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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결혼-60화 (60/103)

60화. 그럼 내 부모님도 찾아줄 수 있어요?

“조원식 대표, 들었습니다.”

비서의 목소리에 준범도 번득 정신이 들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소영하의 저 면상을 한 대 쳐주고 싶지만, 얼굴로 먹고사는 저 물건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다.

“알았으니까 나가 봐.”

소영하가 건넨 사진을 빼앗아 들고서 싸늘한 축객령을 내렸다.

목적은 충분히 이뤘다는 것처럼 얌전하던 개는 주인의 손을 물고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무슨 일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약 이 일을 조원식이 알았다가는 더더욱 약점이 잡힐 것 같다.

애써 이성을 찾으며 성준범은 진척 상황에 대해 물었다.

“당분간 석민재를 제거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번엔 또 뭡니까?”

대놓고 비꼬는 그의 말에도 조원식은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쪽에서는 이미 우리 계획을 알아챈 모양입니다. 아예 외국인 경호를 붙였더군요.”

“경호?”

미행에 성공한 마지막 차량은 주차장에 들어간 뒤로 아예 종적을 감췄다.

뒤늦게 따라간 차들은 입구조차 얼씬도 하지 못했고, 석민재를 쫓던 조직원들은 그대로 행방이 묘연해졌다.

“저쪽에서 눈치를 챈 것 같으니, 당분간은 숨을 죽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나가 보세요.”

평소라면 골프채를 휘둘러야 하지만, 지금의 준범에게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이를 악문 채 그는 구겨진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이런 일로 발목이 잡힐 줄은 몰랐는데.

“젠장.”

쓰린 속을 삼키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확실히,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

가짜 성아린 사건이 있고 이 주가 지난 후, 혜성 그룹의 사장단 회의가 열렸다.

성 회장이 쓰러지고 처음으로 전 계열사 사장단이 모인 자리에서 많은 이들이 성준범 측의 맹공을 예상했다.

“성준범 이사가 데려온 건 제 딸이 아닙니다.”

하지만 줄곧 침묵을 지키던 홍연희 여사가 전면에 나서며 경영권 문제는 표결조차 오르지 못했다.

저쪽도 제법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었지만 A&Z의 정예 팀이 붙은 덕분에 이번 총회의 성과는 완벽한 홍 여사 쪽의 승리였다.

“그나마 소영하 하나라도 제대로 잡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쯧.”

앞에서 대놓고 빈정거리는 말을 들으면서도 성준범 측은 어째 이상할 정도로 몸을 사렸다.

무안함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뭐라고 입도 열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지만, 민재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제법 속이 시원해졌다.

“민재, 나 배고파.”

그리고 이 주가 더 지난 현재까지도, 민재는 성가신 이 외국인 상전의 보모 역할을 벗어나지 못했다.

해커라고 해서 처음에는 마냥 까칠한 줄만 알았는데 제레미를 길들이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찌개 데워줄 테니까 어서 일이나 해요.”

“매운 건 싫어.”

진무혁 바라기였던 제레미도, 매일 붙어 있어서 그런지 어느 순간부터 민재만 찾기 시작했다.

첫인상은 뭐 저런 게 있나 싶어 참 얄미웠는데 그래도 하는 걸 지켜보면 참 신기하긴 했다.

부탁받은 장비들이 도착하자 제레미는 아예 서재에 복잡한 기계의 산을 쌓아두고서 다섯 개나 되는 모니터 가득 어마어마한 명령어들을 빼곡하게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뭘 보고 있어요?”

“해외 계좌 쪽, 횡령한 증거들 이제 거의 다 찾은 것 같아.”

값비싼 몸값을 증명하듯 제레미는 듣도 보도 못한 수단까지 써가며 성준범의 비리 자료를 무자비하게 뽑아냈다.

“약값이라고 꾸준히 나오는 이건 뭐예요?”

“뭐긴, 드러그, 그러니까 이게 한국말로 뭐더라.”

손가락으로 제 손목을 푹 찌르는 걸 보니 마약 얘기인가 본데.

파도 파도 무슨 범죄 종합 선물세트가 되어버린 자료들을 보며 민재는 이제는 한숨밖에 나지 않았다.

“이런데도 왜 안 잡혀가는 걸까요?”

“원래 나쁜 놈들이 더 잘 사는 법이거든.”

이만한 짓거리를 하고도 무마될 수 있는 건 뒤에 있는 조원식 덕분일 것이다.

겉으로는 원로급 변호사인 척 세를 위시하고 있지만, 뒤에서 그가 한 짓들은 민재의 상상을 초월했다.

만약 그때 무혁과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조원식은 분명 민재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민재, 나 카레 먹고 싶어.”

