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61화 (61/103)

61화. 난 너만 있으면 돼, 민재야.

[검사란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불의와 싸우는 국민의 검이 되어야 한다.]

예전에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검사 선서를 할 때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뜻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무혁의 아버지, 진이한 부장검사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오갔다지만 올곧은 사람이라는 점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진짜 검사라는 별명이 붙었던 진이한의 아들 진무혁이지만 동시에 법조계의 온갖 적폐를 고스란히 거머쥔 조원식 변호사의 후계자라 불리기도 했다.

“내가 너를 중앙지검에 보내지 않았던 걸 아직도 원망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무혁은 담담히 원망했음을 시인했다.

당시 사법연수원에 있었던 지금의 동부지검장 김일훈은 무혁의 배치를 놓고 꽤 오랜 시간 고민에 빠졌다.

사법고시는 물론 연수원 성적마저 최고였던 진무혁이지만, 검찰 내부에서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여론이 거셌다.

“제가 검사가 되었으니, 조원식이 아예 동부지검을 틀어쥘 거란 비아냥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경계와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무혁은 묵묵히 자신이 맡은 소임을 다했다.

그때만큼은 민재조차 잊고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지.”

신참 검사 주제에, 진무혁은 제 경력에 바늘 하나 파고들 오점 하나 남기지 않았다.

흉악범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취조를 이어나가고 악명높은 사기범의 자백을 받아내기도 했다.

폭력도, 폭언도 없었다. 그저 논리만이 있을 뿐.

그는 오직 사실 하나만으로 범인이 자신의 죄를 모조리 실토하도록 매섭게 포위망을 조여나갔다.

“또 빠져나가겠다 싶던 놈이 자백까지 했을 때는 나도 놀랐지. 조원식이 무서운 놈을 키웠구나, 뭐 그런 싶은 생각도 들었고.”

거짓말은 말이 길어질수록 앞뒤가 안 맞으니, 무혁은 증거와 허점을 교묘하게 활용해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하게 만든다.

“일부러 곤란한 사건만 줄줄이 배당해도, 네놈은 눈 하나 깜짝하는 법이 없었지.”

“대가는 지금도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일부러 질 게 뻔한 대규모 로펌의 기업 소송을 줄줄이 맡겨놓았건만, 진무혁 앞에서는 수임료 높기로 유명한 변호사들조차 줄줄이 패소의 아픔을 맛봐야 했다.

“그러고 보니 문성희 그 친구가 A&Z에 있었지?”

기수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무혁의 독니는 언제나 유효했다.

윗선의 질책조차 논리적으로 받아치는 것도 모자라 조원식의 뒷배가 있으니 징계 하나 받지 않은 채 무혁의 검찰 생활은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너 같은 놈이 열 명만 더 있었어도, 검찰이 지금 같지는 않았을 텐데.”

“그럴 리가요. 법은 멀고 정의는 무력하니 이건 검찰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심이냐?”

하는 짓이 천상 검사라 조원식 문제만 아니었다면 진무혁이 그토록 배척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진무혁이 돌연 사표를 제출하며 내부에서는 드디어 조조를 물려받으러 가는 거라는 비아냥이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네는 변호사 체질이 아니라는 걸, 자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무혁은 그의 말을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이년 차쯤 되니 보이더군요. 법이라는 거, 알면 알수록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미국에서 제레미를 만난 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제레미는 기술이 있고 무혁은 법을 아니, 사실상 누구도 둘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공정하지 않은 게임판 위에서는 룰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때로는 피해자의 죽음보다, 가해자의 생채기가 더욱 가엾게 느껴지는 곳이 법정이라지만.

검사의 검도, 판사의 법봉도 결국은 도구일 뿐.

제 아버지의 죽음을 사주한 조원식의 죄는 정당한 법망 안에서는 이제 처벌할 만한 방법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는 저도, 저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싸워볼까 합니다.”

바보처럼 올곧았던 아버지는 정의만을 쫓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검찰이 되어 아버지의 죽음을 밝히고 싶었지만, 검사 진무혁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진실을 알게 된 날, 홀로 검찰청에 남아 남몰래 흐느꼈던 밤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돌아서는 민재를 붙잡지 못했던 그날만큼이나, 무혁의 자존심은 너덜너덜해진 채 바닥을 굴렀다.

“지금의 저는 국가와 정의를 위해 헌신하며, 거룩한 희생을 치를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가 대단하다 추켜세워줘도 진무혁도 결국은 일개 검사일 뿐.

공직자로서 행동에 제약이 잔뜩 걸린 채 조원식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지검장은 무혁을 다시 검찰로 복귀시킬 속셈이었겠지만, 무혁은 차갑게 등을 돌려 사무실을 나왔다.

안면 있는 몇몇 이들과 적당히 인사를 나누고 무혁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차에 올랐다.

