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알아서 살아. 그렇다고 너무 잘 살진 말고.
못 본 사이 얼굴이 많이 상했다.
굳어버린 소영하를 보며 민재는 다급히 뒷걸음질 쳤다.
“자선행사 서포터즈 자격으로 온 거야!”
지난번과 달리 오늘은 정말로 일 때문이었다고, 그는 제 얼굴이 박힌 리플렛까지 흔들어 보이며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했다.
소영하가 오는 줄 알았더라면 아예 오지 않았을 텐데.
일단은 같은 혜성 소속이다 보니 저쪽에서는 제일 유명한 소영하를 간판으로 내세운 모양이다.
“좋은 뜻으로 하는 거라 나도 재능기부로 온 거지, 너 때문에 오고 그런 거 아니야.”
민재가 참석한다는 사실이 따로 알려진 적은 없으니 아마 오늘의 만남은 정말로 우연인 걸지도 모른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동자를 마주하고서 민재는 애써 입술을 곱씹었다.
“들었어?”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안에 있었다면 무혁과의 통화 내용도 다 들렸을 것이다.
절망 어린 눈동자로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망했네.’
소영하는 언제나 사랑에 목말라 했다.
얼굴을 보지 못할 때는, 촬영장에서 시간이 빌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는 바람에 민재는 새벽까지 잠도 자지 못하고 그의 전화에 시달려야만 했다.
- 사랑한다고 말해줘.
- 난 그런 말 안 해.
수십 번을 졸라야 한 번 해줄까 말까였는데.
그래도 마음에 없는 말을 억지로 할 수는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소영하와 달리 민재는 그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다.
소영하는 진무혁이 아니니까, 민재가 먼저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에 충격이 컸을 테지만 그렇다고 미안한 마음 따위는 없다.
“그 남자, 사랑해?”
“먼저 실례하죠.”
누가 보기라도 하면 그것도 곤란하다.
민재는 서둘러 자리를 피해 보려 했지만 아쉽게도 소영하 쪽이 한발 빨랐다.
나가지 못하게 입구를 막고서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난 뭐였어?”
“혼자 멋대로 상상하지 마. 먼저 뒤통수를 친 건 내가 아니라 너니까.”
만약 소영하가 민재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와 결혼했을 것이다.
민재는 친구들 앞에 소개까지 했는데 결혼을 엎을 수 있을 만큼 대범한 사람이 못 된다.
그 판을 엎은 건 자신이었던 주제에.
마음에도 없는 결혼 얘기를 남발하고 다급한 민재의 발목을 붙잡는 데 급급했다.
“난 충분히 노력했어. 당신 팬들 때문에 난리 나는 것도, 내 얼굴이 사방에 팔릴 것도 감수하고 결정했던 거야.”
“나는…….”
“결혼이 대체 뭐라고 생각했어?”
소영하라는 대단한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면 그에 따르는 책임 역시도 제 몫이라 여겼다.
정말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감수해야 할 몫이라 여겼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인데. 이기적인 소영하는 끝까지 자기 자신밖에 몰랐다.
“이거 놔.”
“내가 잘못했어.”
뿌리치고 걸어가려는데, 쥐어짜듯 새어 나온 말이 민재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지금껏 줄곧 사과 한번 한 적이 없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 건지.
민재는 귀를 의심하며 뒤를 돌아봤다.
“내가 다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민재야.”
어느새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만약 이 사람이 그래도 연기를 제법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몰랐더라면, 저 가식적인 눈물에 깜빡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넌 날 기만했어.”
막상 사과를 받고 나니 억하심정이 치솟아 올랐다.
민재는 울먹이는 소영하를 보며 매서운 말을 퍼부었다.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도 없었던 주제에, 매달리는 내가 우스웠겠지.”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제는 좀 잊을 만하면 찾아와 매번 이러는 것도 정말 지긋지긋하다.
한참을 울먹이던 소영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렸다.
“나는 그냥 사과하고 싶어서…….”
“필요 없어.”
사람을 죽여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그만인 건지,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며 민재는 애써 이를 악물었다.
“너 혼자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사과 같은 건 필요 없어.”
“하지만 나는!”
“알아서 살아. 그렇다고 너무 잘 살진 말고.”
하얀 도화지 위에 튄 먹물처럼 아마 소영하는 민재의 인생에 지우지 못할 오점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VIP 화장실의 코너를 돌아 나오자 입구에는 선글라스를 낀 제레미가 제법 그럴듯한 경호원 흉내를 내며 서 있었다.
“여기 있었어요?”
“아까 그건 무슨 얘기야.”
소영하와 나눈 얘기가 입구까지 모두 다 들린 모양이었다.
민재는 난감한 기색을 애써 삼키며 태연한 척 말을 얼버무렸다.
