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52화 (52/103)

52화. 어서 오세요. 석민재 씨.

“어젠 죄송했어요. 몸이 좀 안 좋아서, 하루 푹 쉬고 나니 이제 괜찮습니다.”

“……몸이 안 좋다, 이거지?”

꾀병이라는 건 진작 눈치챈 건지, 안 팀장은 대놓고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서 민재에게 괜히 심통을 부렸다.

“제가 없어서 불편하셨어요?”

“됐어. 진무혁이고, 홍 사장이고. 왜 다들 널 못 빼앗아가서 안달인 건지.”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투덜거리는 말에 절로 웃음이 났다.

진무혁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홍 사장은 또 무슨 일인 걸까.

“왜 그러세요?”

“그건 됐고 심부름 하나만 해. 무혁이 놈 회의 들어간 사이에 잠깐만 이거 홍 사장한테 전해주고 와.”

아마 진무혁이 알면 또 같이 가든 뭘 하든 달라붙을 테니까.

안 팀장의 말뜻은 적당히 알아들었다.

알겠다고 대답하기 무섭게 대기 중이던 홍 사장의 운전 기사가 민재를 데리러 왔다.

“사장님께서 어제부터 줄곧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가시죠.”

“무슨 일이 있나요?”

“가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어디로 가는 건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민재는 가방을 챙겼다.

복도를 걷던 중 다른 변호사들과 회의 중인 무혁의 옆모습이 얼핏 보였다.

이제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눈으로 살짝, 인사를 주고받는 것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다.

[팀장님 심부름 좀 다녀올게.]

홍 사장에게 간다는 사실을 적을까 말까 고민하다 지워버렸다.

만약 그 얘기까지 하면 괜히 또 걱정할 것이다.

‘바보.’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뭐가 저렇게 걱정인 걸까.

민재가 복도에 보이는 순간부터 무혁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을 쫓고 있다.

이렇게 알아보기 쉬운 걸 그동안은 왜 몰랐던 걸까.

어서 집중하라고 손짓을 하면서도 민재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가시죠.”

홍 사장이 보내준 차에 몸을 싣고서 민재는 문득 회사 건물을 올려다봤다.

분명 금방 돌아올 텐데, 그토록 지겹게 매일 본 건물임에도 오늘은 어쩐지 낯설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오늘은 금방 이야기가 잘 끝나야 할 텐데.

서류 봉투를 꼭 안은 채 민재를 태운 차는 속도를 높여 어딘가로 향했다.

***

서울에 올라오고 소영하의 스케줄은 대부분 취소됐다.

매니저의 관리가 소홀해진 틈을 타 여기저기에서 소영하의 목격담이 들려왔다.

“이렇게 노는 게 대체 얼마 만이야.”

“그랬었나?”

독한 술과 화려한 조명. 요란한 음악 소리와 매캐한 공기까지.

강남에서도 손꼽히는 클럽에 소영하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그를 보러 온 사람들이 넘쳐났다.

당연한 일이다.

오직 그가 얼굴을 비친 것만으로도 원하는 것들은 뭐든 다 제 앞에 놓인다.

술, 여자,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

자신을 이토록 빛나게 하는 모든 것이 이토록 손쉽게 손에 들어왔다.

제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쉽사리 얻을 수 없었던 건 단 하나, 석민재뿐이었다.

“오늘 잘 마시네.”

“오랜만이라서 그렇지 뭐.”

예전에 꽤 가깝게 지냈던 여자는 여전히 클럽판을 떠나지 못했다.

아는 얼굴도 있지만 모르는 얼굴이 더 많은데 태도는 모두 똑같다.

톱스타인 그를 선망하는 눈길이 쏟아지건만.

아무 흥미도 가지지 않는 그 여자가 이상했던 거다.

“그러게. 이렇게 잘 놀면서 왜 그렇게 몇 년이나 코빼기도 안 보였던 거래?”

“여자친구가 싫어했거든.”

석민재는 함께 했던 시간조차 부정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석민재는 엄연한 제 여자친구였다.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여자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문제인 건지.

그저 신기했던 것뿐.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제 주변 여자 연예인들에 비하면야 외모도 별로고 성격조차 무뚝뚝하기 그지없다.

요리도 못하고, 잔소리만 많고 하나같이 성가신 여자.

“젠장.”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지만, 석민재의 미소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잘 웃지도 않는 주제에, 담배를 끊었을 때 그 여자는 처음으로 자신을 보며 참으로 보기 드문 미소를 보여줬다.

- 거봐요. 하려면 할 수 있잖아.

정말로 대수롭지 않은 칭찬이지만 그 여자가 해줘서 더 귀한 칭찬이었다.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날부터 석민재의 말이라면 뭐든 다 들었다.

매니저들도 듣기 싫어하는 투정도 민재는 몇 시간이나 진지하게 들어줬다.

그 눈동자가 예뻐서 평소에는 하지 못할 얘기들도 술술 다 풀었다.

- 고생이 많네.

사소한 것까지 잊지 않고 챙겨주고 가끔은 자괴감에 빠진 자신을 위로해줬다.

