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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결혼-57화 (57/103)

57화. 불청객.

성준범 이사의 돌발 기자회견으로 A&Z 내부도 적잖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특히나 이번 일의 총괄 책임을 맡은 안 팀장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욕을 퍼부었다.

“미친 거 아니야?”

하나 같이 아니면 말고 식으로 던진 건데, 어차피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저러는 게 분명하다.

설령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성아린을 사칭한 저 여자 하나만 문제가 될 뿐 배후는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을 텐데.

저게 누구 솜씨일지는 으레 짐작이 갔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안 팀장의 물음에 무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반박 기사부터 준비해야죠.”

아직 홍 사장이 돌아오기 전이니 그 전에 모두 수습해야 한다.

자칭 성아린이라는 저 여성은 혜성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입장문을 준비하며, 무혁은 힐끗 전화를 확인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착 세 시간 전에, 그것도 비행기 안에서 연락을 줄 줄은 몰랐다.

[세 시간 뒤에 착륙해. 마중 기대할게♡]

얄미운 녀석 같으니라고. 지금은 도저히 직접 움직일 상황이 아니라 대신 민재를 보냈다.

저쪽이 가짜까지 세우는 무리수를 둔다는 건 민재에게도 조만간 손을 쓸 모양인데, 이쪽도 와일드카드가 도착했으니 이제는 걱정이 없다.

“그래서, 네가 말한 해킹 전문가는 언제쯤 오는 건데?”

안 팀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난 문자가 울렸다.

[서울, 인천 일부 지역 신호등 오류. 운전 시 주의 요망.]

자신의 도착을 요란하게 알리는 저 미친 자를 어찌하면 좋을까.

“뭐야 이건?”

“잘 오고 있는 모양이군요.”

제레미 로즈펠트. 코드네임 쿨 키드.

시애틀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천재 해커에게 교통 정보 시스템을 해킹해 자기가 움직이는 동선마다 파란 불을 띄우는 정도는 애교다.

“신호등을 조작했다고?”

“워낙에 비싼 몸이긴 한데, 이번엔 차 한 대 정도로 넘어와 주더군요.”

“차 한 대가 무슨 옆집 애 이름도 아니고. 너 대체 뭐야?”

수상하게 여기는 안 팀장을 내버려 두고 무혁은 곧장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해킹도 해킹이지만 무혁이 굳이 제레미를 끌어들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 녀석은 나라에서 관리하는 놈이라. 어지간한 경호는 그쪽에서 알아서 해줄 겁니다.”

“나라에서 관리하는데, 이렇게 마음대로 와도 돼?”

“못 가게 했다가 다른 나라로 넘어가면 본인들만 손해니까요.”

천부적인 해킹 실력으로 국가 정보 시스템까지 뚫어버린 천재라 원래는 출국도 정부의 승인 하에나 가능하다지만.

그렇다고 괜히 행동에 제약을 줬다가는 누가 어떻게 보복을 당할지 모르니 차라리 각국은 제레미를 두고 암묵적인 공조에 들어갔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인간 흉기나 다름없죠. 그 녀석, 핵미사일 발파장치까지 해킹해 멈춘 적도 있었으니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어?”

벙한 표정의 안 팀장을 보며 무혁은 어깨만 으쓱했다.

업데이트되는 뉴스를 보니 벌써 인천 쪽 교통망은 정상화됐고 슬슬 서울 쪽에서 마비가 이어지고 있다는 걸 보니 별 무리 없이 잘 오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걸 보면 분명 천재는 천재인데, 어딘가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린 재능을 발산하고 있단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민재 말을 들어보면 미행이 붙은 건 맞는 모양이지만 저래서야 제레미에게 붙은 첩보 기관 쪽에서 알아서 정리할 것이다.

‘이래서 불러들인 거지만.’

해킹이야 그쪽에서도 가능해도 이런 부가적인 활용도까지 모두 고려한 계산이었다.

다만 테러에 가까운 운전실력이 걱정일 뿐.

“성준범 쪽의 부당거래 내역은 그 녀석이 찾아낼 겁니다. 아무리 세탁을 해도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까요.”

증거능력에 제약이 많은 검찰 시절과 달리 차라리 주주 간의 다툼 쪽이 죄상을 밝히기엔 훨씬 쉬웠다.

본격적인 반격을 준비하던 중 드디어 회사 앞 도로에서 빵,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슬슬 도착한 것 같네요.”

대책 기사 및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무혁은 직접 지하주차장까지 내려갔다.

시계를 확인하고 정확히 삼십 초 후, 주차장 입구에서 새빨간 스포츠카가 경사로를 따라 내려왔다.

“무혁!”

차를 세우자마자 제레미는 운전석을 박차고 달려와 그를 꽉 안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파트너의 등을 토닥여주며 무혁은 뒤따라온 까만 세단을 힐끔 바라봤다.

“저것들은 좀 떼놓고 오지 그랬어?”

“뭐야, 저건?”

옆도 뒤도 안 보고 미친 듯이 달렸을 테니 누가 자길 미행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으리라.

