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전부 내 거야.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무방비한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그는 여지없이 제 속내를 드러냈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두 사람은 짐승처럼 서로에게 얽어 들었다.
거추장스러운 단추를 잡아 뜯고서 무혁은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입술이 닿은 자리마다 불이 일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인내해온 그의 갈증은 겨우 이 정도로 성에 찰리 만무했다.
“무, 무혁…….”
잘 익은 과실처럼 달콤했다. 엉망이 되어버린 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서 무혁은 민재의 신음조차 삼켜버렸다.
“예뻐.”
“제발.”
“전부 내 거야. 누구에게도 주지 않아.”
단단한 등 근육 뒤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는 제 아래에 누운 민재를 바라봤다.
이대로 모두 집어 삼켜버리면 좋을 텐데.
붉게 물든 입술을 다시금 머금고서 무혁은 스타킹의 잔해를 저 멀리 치워버렸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하루 정도는 쉬어. 나도 쉴 거니까.”
“그래도 돼?”
눈물이 얼룩져 시야가 흐려진 주제에.
착실하기 짝이 없는 석민재는 아직 내일 출근을 걱정할 여유가 남은 모양이다.
“아직 살 만한가 보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변명해봐야 이미 늦었다.
장난기 섞인 그의 미소 뒤에 뭐가 밀려올지 석민재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혼하면 좋을 거라고 했던 건 진심이었어. 난 이미 모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처음 그녀를 가진 날부터 지금까지 그 무엇도 바뀐 적이 없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엄지로 훑고서 무혁은 떨고 있는 민재에게 키스했다.
뭐가 그리 겁이 나는 건지 민재는 떨리는 손으로 무혁의 목덜미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좋아해.”
“부족해. 더 말해줘.”
응석을 부리듯 무혁은 민재를 재촉하며 애간장을 태웠다.
부끄러워하는 민재를 재촉할 때마다 제 심장에 더욱 불이 일었다.
“너무 좋아.”
창 너머로 스며든 불빛이 무혁의 등 뒤로 스며들었다.
오늘만은 달콤한 공기를 한껏 마시며 승자의 쾌감을 만끽했다.
섣불리 저를 원망할 여지를 남겨뒀다가 두 번 다시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
제 마음을 모두 알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이렇게 잔인한 여자를 사랑해버린 걸까.
“사랑해, 민재야.”
좋아한다는 정도의 말로 제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까. 정말로, 정말로 잔인한 여자다.
처음 본 날부터 지금껏 제 머릿속에는 석민재 하나뿐이었다.
제아무리 죽고 싶은 날이 찾아와도 석민재의 말 한마디가 그를 버티게 했다.
부모를 앗아가고, 키워준 이가 배신하고,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오직 석민재 하나만이 제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건만.
그녀는 자신을 버렸다.
그것도 가장 처참한 형태로.
“이제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을 거야.”
민재가 명령한다면 뭐든 할 수 있다.
다만 이제 더는 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민재의 발끝에 키스하며 무혁은 그녀를 위한 충성을 맹세했다.
“왜 그래, 정말.”
“예뻐서.”
달아나고 싶어도 이제 다시는 저와의 끈을 놓을 수 없도록 예쁜 발목에 족쇄를 채워야 한다.
설령 석민재가 또다시 자신을 버리게 되더라도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이라는 점은 절대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정말 예쁘네. 내 아내는.”
가엾은 석민재. 도망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앞으로 다가올 제 미래도 모르는 채 민재는 수줍게 뺨을 붉혔다.
어떻게 발톱까지 이렇게 앙증맞고 사랑스러울까.
진심 어린 무혁의 말에 민재는 시트로 제 얼굴을 가려버렸다.
“그러지 마.”
“싫은데?”
시트를 내리며 그는 표범처럼 민재의 위로 다가섰다.
애써 아닌 척하고 있지만, 민재의 손가락은 어느새 다음 단계를 기다리고 있다.
“입 벌려.”
엄지로 민재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살짝 벌린 입술과 촉촉이 젖은 눈빛이 실로 매혹적이다.
앞으로 다시는, 그 누구도 제 것을 넘볼 수 없도록.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도록
“읏…….”
완전히 제게 길들여두어야 한다.
뽀얀 목덜미에 이를 박으며 민재는 체향을 가득 삼켰다.
말랑말랑한 살결과 부드러운 촉감은 마시멜로우처럼 입안에 녹아들었다.
자극을 줄 때마다 눈물이 고였다.
수치심과 쾌락에 몸부림칠 때마다 숨겨온 욕망에 불이 붙었다.
“미칠 것 같아.”
