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50화 (50/103)

50화.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먹여줘.”

“뜨거우니까 조심해.”

천하의 진무혁이 후, 하고 숟가락을 불고서 입에 수프를 떠먹여 주기까지 했다.

이게 뭐라고 한껏 집중한 모습을 보니 자꾸 웃음이 터져나왔다.

“맛있다.”

“다행이네.”

세상 모두에게 차갑게 거리를 둬도 민재만은 언제나 예외였다.

어째서 이렇게 상냥한 걸까.

뭘 해도 오냐오냐 받아주는 게 너무 좋아서 민재는 그에게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첫사랑이지?”

“그렇지.”

여중에 여고를 나온 민재는 남자친구 같은 건 사귀어볼 겨를이 없었다지만.

유혹이 많았을 진무혁의 첫사랑이 자신이란 사실은 신기했다.

“첫인상은 무서웠어.”

“난 처음부터 좋았어. 그 뒤로도 쭉, 네 생각밖에 못 했을 정도로.”

“정말?”

진무혁은 왜 석민재를 좋아하는 걸까.

그동안은 좀처럼 해주지 않던 얘기였는데, 무혁이 먼저 입을 연 건 분명 처음이었다.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전부 다 좋았지. 예쁜 눈도, 작은 손도. 귀여운 목소리까지 전부다.”

대학 시절의 제 모습이 그렇게 보였다니.

당시에는 그의 눈치만 보며 쭈뼛대기 바빴는데, 정말로 의외였다.

“정말? 난 날 진짜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술자리에서 곤란해 보이는 모습을 도와줬을 때도 무혁은 인상을 가득 쓴 채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건만.

무혁은 이미 그때도 민재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했다.

“처음 본 건 훨씬 전이야.”

“정말? 개강 파티 땐가.”

“비밀. 잘 기억해 봐.”

민재가 신입생이었던 해 무혁은 막 군대에서 복학했었다.

그런 그가 어디서 민재를 본 건지 궁금한 데, 정작 무혁은 아무리 물어도 또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느새 수프 그릇이 텅 빌 때까지도 민재는 무혁의 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궁금해. 그냥 알려줘.”

“맞추면 상을 줄게.”

몇 번이나 보채보지만, 소용이 없다.

힌트를 받고 싶어서 민재는 아예 무혁의 무릎에 올라 그의 목을 꼭 안았다.

“키스해줄 테니까 말해줘.”

“이건 반칙이라고 했지.”

등줄기로 파고든 큰 손이 걸치고 있던 셔츠를 벗겼다.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파버린 셈이라 민재는 꼼작없이 무혁의 품에 갇혀버렸다.

“자, 잠깐만!”

“룰을 어겼으니 벌을 줘야지.”

구겨진 셔츠가 엉망이 됐다. 꼼짝할 수 없게 손목을 잡힌 채 쇄골 어귀에 진득한 키스가 밀려들었다.

“우리 애 태어나면, 그때 얘기해줄게.”

한 번 아니면 절대 아닌 진무혁은 정말로 알려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내가 정리할 테니까, 소파에 가 있어.”

무혁이 설거지를 하는 사이 민재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꼭 꿈을 꾸는 것 같아.”

“꿈 아닌데.”

저렇게 딱 잘라 말하는 것조차도 진무혁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동안 후회 많이 했어.”

그런 식으로 떠나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게라도 바로잡았다면 좋았을 테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두 사람은 겨우 제자리를 찾았다.

“정말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이름난 변호사인 조원식은 고작해야 대학생밖에 안 된 민재에겐 너무나 벅찬 상대였다.

사실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진무혁이 석민재를 사랑하는 만큼 민재 역시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식사까지 다 마치고 나서야 민재는 느긋하게 폰을 확인했다.

[배신자]

안 팀장에게서 온 심플한 메시지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을지 대강은 상상이 갔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연락을 더 확인하던 중 민재는 뜻밖의 메시지 하나를 확인했다.

“무슨 일이야?”

“잠시만. 보육원에서 연락이 와서.”

엄마가 자주 봉사활동을 다녔던 보육원은 민재가 버려졌던 곳이기도 했다.

어른이 된 지금은 매달 큰 금액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기부도 하고 있다.

가끔 그 문제로 연락이 오기도 해서 민재는 오늘도 그것 때문인 줄만 알았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석민재입니다.”

“어머, 민재 씨. 안 그래도 내가 연락하려고 했었는데!”

담당자는 어쩐지 들뜬 목소리로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인 걸까.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전화 너머에서 대답이 들렸다.

“드디어 나타났어요!”

“네?”

“민재 씨를 찾는 사람이! 어디 갔지, 연락처를 분명 받아놨는데.”

무슨 얘기인지 처음에는 바로 알아듣지도 못했다.

'아, 그랬었지 참.'

삼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버려진 아기의 행방을 찾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확신했다. 제 친부모는 자신을 버린 거라고.

