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54화 (54/103)

54화. 난 네가 싫어하는 일은 못 해.

“안 무거워? 이리 줘, 내가 들게.”

“괜찮아.”

힘 세다는 걸 자랑하려는 건지 무혁은 여지 하나 주지 않고 집까지 혼자서 그 많은 걸 모두 가져왔다.

“복숭아는 줘. 이건 내 거야.”

다른 건 다 넘기더라도 민재는 복숭아만은 꼭 껴안고서 절대로 넘겨주지 않았다.

“갑자기 웬 복숭아야?”

“혜성 사모님이 이만큼이나 싸주셨지 뭐야. 심부름 값은 제대로 받았지.”

“혜성 사모님?”

달갑지 않은 무혁의 심정도 모르고 민재는 집에 도착해 산더미 같은 짐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것 좀 봐. 한우에 멜론까지 있어.”

“거기는 왜 간 거야?”

싱글벙글 웃는 민재와 달리 무혁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단순히 서류를 전달한 거라고 해도 그는 어쩐지 홍 여사의 호의가 그리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어?”

“이리 와.”

냉장고 정리를 채 마치기도 전에 몸이 붕 하고 허공에 떠올랐다.

뭘 그리 서두르는 건지 무혁은 양복이 구겨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서 민재의 블라우스 단추를 서둘러 풀어나갔다.

웃고 있는 민재와 달리 무혁은 조금도 웃지 않고 있다.

“무슨 일 있었어?”

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리도 심각한 건지. 민재는 달래듯 무혁의 뺨에 손을 얹고 애써 그의 심기를 살폈다.

“무서워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입술을 삼켜버렸다.

오늘따라 조급하게 구는 무혁의 손에 새 스타킹이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다.

침대까지 채 닿기도 전인데, 민재는 벽을 짚고 가는 신음을 삼켰다.

오늘따라 유독 애가 마른 무혁은 집요할 정도로 민재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진무혁이 무서운 것도 있어?”

“많지.”

뭐라고 말을 더 이어나갈 틈도 없이 무혁의 공세가 시작됐다.

어지러운 열기만이 가득한 채 민재는 애꿎은 입술을 가득 깨물었다.

대체 뭐가 그리도 두렵길래 이러는 걸까.

민재가 달아날까 겁내는 사람처럼 무혁은 뒤에서 꼭 껴안은 채로 조금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프잖아.”

“많이 아팠어?”

어깨에 잇자국이 제대로 남았다.

슬립만 걸치고서 민재는 애교를 부리는 무혁을 잔뜩 흘겨봤다.

“그래서, 대체 이런 이유가 뭐야?”

집에 들어서자마자 짐승처럼 달려든 것도 모자라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보니 벌써 새벽 두 시가 넘었다.

집요하게 자신에게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있었단 건데.

무혁은 입을 꾹 다물고서 못된 욕심을 채우기 바빴다.

“다리 들어줘.”

“싫어. 만지지 마.”

“만지게 해줘. 응? 미칠 것 같아.”

“대체 왜 이리 진짜?”

이쯤이면 질릴 때도 됐는데. 무혁은 무슨 사춘기 소년처럼 민재에게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귀찮아서 저리 가라고 밀어내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천하의 진무혁이, 여자 품에서 이러고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까.

“검사복 입고 있을 때는 진짜 멋있는데. 이러고 있으니 완전 애야, 애.”

“아마 저쪽 방에 아직 있을 텐데. 입고 올까?”

“됐네요.”

그 얘기가 그 얘기가 아닌데.

무혁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서 민재의 등줄기를 손으로 훑었다.

“솔직히 실토하는 게 좋을 거야.”

“뭐, 뭘.”

“내가 이러는 거 좋아하잖아.”

“내, 내가 언제!!!”

사람과 살결이 닿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무혁과는 조금 다르긴 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따뜻해서 주말이면 온종일 그에게 안겨 어리광을 부린 적도 있었다.

향수의 향기도 진무혁의 체향과 섞이면 이상하게 가슴이 설렜다.

괜히 킁킁거리며 그의 가슴팍에 한참 코를 박고 원인을 알아본다고 한 적도 있긴 했다.

“좋아하잖아. 내 살 냄새.”

“그, 그런 적 없어.”

“난 좋아하는데. 우리 민재 냄새.”

굳이 그런 말을 하면서 왜 입맛을 다시는 걸까. 저리 가라며 발버둥을 쳐보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씻을래?”

“응.”

민재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혁은 욕실로 가 더운물을 틀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민재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겼다.

따뜻한 물과 배스 밤의 향기.

진무혁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누워 있자니 정말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방, 이제 슬슬 합쳐도 되지 않을까?”

“잠든 아내가 방심한 틈을 타 몰래 쳐들어오는 것도 제법 즐겁긴 한데.”

모처럼 큰맘 먹고 한 제안인데 무혁은 음흉한 얼굴로 민재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자는 것만 봐도 즐겁긴 하거든. 밤새도록 봐도 하나도 안 질릴 정도로.”

어쩐지 위험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이 남자가 그동안 관심이 없는 건 전혀 아니었다는 걸.

