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차라리 그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기자회견장에는 제법 많은 기자가 모였다. 대부분 HS엔터에 호의적인 이들로 꾸렸다.
아직 이야기가 새지 않았을 텐데도 왠지 모를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무대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성준범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안녕하십니까, 성 이사님.”
“조 대표님.”
그와 달리 조원식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로 다가와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척하고 있지만, 성준범도 조원식의 이번 계획에는 적잖이 놀랐다.
“제 선물은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듭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저런 역겨운 얼굴이 세상에 또 존재할 줄은 몰랐는데.
물론 최대한 닮은 꼴을 데려온 모양이지만 그래도 석민재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번 건은 홍옥자가 한 발 늦었으니, 앞으로 속 좀 꽤나 썩을 겁니다.”
일부러 보란 듯이 데리고 다녔으니 차라리 그걸 역이용하자는 계획은 완벽하게 먹혀들었다.
홍옥자 쪽에서 방심한 틈을 타 여론의 주도권은 제게 넘어온 셈이다.
어차피 덮을 수 없다면 차라리 곪아 터지게 하는 게 나으리라.
찬물을 실컷 뿌려뒀으니 아무리 도화선에 불을 붙여 본들 불씨는 제대로 피기도 전에 제풀에 꺼져버릴 것이다.
“그쪽은 어찌 되어가고 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요즘들어 수상한 움직임이 거세진다는 얘기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어제 석민재가 혜성 본가에 들렀다는 소식까지 들리니 성준범도 더는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빨리 정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아무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 조카뻘인 성준범의 무례한 태도에도 조원식은 깍듯한 태도로 꼬박꼬박 경어를 썼다.
한없이 미소만을 머금은 채 그는 자신의 계획이 완성되는 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봤다.
“모든 것이 이사님의 뜻대로 흘러가길 빕니다.”
“어서 처리하세요. 괜히 성가시게 내버려 뒀다간 두고두고 문제가 될 테니까.”
본격적으로 기자회견이 시작되는 걸 확인하고서 조원식은 자리를 피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 선생님. 마침 연락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은 새로 교체된 독사파의 간부였다.
벌써 세대교체를 몇 번이나 이뤄낸 조직 내에서 조원식은 거의 원로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고 있다.
언제 성준범 앞에서 굽신거렸냐는 듯이, 그는 오만한 목소리로 대뜸 물었다.
“그 건은 어떻게 됐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흘 안에 정리하겠습니다.”
진무혁이 소영하의 활동 기반을 처참하게 밟아놓은 것도 모자라, 석민재와 홍 사장까지 엮이니 일이 점점 꼬여만 갔다.
그간 쌓아온 모든 인맥을 동원해가며 공을 들인 만큼, 혜성이 독사파 손에 넘어오게 된다면 그 역시도 이 지겨운 생활을 청산해야 한다.
혜성 건만 잘 마무리된다면 그는 정계에 정식으로 출사표를 던지고 본격적인 대선 가도에 발을 들이밀 작정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없애버려야 해.”
고분고분하게 무혁의 곁에서 떨어져 나갔기에 더 짓밟지 않았던 것뿐인데, 찰나의 방심이 이런 결과를 불러오게 될 줄은 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뒤늦게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처음에는 손쉽게 해치울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진무혁은 그의 속셈을 모두 아는 것처럼 아예 손 쓸 만한 모든 루트를 차단해 버렸다.
차라리 그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만약 정말로 성 회장의 친딸이라면 차라리 납치된 시점에 죽어버리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왜 그리도 악착같이 살아남아 이리도 제 발목을 잡는 건지, 얌전하던 진무혁이 제게 반기를 드는 것도 분명 그 여자의 농간이 분명했다.
“제대로 숨을 끊어 놔. 다시는 태양 아래 서지 못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말 잘 듣던 진무혁도 여자 치마폭에 빠지니 제 아비와 조금도 다를 게 없다.
일에 파묻혀 평생 혼자 살 것 같던 진이한을 꼬여낸 그 여자만 아니었더라도 제 손으로 친구를 죽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무혁을 데려온 것만이 유일한 보상이었다.
그 아이만은 어떻게든 조원식의 방식대로 길러내 요령 좋은 제 식구로 삼을 참이었는데.
결국은 진무혁도 제 아비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 밟을 모양이었다.
“반드시 죽은 걸 확인해. 어설프게 숨이 붙어 있으면 그게 더 골치 아파지니까.”
사람 목숨 같은 건 어차피 바람 앞의 등불 같은 거니까.
뒷수습만 잘하면 누구 하나 죽는 것 정도야 묻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진이한의 죽음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저 멀리서 결과만을 지켜보면 그만이니까.
‘그러게 진작 내 말을 들었어야지.’
제 손에 잡은 게 썩은 동아줄이라는 걸 그놈도 알아야 할 텐데.