그런데 지금 와서 누가 자신을 찾는 걸까.

“무슨 일이야?”

“잠시만.”

민재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고쳐 쥐었다.

걱정하는 무혁의 손을 꼭 잡고서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를 썼다.

연락처를 찾아냈다며 담당자는 민재에게 찾아온 사람에 관해 설명해줬다.

“남자였어. 마흔에서 마흔다섯 정도의 남자분이 물어보더라고.”

“뭐라고요?”

“혹시 삼십 년쯤 전에 버려진 아기가 없었느냐고. 그래서 있다고 했지. 어떻게 알고 온 걸까?”

안 팀장 또래쯤이라면 부모일 리는 없다. 기껏해야 삼촌뻘이라는 건데.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잠시만. 내가 받을게.”

민재를 소파에 앉히고 무혁이 대신 전화를 넘겨받았다.

“석민재 남편 되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보호자로는 이만한 사람이 없다.

여유가 넘치는 목소리로 그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해나갔다.

“그러니까 민재가 버려진 시기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네. 아무래도 확실한 것 같아서 연락처를 받았죠.”

“자세한 사항은 제 메일로 부탁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정말로 제 부모가 나타난 거라면, 그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무혁은 통화를 마무리하고서 민재의 손에 다시 폰을 돌려줬다.

“친부모님을 만나고 싶어?”

습관처럼 고개를 저으려다 순간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 분명 그쪽도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게야.

할머니의 말처럼 정말로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거라면.

제 새끼를 떼놓은 부모가 어찌 하루라도 멀쩡히 살 수 있을까.

울먹이던 홍 사장처럼, 어쩌면 자신을 버린 부모도 지난 삼십 년간을 후회라는 지옥 속에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모르겠어.”

막연한 추측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제야 다시 만난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모든 진실이 아름답지 않은 것처럼 친부모 문제는 이제 민재에게 판도라의 상자가 됐다.

과연 이 상자를 여는 게, 자신에게 득일까 독일가.

무혁은 혼란에 빠진 민재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무서워.”

“뭐가 무서워. 내가 있는데.”

삼십 년이나 모르는 채 살아온 피붙이보다는, 당연히 결혼한 남편 쪽이 가깝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렇게 흔들리는 순간에 이 사람이 옆에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옆에 있어 줄 거지?”

“그럼. 당연하지.”

소영하조차 물리쳐준 사람이니까 분명 괜찮을 것이다.

무혁의 미소 속에 담긴 의미를 모르는 채.

민재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애써 심란한 감정을 가라앉혔다.

***

“출근을 안 했다고?”

홍옥자 사장은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안 팀장은 분명 석민재가 심부름을 올 거라고 했었는데, 하필이면 그 석민재가 오늘 월차를 내고 아예 회사를 쉬어버렸다.

“그렇다니까. 따질 거면 진무혁 그놈한테 따져.”

홍 사장에게 보내려고 한 걸 이미 눈치챈 건지 무혁은 이제 대놓고 석민재를 빼돌리기 바빴다.

통화를 마무리할 때쯤, 쓸데없는 짓을 하며 여전히 통화 내용을 듣고 있는 비서가 눈에 띄었다.

“거기서 뭐 해?”

“아, 아닙니다. 나가보겠습니다.”

어색한 태도만 봐도 뭔가 미심쩍은 구석을 지울 수 없다.

삼대 언론으로 손꼽히는 수정일보의 여제로 군림하며 참으로 볼꼴 못 볼 꼴 다 봐왔다.

그동안 자신을 물 먹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제 뒤통수를 쳐왔던가.

“비서실장 들어오라고 해.”

엉뚱한 짓만 하고 다녀도 회사 전체를 제 수족처럼 파악할 수 있는 건 유능한 비서실장의 존재 덕분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버지 대부터 근속해온 그만은 절대로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말씀하십시오. 사장님.”

“검사는, 어떻게 됐어?”

“검체는 확보했습니다. 오늘 밤이나 내일쯤 검사 결과가 나올 거라고 합니다.”

“잘되어야 할 텐데.”

하다못해 친척인지 만이라도 알고 싶어서 그녀는 아예 제 유전자와 석민재의 유전자를 비교하기로 했다.

어떻게든 증거만 생긴다면 그때는 언니 앞에 들이댈 명분이 선다.

“내가 석민재를 신데렐라로 만들어 줄 거야.”

그 애가 혜성의 상속녀로 반짝반짝 빛날수록 성준범의 표정이 일그러질 게 눈에 선했다.

비서실장이 넘긴 자료를 꼼꼼히 살피며 그녀 역시 소영하가 왜 찾아온 건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그러니까, 원래 민재가 결혼하려던 상대는 무혁이 녀석이 아니라 이 기생오라비란 거지?”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민재가 차버린 거구나.”

“거기까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습니다.”

끔찍하게 싫어하던 모습과 구차하게 매달리던 것만 봐도 소영하가 차인 것 같은데.