“이젠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젠 아니라는 건, 예전엔 뭐가 있었단 건가?”
평소에는 맹한 얼굴로 애같이 구는 주제에.
매서운 질문을 보니 이 사람도 결국은 진무혁과 같은 과였나보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없어요.”
일부러 캐보려는 속내를 모를 까보냐.
민재는 얄미운 제레미의 팔을 꼭 잡고서 유유히 회장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경호원으로 온 거니까 날 똑바로 지켜줘요.”
“불고기 피자랑 양념치킨 사주기로 한 거 잊어버리지 마.”
“알았다니까요.”
먹을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제레미는 순순히 민재를 에스코트했다.
제발 이대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회장 안에 있는 소영하의 존재가 괜히 마음이 쓰였다.
***
“민재 씨.”
회장에 들어가자마자 홍 여사는 민재를 반갑게 맞이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은데, 조금만 기다려 줄래요?”
행사 주최 측이 얼마나 바쁜지 알기에 민재는 가볍게 인사만 나누고 적당히 물러났다.
남편이 쓰러진 이후로 줄곧 그늘 뒤에 숨죽여 지내던 홍 여사도 요즘은 왕성한 외부활동을 하며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다져나갔다.
“저거 보러 가자.”
“그래요, 그럼.”
별 기대를 안 하고 온 것과 달리 자선 바자회에 출품된 미술품들은 문외한인 민재가 보기에도 제법 수준이 높았다.
고전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회화 작품부터 조각까지 훑어보던 중 민재의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것 좀 봐요.”
피식, 웃는 소리가 어째 익숙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역시나 조장미는 일행으로 보이는 여성 몇 명과 함께 대놓고 민재 쪽을 보며 수군거림을 이어 나갔다.
“오랜만이네요, 조장미 씨.”
굳이 기가 죽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 민재는 담담히 다가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게요, 오랜만이네요. 석민재 씨.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많이 놀랐죠?”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은 아니었지만 걱정해주는 척 꺼낸 말의 속내가 뭔지 뻔히 보인다.
제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라며 자기들끼리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데.
‘그래봤자 우물 안 개구리들 주제에.’
민재는 제법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서 장미의 말을 그대로 맞받아쳤다.
“처음은 아니지만 익숙하진 않죠. 하긴, 조장미 씨는 회사를 안 다녀보셔서 모르시겠지만, 이 시즌이 원래 아주 바쁘거든요.”
부모만 믿고 설치는 것도 일 절만 해야 하는데.
저쪽은 약점이라 여겨 비웃는 모양이지만, 고생한 민재에게는 민재만의 프라이드가 있다.
“그래서, 가난한 게 자랑이에요?”
“가난한 건 그쪽 마음이겠죠. 내 직장은 A&Z고, 우리 남편은 자수성가한 부자고. 제가 굳이 조장미 씨한테 그런 말을 들을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요?”
옆에 선 제레미에게 묻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얄밉게 맞받아쳤다.
“나 드라마에서 봤어. 저런 걸 보고 졸부라고 하는 거지?”
어색한 한국말로 놀림까지 당하자 조장미의 고운 미간이 일그러졌다.
옆에 선 제레미는 애써 무시하며 그녀는 매서운 말투로 민재에게 쏘아붙였다.
“무혁 오빠가 왜 널 고른 건지 몰라?”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오빤 그냥 우리 아빠를 화나게 하고 싶은 것뿐이야. 당신처럼 천박한…….”
“남들 보는 앞에서 천박하게 구는 건 그쪽이겠죠. 조장미 씨.”
뭐라고 도발하든 민재는 이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옆에 믿는 구석도 있겠다, 지금도 조장미의 곁에서 자신을 비웃는 저 사람들의 눈빛이 낯익었다.
대학 시절 유독 민재를 미워했던 선배들은 무표정한 제 얼굴을 유독 싫어했다.
웃지 않는 게 죄는 아닐 텐데,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달았다.
이유 같은 건 어차피 핑계일 뿐.
그 사람들은 그저 진무혁을 낚아채 간 민재가 미웠던 것뿐이다.
“네까짓 걸 내가?”
“그런 게 아니면 굳이 길 가는 사람을 잡고 이렇게 패악질을 부릴 이유가 없죠. 안 그래요?”
“뭐?”
분노에 찬 장미가 멈칫하던 순간, 지나가던 직원의 손에 들린 와인 병이 고꾸라졌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와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장미는 물론 맞은 편에 있던 민재의 옷에까지 얼룩이 묻었다.
더러워진 치마를 보며 장미는 뒤에 선 직원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죄, 죄송합니다.”
“더러운 손 치워!”
얼룩을 급히 닦아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겁에 질린 직원은 아예 무릎까지 꿇고서 흩어진 유리병 조각을 주으며 벌벌 떨었다.