아무리 발버둥 쳐본다 한들 고지식한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벌써 알림이 미친 듯이 울리는 걸 보니 사람들은 저 가짜의 손에 완전히 놀아난 모양이다.
어리석은 것들. 조원식은 내실 따위 없는 기자회견을 보며 차가운 비웃음을 남겼다.
***
아무래도 무슨 일이 난 게 분명하다.
성준범 측의 기습 기자회견으로 사무실은 아예 뒤집혔다.
민재도 서둘러 내용 확인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올라온 기사는 제법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누가 썼나 보니 어째 이름이 눈에 익었다.
“스타커넥트의 김영룡 기자?”
분명 지난번 소영하 일로 찾아왔던 바로 그 기자였다.
그의 기사에 따르면 스스로를 성아린이라고 밝힌 여자는 아무래도 성준범 쪽에서 내세운 꼭두각시임이 분명했다.
“친부모 아래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데, 혜성 가의 다툼 문제에 이용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고…….”
요즘 들어 자신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는 게 불쾌하다는 데 이건 분명 홍옥자 사장을 다분히 의식한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최근 언급된 사람은 로펌의 직원일 뿐이라는 데 이건 분명 민재 자신을 일컫는 것 같다.
“내가 언제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은 절대로 혜성 가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못을 박으며, 자칭 성아린은 자신의 모든 지분과 권리를 성준범에게 양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오직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는 말만 반복하는 걸 보며 민재는 그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어이가 없네. 사람들이 바본 줄 아나?”
누가 봐도 성준범 쪽에서 내세운 가짜인데, 어쩐지 여론은 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짜 믿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보였다.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유전자 감정서는 물론이오, 저 여자가 진짜 성아린이라는 물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사람들은 성준범 이사가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주는 걸 보며 다들 뭔가 있다고 확신한 것 같았다.
요즘 세상에는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가 얼마든지 날 수 있는데,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게 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내용을 정리해 안 팀장에게 전하고 나오는데 무혁이 다급하게 민재를 찾았다.
“손님?”
“원래는 내가 데리러 갈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어.”
귀한 손님인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대신 데리러 가 달라는데, 하필이면 당장 오후 비행기로 도착한다고 했다.
오랜만에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그를 보며 민재는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냥 마중만 나가면 되는 거야?”
“자세한 건 전화로 얘기하자. 밑에 택시 불러놨으니까 그거 타고 출발하면 돼.”
평소라면 과보호에 난리를 칠 사람이 오늘은 어째 혼자 보내는 게 신기하긴 했다.
무혁이 불러준 택시를 타고서 민재는 서둘러 비행기 스케줄부터 확인했다.
“시애틀발이니까…….”
수속을 고려해도 너무나 빠듯하다.
게다가 무혁이 보내온 ‘손님’의 정보는 그야말로 엉터리란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게 뭐야.”
사진 한 장 없이 이름은 존 도 John Doe.
한국식으로 치자면 홍길동, 혹은 아무개 정도로 쓰이는 가명의 대명사가 떡하니 적혀 있다.
신원불상자에게나 쓰는 이름을 주고 어떻게 찾으라는 건지.
[그쪽은 네 얼굴을 아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저쪽이 알아서 찾아올 거라는 무혁의 메시지에 민재는 더더욱 손님의 정체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손님과 관련된 걸 꼬박 검토하는 와중에도 택시는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아 기적적으로 시간 내에 공항 입국장 앞에 멈췄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어마어마하게 나온 택시비는 경비로 청구해줄 테다.
민재가 내민 카드를 받아들고서 기사님은 백미러로 힐끗 차 뒤쪽을 바라봤다.
“아가씨. 내가 아까부터 영 이상해서 물어보는 건데 말이야.”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까부터 저 뒤에 검은 차들이 따라붙는 것 같은데. 혹시 아가씨를 따라서 온 건가?”
카드를 받아들고서 민재도 백미러로 차 뒤쪽을 관찰했다. 정말로 멀리 뒤에 선 검은 색 세단 두 대가 보였다.
“조심해. 내가 잘못 본 거면 좋겠지만 영, 감이 좋지 않아.”
경고 섞인 염려 때문이었을까. 민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쏜살같이 입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데 기사님의 말대로 자신이 움직이기 시작하니 검은 세단에서 덩치 큰 남자 여럿이 우르르 내렸다.
노골적인 추적이 시작되기에 인파 속에 숨어들었다.
‘이런.’
일단 커다란 화면에서 비행기 스케줄을 보자 시애틀에서 온 비행기는 벌써 도착한 것 같았다.
급한 대로 입국장에 달려와 주변을 둘러보지만, 상대의 얼굴을 모르니 도통 짚이는 구석이 없다.
열심히 주변을 살펴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석민재 씨 맞습니까?”
느슨하게 여민 셔츠와 명품 벨트를 찬 헐렁한 바지.