뒷일은 제레미에게 맡겨두고 무혁은 조수석에 앉아 완전히 얼어붙은 민재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사, 살려주세요…….”

속도 카메라는 물론 교통 신호 조작까지 해가며 미친 듯이 밟아댔을 테니 놀란 게 당연하다.

그따위로 운전하면서도 지금껏 사고 한 번 안 낸 것도 어찌 보면 재주긴 한데.

벌벌 떠는 민재를 차에서 데리고 나오니 어느새 검은 세단에서 각목을 든 남자들이 우르르 내렸다.

4 대 1.

제법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무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민재만을 챙겼다.

“저기,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저 정도로 다칠 놈이면 이 난리를 피우지도 않았지.”

어차피 총도 없는데 그는 손톱만큼도 걱정 따위 하지 않았다.

무혁의 예상대로, 제레미는 각목을 든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가볍게 거구의 사내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 원래 자기 나라 태권도 국가대표 선수였어.”

“국가대표?”

“일부러 죽이려고 해도 절대 안 죽을 놈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덩치만 해도 가냘픈 제레미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은데 그는 물 흐르듯 유연한 자세로 마지막 하나까지 완전히 쓰러트렸다.

저쪽도 어지간히 싸움에 익숙해 보였건만 급소만 딱딱 찍어버리는 외국인을 보며 민재는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후, 별것도 아닌 것들이.”

가방에서 아예 로프까지 꺼내 굴비 묶듯 모조리 묶어놓고서 제레미는 기절한 폭력배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미천한 것들이 어디 감히 본좌에게 덤벼!”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몰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저 사람, 아무리 봐도 한국말을 잘못 배운 거 같아.”

의기양양한 제레미를 보며 민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정체불명의 외국인을 제일 반긴 건 무혁의 친구 한용식 변호사였다.

“찾았어.”

뒷조사라면 이골이 난 용식조차 추적하지 못한 접속기록을 훑어본 제레미는 클릭 몇 번을 더해 순식간에 위치를 추적해줬다.

“미쳤어. 이걸 대체 어떻게 찾아내는 겁니까?”

“위대한 이 몸의 뜻을 우매한 백성이 어찌 알까.”

말도 안 되는 저 말버릇만 좀 어찌하면 좋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제레미가 합류하며 막혀 있던 문제들이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보니까 필로폰 거래 대금은 전자화폐로 바뀌어서 광저우 쪽으로 넘어간 것 같은데?”

“그거랑 사기계좌 내역은 여기. 이것들 아주 많이 해 먹었네.”

순식간에 털어낸 계좌 정보를 보며 어지간하면 놀라지 않는 민재도 진심으로 경악했다.

이건 불법적으로 입수한 증거니 법적으로는 어떤 효력도 지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주주들을 설득하는 데는 충분히 쓰일 수 있다.

어차피 지금 목표는 성준범을 법정에 세우는 게 아닌, 경영권을 빼앗는 거니까.

자료를 훑어보던 금융 전문 변호사들도 근 수백 억대에 달하는 자금 세탁 규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지막으로 불법 도박까지. 얘들은 정말 돈 되는 건 다 하는 모양이네.”

“날리게?”

“어, 마음에 안 들어.”

무혁은 이미 그의 기행에 익숙해 보였다.

제레미는 그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만으로, 거래 내역을 모조리 백업한 후 말 그대로 서버의 자료를 차례로 삭제해나가기 시작했다.

불법 거래소의 접속 링크가 하나둘 끊어지고 있는데. 저기에 돈을 넣은 사람들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저래도 돼요?”

“어차피 불법이라며? 보호받을 테두리도 없는 곳인 걸 알았으면 이렇게 될 것도 예상했어야지.”

당장 오늘 저녁 뉴스 첫 기사가 바뀌는 순간을 실시간으로 바라봤다.

[토토 사이트 접속 장애]

실시간검색까지 올라오는 걸 보니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른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은 참으로 태연하기 그지없다.

“인원이 보충됐으니 업무를 다시 나누죠.”

필요한 물증도 모두 확보됐고, 무엇보다 돌발 상황이 생겼음에도 홍 사장은 아직 지방 출장 중이라 이쪽까지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A&Z에서 서둘러 보도자료를 배포한 덕분에 성준범 측의 계획은 오늘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자회견장에 나온 여자는 김경희, 올해 서른둘인 모델입니다.”

제레미가 신상을 확보하고 용식이 빠르게 뒷조사에 들어가니 가짜 성아린의 정체는 금방 밝혀졌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성준범 쪽에서는 급히 자신들도 확인중이라며 꼬리를 잘랐다.

“그리고 민재 씨는 당분간 제레미의 서포트를 맡아 주세요.”

업무를 다시 나누며 무혁은 아예 민재를 제레미의 담당으로 고정해버렸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그는 구체적인 이유를 덧붙였다.

“아까 미행당한 것도 그렇고, 저쪽에서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까요.”

“미행을 당했다고?”

