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48화 (48/103)

48화. 언제든 네 개가 되어줄 거야.

사무실에 차곡차곡 쌓인 보고서를 보며 민재는 한숨을 쉬었다.

“잘 놀다 와서 왜 그래?”

“오 대리야.”

그나마 편한 사람의 얼굴이 보이니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인다.

민재는 흐느적거리며 오 대리를 품에 꼭 안았다.

“내가 오 대리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아무래도 오늘 아침에 해가 서쪽에서 뜬 걸까.

아니면 석민재가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걸까.

“그냥, 오 대리가 보기에 내가 좀 문제가 있다거나 그래?”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민재의 뺨을 주무르며 오 대리는 리조트에서 있었던 일을 열심히 캐물었다.

벌써 몇 년이나 민재를 봐오며 이젠 제법 노하우가 생겼다.

제 얘기는 도통 안 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잘 달래자 하나씩 실마리가 나온다.

“소영하가 왔었다고?”

“응. 박 변이 정보 유출한 건 들었지?”

“들었고 말고. 오늘 징계위원회까지 열리잖아.”

아무리 변호사는 승소가 전부라지만 이번 일은 박 변호사도 도를 넘었다.

단순히 A&Z 내부를 넘어 변호사 협회 차원의 중징계가 예고되었는데도 박 변호사는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대체 누구에게 반출한 건지, 뒤늦게 회사 차원에서도 조사가 들어갔지만 상대는 이미 꼬리를 자른 지 오래였다.

“그리고, 홍 사장님이 우리 방 문고리를 부쉈어.”

“문 고리를 왜 부숴?”

“내가 물어보고 싶어.”

그 일을 잘 넘긴 것까진 좋은데 마지막에 그 난리가 나 버려서 모든 게 엉망이 됐다.

주말을 끼고 갔던 터라 오늘은 바로 부랴부랴 출근하느라 바빴다.

솔직히 말해 눈을 떠보니 할머니도 안 계셔서, 어제 찾아오신 것까지도 꿈인 줄 알았다.

“할머니는 밤에 가셨다고 하고, 무혁 씨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더라고.”

“흐응, 그러니까 한참 좋을 때 홍 사장이 훼방을 놔서 좋다 말았단 거지?”

왜 얘기가 그렇게 되나 싶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이라고 하기도 뭣하다.

내심 리조트에서의 연장선을 기대했건만, 무혁은 오늘 아침도 평소와 다름없이 식사를 준비해주고 금방 출근했다.

“얘기는 해 봤어?”

“그걸 말로 하기는 좀…….”

“뭐 어때. 결혼까지 해놓고 내숭은.”

아무래도 사정을 모르는 오 대리에게 상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는 정말 진짜도 가짜도 아닌 너무나 애매한.

굳이 따지자면 비정규직에서 무기 계약직으로 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선 느낌인데.

고용주의 정식 승인이 떨어지기 전에는 무엇 하나 확정되는 게 없다.

결과적으로 모든 결정권은 갑에게 달린 셈이다.

상호 합의에 의해 연장할 수 있다던 계약서의 문구가 꼭 희망고문 같다.

“바보.”

이런 제 마음도 모르고 무혁은 오늘도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반듯한 넥타이 차림에, 흐트러짐 하나 없는 그와 달리 민재의 머릿속은 여전히 엉망진창이다.

내부 상황이 알고 싶어서 민재는 똑똑, 하고 문을 두드렸다.

“회의가 길어지시는 것 같은데, 차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어, 그럼 우리야 좋죠. 전 커피…….”

“아니, 괜찮으니까 나가 보세요.”

민재의 일은 사실상 변호사들의 서포트다 보니 다과를 제공하는 것 정도는 기본적으로 업무에 포함된다.

그런데 무혁은 딱 잘라 거절해버리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뭐야, 민재 씨 무안하게 왜 그래?”

사정을 모르는 용식이 무혁을 탓했다. 하지만 업무 중이니 공사구분을 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아닙니다. 나가보겠습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런데 속이 상했다.

탕비실에서 분노의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얼마 후 바쁘신 진무혁 변호사님께서 직접 차를 타러 오셨다.

“그 커피,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곁에 선 그는 민재의 앞에 놓인 커피를 가리켰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아침부터 온종일 속앓이 중인 제 마음도 모르고, 무혁은 무슨 동료를 대하는 것처럼 민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할머님 일로 아직 토라져 있는 거야?”

“그런 거 아니거든.”

할머니가 일부러 깨우지 말라고 했다는 건 충분히 이해했다.

몰랐던 일도 아니니 안 대표님과의 일도 할머니의 뜻이 그렇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요즘 따라 눈치 따윈 아예 어디 갖다 버린 것처럼 구는 진무혁은 엉뚱한 소리를 하며 민재의 속을 뒤집어놨다.