목에는 금목걸이를 두 개나 건 데다, 애초에 범상치 않은 큰 체구만 봐도 어느 업종에 종사하는 분들인지는 대강 유추가 가능했다.
“누구시죠?”
“잠시 얘기 좀 하시죠.”
제일 작은 남자가 턱을 까딱이자 다른 남자 둘이 민재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저쪽이 두목인 것 같은데, 이러다 무슨 일 날 것 같아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더는 도망갈 곳도 없는데. 막힌 곳까지 닿을 즈음 등 뒤에서 누군가가 툭툭 치는 느낌이 들었다.
“민재?”
색이 연한 머리카락의 외국인이 민재의 이름을 불렀다.
아, 이 사람이구나.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등에 멘 가방을 바닥에 벗어두고서 가볍게 칸막이를 넘어왔다.
“내 짐 챙겨.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죽는다.”
누가 봐도 외국인인데, 한국말을 제법 잘하는 게 놀라웠다.
민재가 짐가방을 챙기는 사이 제일 가까이에 서 있던 두 겹 금목걸이가 외국인 쪽에 다가섰다.
“이건 또 뭐야?”
이대로 있다간 제대로 당할 것 같은데.
지나가던 사람들도 슬슬 수상한 남자들의 행동을 보고서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국인 쪽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묘한 포즈를 취하며 아예 싸움을 걸기 시작했다.
“덤벼봐. 이 여자를 가져가려면 날 먼저 무너트려야 할 거야.”
“이 양놈이 대체 뭐라는 거야?”
저 사람, 발음은 좋은데 아무래도 한국말을 잘못 배운 것 같다.
뭐라고 말려보려던 찰나 다행히 수상한 정황을 파악한 공항 안전요원들이 다가왔다.
“Sorry, I can’t speak Korean.”
아까까지 잘도 떠들었던 주제에.
거구의 남자들이 도망치는 사이, 외국인은 속사포처럼 영어를 쏟아내며 아예 알아듣지 못하는 척했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진무혁의 지인이라더니 이쪽도 평범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민재가 적당히 해명하는 사이 남자는 제 짐을 챙기기 바빴다.
이 일을 어쩐다, 고민하는 사이 무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도착했어?”
“그게 있잖아…….”
아무래도 조짐이 이상하다. 이대로 나갔다가 또 무슨 일이 나는 걸까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뭐라고 말을 다 할 틈도 없이, 외국인은 민재의 손에 들린 전화를 빼앗아 무혁에게 버럭 화를 냈다.
“자기는 고작 이런 것 때문에 날 버리고 한국까지 온 거야?”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뭐가 그리 불만인 건지, 외국인은 무혁과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고서는 연신 못마땅한 얼굴로 민재를 훑어봤다.
네가 그렇게 본다면 나도 그렇게 봐주마, 뭐 그런 심정으로 민재도 남자의 행색을 위아래로 살펴봤다.
무혁 못지않게 큰 키에 흩뿌리듯 풍성하게 떨어지는 묘한 색의 머리카락.
서구권 특유의 높은 콧대에 선이 굵은 남자는 연초록빛 눈동자를 빛내며 민재를 주시했다.
연한 색의 속눈썹이 무척 길어서 눈을 깜빡일 때마다 하늘하늘 움직였다.
이 남자 참 예쁘구나.
소영하가 강아지처럼 귀여운 타입이었다면, 이 남자는 오히려 고양이처럼 도도한 얼굴로 민재 쪽을 차갑게 노려봤다.
“바꾸래.”
전화를 겨우 다시 돌려받았다.
“무혁 씨.”
“많이 놀랐어?”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울고 싶은 심정인데, 그래도 무혁의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은 나아졌다.
“이상한 남자들이 자꾸 쫓아오는 것 같아.”
“괜찮아. 전화 가지고 이대로 공항 밖으로 나와. 5번 게이트 쪽으로.”
수상한 외국인과 함께 민재는 무혁의 지시대로 문밖으로 나왔다.
5번 게이트를 확인하고 왼쪽으로 돌자 거기에는 새빨간 스포츠카가 서 있었다.
“저거구나?”
뭐라고 말을 전하기도 전에 남자는 신나게 달려가 앞에 선 기사에게 차 키를 건네받았다.
“빨간 스포츠카 맞아?”
“괜찮을 거야. 날 믿어.”
진무혁은 믿을 수 있지만, 저 남자는 도저히 못 믿겠는데.
“야, 타!”
그러거나 말거나 저쪽은 벌써 운전석에 앉아 큰소리를 쳤다.
언제 또 누가 쫓아올지 몰라 민재도 일단 부랴부랴 차에 올랐다.
“그럼 가 볼까?”
앉자마자 액셀을 밟는 솜씨가 심상치 않다.
과연 무사히 집에 갈 수 있을까.
갑자기 휘몰아친 폭풍에 민재는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