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무혁 씨 덕분이겠죠.
“원하는 게 뭐야?”
“이해가 빠르시군요. 역시 직접 찾아오길 잘했습니다.”
기자는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깊은 밤, 석민재와 소영하와 함께 손을 잡고 있었던 바로 그 사진이었다.
홍 사장이 민재를 대동하고 다닌 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러니 이런 식의 접근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소영하라.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홍 사장을 앞에 두고 기자는 제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일반일까지 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소영하의 위선적인 행각을 알리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선이라?”
“혜성 소송 문제에 불똥이 튈까 봐, 소영하와 관련된 보도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방송에 나와서 뭐라고 헛소리를 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별생각 없이 넘겼던 일들 뒤에는 제법 여러 사정이 얽힌 모양이었다.
“그래서, 민재가 소영하를 찬 거야?”
거침없이 본론으로 넘어가는 홍 사장의 질문에 김 기자는 적잖게 놀랐다.
상대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라서, 그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모든 속사정을 낱낱이 고했다.
“소영하 쪽 매니저의 말로는 석민재가 완전히 속은 거라더군요.”
“속았다고?”
“소영하가 석민재를 좋아해서 둘이 사귄 것도 맞지만, 처음부터 결혼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상하긴 했었지.’
민재가 왜 결혼을 서둘렀는지는 홍 사장도 익히 알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가 결혼 전에 얼마나 들뜨는지는 지금껏 살며 몇 번이나 봐왔다.
하지만 민재는 결혼의 이유로 중병에 걸린 할머니를 들먹였다.
진무혁과 얽힌 조원식 문제도 그렇고 피차간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둘 다 어린애는 아니니 그것까지는 자기들끼리 알아서 할 문제라고 여겼지만, 자신이 모르는 문제까지 얽혀 있을 줄은 몰랐다.
“소영하 쪽에서 먼저 배신한 거면, 이제 와 매달리는 건 또 뭐야?”
“소영하도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죠. 남에게 무언가를 바랄 때는, 자신 역시 상대가 원하는 걸 줘야 한다는 걸요.”
세상에 공짜 같은 건 없는 법이다.
소영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석민재 역시 무조건 제 뜻을 따라줄 거라 믿은 모양인데.
참고 참던 석민재도 더는 그런 소영하를 감당하지 못했다.
석민재는 주변에 사람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여러모로 눈에 띄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대중은커녕 누구에게도 소영하와의 교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입도 무겁겠다, 소영하 입장에서는 그만한 상대가 없으니 아쉬웠을 테지만.
사실상 두 사람의 연애는 석민재 쪽이 훨씬 더 많이 희생했을 거였다.
“일이 그렇게 됐을 거란 말이지.”
“흔한 경우입니다. 다만 방송에서까지 순정남 행세를 하는 게 문제일 뿐이지요.”
버림받은 척하고 있어도 먼저 뒤통수를 친 건 분명 소영하 쪽이 맞다.
예전 같으면 성준범 이사의 철통같은 관리 때문에 말 한마디 새어 나올 일이 없었을 이야기가, 이제는 그만둔 매니저의 입을 통해 업계 내외부로 번져나갔다.
“그런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 따위는 내 알 바 아니지.”
애초에 홍 사장이 지키고 싶은 상대는 석민재 하나뿐이다.
결혼까지 한 이상, 이미 모든 관계는 끝났음에도 질척대는 소영하 쪽이 오히려 눈엣가시였는데.
마침 기자가 제 발로 찾아와주니 홍 사장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데스크에서 이런 훌륭한 기사를 왜 막은 걸까?”
“그러게 말입니다.”
“일반인만 철저하게 보호한다면야 이 정도는 보도해도 문제가 없겠지. 선물은 잘 받아둘게.”
“감사합니다. 사장님.”
김 기자는 어렵게 확보한 석민재 관련 자료를 미련 없이 홍 사장에게 넘겼다.
어차피 그는 일반인인 석민재 따위에게는 관심 한 톨 없었다.
“스타커넥트 쪽에 얘기해놔. 저 친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라고.”
“하지만 사장님.”
“괜찮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홍 사장의 엄한 명령에 비서실장은 전화를 걸기 위해 사장실을 나섰다.
모두를 내보내고 홀로 남아 홍옥자는 기자가 주고 간 자료를 훑어봤다.
기록만 보고 확신할 수는 없다지만, 반지 얘기는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아린아.”
처음 태어났을 때만 해도 새끼 원숭이처럼 징그럽기만 했었는데.
유난히 웃음이 많던 아기는 아직 철없던 이모의 손가락을 꼭 쥐고서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모두가 행복했었다.
노발대발하며 결혼을 반대했던 선대 수정일보 사장조차 첫 손녀의 탄생에 마음을 돌려 두 집안에는 제법 원만한 공기가 맴돌기까지 했다.