누가 할 소릴.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려 해봐도 그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런게 정말 사랑일까. 절제를 미덕이라 여기던 이성조차도 이 광기 앞에서는 스스로 무릎을 꿇고 만다.
가느다란 팔다리를 단단히 옭아매고서 무혁은 파르르 떠는 민재의 이마에 키스했다.
“후회해?”
내민 손을 잡은 이상, 이제 더는 놓아줄 생각이 없다.
뜨거운 체온 아래 녹아버린 민재는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후회하지 않아.”
그 한마디가 무혁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한 걸음 더 다가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으니 조금씩 그녀의 정원 안에 걸어 들어가 아름다운 열꽃을 피워냈다.
체력에 한계가 온 건지 민재가 버거워하는 걸 알면서도 한 번 불이 붙은 욕망은 좀처럼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밤이 다 지나도록 무혁은 민재를 힘껏 안은 채 애 마른 갈증을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
잠에서 깨는 순간 묵직한 둔통이 밀려왔다.
민재는 무의식적으로 깨달았다.
“아…….”
꿈이 아니었구나. 움직이려고 해 봐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디 그뿐일까, 오랜만에 안 쓰는 근육을 써서 그런지 관절 여기저기가 아프고 쑤셨다.
‘저질렀네.’
오늘이 며칠이더라.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다 다시금 떠올려버렸다.
진무혁이 성인군자가 됐다고 여긴 건 완벽한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그동안 대체 뭘 얼마나 참아온 건지……. 무혁은 쉴 틈도 주지 않고서 민재를 한계까지 몰아세우기 바빴다.
진짜로 잡아먹히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목숨은 부지했다고 해야 할지.
이게 불행인 건지 다행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자꾸 실없는 웃음이 났다.
“잘 잤어?”
문득 커다란 손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들자 옆에 누운 무혁과 눈이 마주쳤다.
안경을 쓰고서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는 영어가 가득 적힌 서류를 읽고 있다.
분명 자신보다 늦게 잠들었을 텐데.
그는 피곤한 기색은커녕 상쾌한 얼굴로 민재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응.”
저 미소는 반칙인데. 서류를 쥐고 있던 날렵하고 긴 손가락이 민재의 귓불을 어루만졌다.
어쩐지 장난을 치고 싶어서 민재는 무혁의 손가락을 가져와 끝을 살짝 깨물었다.
“일하지 마.”
지금은 좀 더 어젯밤의 여운을 느끼고 싶은데, 진지하게 서류만 보고 있는 모습이 괜히 얄미워졌다.
“그럼 우리 민재는 어떻게 먹여 살릴까.”
“내가 먹여 살리지 뭐.”
그의 관심을 뺏기는 게 싫어서, 손에 든 서류를 가져다 저 멀리 밀어버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어째서인지 무혁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자꾸 헤실헤실 웃음이 나왔다.
“왜 자꾸 웃어.”
“좋아서.”
민재의 말이 싫진 않은 건지, 그는 피식 웃으며 민재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마치 이게 꿈이 아니라고 되새기는 것처럼.
꿈만 같은 밤이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그래도 좋았다.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는 사랑고백이었으니까.
그동안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민재는 기어가듯 손을 뻗어서는 그대로 무혁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정말 좋아서 그래.”
이것보다 더 좋은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혁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젯밤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머릿속 어딘가가 고장 나버린 것처럼 너무 좋아서 자꾸 웃음이 났다.
“그렇게 좋았으면 상을 줘야지.”
무혁은 엉겨 붙는 민재를 번쩍 안아다가 제 배 위에 앉혔다.
민재는 제 아래에 앉은 무혁을 마주 보며 턱, 하니 그의 어깨에 두 팔을 얹었다.
“말 잘 듣는 남편한테 무슨 상을 줘야 할까?”
“굳이 점수를 매기자면, 몇 점이었어?”
무혁은 막연한 말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뭐든 명확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구체적으로 칭찬해달라는 그의 요청에 민재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 금방 결론을 내렸다.
“십 점 만점에, 백오십 점 정도?”
“아쉽네. 오백은 나올 줄 알았는데.”
“뭐?”
이 오만한 남자가 대체 어쩌면 좋을까.
자기가 잘난 걸 너무나 잘 아는 진무혁은 하는 말마다 이토록 얄밉다.
후회하지 않게 해주겠다더니. 자신만만한 그를 부정하고 싶지만, 어제는 완벽한 민재의 패배였다.
“얄미워.”
은근한 분풀이를 하고자 민재는 그의 뺨을 꼬집고 입술을 깨물어댔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날 도발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일방적인 공격에 몸이 기우뚱하며 이번에는 공세가 역전됐다.