“그동안 대체 어떻게 참은 거야?”

“난 네가 싫어하는 일은 못 해. 지금은 좋아하는 거 아니까 마음껏 하는 거고.”

그러면서 또 은근슬쩍 손을 뻗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이렇게 힘이 넘치는 건지.

성인군자인 줄 알았던 진무혁도 해가 지고 나니 그저 한 마리 늑대일 뿐이었다.

“그래서. 아까 그건 왜 그런 건데.”

젖은 머리를 빗어 넘겨주며 무혁은 민재의 질문에 뭐라 답할지 고민했다.

제 두려움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어느새 몸을 틀어 제 위에 걸터앉은 민재의 모습이 더없이 아찔하다.

촉촉이 젖은 뺨에 손을 얹고서 무혁은 대답 대신 입을 맞췄다.

“말하면 상처받을 거면서.”

“괜찮아.”

“진심이야?”

겁쟁이였던 주제에. 민재도 더는 눈도 피하지 않고 무혁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렇게 올곧은 눈을 하고 있으면 나쁜 마음을 먹기도 어렵다.

무혁은 어쩔 수 없이 솔직한 제 마음을 털어놓았다.

“네가 없는 몇 년은 정말 지옥에서 사는 기분이었는걸.”

소영하의 존재만으로도 질투심에 돌아버릴 것 같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이미 파투가 났으니 망정이었지, 만약 정말로 그 남자와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었다면.

아마 그때는.

제 두 손으로 무슨 짓까지 하게 될지 그 자신조차도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질투했어?”

“질투해. 네 눈길이 닿는 모든 사람이 미치도록 부럽고 미워져.”

이제 퇴물이 된 소영하 따위보다는 홍 여사 쪽이 훨씬 더 무섭다.

미국에서 처음 홍 여사를 봤을 때는 무혁조차도 좀처럼 놀라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나는 네 가족이 되고 싶었어.”

민재에게 가족은, 고작 연인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한 존재니까.

그러니 헤어지고 마는 애인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결혼을 택했다.

하나뿐인 가족이 된다면 민재의 사랑을 독점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는데, 이런 치졸하기 짝이 없는 독점욕을 어찌 다 내보일까.

“그러니까 어서, 우리 아이를 갖고 싶어.”

돌리고 돌려서 말하니 아마 제 진심의 절반도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심각한 무혁의 마음도 모르는 채 민재는 참방참방 물장구를 치며 그의 배 위에 앉아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금방 생기는 거 아닐까?”

“부족해.”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 민재 때문에 무혁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다시금 파고드는 손길에 앙탈을 부려보지만, 수증기가 가득 찬 더운 욕실 안에는 어느새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

홍 사장을 만난 후로 김 기자는 유독 기분이 좋았다.

사장실에서 직접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스타커넥트의 데스크에서는 전부 다 네가 알아서 하라며 아예 손을 뗐다.

콧노래를 부르며 극비리에 작성한 기사의 타이틀은 <스타의 위험한 밤놀이>.

헤드라인부터 완벽하게 소영하를 저격하는 내용이었다.

굳이 그가 숨통을 끊어놓지 않아도 요즘 들어 유흥가 출입이 잦아진 덕분에 사진 제보도 여럿 입수했다.

만약 이 기사가 나간다면 소영하가 아무리 대단한 스타라도 적잖은 충격을 받을 터.

그 반반한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질 걸 생각하니 벌써 입이 찢어질 것처럼 웃음이 났다.

“김 기자. 누가 찾는데?”

“지금 바빠. 돌려보내.”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굳이 그를 만나야겠다며 성화를 부렸다.

대체 어느 대단하신 양반이기에 여기까지 찾아와 성화인 건지.

얼굴을 보자마자 욕부터 퍼부어주려고 했는데 체구가 자그마한 여자는 말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간 금방 쓰러질 것처럼 한없이 여려 보였다.

“김 기자님이시죠?”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만 청초함은 숨길 수 없다.

트렌치코트 아래에 입은 레이스 원피스에 긴 생머리를 늘어트린 가련한 여자는 얼핏 보기에도 무척 미인으로 보였다.

연예인인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고.

뒤에 정장 입은 여자를 둘이나 달고 왔는데, 가슴에 달린 배지를 보니 둘 다 변호사인 것 같았다.

“누구시죠?”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조장미라고 해요.”

선글라스를 벗으며 여자는 배시시 눈웃음을 쳤다.

뒤에 선 변호사들이 각자 법무법인 조조 명의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뭡니까, 이건?”

“고생하신다는 의미에서 기부금을 좀 넣었어요.”

“법 바뀐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런 걸 주십니까?”

법무법인 조조 명의의 봉투 안에는 얼핏 봐도 두둑해 보이는 오만 원 권이 가득 들어 있다.

저런 걸 잘못 받았다가는 당장 감방에 갈지도 모르는 데.

어설픈 유혹에 넘어가 제 밥줄을 끊을 만큼 하수는 아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소영하를 치려는 걸 알고 HS엔터 쪽에서 직접 작업이 들어온 모양이지만 고작 돈 따위에 넘어가기에는 그동안 쌓인 원한이 컸다.