아무리 얄밉다고 해도 상대는 길 가는 다섯 살짜리 어린애도 이름을 아는 소영하다.

그런 걸 보면 진무혁의 수완이 대단하긴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드릴 말씀?”

“기자 한 사람이 사장님을 뵙고자 합니다.”

“날?”

기자와의 면담은 언론 집단을 이끄는 홍 사장의 특이한 경영방식 중 하나였다.

소속 기자들의 특종 거리는 솔선수범해서 제공해주겠노라며 처음 취임했을 때만 해도 인터뷰만 수십 건에 달했다.

그것도 이젠 옛날이라지만. 요 몇 년 사이 기자와의 면담 같은 건 사실상 허울 좋은 제도로 전락했다.

“누군데?”

“스타커넥트의 김영룡 기자라고 합니다.”

“스타커넥트?”

일간지 기자나 하다못해 여성지 인터뷰도 해봤지만, 연예부 기자가 왜 자신을 찾아온단 말인가.

그래도 왔다고 하니 당연히 인터뷰는 승낙했다.

그리고 덤으로.

홍 사장은 여전히 수상해 보이는 비서 쪽을 가리켰다.

“저 친구. 확실히 털어봐.”

“명심하겠습니다.”

A&Z에 사람을 심었듯이, 만약 성준범 쪽에서 여기까지 손을 뻗은 거라면 정말로 곤란해진다.

만약 석민재의 일이 그쪽으로 먼저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그땐 정말로 저쪽에서 무슨 수를 쓸지 알 수 없다.

‘수상했었지.’

홈 파티 때문에 바빴던 그날. 사라진 아기와 함께 건물에 있었던 사람은 셋이었다.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알리바이를 입증했고.

나머지 하나는.

- 전 아무것도 몰라요.

당시 여덟 살이었던 성준범이었다.

부모를 따라 저택에 놀러 왔던 그 애가, 이 집에 들어오게 된 건 정말로 우연이었을까.

처음에는 괴한을 봤다고 했고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본 게 없다고 말을 바꿨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준범의 증언 때문에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려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그 애는 결국 사라진 아린의 자리를 차지해 혜성의 왕좌를 넘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장님.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요즘 같은 때에 겁도 없이 자신과의 인터뷰를 청하는 패기가 대견해서 홍 사장은 기꺼이 만남에 응했다.

이제는 데스크에 앉아있을 법한 나이의 기자는 구식 수첩에 펜까지 들고서 홍 사장 앞에 허리 숙여 인사까지 올렸다.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타커넥트의 김영룡이라고 합니다.”

“그래, 날 보자고 했다고?”

“드릴 말씀도 있고 여쭤볼 것도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연예부 기자라면 소영하에 대해서도 잘 알 것이다.

민재의 상황에 대해서도 조금 더 세세히 물어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드릴 말씀이라?”

“삼십 년 전, 사장님의 언니분이신 홍연희 여사님께서 낳은 아기가 유괴된 사건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랬지.”

해묵은 사건을 들먹이는 사람들은 대게 두 부류였다.

당신의 아픔을 절절하게 공감한다며 사연을 팔거나, 아니면 죽은 아이를 들먹이며 사기를 치려고 하거나.

하지만 기자는 달랐다.

그는 가방에 넣어온 구겨진 에이포 용지들을 잔뜩 꺼내 들고서는 홍 사장 앞에 모두 들이밀었다.

“혜성 가에서는 그 아이의 행방을 여전히 찾고 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래. 맞아. 내 조카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면야 무슨 소원을 못 들어줄까.”

증거물을 단단히 준비해온 걸 보면 허언을 떨 요량은 아닌 모양인데.

자료들 사이에서 어쩐지 소영하의 프로필 사진이 보였다.

“저건 뭐지?”

“아, 저건 이따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꼭 쓰고 싶은 기사가 있지만, 데스크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중구난방으로 정리된 자료를 겨우 정리한 후에야 그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삼십 년쯤 전, 새벽에 청소하던 보육원 경비원이 버려진 아기를 발견했습니다.”

“응. 그래서?”

“성실했던 보육교사는 아이와 함께 버려진 물건을 모두 챙겨 입양 보낸 집에 맡겼습니다. 혹시라도 그 애를 버린 친부모가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요.”

그는 자잘한 물건들의 목록이 적힌 메모지를 건넸다.

심드렁한 얼굴로 보던 홍옥자 사장은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 적힌 조악한 글자들을 눈으로 훑어내렸다.

채 백일도 되어 보이지 않았던 아이는 한땀 한땀 정성 들여 꿰맨 배냇저고리와 반지와 함께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 반지에는 이런 글씨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촘촘한 글자라 교사는 흉내도 내기 힘들었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윤곽은 남아 있었다.

아린娥潾.

아이의 장수를 빌며 그날, 옥자 자신이 직접 선물한 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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