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복수하고 싶은 거지?
“오늘, 많이 힘들었지?”
“힘들었어.”
자연스럽게 양복 자켓을 받아 들며 민재는 문득 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예전부터 진무혁을 흠모하는 여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래 봐야 찍어도 안 넘어갈 나무라 사실상 공공재나 다름없었는데.
석민재가 나타나며 서원대 법학과의 칠대 불가사의 전설이 시작됐다고 할 정도로 진무혁은 여자 문제에 있어 한없이 결백했다.
잘 나가는 선배들은 물론 모 재벌가에서도 무혁을 탐내며 들이댔다는 풍문이 돌았는데, 생각해보니 진무혁은 정말 단 한 번도 여자 문제로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설마 남자가 문제가 될 줄은 몰랐지만…….’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도 제레미는 무혁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잠시도 둘이 있을 틈을 주지 않았다.
영어로 둘만 아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워 보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째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내가 일하는 동안 이 방에 함부로 손대지 마. 청소든 뭐든 다 필요 없으니까.”
무혁도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해서, 그제야 겨우 제레미의 보모 역할에서 벗어났다.
미행에 미친 운전 실력에, 뒤치다꺼리까지 하느라 민재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죽겠다…….”
진짜 해방이라고 생각하니,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무혁은 그런 민재의 옆에 앉아서는 장난스레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줬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저 녀석, 그냥 내버려 두면 또 적당히 알아서 다 할 테니까.”
“친해?”
평소라면 언제나 민재가 우선이었을 그가 오늘은 노골적으로 제레미를 챙기고 있다.
민재가 모르는 두 사람의 관계도 그렇고, 막상 생각해보니 민재는 ‘지금의’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알고 싶어.’
유치한 독점욕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민재는 아예 무혁의 무릎을 베고서 내려다보는 그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저 사람 목숨을 어떻게 구해줬길래 저렇게 잘 따르는 거야?”
“저 녀석은 친구가 나밖에 없거든.”
“나도 남편은 진무혁밖에 없는데.”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하니 무혁도 신기한 듯 민재를 내려다봤다.
뾰로통하게 토라진 채로 민재는 괜히 무혁의 허벅지만 쿡쿡 찔러댔다.
“우리 공주님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그냥 좀 부러워서 그랬어.”
“부럽다고?”
저 사람은 분명 민재가 모르는 그의 모습을 알고 있을 테니까.
나중에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까지 보상받을 수는 없다.
소영하의 존재가 무혁에게는 꼭 이런 기분이었을까.
서운해 보이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민재는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그래도 덕분에 쉽게 방은 합쳤네.”
“뭐라는 거야, 정말.”
어느새 침대 옆자리를 차지하고서 무혁은 잔뜩 골이 난 민재를 달래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 눈에는 미운 구석 하나 없는 예쁜 사람이라서, 민재는 무혁의 품에 꼭 안긴 채 마음껏 독점욕을 발산했다.
“어쩐지 오늘은 잠잠하네?”
“피곤해 보이길래. 얌전히 손만 잡고 자려고 했지.”
“거짓말.”
한 번 잠이 들면 업어가는 줄도 모르고 잘 자다 보니, 무혁이 잠든 사이에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지만.
노골적으로 흔적을 남겨두는 것만 봐도 절대로 곱게 잠만 재울 사람이 아니다.
“들켰나?”
화사한 꽃물을 머금듯, 무혁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민재를 품에 안았다.
“간지러워.”
거리가 머니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겠지만 어쩐지 아슬아슬한 이 기분이 싫지 않다.
이 사람이 이토록 사랑스러워진 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정신없이 입을 맞추며 어느새 무혁의 큰 손이 슬립 안으로 파고들었다.
“저 녀석 장단도 적당히 맞춰줘. 아무리 친구라도, 내 아내 옆에 다른 남자가 붙는 꼴은 못 보니까.”
“뭐라는 거야, 정말.”
음흉한 늑대답게 무혁은 제 앞에 놓인 기회를 절대 놓지 않았다.
야금야금 손끝을 깨물며 무혁은 흐트러진 민재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무혁은 공들여 민재의 이성을 녹여버렸다.
제 입을 틀어막은 채로 민재는 무혁의 아래에서 끊어질 것 같은 정신을 애써 부여잡았다.
“아직도 부모님을 찾고 싶어?”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찾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무혁이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건지는 이제 민재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역시 아까 그 질문은 함정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는 민재가 친부모를 찾는 걸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니까.
- 이제 두 번 다시 버림받고 싶지 않아.
상처받은 거겠지. 대놓고 책망하지 않을 뿐.