“어떻게든 변상을…….”
“이게 얼마인 줄 알고, 네까짓 게!”
“괜찮으세요?”
윽박지르는 장미를 밀어버리고서 민재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직원의 손에 감아줬다.
붉은 피가 가득 스며드는 걸 보고 나서야 그녀는 제 손에 상처가 생겼다는 걸 알아차렸다.
“의무실로 가죠. 어서 치료부터 받으셔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기껏해야 스물하나에서 스물둘 정도. 앳돼 보이는 직원은 흩어진 조각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사람도 아마 누군가의 귀한 딸일 텐데.
벌벌 떨며 울먹이는 직원을 앞에 두고도 분노한 장미는 여전히 제 치마만 살피며 좀처럼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홍 사장이 나타나자 주변의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끝났네, 끝났어.”
원래도 까탈스럽고 엄하기로 소문난 홍 사장의 눈에 띄었으니 저 직원도 무사히 넘어가기는 글렀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민재는 직접 조심스레 직원을 부축해 자리에서 일으켰다.
“설 수 있겠어요?”
“괘, 괜찮습니다.”
민재와 함께 선 모습을 보고서 홍옥자는 대뜸 잘 걷지도 못하는 직원을 그대로 공주님처럼 안아 올렸다.
“사, 사장님!”
“무릎에서 피가 나는데, 조심해야지.”
오십 세의 중년 여성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건강한 홍옥자 사장께서는 친히 직원을 안아 들고 곧장 의무실로 향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일찍 죽는다던데.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 게 아닐까.
주변의 수군거림을 뚫고 홍연희 여사가 민재를 찾아왔다.
“다친 거예요?”
피가 묻은 손을 보고 그만 민재의 상처라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제 피 아니에요.”
다치지 않았다고 애써 말을 했지만 믿지 않았다.
홍 여사는 장미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혹시나 민재가 다쳤을까 몸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펴나갔다.
“그럼 먼저 실례하죠.”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어색하게나마 상황이 정리됐으니 오늘은 이쯤 하자 싶었는데 조장미는 끝까지 민재를 물고 늘어질 모양이었다.
하지만 홍 여사 쪽이 한발 빨랐다.
“세탁비라면 저희 쪽에서 준비해 드리죠. 그러니 무례한 행동을 삼가세요.”
“지금 내가 고작 그런 것…….”
“말씀은 익히 들었어요. 조장미 양.”
뭐라고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홍연희 여사는 우아한 목소리로 말을 끊어버렸다.
장미도 제법 가냘프긴 하지만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가녀림으로 따지자면야 홍 여사 쪽이 훨씬 더 애처롭다.
“손버릇이 고약하다고 하더니, 설마 내게도 손을 올리려고 그러는 건가요?”
언성을 높이면 높일수록, 홍 여사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민재의 앞에 섰다.
정말로 맞을까 봐 덜덜 떠는 모습만 보아도, 젊은 조장미 쪽이 훨씬 더 악랄한 하극상으로 보이게 된다.
“아, 머리가…….”
두통이 밀려온 건지 홍 여사는 머리를 짚으며 민재에게 기댔다.
때마침 의무실에 갔다 돌아오던 홍옥자는 그 모습을 보고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언니!!”
다른 누구의 말도 절대 듣지 않기로 유명한 홍 사장의 약점은 오직 하나.
애처롭기 짝이 없는 언니 한 사람뿐이라는 건, 적어도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
장미는 결국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부랴부랴 그대로 달아나버렸다.
어차피 누구도 홍옥자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사람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것만 봐도 언니 쪽 역시 만만찮은 상대임이 분명했다.
“저게 그거야?”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는 조장미를 가리키는 홍 사장에게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혁의 자칭 전 약혼녀라는 이야기를 그리도 당당하게 했던 주제에, 오만하던 조장미도 홍옥자 앞에서 제대로 붙어볼 용기는 없는 모양이었다.
“언니, 괜찮아?”
“이제 좀 덜 아픈 것 같아.”
“아프면 안 돼.”
장미가 물러가고, 홍 여사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런 기색 하나 없었던 사람이 왜 저런 걸까.
‘설마.’
놀란 민재와 눈이 마주치자 홍 여사는 속 모를 미소를 띠고 살짝 윙크했다.
그런 거였구나.
장미가 보여준 가식적인 모습도 홍 여사의 내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걸지도 모른다.
“그럼 이제 가 볼까?”
홍 여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민재의 팔짱을 끼고서 내부를 둘러봤다.
모처럼 밝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옆의 저 아가씨가 누구냐며 대놓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러면 오해가 점점 커질 텐데.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새삼 깨달았다.
어쩌면 정말로 무서운 건 여동생이 아닌 언니 쪽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