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좋아하잖아. 나랑 나쁜 짓 하는 거.
젖은 머리를 닦으며 민재는 무혁을 빤히 바라봤다.
“내가 말려줄 테니까 이리 와. 피곤할 텐데.”
새로 바꾼 보송보송한 시트를 톡톡 두드리며 무혁은 어서 제 옆에 오라고 손짓했다.
“하여튼, 뻔뻔하다니까.”
누구 때문에 이렇게 피곤한 건데.
민재는 적당히 물기만 닦아내고서 곧장 무혁의 품에 몸을 던졌다.
아까는 그리도 심통을 부리더니 이제는 제법 흡족한지 꽤 여유가 생겼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의 심기를 살피며 민재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까 혜성 사모님이 물어보셨거든.”
“뭘?”
말을 꺼내자마자 그의 눈빛에 적의가 맴돌았다.
왜 저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건가 싶어서 민재는 오해를 풀 겸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그렇게 빨리한 건 아닌데, 왜 굳이 결혼을 서두른 거냐고 물어보시더라고.”
뭐라고 대답했을지 무혁은 이미 알고 있을 거였다.
사랑하는 할머니가 원했으니까.
민재가 굳이 이런 식으로 결혼을 택한 이유는 그것 외에는 없다 믿고 있을 터.
“그래서 내가 그랬지. 할머니 때문도 있긴 한데……. 내가 남편을 너무 좋아해서 한 거라고 말이야.”
오해를 계속 담고 있다가는 그가 더 상처받을 테니까.
무혁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다정하게 제 마음을 전해보려 애썼다.
“무거운 선물을 굳이 받아온 것도 당신 먹이고 싶어서 들고 온 거야.”
“민재야.”
평소에도 말주변이 없어서 그런지 속내를 말하는 게 무척 서툴렀다.
하지만 오늘따라 민재는 무척이나 어색하게, 하지만 열심히 제 마음을 표현해주려 애를 썼다.
“당신이 나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그러는 나도 당신을 참 많이 좋아하거든?”
“얼마나?”
“음, 굳이 따지자면 십 점 만점에 오만 점 정도?”
낑낑대며 자리에서 일어난 민재는 아직 물기가 다 가시지 않은 무혁의 머리를 꼭 껴안았다.
물방울이 뚝뚝 덜어져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민재는 사랑스럽다는 듯 그의 이마에 쪽쪽, 입을 맞췄다.
“난 어디 도망갈 생각도 없는 데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거야?”
다정한 물음에 무혁은 잠시 망설였다.
아마 민재는 모를 것이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 건지.
“아이가 생기면, 그 애라도 키우면서 버텨보려고 했지.”
“뭐라는 거야, 정말.”
“네가 날 버리면 난 또 외톨이가 될 테니까.”
담담한 무혁의 말에 민재는 대놓고 서운함을 드러냈다.
왜 자신을 못 믿느냐고 화를 내면서도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가득 번졌다.
“당신, 나 진짜 많이 좋아하는구나?”
“좋아한다는 말 정도로는 부족해.”
“그랬구나. 내가 그 마음을 몰라줘서 서운했구나.”
갖고 싶은 건 단 한 가지. 그것만 있으면 충분하다.
“내 아내, 참 예뻐.”
소중한 보석을 다루듯 무혁은 반짝이는 민재의 눈동자에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독점욕에 미쳐버릴 듯한 제 속을 알고 이러는 건지, 그녀는 굳이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응석을 모두 받아줬다.
“나만 봐. 나만 사랑해줘. 응?”
“걱정하지 마. 이미 임자 있는 몸인데 누가 날 건드린다고 그래.”
자꾸 애같이 군다며 민재는 무혁의 뺨을 슬쩍 꼬집기까지 했다.
몇 번이나 확인을 받고 나서야 그도 안심한 듯 겨우 미소를 되찾았다.
“난 너만 있으면 돼.”
“당신이 이러는 거, 남들은 알아?”
“그럴 리가.”
평소의 오만하고 얄미운 태도를 생각하면, 침대에서만 유독 이런 어리광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자신만큼이나 진무혁도 제 속내를 드러내는 데는 서툰 사람이니까.
민재는 그런 제 남편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그의 기분이 좋아진 걸 확인하고서 민재는 살며시 입을 열었다.
“내 부모님, 진지하게 찾아볼까 싶어.”
“왜?”
또 시작이구나.
상처받은 소년의 눈동자처럼, 그의 눈에는 벌써 대놓고 다 말하지 못할 서운함이 가득했다.
처음에는 민재도 친부모를 찾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홍 여사를 보고 내심 고민이 깊어졌다.
“내 부모님도 홍 사장님네 같은 사정이 있을 수도 있잖아.”
“나로는 부족해?”
“그런 거 아니라니까.”
겨우 달래놓은 무혁의 얼굴에서 다시금 미소가 사라져버렸다.