진작에 내보내려던 특종을 이토록 오래 손가락만 빨아야 했으니까.

화가 단단히 난 김 기자를 두고 장미는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 이런 건 어떨까요?”

아직 던질 미끼가 남았다는 것처럼 조장미는 돈봉투를 거두고 다른 봉투를 꺼내 들었다.

“뭡니까, 이건?”

“보시면 알게 되실 거예요.”

특별한 선물이라는 것처럼 굳이 생색을 내는 저 자신감의 근원이 뭔지.

심드렁하게 봉투를 열어본 그도 내용을 보고 적잖은 충격에 빠졌다.

“이, 이건…….”

“말 그대로. 제일 먼저 기사를 낼지 말지 선택권을 드릴 테니 우리 소영하 씨 기사는 조금만 미뤄 달란 거예요.”

“이런 걸 나한테 줘도 되는 겁니까?”

일급 기밀 도장이 몇 개나 박혀 있는 문건임에도 불구하고, 장미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기자에게 넘겼다.

먹으면 죽는 독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맛있어 보인다.

아마 이게 세상 밖으로 나가면 오히려 성준범이 불리해질 텐데도, 해맑게 웃고만 있는 조장미 속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쪽은 소영하의 편입니까, 아니면 성준범 이사 편인 겁니까.”

“굳이 따지자면 석민재 씨의 안티겠죠.”

“안티?”

“그 여자가 내 약혼자를 빼앗아갔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예전 석민재의 약혼자에 대해서도 조사한 적이 있긴 했다.

진무혁. 수습 시절부터 제법 악명이 높았던 그는 검찰 내부에서도 골치 아픈 사건들만 도맡아 해결하며 단숨에 유명인사가 됐다.

조조의 뒷배를 업고 들어온 거라며 미운털이 박혀서 일부러 안 될 건만 골라서 줬다는 모양인데.

A&Z를 비롯해 유수의 변호사들에게 모조리 물을 먹인 장본인이라고 했다.

‘그쪽도 분명 이상하긴 했지.’

검찰을 그만두고 유학을 다녀와 조조로 갈 거란 예상과 달리 진무혁은 대학 시절 애인이었던 석민재와 결혼했다.

A&Z에서 아예 작정하고 로비를 한 게 아니냐는 유언비어까지 돌 정도로 그 과정 안에는 수상한 점이 많긴 했다.

“정말로 빼앗긴 거라고 확신합니까?”

“어라, 지금 나까지 적으로 돌리려는 거에요?”

장미는 화사한 미소 뒤에 독기를 가득 품었다.

일부러 화내라고 긁어본 거긴 한데 오히려 웃는 걸 보니 이쪽도 만만치는 않아 보였다.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그냥 확인차 물어보는 거지.”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데.

어떤 의미로는 그 홍옥자보다 더욱 까다로운 상대다.

일단 김 기자는 한 발 빼고서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그러니까 내 말은 왜 굳이 그렇게 석민재를 문제 삼느냐는 말이지요.”

“우습잖아요? 이 모든 일이 고작 석민재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났다는 게.”

소영하도. 진무혁도. 조원식도. 성준범마저도 석민재만 없었다면 일이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거라고.

조장미는 조목조목 예를 들어가며 지난 일들을 되짚었다.

“석민재가 그 난리만 치지 않았다면 무혁 오빠가 A&Z로 갈 일도 없을 테고, 소영하와 성준범 이사가 틀어질 일도 없었겠죠.”

“그거야 그렇죠.”

“우리 아빠가 그렇게 고생할 일도 없을 거고. 무혁 오빠도 얌전히 나랑 결혼해서 조조를 이으면 됐을 테니까요.”

명분은 그럴싸하다.

그러니 모든 건 석민재가 악의 축이란 건데.

“석민재가 홍옥자 사장까지 홀려서 쥐락펴락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난 그저 그 영악한 여자 손에 속고 있을 우리 무혁 오빠가 가엾을 뿐이에요.”

이야기를 쭉 들으며 김 기자는 결론을 내렸다.

‘제정신이 아니군.’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상황을 끼워 맞추는 걸 보니 길게 대화를 섞을 상대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걸 받는 대신 소영하 기사 미뤄달라는 겁니까?”

“어차피 기자회견은 내일 오전이니까 그때까지만 엠바고 지켜주시면 돼요.”

기사는 모두 완성되어 있지만, 만약 이게 터진다면 고작 소영하 건 따위는 다른 기사에 휩쓸려 떠내려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럼 이렇게 하죠.”

이러나저러나 자신이 손해 볼 건 없다.

이 여자 말대로 내일 성준범 쪽에서 기자회견을 하게 된다면, 그는 누구보다 빨리 조장미가 넘겨준 자료를 기사화하면 될 터.

하지만 기자회견 사실이 거짓이라면.

그 역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영하의 자료를 모두 풀어버리면 그만이다.

“계약 성립이네요.”

장미는 기꺼이 먼저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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