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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결혼-58화 (58/103)

58화. 첫사랑은 안 이루어지는 거 아니었나?

홍옥자는 며칠째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낡은 건물 앞을 서성였다.

힘들게 추적한 끝에 겨우 주소지를 알아냈는데 찾는 사람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으니 슬슬 한계가 찾아왔다.

“차라리 문을 부숴버릴까.”

처음 보육원에 들렀을 때, 교사들로부터 민재가 버려진 과정에 대해서는 제법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워낙 안타까운 사연이니까.

혹시라도 가족이 찾으러 오면 연락을 전해주려고 인수인계 과정에서도 꼭 챙겼다는 말에 홍옥자는 답지 않게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 추운 날에 혼자 버려져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고.

민재의 호적상 생일, 보육원 앞에 버려진 날은 분명 아기가 사라진 바로 다음 날이었다.

“옥자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양주댁 아주머니.”

석민재의 비밀이 풀렸으니 이제는 누가 그 아이를 빼돌렸는지 알아볼 차례다.

아이를 보던 보모는 두 사람.

한 사람은 평생을 죄책감에 살다 결국 자살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소식이 끊겼다.

추적을 피해 몇 번이나 주소를 바꾸며 도망치던 양주댁은 초라한 행색을 애써 숨기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날 일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돌아가 주세요.”

“다 알고 왔어요. 그 애를 어디에 버린 건지까지도.”

삼십 년이 지난 일이라지만 옥자는 지금도 아이와 관련된 내용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막 대학생이 된 스무 살의 홍옥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지만, 오십 대가 된 홍옥자 사장은 더는 힘없이 지켜봐야만 하는 어린 애가 아니다.

“아주머니는 분명 집에만 있었다고 했지만, 함께 살던 남편의 직장은 분명 양주 쪽이었죠.”

당시에는 혜성가 쪽에서 쉬시하며 덮는 바람에 제대로 조사조차 할 수 없었다지만 이제는 아니다.

모든 걸 알고 온 옥자를 앞에 두고 한없이 늙은 양주댁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는 아무것도 드릴 말씀이 없어요.”

“누가 시킨 일인지, 그것만 알면 됩니다.”

“말할 수 없어요. 아가씨는 어차피 절 지켜주실 수 없을 테니까요.”

자신이 아직도 적당히 어르면 넘어가는 어린애로 보인 걸까.

좋게 말해서 해결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상대는 아직도 제 말 속에 숨은 행간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켜 준다고?”

“함부로 입을 열면 제가 죽겠죠.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요.”

공소시효가 지났음에도 단서 하나 주지 않겠다며 버티는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옥자도 더는 참아줄 여력이 없다.

“살려줄 능력은 없지만 죽여줄 자신은 있지.”

좋게 좋게 말하니 사람이 이토록 우습게 보였나 보다.

주먹을 꽉 쥐고서 옥자는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우리가 그 애를 얼마나 찾았는데. 아린이가 없어지고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그 애만 찾으셨어.”

벌써 삼십 년이 지나도록 피가 마르는 모습을 뻔히 지켜봤으면서, 제 한 몸을 살겠다고 입을 다무는 모습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옥자는 비겁한 양주댁의 멱살을 잡고서 매섭게 쏘아붙였다.

“아, 아가씨…….”

“언니가 몇 번이나 죽으려고 하는 걸 옆에서 뻔히 봤으면서!”

모든 걸 알고 있었던 주제에, 양주댁은 내색 하나 흘리지 않고 시치미만 떼고 있었다.

무시무시하게 쏘아붙이는 옥자의 기세에 약주댁은 비굴한 눈을 하고 우는 소리를 늘어놨다.

“저라고 편했을까요? 그때 그렇게 쫓겨나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서 우리 아린이 물건에 손을 댔어?”

반쯤 혼이 빠진 홍 여사는 매년 습관처럼 여자아이가 쓸 만한 물건을 사들이곤 했다.

사라진 아이의 공백을 채우려는 것처럼, 사라진 딸이 자라는 모습을 그리며 주인 잃은 물건들은 복도 끝 방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양주댁은 그 물건을 빼돌려 팔다 덜미를 잡혀 쫓겨났다.

“그때는 우리 아들이 사고를 쳐서 어쩔 수 없이…….”

“그랬겠지. 자기 자식은 감방에 보내기 싫으신 분이 어째서 남의 자식이 귀한 줄은 몰랐을까.”

그것도 모자라 상처뿐인 홍 여사를 등쳐먹기까지 했으니 그 죄는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다.

물리적으로 때리지 않아도 옥자의 매서운 말은 시퍼런 비수처럼 상대의 속을 헤집었다.

남의 가정을 산산조각낸 주제에, 아기를 빼돌린 당사자는 이토록 뻔뻔하게 버티며 끝까지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차라리 날 죽여요. 그럼 영원히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정말로 죽어도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양주댁은 다 해진 카디건을 고쳐 입고서 반지하 방으로 걸어 내려갔다.

차라리 돈을 써서 회유하면 쉽게 입을 열지도 모르지만, 그러고 싶진 않다.