[저는 커서 아버지처럼 훌륭한 검사가 될 거예요!]

어린 시절, 아버지는 그런 무혁의 말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사랑하는 일이었고 평생의 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꿈보다 더욱 소중한 것이 생겼다.

“벌써 왔어?”

민재는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그를 반가이 맞이했다.

지금처럼 민재를 최우선에 놓을 수 있는 것도, 검찰을 나왔으니 가능한 일이다.

“제레미는 이따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면서 일찍 잔대. 저녁은 아직…….”

가방을 내려놓고, 민재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무혁은 그녀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영문도 모르는 채 민재는 그런 남편의 돌발행동을 기꺼이 받아줬다.

“무슨 일 있었어? 오늘따라 얼굴이 완전 상했네.”

“난 너만 있으면 돼, 민재야.”

꿈도 신념도 잿더미가 되어버린 지금 무혁을 버티게 하는 건 오직 석민재 하나뿐이다.

차라리 부모님과 함께 죽어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절망이 그의 목을 조여올 때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의 한마디가 그를 살게 했다.

“우리 남편, 오늘 많이 힘들었나 보네.”

따스한 민재의 체온이 제 안에 녹아들었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무혁은 달콤한 민재의 향기를 몇 번이고 삼켰다.

“힘들었어. 정말로.”

어째서인지 눈물이 차올랐다.

갑작스럽게 울먹이는 그를 안고서 민재는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무슨 일 있었어?”

“그냥 다 그만둘까, 싶어서.”

복수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서, 민재와 함께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민재는 그런 무혁의 머리를 꽁, 하고 쥐어박고서 뺨까지 쭉쭉 잡아당겼다.

“주말에 우리 집 짐 빼러 가기로 해놓고, 그만두긴 뭘 그만둬?”

“그랬었지, 참.”

“완전히 까먹었던 거지? 너무해.”

“안 잊어버렸어. 차도 다 예약해놨는걸.”

안 대표의 때늦은 순정이 결실을 본 덕분에, 결국 민재네 할머니는 프러포즈를 수락하고 말았다.

아예 퇴원하고 집에 주치의를 들인다는 성화에 민재는 과감히 본가를 정리하기로 했다.

“집 산다는 사람 벌써 나와서 빨리 비워줘야 한단 말이야. 내 짐이랑, 엄마 아빠 앨범이랑. 정리할 게 산더미인데 그만두긴 뭘 그만둬?”

핀트가 완전히 어긋난 민재의 대답에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촉촉이 젖어버린 눈가를 소매로 훔치고서 무혁은 잔뜩 골이 난 민재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아깝지 않아? 부모님하고 추억이 많은 곳이잖아.”

“그렇다고 아무도 안 사는 집을 그냥 둘 수는 없으니까. 내 집은 이제 여기인걸.”

내 말이 틀렸냐며 큰소리를 치면서도, 은근히 눈치를 보는 모습이 마냥 예뻤다.

이러니 사랑할 수밖에. 엉뚱하기 짝이 없는 제 연인은 어쩌면 이리도 제 마음을 뒤흔드는 법을 본능처럼 잘 알고 있다.

무혁은 폭소를 터트리며 민재의 이마에 살짝이 머리를 기댔다.

“그럼, 여기가 우리 집이지.”

“그러니까 말야. 마침 훼방꾼도 잠잠한데, 오랜만에 분위기를 내도 좋을 것 같지 않아?”

민재는 그의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살랑살랑 애교까지 부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어째 복잡하던 머릿속이 한결 가벼워졌다.

비록 먼 길을 돌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가장 소중한 사람은 이토록 가까이에서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한잔하고 싶다 이거지?”

“얼른 씻고 나와. 세팅해 둘 테니까.”

지난번 리조트 이후로 금주령이 내린 덕에 민재는 이 얘기를 꺼낼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모양이다.

벌써 신이 난 민재를 보며 무혁은 슬그머니 제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난 못 기다릴 것 같은데.”

“응?”

훼방꾼이 거슬리는 건 무혁 역시 마찬가지라, 지금은 다른 것들보다 민재가 더욱 절실하다.

꺄악, 하는 비명과 함께 민재는 무혁에게 업혀 곧장 침실로 향했다.

***

지난 번, 무혁 몰래 부모님을 찾아보려 했던 일은 의외로 싱겁게 끝이 났다.

“미안한데 이건 내 능력 밖이야.”

쿠키 한 상자를 홀랑 먹어치운 주제에 제레미는 민재의 부모님 찾는 일을 순순히 포기해버렸다.

사실 요즘같이 CCTV가 많으면 모를까, 당시는 휴대폰도 없던 시절의 이야기니 디지털 정보가 제대로 남아 있을 리 없다.

안 되는 걸 된다고 희망 고문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안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해주는 게 낫다.

“그랬구나.”