“저녁에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화 풀어.”

“내가 무슨 화를 냈다고…….”

말을 하다 말고서 민재는 무혁을 똑바로 마주했다.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그는, 정말로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참 잘생겼다.

어제는 하도 무심하기에 제게 질려서 이러나 싶었는데,

무혁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단 얼굴로 민재의 화를 풀어주겠다며 연신 말을 보탰다.

“오랜만에 중식이나 먹으러 갈까. 아니면 다른 메뉴도 좋고.”

“할 얘기가 있어.”

아마 이 말을 하게 되면 그땐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자각해버린 이상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다.

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더는 부정하고 싶지 않다.

“오늘, 퇴근 늦어?”

이쯤 하면 알아들었을 테지, 확신하는 민재를 앞에 두고 무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체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민재도 점점 속이 탔다.

“딱히 늦을 이유는 없지.”

“길 건너에 괜찮은 파스타 집이 있어. 거기서 저녁 먹자.”

“예약해둘게.”

물 흐르듯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민재는 애써 숨을 골랐다.

순서가 잘못되었을 수는 있찌만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히 하고 싶다.

‘이대로는 싫어.’

이 결혼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갖고 싶었다.

비록 서로의 필요 때문에 시작했다고 해도, 더는 가짜라는 꼬리표를 달고 싶지 않다.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 이따가 봐.”

심각한 민재를 앞에 두고 무혁 역시 진지하게 답했다.

아주 잠시 손끝이 스치고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

형부가 입원한 VIP 병동에서는 언제나 고약한 냄새가 났다.

홍옥자는 이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다.

병원 냄새를 지으려고 뿌려둔 향기겠지만, 이런 걸로 덮는다 한들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언니.”

“옥자가 왔구나.”

촌스러운 제 이름도 언니가 불러주면 품위 있어 보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제 이름을 이렇게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언니 뿐이다.

무표정한 언니도 여동생을 마주할 때나 잠시나마 미소를 머금었다.

“왜 또 이렇게 야위었어.”

“잠을 잘 못 자거든.”

“형부는?”

“여전하지.”

삐, 삐, 울리는 기계음과 여러 장치를 달아 중태에 빠진 성 회장의 숨줄을 근근히 이어나가고 있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는 걸 보면 잘하면 의식이 돌아올 희망이 있다.

“지난번에 한 얘기 생각해 봤어?”

“그 얘기는 그만하자.”

“하지만 언니.”

석민재에 대해서는 진작 언질을 줬음에도 언니의 눈동자에 더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벌써 삼십 년이 지났다.

남편까지 쓰러진 상황에 홀로 남은 언니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은 채 그저 여위어갔다.

“천벌이라고 했었지.”

아이가 사라진 이후로 언니의 하루하루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혜성 가 어른들의 완강한 반대로, 아이의 실종은 어영부영 진을 빼다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반쯤은 고의였다는 걸.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어른들은 아이의 실종을 무기 삼아 대놓고 이혼을 종용했다.

“그런 말은 잊어버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 알잖아.”

“준범이 그 애가 그랬어. 이건 모두 내 잘못이라고.”

어른들의 압력으로 원치 않게 떠맡게 된 양아들은 사라진 가엾은 딸의 존재 자체를 모질게 부정했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의 자리를 빼앗았으면서, 성준범은 뻔뻔한 얼굴로 너덜너덜해진 언니의 심장에 대못을 박았다.

“언니.”

“나는 이제 모르겠어.”

지쳐버린 언니는 금방이라도 연기가 되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홍옥자는 그런 언니의 손을 꼭 잡고서 애써 고개를 저었다.

“정말 마지막이야. 그냥 한 번만, 날 믿고 만나봐 줘. 응?”

“옥자야.”

“그 애가 우리 아린이라는 말이 아니야. 그냥, 언니도 그 애를 보면 내가 왜 그러는지 알게 될 거야.”

강권하는 여동생의 말에 언니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도 분명 그 애를 보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가짜들과 달리 석민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언니를 닮았다.

“안 팀장한테 연락 넣어. 되도록 빨리 석민재를 이쪽으로 보내 달라고.”

“진 변호사가 아니라요?”

“그래. 안 팀장 쪽으로 연락을 넣어줘.”

아마 제 계획을 눈치챈다면 진무혁은 절대 그냥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석민재는 어디까지나 이 계획을 위해 준비된 요소일 뿐이라고 했지만 눈빛만 봐도 그게 아니라는 건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긴 했지.’

요즘 들어 제 말에 유독 토를 다는 비서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사무실에 돌아온 후, 홍 사장은 쓰레기통에 버린 검사지를 꺼내서는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나 홍옥자인데, 부탁한 거 확보했어?”

민재의 객실에 버려진 칫솔 두 개. 둘 중 하나는 석민재의 것일 테니 그거라면 더욱 확실한 물증이 된다.