“무슨 카레요?”

겨우 밥을 다 차려놨더니 제레미는 갑자기 반찬 투정을 하기 시작했다.

광고에서 본 거라며, 그는 하필이면 앞치마를 두른 소영하의 사진을 떡하니 내밀었다.

“카레의 왕자. 얘가 카레 먹는 모습 보니까 먹고 싶어졌어.”

“우리 집에선 이거 안 먹어요. 자, 반찬 투정하지 말고 어서 밥 먹어요.”

왜 하필이면 저런 걸 고른 걸까.

한동안 활동이 없어지나 싶던 소영하는 얼마 전부터 다시 여기저기에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다.

신인에게 넘어갔다는 영화도 소영하를 주인공으로 다시 촬영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바빠서 그런지 이제는 연락이 오지 않아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밥 다 먹을 테니까 쿠키, 그 버터 쿠키가 먹고 싶어.”

“그건 내가 선물 받은 거라 안 된다고 했죠.”

“민재는 맨날 안 된다고만 해. 나빠.”

칭얼대는 것만 보면 다섯 살짜리 애만도 못하다.

말 안 듣는 똥강아지 같아서 민재는 딱 잘라 혼을 냈다.

“싫으면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고 하세요.”

“그건 아니야.”

그만둔다는 말에 제레미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막말로 민재야 얼마든지 원래 업무로 복귀하면 된다지만, 까다로운 제레미는 눈에 익은 민재가 아니고는 좀처럼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민재, 화났어?”

“안 났어요.”

“화내지 마. 응?”

이렇게 보면 조금은 귀여운 것도 같고.

천성이 애교가 많아서 그런지 무혁이 왜 그를 예뻐하는 건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게다가 매번 야근에 시달리던 시절에 비하면야 재택근무를 시작하니 천국이 따로 없다.

‘그러고 보니 새 쿠키가 왔었지.’

제레미가 탐내는 쿠키는 혜성에서 보내준 선물이었다.

딱 한 번 만난 민재가 퍽 마음에 든 건지, 쿠키 상자 안에는 매번 사모님의 손편지까지 들어 있었다.

[오늘은 마들렌과 버터 쿠키를 구워봤어요.

이번에는 편지가 아니라 민재 씨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네요.

건강하게 잘 지내고 항상 행복하길 빌어요.

- 민재 씨의 친구가 되고 싶은 홍연희로부터.]

정성 들여 쓴 손글씨에조차 우아한 인품이 묻어나는 것만 같다.

오늘도 어김없이 도착한 쿠키를 하나 맛보며 민재는 어쩐지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났다.

친엄마가 아닐 거라고는 차마 상상조차 못 해볼 만큼, 엄마도 아빠도 민재를 너무나 예뻐했었다.

홍 여사의 편지를 보니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서 민재는 괜히 눈물을 훔치고 쿠키를 하나 더 입에 물었다.

이건 다 달콤하게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쿠키가 너무 맛있는 탓이다.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민재는 직접 홍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 민재 씨구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마냥 부담스럽던 홍 사장의 공세가 멈춘 것도 모두 언니인 사모님 덕분이다.

쿠키에 대한 감사 인사와 함께 민재는 대략적인 사건 진행 상황도 함께 전했다.

“다음 달쯤, 그동안 모인 자료를 기반으로 성준범 이사에 대한 불신임 안건을 제출할 예정입니다.”

증거는 벌써 제레미가 넘칠 만큼 수집했으니 저쪽도 더는 발뺌하기 어려울 터.

일단 이사 자리에서 끌어내린 후에는 유효한 증거들을 모아 다시금 법의 심판대 위에 올리면 된다.

사사건건 제 발목을 잡았던 성준범도 이제는 독 안에 든 쥐인 셈이다.

“보고 받고 이런 건 너무 딱딱해서 꺼렸는데, 민재 씨는 알기 쉽게 설명해주니 나도 안심이 되네요.”

“저야말로, 저희를 믿고 이렇게 일임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홍 사장은 물론 이제는 혜성의 안주인까지, 다들 민재라면 뭐든 다 오냐오냐할 분위기다 보니 유능한 상사 안 팀장은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민재 씨가 살펴봐 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혹시 이번 주에 따로 시간 낼 수 있을까요?”

다른 변호사들은 너무나 어렵다며, 홍 여사는 민재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마침 이번에 우리 자선 재단에서 열리는 파티가 있어요.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싶고, 그 얘기도 나누고 싶고. 시간 괜찮죠?”

묘하게 거절하기 어려운 말투라 민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제레미에게 시달리느라 하루라도 마음 편히 쉬어 본 적이 없긴 했다.

“팀장님께 말씀은 드려봐야 할 것 같은데…….”