어쨌든 보육원 앞에 가게 된 과정을 알아야 진짜 범인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옥자는 갑갑함을 견디지 못하고 애먼 제 가슴을 쳤다.

“사장님, 기자 회견 관련해서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안 그래도 그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옥자가 서울로 돌아올 즈음에는 벌써 A&Z 쪽에서 완벽한 뒷수습을 마친 후였다.

아린을 사칭한 여자는 서른두 살의 모델로, 얼핏 정면 얼굴만 보면 민재와도 제법 닮은 구석이 있어 보이긴 했다.

“해프닝으로 취급되긴 했지만, 그래도 저쪽도 많이 초조한 모양입니다.”

“민재까지 굳이 걸고넘어졌단 거지.”

돌려서 말을 덧붙여도 저쪽의 의도만은 확실히 파악했다.

자기들이 똥줄이 타 가짜를 들이민 만큼 홍옥자 역시도 가짜를 데리고 있는 거라는 식으로 사람들이 인식하게 만드는 것.

그것만으로도 오늘 기자 회견은 저쪽의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시켜 준 걸지도 모른다.

“혜성가로 가자.”

오늘 일로 온종일 시끄러웠을 테니 옥자는 언니의 상태가 그 무엇보다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제 염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홍연희 여사는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쿠키를 굽고 있었다.

“옥자야, 왔어?”

“언니?”

근 삼십 년 간 언니가 이렇게 화사하게 웃고 있는 모습은 도통 본 적이 없었다.

남편을 간호하며 야위어가던 홍 여사는 어쩐지 며칠 사이 뺨에도 제법 살이 오른 것 같았다.

발그레 두 뺨을 물들인 채 즐거워 보이는 언니는 앞치마를 벗고 옥자의 입에 갓 구운 쿠키를 넣어줬다.

“맛있지? 삼십 년 만에 만들어도 내 솜씨는 변함이 없지 뭐야.”

“그건 그렇긴 한데. 이건 다 웬 거야?”

“우리 아린이한테 보내 주려고.”

지난번에 다과에 낸 걸 잘 먹길래 이번에는 내가 직접 구워주고 싶었다며 언니는 참으로 오랜만에 미소를 되찾았다.

은밀히 의뢰한 검사 결과는 아예 원본 그대로 민재 손에 들려 보냈다.

섣불리 내용물을 확인할 만큼 경솔한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예상은 완벽하게 적중했다.

“그러게, 내 말이 맞지?”

의기양양한 동생을 앞에 두고 홍연희 여사는 저택에 찾아온 민재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정이 가는 아가씨였다.

단아한 외모도, 어려운 환경 속에 제법 고생한 것 같은데도 요즘 사람답지 않게 진중한 면모도 자신을 꼭 빼닮았다.

일차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홍 여사는 민재가 마시고 남은 컵을 가지고 한 번 더 유전자검사를 의뢰했다.

[ 99.9 퍼센트 확률로 친자 관계가 성립합니다. ]

분명히 예상했던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받아든 날. 그녀는 의식도 없는 남편의 곁에서 밤새 울었다.

살아 있었다.

살아 있을 거라고 그토록 믿어 왔지만 남편이 쓰러진 이후로는 정말로 포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이토록 어여쁘게 자라 제 곁까지 다가와 줬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있었으면서 왜 몰랐던 걸까.

민재가 제 딸이라는 걸 알고 나니 더 빨리 만나보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이 앞섰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 해야 할지,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민재가 돌아간 이후로, 홍 여사는 옥자가 조사해둔 기록을 두루 살폈다.

민재를 입양해간 부부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그 아이는 그럭저럭 순탄한 생활을 보내온 듯 했다.

“진무혁이라면 그 친구인가?”

“응. 미국에서 만난 그 애 맞아. 지금은 안 팀장 밑에서 우리 사건을 전담하고 있어.”

민재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시점은 정확히 그의 등장 시점과 일치했다.

명문 서원대 법대 안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그와 얽히기 시작하며 석민재의 인생은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둘 다 첫사랑이라나 봐.”

“이걸 어째, 첫사랑은 안 이루어지는 거 아니었나?”

꼬박꼬박 민재라고 부르는 옥자와 달리 홍 여사는 제 딸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더 빨리 만났다면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미 자신만의 가정을 꾸렸다는 사실이 홍 여사는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혁이가 민재를 많이 좋아했거든. 그래서 서둘러 결혼한 거지.”

“내가 들은 거랑은 이야기가 다르네.”

두 뺨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던 그 아이의 눈빛만 봐도 분명 진심인 거 같긴 했다.

혼자 남은 할머니 때문에 결혼을 서둘렀다고 하는데, 그 안의 속사정은 조금 더 복잡했다.

특히나 소영하라는 이름이 제일 눈에 거슬렸다.

첫사랑이 다시 만나 마냥 예쁜 사랑을 피워냈다고 하기엔 소영하와 얽힌 내용은 어째 참담하기 그지없다.

“소영하라면 그 배우인가?”