약한 사람에게는 다정한 여자니까.

입이 무거운 그녀에게만은 제 약점도 모두 드러낼 수 있었다.

다른 배우는 다른 배우들이고, 소영하는 소영하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포스트 한규원을 꿈꾸며 찍은 첩보물은 장렬히 망했다.

성준범 이사가 얼마를 퍼부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망할 수 있냐는 말이 나올 만큼 처참한 결과였다.

- 당신은 멋있다기보단 귀여워. 그런 점을 잘 살리면 좋을 것 같아.

그래서 민재의 조언대로 차기작은 로맨틱 코미디로 잡았다.

연하남 콘셉트로 촬영한 영화가 대박이 나고 그 작품은 소영하의 대표작이 되어 주었다.

연기에 탄력이 붙은 것도 분명 그즈음부터였다.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는데 연기에 무게감이 생겼다는 칭찬도 처음 들었다.

“너희 내 작품 본 적은 있어?”

“CF는 많이 봤지, 카레의 왕자!”

그럼 그렇지. 실소를 머금고 소영하는 입을 다물었다.

배우라는 직업에 대단한 직업의식을 가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석민재를 만나고 연기에도 조금씩 재미가 붙었다.

그를 만난 게 자랑이라며 오늘 처음 본 여자는 다짜고짜 폰부터 들이밀었다.

“찍지 마.”

“사진 하나 찍는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고작 며칠 만에 뭐가 그리도 거슬렸는지 금방 깨달았다.

다들 꺼지라며 내보내고서 소영하는 홀로 남아 술잔을 들이켰다.

이제는 제법 배우로도 자리를 잡았으니, 석민재와 결혼하는 것과 별개로 충분히 잘해나갈 자신이 있었는데.

“거지 같네.”

회사에서는 한사코 소영하를 배우가 아닌 상품으로 취급했다.

매몰차게 냉대하는 성준범 이사의 태도가 어쩌면 자신을 버린 석민재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결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건 제 쪽이었으니 석민재도 서운했을 것이다.

그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성준범 이사가 이리도 쉽게 자신을 버릴 줄은 몰랐다.

석민재와 자신을 갈라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급도 안 되는 새파란 신인을 가져다 제게 와야 할 일까지 모조리 넘겼다.

그토록 석민재는 안 된다고 한 이유가 뭔지.

회사 사람들은 누구 하나 알려준 적이 없었다.

요새 홍 사장이 데리고 다니는 여자가 혜성 사모님이랑 똑같이 생겼다며?

친엄마는 엄청나던데. 자기 아들 판 덕분에 벌써 강남에 빌딩이 몇 채야?

그래서 홍옥자가 그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건가? 안 그래도 성준범이…….

말을 하다 말고 힐끗 소영하 쪽을 쳐다보는 속내가 뭐겠는가.

처음에는 자신을 위해 그러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정말로 성준범 본인의 사적인 감정이 섞인 거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을 비웃으며, 민재를 감싸던 홍 사장의 태도가 분명 이상하긴 했다.

제대로 말려든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성준범 이사 때문에 제대로 꼬여버린 걸지도 모른다.

밀려드는 배신감에 헛웃음이 절로 났다.

계약 기간이 언제 까지더라. 법 문제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의 인맥에 짚이는 구석이 없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가 있었지.’

도저히 못 믿을 제게 그나마 제대로 된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하나 뿐이었다.

소영하는 제 폰을 뒤져 조장미의 번호를 찾았다.

***

피곤이 밀려와서 깜빡 잠이 들었다.

‘홍 사장님을 보러 가고 있었지.’

민재는 미간을 찌푸리고서 주변을 둘러봤다.

어쩐지 주변 풍경이 낯설다.

“여긴…….”

“사장님 지시 사항입니다.”

오늘은 수정일보 본사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모양인데.

무혁에게 전화할까 말까 망설이다 조심스레 폰을 내려놨다.

‘나한테 해코지를 하진 않을 거라고 했었지.’

진무혁이 소개해준 사람이니까 조금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참아보기로 했다.

악의가 있다면 그때 한발 뒤로 물러나도 늦지 않다.

‘무혁 씨.’

이제는 정말 믿는 구석이 생겨서 그런지 무엇도 두렵지 않다.

이것도 분명 별일은 아닐 테지만 그냥 괜히 또 진무혁이 보고 싶어졌다.

- 사랑해, 민재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여줄 때마다 전율이 일었다.

황홀했던 그날 밤의 기억에 괜히 자꾸 웃음이 났다.

이제는 진짜 남편이 된 거니까 불안함 같은 건 모두 눈녹듯 사라져버렸다.

고작 며칠 사이에 애틋함이 몇 배나 자라나 버려서, 이젠 정말 그 사람 없인 안 될 것 같은데.

너무 푹 빠져버린 제 모습이 무척 낯설기만 했다.

“도착했습니다.”

고급 주택들이 늘어선 후에야 차가 멈췄다.

입구에는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아주머니 몇 명이 나와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민재가 차에서 내리자 아주머니들은 깜짝 놀란 얼굴로 민재를 바라봤다.