남들은 이런 모습을 정말 상상도 못 할 테지만, 무혁은 민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생전 안 부리던 어리광까지 부리기 시작했다.
“나는 싫어. 그 가족이 널 빼앗아가는 건 더더욱 견딜 수 없어.”
“아직 찾은 것도 아닌데. 질투하는 거야?”
너무나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민재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원래는 정말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대놓고 싫은 티를 내는 걸 보면서 민재는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있잖아. 그날 기억나?”
“어느 날?”
“우리 처음으로 잤던 날.”
사귄 지가 반년이 넘었는데, 진도라고는 고작해야 키스가 전부였다.
애지중지 공주님처럼 대해주면서도 무혁이 손끝 하나 대지 않아서 폭발한 민재가 먼저 그의 오피스텔로 쳐들어갔다.
“그땐 대체 무슨 용기였나 몰라.”
“……기억 안 나.”
“뭐? 정말 기억 안 나?”
막무가내로 달려가서는 억지를 부렸는데 하필이면 그게 진무혁의 인내심 버튼을 눌러버렸다.
제법 예뻤던 추억으로 기억하는 민재와 달리 무혁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둘 다 처음이라 마음만 앞섰던 탓에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는 기억이다.
안아달라고 박박 우겼던 주제에 민재는 너무 아프다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한테 그랬었잖아. 책임질 거라고, 결혼하면 엄청 잘해 줄 거라고 호언장담 했으면서.”
우는 걸 달래느라 정말로 할 소리 못 할 소리를 다 했었는데.
돌이키고 싶지 않은 흑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민재는 그때의 진무혁을 무척이나 그립다는 듯 추억했다.
“그땐 진짜 순진하고 귀여웠는데 어쩌다가 이런 짐승이 됐을까?”
“그런 말을 할 힘이 남을 걸 보니 아직 짐승 맛을 덜 본 모양이네.”
슬쩍 입맛을 다시며 무혁은 무방비한 민재를 데려와 눕혔다.
머리카락, 눈썹, 코, 입술, 귓불까지.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민재의 입에선 자꾸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간지러워.”
“좋아하잖아. 나랑 나쁜 짓 하는 거.”
이제는 부부니까 딱히 나쁜 짓도 아닌 것 같은데.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할 밑바닥조차 무혁의 앞에서는 모조리 내보일 수밖에 없다.
“나쁜 짓 하는 거 좋아. 너무 짜릿해.”
“더 나쁜 짓도 얼마든지 가르쳐 줄 테니까, 다른 데로 눈 돌리지 마.”
환한 달빛 아래에서 침대가 삐걱거렸다.
채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등줄기로 무혁의 입맞춤이 이어졌다.
“무혁, 무혁 씨…….”
“아직도 내 이름을 부를 여유가 있는 모양이네.”
한계까지 치달을 때면 슬프지도 않은 데 자꾸 눈물이 났다.
어쩐지 짓궂은 그는 침대에서 민재를 울리는 걸 유독 즐겼다.
“그, 그마안…….”
“응? 뭘 그만하라는 건지 모르겠어.”
말을 할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민감한 몸을 달궜다.
헤어나지 못할 늪처럼 민재는 두 눈을 가린 채 무혁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러니까…….”
굳이 제 입으로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드는 저 남자가 대체 어쩌면 좋을까.
온몸에 제 입술 자국을 새기려는 것처럼, 무혁의 집요한 장난은 저 달이 질 때까지도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법무법인 A&Z 회계팀 소속 오영지 대리는 요즘 들어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그녀는 가끔 틈이 날 때마다 절친한 친구 석민재의 남편인 진무혁에 대해 알아보곤 했다.
“그러니까, 법대 시절부터 여자 만난단 소리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지?”
“그렇다니깐. 민재 씨가 나타나기 전에는 진짜 소문이 너무 없어서, 다들 조원식 딸 때문인 줄 알았다니까.”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지성, 거기다 누구의 앞에서도 꺾이는 법이 없는 더러운 성질머리까지.
법대 재학 시절부터 진무혁은 지금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온 듯했다.
그런 사람이 왜 굳이 석민재에게 그토록 매달린 건지는, 서원대 법대 내부에서도 해결되지 않을 칠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악명이 높았다.
“그럼 진 변호사님한테 민재 씨가 첫사랑이란 거네?”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근데 솔직히 너무 성인군자 같아서 막상 까보면 또 어떨지 모르지.”
민재를 질투하는 몇몇은 여전히 두 사람의 쇼윈도부부 설을 밀고 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민재의 몰골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그 가설은 일찌감치 폐기해야 마땅했다.
“안녕, 오 대리.”
“왜 이렇게 사람이 다 죽어 가는 거야?”
출근은 어떻게 한 건지 민재는 유독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안 하던 하품에 기지개까지 켜는데 언뜻 블라우스 틈 사이로 야릇한 흔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흐응, 하여튼 좋을 때라니까.”
“내, 내가 뭘?”