그 일만 없었더라면.
그 일만 없었더라면 정말로 좋았을 텐데.
“살아 있었단 거지.”
외손녀의 실종 이후, 홍 사장의 아버지는 원인 모를 병에 몇 년을 시름시름 앓았다.
모든 건 자신의 업보라며 사라진 아기의 이름을 부르다 숨을 거두었다.
어딘가에서 해를 당하지는 않을까. 울고 있지는 않을까.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마저 그 아이가 덮어쓰지나 않을까.
제 언니는 숨도 한 번 편히 쉬지 못한 채로, 아이의 행방도 모르는 채 삼십 년이란 세월을 버텨왔다.
어린 마음에 반지를 가져왔건만, 혹시나 삼킬지도 모른다고 해서 생전 만져본 적도 없던 바늘까지 들고 강보에 꿰매어 놓았는데.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세세한 기록이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냈다.
“정말이란 말이지.”
납치해 그대로 보육원에 버린 거라면 분명 주웠던 당사자는 어떻게든 사정을 알고 있을 터.
생각지도 못한 흔적을 찾았으니, 이제 그 아이가 어디로 보내진 건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유능하고 믿음직한 진무혁도 석민재와 관련된 문제만큼은 예외였다.
제 손의 사탕을 빼앗으려는 나쁜 어른이라는 걸 알아차린 건지, 진무혁도 이제는 좀처럼 빈틈을 주지 않고 있다.
메모를 꼭 거머쥐고서 홍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준비해.”
삼십 년을 기다렸으니 이제 더는 하루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
“도와줄까?”
무혁의 다정함이 이토록 귀찮아질 줄 누가 알았을까.
“아니, 거기 얌전히 앉아 있어.”
하루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어차피 출근은 이미 남 일이 된 이상 민재는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무혁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왜 굳이 치즈케이크를 말한 건가 했더니 레시피 자체는 그리 까다롭지 않다.
민재는 밑에 깔 쿠키를 절구로 빻으며 만드는 법을 정독해 나갔다.
“다음에는…….”
헤매는 민재를 위해 무혁은 슬쩍 설탕 봉지를 민재 옆에 밀어줬다.
“저리 가라니까.”
“난 그냥 도와주려고 한 거야.”
“됐거든?”
이러면 만들어주는 의미가 없는데. 민재는 무혁을 저 멀리 거실로 쫓아보내고 엉망이 된 주방을 살폈다.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전쟁터가 따로 없다.
‘정말로 요리에는 소질이 없는데…….’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민재는 레시피를 따라 차곡차곡 치즈케이크를 만들어나갔다.
재료를 담고 마지막으로 오븐에 올리면 완성이다.
표면에 살짝 구운 느낌이 남을 정도로만 타이머를 돌려두고 난 후에야 민재는 겨우 앞치마를 벗었다.
“이것도 쉽지 않네.”
엉망이 된 주방을 애써 외면하고 거실로 나오니 무혁은 서류를 보다 말고 잠이 들었다.
안경을 쓰고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요 몇 년 사이에 눈이 나빠진 건지, 서류를 볼 때마다 꼭 안경을 쓰고 있다.
예전에는 없던 습관이라 그런지 그 모습이 심히 낯설긴 했다.
“자?”
눈을 감고 있는 걸 보면 잠이 든 것 같긴 한데.
손에 든 서류를 집어 테이블에 올리니 무혁이 민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고른 숨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무혁의 손을 바로 두고서 민재는 그의 안경을 벗겼다.
무방비하게 잠든 모습이 퍽 사랑스럽다.
“내가 잘해줄게.”
고마운 기억도 미안한 일들도 참 많아서, 이제는 민재가 그를 더 사랑해줄 차례다.
삐빗, 때마침 타이머가 울려서 민재는 서둘러 오븐 쪽으로 달려나갔다.
민재가 케이크를 굽는 데 정신이 팔린 사이 무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얼마나 더 시간을 벌 수 있을까.’
습관처럼 제일 먼저 전화를 확인하니 홍 사장에게 붙인 비서에게 메일이 와 있었다.
[소송 관련 자료 송부합니다.]
메일 마지막에 붙은 깃발 이모티콘을 보아 홍 사장은 벌써 비서의 배신을 눈치챈 듯했다.
만약 이 시점에 민재의 정체가 밝혀지면 어떻게 될까.
- 이 상황에서 친자가 나타나면, 유산 문제부터 꼬이겠네.
용식을 끌어들인 건 처음부터 이 문제를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
뒷조사 전문을 자처하는 이답게 그는 이혼, 재혼, 그리고 친자 감정에 대해 국내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 일반적인 친자 감정으로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밖에 확인할 수 없어. 하지만 마침 이모와 여자 조카면 쉽지. 모계 혈통을 분석하면 되는 거니까.
- 모계?