또 닮아서 이러는 걸까 이제는 이런 반응도 금방 익숙해졌다.

“사모님. 도착했습니다.”

내부에서 무전기를 쓰기에 뭔가 싶었는데 아담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지 넓은 정원이 펼쳐졌다.

가든파티를 열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넓은 저택만 봐도 이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한참을 걸어간 후에야 겨우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실내화까지 갈아신고 복도를 따라 들어서자 응접실 너머에 앉은 사람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석민재 씨.”

혜성 사모님이 이 사람이었구나.

생판 남이라는 게 신기할 정도로, 창백한 얼굴의 중년 여자는 제 얼굴과 거울처럼 닮아 있었다.

***

안 팀장은 심기가 불편했다. 석민재가 없어진 공백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컸다.

첫인상은 정말로 별로였다.

내로라하는 업계 고인 물들도 까다로운 안 팀장에게는 학을 떼는데 어색한 정장 차림을 한 사회 초년생이 어찌 버틸까.

아무리 진무혁의 부탁이었다고 해도 마음에 안 들면 그대로 잘라버리려고 했었다.

- 이걸 지금 일이라고 해 온 거야?

자존심을 가루로 만들 만큼 모진 말을 쏟아부어도 돌부처 같은 석민재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 수정 사항 반영하겠습니다.

버티고 또 버티는 걸 보니 오기가 생겨서 일부러 더 모질게 대해봐도 석민재는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사이코패스인가. 처음에는 정말 감정이 없는 기계인 줄만 알았다.

진짜로 어딘가에 하자가 있는 앤가 싶었지만 그래도 일은 곧잘 하니 별문제가 없다고 여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말이 없으니까.’

안 팀장도 원래 누군가의 사생활에 대해 먼저 묻는 일이 없었으니 자연스레 서로가 충돌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보내온 세월이 벌써 칠 년이다.

“민재는 어딨습니까?”

회의가 끝나자마자 진무혁은 대뜸 제 아내부터 찾고 나섰다.

“심부름 보냈어. 좀 이따가 올 거야.”

따지고 보면 진무혁과 만났다는 기간보다 제 쪽이 훨씬 오래 석민재를 지켜봐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걸 떠맡아서는 이제는 어딜 보내도 걱정 없게 키워놨더니.

이제는 진무혁 손에 빼앗기게 된 이 상황이 적잖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석민재가 그 새끼한테 다시 돌아갈 일은 없나 보네.”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헤어진 줄 알았다.

상대가 상대다 보니 미리 결혼에 대해 언질을 준 거였겠지만, 뒤에서 석민재가 그 고생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제 뒤치다꺼리만으로도 충분히 스트레스를 받을 텐데, 소영하의 입맛대로 휘둘리는 부하 직원을 보니 적잖이 속이 뒤틀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진무혁 역시 코웃음을 치며 부정했다.

애초에 온순함과는 거리가 먼 놈인데, 저리도 얌전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다들 속았을 것이다.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만 해도 회사 내에서는 이 모든 게 쇼가 아니겠냐는 소문이 은연중에 돌았다.

하다못해 안 팀장조차도 조원식을 엿 먹이려고 일부러 저러는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진무혁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진지했다.

“그렇게 좋냐.”

“석민재는 특별한 여자니까요.”

무혁은 그저 쓴웃음을 머금었다.

야무지게 손을 쓴 결과 소영하는 이제 HS엔터 내부에서도 완전히 고립됐다.

본인의 몰락도 문제지만 성준범 이사 쪽도 급하게 대체품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소영하 쪽은 이제 완전히 끝난 모양이던데. 나머진 어떻게 하려고?”

“조만간 터질 겁니다.”

HS엔터의 몸집을 불리느라 투입된 자금은 대부분 사모펀드를 타고 들어왔다.

몇 번이나 세탁되긴 했지만, 배후에 연결된 세력은 분명 해외를 경유한 불법 투기 세력으로 보였다.

“그쪽과 손을 잡게 된 원인이야 명백하죠.”

“조원식이겠군.”

이름난 법조인부터 이름을 거론할 수 없는 범죄자까지, 조원식이 연결되지 않는 네트워크는 존재하지 않는다.

범죄와의 전쟁을 거치며 위축된 조직폭력 세력도 이제는 아예 사업 분야를 갈아탔다.

“인터넷 도박으로 번 돈을 해외 비트코인으로 세탁하고, 그 돈이 다시 주식을 산다. 머리들 참 좋아.”

“독사파와 손을 잡았으니, 성준범도 결국은 미끼겠죠.”

독사파의 고위 간부들은 대부분 조원식이 손을 써 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 비리가 대체 어디까지 연결된 건지, 죽도록 수사했던 검사들은 어느샌가 한직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자칫 이대로라면 열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혜성 전체가 조폭 세력의 손에 떨어지게 생겼건만 성준범도 아직은 자신이 이용만 당할 패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만약 이 상황에서 혜성의 친자식임이 나타난다면 저쪽에서는 어떻게든 민재를 죽이려고 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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