그의 마음속에 난 구멍은 여전히 메워지지 않은 채 민재를 품는 이 순간조차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지금은 말고, 나중에.”
무혁의 아이를 낳고, 시간이 더 흐른 뒤라면. 그때가 되면 용기가 생길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저 이 행복을 깨고 싶지 않을 뿐.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얼굴이 꼭 울 것 같아서.
민재는 땀에 젖은 무혁의 목덜미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애를 한 셋 정도 낳은 다음이면 괜찮을 것 같아.”
“셋이나 낳으려면, 우리 둘 다 분발해야겠네.”
대답이 썩 마음에 든 건지 무혁은 몇 번이고 민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달뜬 시간이 지나고 민재는 그의 체향에 한껏 취한 채 탄탄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까 그 사람들, 날 노린 거였지?”
“성준범 쪽에서 사람을 붙인 거겠지. 위험하니 당분간은 저 녀석이랑 함께 움직이는 게 좋아.”
“그래서 저 사람을 불러온 거야?”
독점욕이 심한 무혁이 굳이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인 이유는 역시 그것밖에 없다.
분명 곧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벌써 다 눈치챘는데, 무혁은 민재를 품에 안은 채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두 번 다시 널 잃어버릴 생각이 없거든.”
“무혁 씨.”
“더는 이 지옥 속에 날 혼자 내버려 두지 마.”
사람들 곁에 둘러싸여 있어도 그는 언제나 고독했다.
자신을 키워준 은인이 제 부모의 원수라는 걸 알았다 해도, 무혁은 내색조차 하지 않은 채 평정을 유지해왔다.
평생을 바쳐온 법조차도 그의 죄를 심판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천직이라 여겼던 검찰을 그만두게 된 건 분명 조원식에 대한 복수 때문이었을 것이다.
“복수하고 싶은 거지?”
무혁은 입을 다문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이 일이 모두 무사히 수습된다 해도, 그에게는 아직 조원식에 대한 복수가 남아 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까만 밤, 도시의 불빛이 밝을수록 하늘은 더욱 어두운 빛을 띠고 있다.
“걱정하지 마, 난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민재를 억지로 헤어지게 만든 것도 조원식이었으니, 원한이라면 이쪽도 만만치 않다.
어느새 잠든 무혁의 얼굴을 바라보며 민재는 남몰래 각오를 다졌다.
복수는 스스로를 해칠 뿐이라지만.
이 사람과 함께라면 지옥에 떨어져도 제법 괜찮으리라.
***
“젠장.”
성준범 이사는 오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요즘 들어서는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
며칠은 갈 줄 알았던 가짜 성아린은 하루 만에 정체가 들켜 개망신을 당했다.
부모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위장했건만, 대체 A&Z에서는 무슨 수를 쓴 건지 금방 여자의 정체를 알아내 가짜라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사님. 큰일입니다.”
“또 뭐야?”
“지금 저희 쪽 전산 시스템에, 의문의 디도스 공격이 들어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디도스?”
“개인정보 상당수가 빠져나간 것 같아서, 일단 서버를 닫고 대대적인 보수 작업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해커가 서버에서 빼낸 정보 중에는 멤버십에 가입한 개인정보까지 포함되어 있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또다시 악재가 될 텐데, 서버를 뒤집어 놓은 해커는 이쪽에서는 손도 대지 못하게 접속 마비를 걸어둬서 쉬쉬하며 묻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생겼다.
“일단 점검 표시해. 어느 쪽에서 저지른 건지도 반드시 추적하고.”
“문제는 저희 직원들 PC까지 접속해 내부 회계 자료까지도 같이 털어간 것 같습니다.”
“뭐?”
“만약 그게 외부로 유출된다면…….”
자칫 성준범이 개인적으로 빼돌리고 있던 자금 세탁 과정까지 모조리 드러날지도 모른다.
정확히 자신을 노리고 들어온 이 공격이 어느 쪽의 소행인지는 능히 미루어 짐작코도 남는다.
“지금 당장 조 대표 들어오라고 해.”
깜찍한 것들. 홍옥자 같은 늙은이가 이런 짓을 지시할 리는 없으니 이건 분명 A&Z에서 벌이는 짓이라는 건데.
이러다가는 저쪽을 망하게 하기 전에 제 목이 날아가게 생겼다.
밀려드는 불안감에 저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었다.
성아린의 이름이 계속 들려서 그런지 요즘 들어 악몽을 꾸는 빈도가 더욱 잦아졌다.
- 도련님은 아무것도 못 보신 거예요. 알았죠?
이제는 누구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렸다.
