서 무혁은 민재의 귓불을 야금야금 깨물었다.
“그러니까 한 번 더 하자.”
“뭐?”
기겁하는 그녀를 품에 안고서 무혁은 달달한 체향을 한껏 삼켰다.
민재에게 받은 향수와 제 체향이 섞이고, 그 향기가 다시 민재의 살결에 닿으며 더욱 달콤해진다.
서로의 냄새가 질펀하게 뒤섞인 이 순간은 무혁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니까.
무혁은 민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서 달아나지 못하게 민재를 감싸 안았다.
“응? 난 아직 부족해.”
“솔직히 말해. 당신 내 몸만 노리고 결혼하자고 한 거지.”
원망 섞인 민재의 물음에 무혁은 잠시 고민했다.
평소에는 정장 아래 숨겨져 있는 몸매를 남들은 알 길이 없다지만, 잘 먹이게 된 이후로 부부생활이 더욱 즐거워진 감은 지울 수 없다.
“정말 그런 걸지도 몰라.”
“뭐라고?”
경악하는 민재를 붙잡고서 무혁은 연신 입을 맞췄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며 정색하는 진지한 민재를 볼 때마다 어쩐지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장난기가 샘솟았다.
“석민재 선생님. 저 여기가 아파요. 보살펴 주세요.”
“민망하게 자꾸 왜 그러는 거야.”
“저 진짜 아파서 그래요. 어서 낫게 해주세요.”
수치심에 쩔쩔매며 민재는 눈물을 머금고 그의 바람을 들어줬다.
“운동은 이렇게 하는 거야.”
시작은 힘들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익숙해질 거라며.
무혁은 버거워하는 민재의 뺨을 톡톡 두드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