긴 머리카락이 침대 위에 흩어지고 무혁은 잘 여며놓은 셔츠의 단추를 풀며 어딘지 모르게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또 시작이구나.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야 굳이 마다해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 남편. 몸 진짜 좋다.”
탄탄한 가슴팍에 손을 얹고서 민재는 문득 테이블 옆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한 시 반.
오늘은 분명 화요일일 텐데.
“어?”
꿈결 같은 시간 속에서 정신이 돌아왔다.
혹시나 잘못 본 건가 싶었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밖을 보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떴다.
허우적대며 침대를 벗어나려는 데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떡해. 난 이제 팀장님한테 죽었어.”
그동안 칠 년 가까이 회사에 다니며 지각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이유로 회사를 땡땡이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석민재의 성실한 직장 생활에 거대한 오점이 남게 생겼건만 무혁은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죽긴 뭘 죽어. 내가 잘 얘기해놨으니까 신경 쓰지 마.”
“뭐라고 했어?”
“사실대로 말했지. 내 옆에서 잘 자고 있으니까, 오늘은 월차 대신 내 달라고.”
본인은 재택근무로 돌렸다며 무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파트너 변호사 정도쯤 되면 가끔 그래도 되긴 하다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권한을 남용하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팀장님은 뭐래?”
“잘 보살피라고 했지. 나 때문이라고 해놨으니 내 욕만 할 거야.”
안 봐도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안 팀장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대놓고 티를 단단히 낸 모양이라 또다시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부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지만, 두 사람에게는 더없이 특별한 밤이었다.
허우적대는 민재를 침대에 앉히고서 무혁은 무릎을 꿇은 채 그대로 민재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그냥 오늘은 쉬어. 하루 출근 안 한다고 A&Z가 망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나도 오랜만에 푹 잤어.”
뭐가 그리 좋은지, 정말로 개운해 보이긴 했다.
제품에 파고드는 무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자니 정말로 커다란 강아지를 키우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 한 약속, 후회하지 않아?”
버림받기 싫은 강아지처럼 무혁은 민재를 꼭 껴안은 채 물었다.
“왜 그래. 난 정말 좋았는데.”
“진심으로?”
“응. 정말 좋았어.”
문득 그런 상상을 해 봤다.
만약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땐 정말 문 변호사가 데려온 아이들 못지않게 고집이 센 말괄량이로 자랄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땠어? 어릴 때부터 착실했으려나?”
“아니. 말도 안 되는 말썽꾸러기였지.”
“하긴, 그랬을 것 같아.”
부모님이 살아계시던 시절의 무혁은 분명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처럼 응석도 부리고, 장난도 치고. 한편으로는 어른들 뺨 칠 정도로 조숙하고 얄미웠을 게 분명하다.
키득키득 웃으며 민재는 무혁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트렸다.
“우리 이런 거 알면, 할머니가 좋아하시겠다.”
“나도 좋은데.”
“엉큼해. 진무혁.”
“응. 내가 좀 엉큼하지.”
뺨에 입을 맞추고 무혁은 다시금 민재의 손을 거머쥐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맞대도 질릴 틈이 없다.
이대로 키스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야속한 위장은 눈치도 없이 꼬르륵 소리를 내며 밥을 달라 청했다.
“여기 사는 애도 벌써 배가 고픈가 보네.”
“아, 뭐래. 진짜!”
베개로 한 대 때려주고서 민재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넓은 창 너머로 오늘따라 서울의 새파란 하늘이 유독 눈이 부셨다.
“밥, 빵, 면. 뭐가 좋아?”
“수프. 뭘 씹을 힘도 없어.”
“이십 분만 기다려.”
이불을 끌어다 덮고서 민재는 침대에 누운 채 하늘 위로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봤다.
으레 회사에 있어야 할 시간에 이렇게 편하게 누워 있으니.
그야말로 일탈.
참으로 짜릿했다.
“맛있겠다.”
열린 문 너머로 솔솔 풍겨오는 냄새가 심상치 않다.
더 누워 있기엔 정말로 배가 고파서 민재는 무혁이 벗어놓은 셔츠를 걸치고 살금살금 주방으로 향했다.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서 앞치마만 두른 남자의 뒤태라니.
군침을 꼴깍 삼킨 채 민재는 숨을 죽이고 다가가 있는 힘껏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불 앞에선 위험해.”
“그래서, 싫어?”
“……그럴 리가.”
가스 불을 끄고서 무혁은 민재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갰다.
따뜻한 손의 온기가 스며들자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이리 와.”
아직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테이블 위의 유리가 유독 서늘했다.
“간지러워.”
“모처럼 사람이 참고 있는데, 먼저 시작한 건 너야.”
시도 때도 없는 것마저도.
정말로 진무혁은 하나도 변한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