아주 조금 기대를 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일말의 미련을 뒤로한 채 민재는 조심스레 무혁에게 파티 얘기를 꺼냈다.

“혜성에서 여는 파티에 초대받았어.”

“제레미와 함께라면 괜찮아. 재미있게 놀다 와.”

“정말?”

비록 제레미라는 금붕어 똥이 달리긴 했다지만, 흔쾌히 다녀오라는 모습을 보니 무혁을 속인 것 같아 조금은 미안해졌다.

석연찮은 기억을 갈무리하고 파티 날이 밝았다.

오랜만에 마중을 나온 홍옥자 사장은 민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민재 씨, 살쪘어?”

“그래요?”

얼굴이 활짝 핀 걸 보면 스트레스가 없어서 행복살이 제대로 붙은 모양인데.

드레스 샵에 오고 나서야 민재는 작금의 현실을 더욱 직시하게 됐다.

“어차피 오늘은 지난번 같은 파티는 아니니까. 깔끔한 원피스 정도면 충분할 거야.”

“방심했네요.”

얼굴에 뽀얗게 살이 올라서 그런지, 예전보다 훨씬 더 생기가 돌긴 했다.

이것도 진무혁이 부린 마법이겠지만. 민재가 머리를 만지는 사이 불만이 가득한 제레미는 타이를 흔들며 불만을 토로했다.

“민재, 나는 이 옷 싫어.”

“저 친구가 새 경호원이야?”

“뭐, 그런 셈이에요.”

제레미의 정체는 대외적으로 철저히 기밀에 부쳤다.

대외적인 신분은 전직 국가대표 출신 경호원이라지만, 하는 짓이 저러니 홍 사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괜히 시비를 걸었다.

“저런 비리비리한 녀석을 뭘 믿고 맡긴다는 건지.”

“당신이 옥자지? 옥-자. 루비 홍이라고 하고 다녀도 구슬 옥에 아이 자. 원래 이름은 옥자야.”

“이 자식이!!”

겁도 없이 하필이면 홍 사장의 콤플렉스를 건드린 결과는 비참했다.

기름창고에 화염병을 담은 분노의 힘 덕분인지, 전직 국가대표 출신이라는 제레미도 자타공인 티라노사우루스를 이길 수는 없었다.

“민재, 저 사람 무서워.”

“그러게 왜 그랬어요.”

무서워서 벌벌 떠는 제레미를 달래주고 있자니 아무래도 누가 누구를 보살피는 건지 우스워질 노릇이다.

“오늘은 실종아동 찾기 자선 파티야. 연예인이랑 방송국 취재도 오고, 제법 많은 사람이 올 테니 기대할 만해.”

지난번 그 일 때문인지, 홍 사장 자매는 참 신기할 정도로 민재를 아껴줬다.

‘내가 정말 성아린이라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가도 금방 고개를 저어버렸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들어가기 전 거울을 볼 겸 잠시 VIP 전용 파우더룸에 들렸다.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 민재는 무혁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잘 도착했어?”

내버려 두면 걱정이 삼천리일 테니, 민재는 조곤조곤 과정을 차분히 알려줬다.

“응. 오늘은 깔끔한 정장. 머리는 다듬어서 틀어 올렸어.”

“예쁘겠네, 어서 보고 싶다.”

반사적으로 나오는 달달한 말에 웃음이 났다.

은근한 독점욕도, 그 속에 담긴 구속도 그렇고. 욕심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새삼 느꼈다.

무엇하나, 거짓 같은 건 없는 사람이니까.

마르지 않는 갈증처럼 그의 시선은 언제나 민재를 쫓고 있다.

“사랑해, 무혁 씨.”

“내가 더 사랑하는데.”

“아니거든. 내가 훨씬, 훨씬 더 많이 사랑하거든?”

수화기 너머로 무혁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난번에는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아서 민재는 더욱 세심하게 무혁의 마음을 다독여줬다.

“진무혁은 잘할 수 있어. 난 언제나 믿고 있으니까.”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라지만 무혁은 잠시 숨소리도 멈춘 채 민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 번만 더 말해줄래?”

“힘내, 사랑하는 우리 서방님.”

“진짜 힘이 나네.”

이따가 집에서 보자며 가벼운 키스도 잊지 않았다.

살면서 이런 간지러운 일을 해보는 건 또 처음이라지만, 그래도 이런 사소한 것들 덕분에 비로소 실감이 났다.

결혼은 정말 좋은 거구나.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오랜만에 재미있게 놀다 와.”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민재는 감미로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새삼스럽게나마 함께라는 사실이 괜히 즐겁다.

오늘은 일찌감치 집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전화를 끊고 잠시 화장을 고친 후 민재는 유유히 파우더룸을 나섰다.

“민재야.”

남자 화장실 쪽에서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불렀다.

얼굴을 보는 순간 들떴던 기분이 삽시간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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