- 그래. X염색체에서 변이 없이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를 분석하면 친족이라는 건 확실히 증명할 수 있지.
민재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안 팀장은 애초에 남의 사생활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니 관심 하나 보이지 않고 있다지만, 석민재와 혜성 회장 부인 두 사람을 모두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의심할 거였다.
하지만 아직은 아닌데.
“일어났어?”
“응. 막 깼어.”
갓 구워진 케이크의 향기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재는 예상보다 훨씬 더 잘 구워진 걸 보며 좀처럼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게 좋아?”
“너무 좋아.”
언제까지나 이렇게 웃을 수 있다면 정말로 좋을 텐데.
해맑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속이 쓰렸다.
“석민재.”
“응?”
“내가 부모님 노릇까지 다 해줄 테니까, 그냥 우리 이대로만 살자.”
뜬금없는 무혁의 말에 민재는 웃음을 터트리며 살짝 그의 가슴을 쳤다.
“뭐라는 거야, 정말.”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리면 좋을 텐데.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사랑해 민재야.”
케이크를 식히는 사이 두 사람은 함께 뒷정리에 들어갔다.
냉장고 문을 닫으며 중얼거리듯 던진 고백에 민재는 폭소를 터트리며 무혁의 허리를 꼭 안았다.
“나도 사랑해.”
이토록 환한 미소를 보면서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둘만 남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니, 네가 모든 걸 알고도 날 향해 웃어줄까.
해맑은 민재를 마주하고서 무혁은 애써 뒤틀린 감정을 억눌렀다.
***
다음날, 민재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회계팀에 들렀는데 오늘따라 오 대리를 비롯해 다들 유독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어제 그거 진짜 재미있었지. 이시준 진짜 잘생겼더라.”
“이시준?”
“아, 민재 씨는 어제 그거 안 봤으려나? 드디어 우리나라에 얼굴 천재가 나타났다니까.”
소식 빠른 오 대리가 웬 남자 사진을 보여줬다.
어쩐지 소영하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강아지상인 소영하와 달리 훨씬 더 남자다운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직 신인이니까 그렇지. 근데 진짜 대단해. 벌써 CF도 여럿 찍었고, 곧 영화도 나온다더라?”
“HS에서 소영하를 그렇게 밀어주더니 이제는 얘로 갈아탄 모양이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정말 소영하의 얼굴을 볼 일이 드물어지긴 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거리를 걸으면 좋든 싫든 소영하의 얼굴을 봤어야 했는데.
이제는 굳이 먼저 찾아보지 않는 이상 그 얼굴을 안 봐도 되는 건 좋다.
“이거 사실은 비밀인데, 내 친구가 HS엔터에 다니거든?”
“뭐, 뭔데? 무슨 일 있어?”
다른 직원의 말에 민재 대신 오 대리가 나섰다.
다행히 직원은 민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요새 분위기가 별로긴 한가 봐. 요새 일도 많이 줄고, 원래 소영하 광고를 이시준이 다 가져간 모양이더라고.”
“계속 사고 치니까 밉보인 모양이네.”
“아……. 그때 그거?”
직원들이 얘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민재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 잘 나갈 때는 다들 별말을 안 했어도 이제는 하나둘 다시 구설에 오를 차례가 됐다.
‘그러게 잘 좀 하지.’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인데. 아무리 숨기려 해봐도 세상에 영원한 비밀 같은 건 없다.
“근데 민재 씨는 별 관심이 없나 봐?”
“하긴, 진무혁이랑 사는데 이런 애들이 눈에 차겠어?”
“에이, 왜 그러세요. 저도 잘 생긴 사람 좋아하는 걸요.”
시간이 좀 흐른 덕분인지, 이제는 이런 얘기도 스스럼없이 할 수 있게 됐다.
웬일로 웃기까지 하는 민재를 보며 어쩐지 다들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민재 씨 변했네.”
“제가요?”
“원래 좀 차갑다고 해야 하나. 딴 세상 사람 같았거든.”
그러고 보니 요새는 웃는 일이 제법 잦아진 것 같기도 하다.
소영하를 만날 때만 해도 매번 누군가에게 들킬까 싶어 전전긍긍하기 바빴다지만.
이제는 그런 걱정을 안 해도 되니 훨씬 더 숨 쉬기가 편해졌다.
“무혁 씨 덕분이겠죠.”
“뭐야, 지금 우리 앞에서 남편 자랑이야?”
“민재 씨 너무하네, 정말. 그러는 거 아니야.”
어쩐지 사람들을 대하는 데도 훨씬 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런 사소한 변화조차도 진무혁 덕분인 것 같아 괜히 웃음이 났다.
“석민재.”
이렇듯 기분이 좋은 민재와 달리, 안 팀장은 반쯤 죽을상을 하고서는 제 부하를 매섭게 노려봤다.
아무래도 입이 댓발로 나온 걸 보니 이래저래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