“그건 내가 말해둘게요. 그러니까 민재 씨도 함께 가요? 응?”

날이 선 무혁을 본 후로, 홍 여사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못했다.

민재의 행방을 찾는다는 사람이 나왔다고 해서 조금은 기대했는데,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지난번 회사에 찾아왔던 기자였다.

아주 잠깐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 같아서 민재는 제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헛된 기대였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혹시나 자신이 성아린이 아닐까, 괜히 설레발을 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알겠습니다. 팀장님이 괜찮다고 하면 참석할게요.”

“정말? 어머, 기뻐라. 그럼 그날은 옥자를 보낼게요.”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마무리할 즈음 제레미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야?”

“쿠키 보내주신 분.”

“어디 가?”

남편도 아닌데 왜 이리 집요하게 물어보는 걸까.

마치 엄마가 바람이라도 난 것처럼 따져 묻는 그를 보다 보니 문득 지난번에 하지 못한 질문이 떠올랐다.

“제레미는 뭐든 다 찾을 수 있다고 했죠?”

“응. 적어도 네트워크에 연결된 정보 중에, 내가 못 찾는 건 없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기술들을 활용해가며 제레미는 성준범의 약점들을 쥐잡듯이 파악해냈다.

정말로 이 사람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민재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내 부모님도 찾아줄 수 있어요?”

“부모?”

거실에 장식된 부모님의 사진을 가리키며 제레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 사정을 알지 못하는 그에게 민재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알려줬다.

“찾아서 뭘 할 건데?”

단도직입적인 제레미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만약 부모님을 찾는다면, 뭘 하고 싶은 걸까. 딱히 뭔가를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저 알고 싶었다.

어째서 자신은 그렇게 버려져야만 했던 걸까.

그토록 사랑했던 진무혁과 헤어지기까지 하며 헛되이 보낸 시간을 보상받을 수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알고 싶어요.”

김 기자가 접근한 줄도 모르고서 보육원에서 연락이 온 뒤로 매번 그 생각에 쉬이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이게 판도라의 상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건 알고 있지만.

“무혁 씨는 모르게 알아봐 줄 수 있어요?”

사뭇 진지한 민재를 앞에 두고 제레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아봐 주면 나한테 뭘 해줄 건데?”

민재는 대답 대신 제 손에 있는 쿠키 상자를 보여줬다.

평소에도 어떻게든 악착같이 빼앗아 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쿠키 한 상자를 대가로 제레미는 손쉽게 민재의 청탁을 들어줬다.

“무혁 씨한테는 꼭 비밀로 해줘야 해요.”

“대신 나중에 들켜도 난 모르는 일이야.”

“응. 약속할게요.”

이게 기우라면 좋겠지만, 어차피 확실하지도 않은 사실을 무혁에게 알리고 싶진 않다.

바쁜 사람이니까, 요즘 들어 늦는 일은 다반사에 가끔은 술에 취해 들어오는 일도 잦았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무혁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민재에게는 무엇 하나 말해주지 않았다.

‘뭘까.’

분명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업무에서 배제된 이후로는 무슨 사정인지 알 길이 없다.

제레미의 호출이 없어서 민재는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여유로운 시간이라고 해야 할지.

민재만 바라보는 안 팀장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어쩐지 지금의 생활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미끼를 물었어.]

제레미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무혁은 화면을 껐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약속한 오후 두 시에 정확하게 맞춰 그는 오랜만에 옛 상사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오랜만이구나. 무혁아.”

“지검장님.”

이렇게 인사를 나누는 건 지난번 결혼식 이후로 처음이었다.

지금은 법복을 벗고 A&Z에 들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옛 상사는 무혁을 굳이 제 사무실로 불렀다.

“결혼하더니 확실히 얼굴이 폈구나.”

“과찬이십니다.”

조원식이라는 뒷배가 있다 보니 처음 검찰에 임관했을 때부터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사법고시는 물론 연수원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최고의 엘리트들이 배치되는 중앙지검이 아닌 동부지검에 배치된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이제는 조원식과는 완전히 갈라선 모양이구나.”

“처음부터 같은 편도 아니었습니다만.”

언젠가는 검찰에서 나가 조원식의 밑으로 들어갈 거라고.

검찰 내부에서도 그렇게 바라본 모양이지만, 무혁은 그들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다.

“검찰로 돌아올 생각은 없는 거냐?”

그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조원식을 처벌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무혁은 미련 없이 사표를 썼다.

매번 결심이 흔들릴 때마다 무혁은 민재를 떠올렸다.

혀끝이 녹아버릴 만큼 달콤한 행복을 맛보고서야 그는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여실히 느꼈다.

“저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생각입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만은 조원식에게 제대로 배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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