아무것도 못 봤으니까, 제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데.
성아린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원인 모를 불쾌감에 두통이 일었다.
“이사님. 소영하 씨가 찾아왔습니다만.”
“……들어오라고 해.”
소영하가 삐거덕거리며 빈자리를 신인 위주로 밀고 있지만, 성과는 뜨뜻미지근하다.
특히나 굵직한 광고 상당수가 날아가며 내부에서는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차라리 바짝 엎드린다면 한 번은 넘어가 주자, 그렇게 생각했는데.
소영하는 평소보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 주머니에 손까지 넣고 성준범을 마주했다.
“……행색을 보아하니 잘못을 빌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용건이 뭐야?”
“제 자리를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성준범 이사님.”
더는 호형호제 할 사이도 아니니 소영하는 비즈니스임을 분명히 하며 차갑게 선을 그었다.
평소의 나사 빠진 구석도 없이 사뭇 진지한 어투가 오히려 어색하다.
연기가 제법 늘었다더니, 아주 어깨에 힘이 제대로 들어간 걸 보면 한류스타의 자존심은 여전한가 보다.
“네 거라면?”
“영화, 광고. 날 지목한 계약들을 전부 다른 배우들한테 빼돌렸다면서요?”
언제 그 이야기가 소영하 귀에까지 들어간 건지.
그래도 달린 게 머리라고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친 모양이다.
준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충 걸친 소영하의 넥타이를 반듯하게 고쳐 매줬다.
“그건 회사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네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야.”
“그렇게 나오시겠다?”
정말로 뭘 잘못 먹은 건지 오늘의 소영하는 겁도 없이 준범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평소라면 헤실거리며 제 눈치만 살폈어야 할 놈이 맞먹으려고 드는 건 유쾌하지 않다.
“고작 그딴 소리를 하려고 날 찾아온 건가.”
“그럴 리가. 이걸 보고도 그딴 소리가 나올지가 더 궁금해지네.”
주제도 모르고 달려드는 저 부나방 같은 놈이 어쩌면 좋을까.
뭐 그리 대단한 걸 가져온 건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그는 소영하가 내민 사진을 받아들었다.
“이건…….”
한낱 고양이 새끼인 줄만 알았는데.
발톱을 세워봤자 뭐가 대수일까 싶었지만, 사진 속의 사람을 본 순간 준범은 질끈 눈을 감았다.
“형 어머니, 아니 어차피 호적상으로는 이제 남인가? 내 열렬한 팬이라고 하시더라고.”
낳아준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준 것 없는 친부모는 언제나 사사건건 준범의 발목을 잡곤 했다.
뒤로 보이는 화려한 배경은 유흥업소에, 눈이 반쯤 풀린 준범의 생모는 반라의 차림으로 술잔을 든 채 젊은 남자를 껴안고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입이 찢어지게 웃는 저 정신 나간 여자는 속옷만 입은 채 소영하와 팔짱까지 끼고 사이좋게 사진까지 찍어댔다.
손에 들린 사진을 완전히 구겨버리고서, 준범은 제 앞에 선 소영하를 다시금 마주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내가 그동안 참 순진했더라고. 얌전히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사님만은 내 편이라고 믿었었거든.”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 버린 톱스타라지만 모두를 매료시킨 아름다움만은 변함이 없다.
더없이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소영하는 준범에게 다가가 그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지, 난 형을 위해 혼자 얌전히 죽어줄 생각이 없는데.”
만약 이 사건이 외부로 유출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소영하 본인이 아닌 준범 자신이 더 위험해진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친모와 관련된 일이니까, 그의 부모는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사람 구실 하나 못 하는 망나니였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이라서, 친모 명의로 빼돌려둔 재산이 제법 되는데.
어머니의 일탈이라며 적당히 수습하다 횡령이 발각될 경우, 얼마 남지 않은 주주 총회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해질 것이 자명하다.
“누구야. 대체 어느 놈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을 나만 몰랐더라고. 형, 아니 대단하신 이사님께선 처음부터 날 그저 돈 벌어오는 도구 취급만 해왔단 걸 말이야.”
“소영하!”
“그거 알아? 형이 민재랑 헤어지라고 했을 때도 난 형이 날 위해 그러는 줄 알았거든?”
굳이 석민재를 걸고넘어지는 것도 모자라 가짜를 내세우고, 민재의 직장을 압박하고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든 것마저도.
“근데 이걸 어쩌지. 나도 더는 형 손에 놀아나 줄 생각이 없어.”
복수는 언제나 짜릿한 법이니까.
한없이 오만하던 성준범의 일그러진 미간이 참으로 흡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