“키스 마크 다 보이거든? 언제는 손도 안 댄다고 투덜거리더니, 아주 꿀 같은 밤을 보내셨나 보네?”
펜으로 옆구리를 쿡쿡 찌를 때마다 간지럽다며 민재는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안 웃기로 소문난 사람이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나사가 빠져서 웃고 있는 것만 봐도 두 사람이 쇼윈도라는 가설은 응당 폐기해야 마땅하다.
“남편이 그렇게 좋아?”
“좋긴 한데. 조금은 걱정이야.”
“또 뭐가?”
나사가 반쯤 빠진 민재와 달리 진무혁은 평소와 다름없이 분주하게 회의를 다니며 다음 재판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엄밀히 말해 변호사라곤 해도 지금 진무혁이 맡은 건 소송보다는 주주총회를 대비한 법리적 다툼이 컸다.
그러다 보니 A&Z 내부에서도 인수·합병 쪽으로 경력이 많은 변호사 위주로 투입해 무혁과 합을 맞추고 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다는 게 꼭 저런 거구나 싶어. 어떻게 저렇게 대단한 사람들 앞에서도 기죽는 법이 없어.”
“원래 저랬어. 그이가 원래 남 눈치 같은 건 안 보는 사람이거든.”
“그래?”
곧 회의가 끝나고 변호사들은 다들 바쁘게 다음 스케줄로 이동하기 바빴다.
재판이 있는 사람들이 먼저 나가고 무혁은 마지막으로 내용을 취합해 회의실을 나왔다.
“민재야.”
“끝났어?”
“응, 여기는 어쩐 일이야.”
금방이라도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달달한 목소리에 오 대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 업무적인 태도로 일관할 때는 저 정도로 티를 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무혁은 대놓고 민재의 허리에 손을 감고서 노골적으로 제 소유욕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유난히 웃음이 많아진 석민재만큼이나 진무혁 역시도 민재가 앞에 있을 때면 유독 눈매가 부드러워지곤 했다.
참 신기한 커플이다. 소영하 일을 알고 있었던 오 대리도 사실 진무혁이 그다지 미덥지 못했다.
그렇게 갑자기 결혼했으니 잘 살 수 있을까 내심 염려했는데.
저토록 사이가 좋은 걸 보면 그건 완벽한 제 기우였다.
“오늘 점심 같이 먹을까? 오 대리도 같이 먹을래?”
“함께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진심으로 권하는 민재와 달리 진무혁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입으로는 권하고 있지만 그다지 함께 가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하다.
“저는 괜찮아요.”
그런 자리에 눈치 없이 낄 정도로 둔한 사람은 아니다.
본인은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 오 대리는 진무혁이 아직 어려웠다.
민재에게만 다정했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다지 상냥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그럼 다음에 같이 식사하자.”
아직은 업무 시간이니 민재가 먼저 위층으로 올라갔다.
서둘러 회계팀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뒤에 서 있던 무혁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오 대리님.”
“네?”
“잠시 여쭤볼 게 있습니다만.”
분명 눈치껏 피해드렸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자신을 부르는 걸까.
웃음기 하나 없는 무표정한 얼굴만 봐도 역시 좀.
‘무서워.’
석민재만 모를 뿐이지, 그의 악명은 이미 입 가벼운 문성희 변호사 덕분에 A&Z 내부에 다 퍼진 지 오래였다.
그 안 팀장조차도 진무혁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것만 봐도 예사 사람은 아니다.
“무슨 일이시죠?”
“소영하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이걸 뭐라고 하면 좋을까.
오 대리는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며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뭐, 우리나라에 소영하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대충 웃어 넘겨보려고 했는데도 저쪽에는 씨알 하나 먹히지 않는다.
어물쩍 넘기기는 그른 모양인데, 어쩐지 독 안에 든 쥐가 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어쩌다 알게 된 거긴 한데,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어요.”
“지난번처럼 또 연락 주시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요.”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지, 설마 하며 기억을 더듬다 문득 떠올랐다.
소영하가 생방송에서 미친 소리를 떠들었던 날 밤.
‘설마 들은 건가?’
어떻게든 알려줘야 한단 생각에 부랴부랴 전화를 건 건데, 아무래도 진무혁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어차피 제가 알 정도면 온 세상 사람이 다 떠드는 일일 텐데요?”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오 대리님께서는 민재의 소중한 친구시니까요.”
분명 친절한 말투인데 안에는 가시가 가득 돋았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소리 같지만, 그렇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뭐라고 받아치면 좋을까. 괜히 시선을 피하다 폰에 속보가 떴다.
“근데 진무혁 변호사님이 지금 저한테 이러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오 대리는 속보를 화면에 띄워 그의 앞에 내밀었다.
[혜성 가의 실종된 딸, 성아린 기자회견.]
성준범과 나란히 선 여자는 얼핏 봐도 민재와 무척 닮아 보이는데.
어느새 A&Z 내부에서도 곧 소란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