뭐든 확실히 해두는 건 나쁘지 않을 테니까.

비서의 눈을 피해 그녀는 한 번 더 검사를 의뢰했다.

***

식사가 끝나갈 즈음 무혁은 포크를 내려놓고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서, 하고 싶단 얘기가 뭔데?”

“우리 계약서를 수정하고 싶어.”

“구체적으로 어느 조항을?”

“기간, 애매하게 연장 가능하다는 그 문장이 싫어.”

무슨 뜻인지 분명 알고 있을 텐데 무혁은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길게, 아니면 짧게?”

초조한 민재와 달리 그는 여유가 넘쳤다. 그래서 더 확신할 수 있었다.

다 알고 저러는 거구나.

마음 같아서는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밉다.

민재는 잔뜩 눈을 흘기며 애써 태연한 텐션을 유지했다.

“내가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싶을 때까지.”

“내 뜻은 반영 안 되는 건가?”

“어차피 무혁 씬 처음부터 그만둘 생각이 없었잖아.”

시한부라는 조건조차도 이제 보니 생색내기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러니 더 얄미운 거다.

기회 좋게 찾아와 제 마음을 흔든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제 남편 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지 오래다.

“내가 순진했지. 난 지금껏 당신이 날 원망하고 있는 줄만 알았거든.”

“원망이야 했었지. 그것도 아주 처절하게.”

입으로는 원망을 말하면서 무혁의 눈동자에는 애틋함이 묻어났다.

강아지처럼 순진한 눈망울을 보니 못된 말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저 한 가지.

“무혁 씨는 날 좋아하잖아.”

“당연하지. 석민재는 내 아내니까.”

“말장난하지 말고, 내 눈 똑바로 봐.”

변호사가 되더니 말솜씨만 더 늘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식을 떨어본들 속에 품은 진심만은 절대로 숨길 수 없다.

“당신은 날 좋아해. 그래서 결혼까지 한 거고.”

“……노 코멘트.”

뜻 모를 미소를 머금은 채 그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러고는 곁에 놓인 냅킨을 들고서 민재의 입술을 살며시 닦아줬다.

날렵하면서도 섬세한 손길 하나에마저 다정함이 맴돌았다.

어째서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다 알고 있어.”

경고처럼 쏟아내는 민재의 말에 무혁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그래. 또다시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뭐?”

“네 맘대로 완벽하게 길들여놓고 또 도망쳐버리면 난 다시 혼자가 되겠지. 안 그래, 석민재?”

정말로 이 관계를 유지할 거라면, 아주 오랫동안 애써 묻어두고 싶었던 서로의 진심을 파헤쳐야 한다.

원망이 서린 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민재의 업보인 셈이다.

“보다시피 네가 원한다면 난 언제든 네 개가 되어줄 거야. 그러니 내 목줄을 채울 거라면 약속해. 절대로, 다시는 날 버리지 않겠다고.”

그가 내민 조건에 말문이 막혔다.

이 관계의 주도권은 언제나 그의 손에 쥐어져 있다고 생각했건만 그는 순순히 제 입에 재갈을 물리고서 민재의 손에 고삐를 넘겨줬다.

“약속?”

“아이를 갖고 싶어. 너와 날 반반 닮은 아이를.”

“아이라면…….”

“그 아이는 우리가 함께했단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어주겠지. 양육권은 당연히 내 쪽에 있을 거야.”

아이라. 결혼조차 엄두도 못 내던 자신이 엄마가 된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진무혁을 닮은 아이라니.

상상하니 어쩐지 정말로 보고 싶어졌다.

“귀엽겠다.”

“어차피 내겐 선택권이 없어. 그러니 네 말대로, 이 결혼은 네가 원할 때까지는 얼마든지 지속할 수 있겠지.”

철저하게 을을 자처하는 그의 말이 어쩐지 가슴 아프게 들렸다.

선을 넘을지 말지 선택은 제 몫이다.

민재는 대답 대신 카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내가 살게.”

“마음대로 해.”

평소의 진무혁이라면 이러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만은 그러지 않았다.

스스로를 개라고 지칭할 만큼 뻔뻔스러워진 이 남자는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기까지 얌전히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그는 지금껏, 발톱을 숨기고서 순종적인 남편 흉내를 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집에 가자.”

이번에야말로 민재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평소엔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던 이 남자도, 결국 제 앞에서는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애가 됐다.

그런 당신을 내가 어떻게 버릴까.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목덜미에 속삭이는 숨결이 벌써 뜨겁다.

그러고 보니 내일 출근은 할 수 있을까, 벌써 자신이 없어졌다.

“오랜만이네.”

“난 여전히 잘하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 뻔뻔해, 진무혁.”

이제야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쾅, 하고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민재의 손에 들린 가방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 소리는 마치 즐거운 밤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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