“준범이가 기르는 똥개. 민재한테 아주 스토커처럼 매달려서는, 지난번에는 리조트까지 따라왔더라니까?”

무혁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민재를 덮치려 했다는 말에 점잖은 홍 여사도 혀를 찼다.

어떻게 얽힌 건지는 워낙 철저히 비밀에 부친 터라 알아내기도 쉽지 않았는데, 김 기자가 물어다 준 정보 덕에 두 사람은 소영하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제법 소상히 알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궁지에 몰린 민재가 결혼을 선택하게 된 원흉이 소영하라면, 제 원망을 받아내는 것도 응당 그의 몫이다.

속 모를 미소만 짓고 있는 홍 여사를 보며 옥자는 어째 소름이 돋았다.

한 배에서 태어나 평생을 봐왔는데 저걸 어떻게 모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모를 언니라지만, 적어도 저 미소가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언니, 뭘 어쩔 셈이야?”

“마침 잘됐어. 준범이 그 아이가 키우는 연예인이라면, 나도 죄책감 같은 건 가질 필요가 없을 것 같거든.”

우아하고 고상한 홍 여사의 미소 속에 살벌함이 피어올랐다.

저 표정은 분명 어린 시절, 언니 가방에 살아 있는 개구리를 넣어놨다가 들켰을 때나 봤던 얼굴인데.

‘뭔진 몰라도 그 녀석들, 골치 좀 썩겠구나.’

성급한 자신과 달리 언니는 절대로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고운 손으로 정성 들여 식은 쿠키를 정성껏 담으며 홍 여사는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다.

***

“여기로 들어오세요.”

상전 하나를 모시고 민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집에 돌아왔다.

하필이면 무혁은 다른 변호사들과 함께 논의할 내용이 남아 야근까지 하는 바람에 민재는 퇴근하고서도 여전히 혼자 제레미의 시중을 들게 생겼다.

“흐응, 여기란 말이지?”

“네. 무혁 씨가 쓰던 침실이에요.”

누추하네, 뭐네 투정을 부릴 줄 알았는데, 무혁이 쓰던 방이란 말 한마디에 제레미는 군말 없이 서재를 제 방으로 정했다.

백팩에 들어있던 랩탑부터 시작해 가방에서 끝없이 나오는 장치들을 열심히 연결하고서 그는 순식간에 무혁의 서재를 자신의 작업실로 만들었다.

“장비가 더 필요해. 이걸로 주문해.”

금색 카드를 받아들고서 민재는 제레미가 준 리스트를 읽어내렸다.

대부분은 전자 장비인 것 같은데, 집에 와서도 일이 끝나지 않는 건 고역이다.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치킨이 좋아. 반반 무 많이.”

굳이 어디의 무슨 치킨을 시키라는 상세한 주문에 입이 떡 벌어졌다.

어지간한 치킨 브랜드는 모조리 꿰고 있는 것도 모자라 그는 커피조차 믹스로 타오라며 불평을 늘어놨다.

“아메리카노 따위를 어떻게 마시란 거야? 커피는 3, 3, 3인 거 몰라?”

“네. 당장 사 올게요.”

커피, 프림, 설탕이 황금비율로 녹아든 금색 믹스만 드신다는 까탈스러운 말씀에 민재는 결국 일 층의 편의점에 가서 커피까지 구해다 바쳤다.

민재가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이, 제레미는 모니터를 세 개나 놓고서 무언가를 심각하게 뒤져보고 있었다.

“뭘 보시는 거예요?”

“너희 나라 주민 등록 시스템. 생각보다 별거 없네.”

“그런 걸 왜 보는 거예요?”

해커라는 말을 듣긴 했는데 하는 짓의 규모가 어째 제 상식의 범위를 현저히 넘어섰다.

이걸 대체 뭐라고 봐야 할지, 마치 포털 사이트를 뒤지듯 제레미는 클릭 몇 번에 민재의 신상 정보를 줄줄 읊어댔다.

“석민재의 본적은 경기도 양주, 며칠 전에 월급도 받았구나?”

“금융정보는 또 어떻게 뜯어본 거예요!”

“내가 못 뚫는 시스템은 없어. 네가 원한다면 무혁의 비밀도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는데?”

이브를 유혹한 독사처럼, 제레미는 천연덕스럽게 위험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원하는 건 정말 뭐든 다 알려줄 수 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닐 테지만, 생각지도 못한 제레미의 제안에 민재도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정말로 이렇게 전지전능한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라면.

제 부모님이 누구인지 알아봐 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다녀왔어.”

부모님에 대해 말을 해보려고 했는데, 운을 떼보기도 전에 현관문이 열리고 문소리가 들렸다.

“무혁!”

아내인 민재보다도 먼저, 제레미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가서는 그대로 무혁의 품에 와락 달려들었다.

“민재랑 잘 놀고 있었어?”

자기가 무슨 애완견도 아니고, 수상할 정도로 무혁을 따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한 심술이 돋았다.

‘차라리 둘이 어떻게 친해진 거냐고 물어봤어야 했는데.’

상대가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아주 조금 질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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