안 팀장의 물음에 민재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원래도 집과 회사만 오가던 처지라, 공항에서 혼자가 되자마자 사람이 따라붙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주차장에서 각목까지 꺼내 들고 나타난 걸 보며 실감했다.

이건 무기만 안 들었지, 사실상 경영권을 두고 벌이는 전쟁이나 다름없다.

“괜찮겠어?”

문성희 변호사조차 진지하게 민재의 안위를 염려했다.

홍 사장 옆을 따라다니며 사실상 표적이 된 거나 다름없으니 민재도 당분간은 안전한 일을 하며 조심하는 게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다들 보안 유지 철저히 하시고 주변 단속 부탁드립니다. 또다시 유출되는 일이 생기면 정말로 곤란하니까요.”

“미친놈들. 이젠 아주 대놓고 사람도 잡겠어.”

박 변호사가 내부 정보를 빼돌린 이후로 회사 내에서도 내부 단속이 더 심해졌다.

심각한 회의를 마치고 안 팀장은 회의록을 마무리하는 민재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왜 그러세요?”

“그냥 좀. 내 새끼를 뺏기는 것 같아서 좀 섭섭하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지만, 근 칠 년을 단둘이 호흡을 맞춰왔으니 섭섭할 만도 하다.

무혁과 결혼한 이후로 업무가 바뀌며 확실히 서로 소원해진 감을 지울 수 없다.

“어디에서 일하든 제 보스는 언제나 팀장님인걸요.”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안 팀장은 민재의 은인이나 다름없다.

대답이 퍽 마음에 든 건지 그는 실없는 미소를 머금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자식, 그래. 넌 아직 독립하려면 멀었어.”

하는 말마다 한없이 비뚤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안 팀장이 없었다면 이 치열한 곳에서 여기까지 오는 건 불가능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다시 돌아올 텐데요, 뭘.”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빈자리를 퍽 아쉬워하는 상사를 보니 그동안 헛일한 건 아닌 것 같아 조금은 뿌듯했다.

곧장 자리에 돌아와 월별 결산 자료를 정리하는데 갑자기 책상 앞에 커피가 놓였다.

“아주 애틋하네.”

또 시작이구나. 대놓고 질투하는 무혁을 보며 민재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누구만 할까?”

“내가 뭘?”

제레미는 언뜻 봐도 무혁과 무척 친해 보였다.

약력만 봐도 대단한 사람인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서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저 사람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죽을 뻔한 걸 구해준 적이 있거든.”

“생명의 은인?”

“뭐, 그런 셈이지.”

속 모를 미소를 머금고 무혁은 습관적으로 민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엔 안 팀장을 질투해서 시작한 것 같은데, 그래도 무혁의 큰 손이 닿는 순간은 기분이 좋았다.

“또 바빠지겠네.”

성준범 쪽에서 핵폭탄을 터트렸으니 당분간은 또 죽을 만큼 바쁠 것 같은데, 무혁은 태연히 민재의 손을 가져와 제 뺨에 비볐다.

“어차피 밤엔 함께일 텐데 뭘.”

“밝히긴.”

굳이 손바닥에 키스하며 무혁은 나른한 눈빛으로 민재를 응시했다.

감미로운 그의 시선 안에 제 모습이 가득 비치는 게 싫지 않다.

“무엄하게, 여기서 뭐 하는 게냐?”

대체 무슨 드라마를 본 건지 괴상한 말투에 김이 새버렸다.

분위기가 제법 좋았었는데 저 손님이 문제다.

슬슬 퇴근 준비를 할 즈음 제레미는 차곡차곡 짐을 챙긴 후 민재 손에 자신의 캐리어를 넘겼다.

“이거 들어줘.”

그러고 보니 숙소가 어디라는 얘기를 아직 듣지 못했다.

갑자기 외국에 왔으니 음식도 맞지 않을 테고, 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챙겨줘야 한다.

“숙소는 어느 호텔이신가요?”

그런데 제레미는 어이없단 얼굴로 되물었다.

“모처럼 한국까지 왔는데, 당연히 무혁의 집에서 지낼 거야.”

“네?”

귀하신 몸이라기에 일부러 오성급으로 예약하려고 했는데 그는 어이없단 얼굴로 민재를 노려봤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무혁도 저 고집은 꺾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호텔은 죽어도 싫다고 해서 서재 쪽 침실을 내줘야 할 것 같아.”

이 불편한 손님과 동거라니.

경악한 민재를 앞에 두고 제레미는 일부러 혀까지 내밀고 약을 올렸다.

“무혁, 오늘은 같이 자자. 밤새 하고 싶은 얘기가 아주 많아!”

아무래도 무혁과 제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작정한 것 같은데.

사사건건 얄밉게 구는 걸 보며 민재는 저 손님이 왜 거북한지 진심으로 깨달았다.

‘이게 시동생이구나.’

사사건건 약을 올리며 속을 긁어대는 게 시댁 식구라더니.

제레미를 보고 있자니 정말 존재하지도 않는 시동생이 생긴 기분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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