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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결혼-47화 (47/103)

47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장님, 검사 결과입니다.”

홍옥자 사장은 비서가 가져온 봉투를 받아들었다.

유전자 감식을 부탁한 업체에서는 의뢰인 이외의 사람이 함부로 열어볼 수 없도록 봉투에 밀랍을 녹여 만든 인장을 찍어놓았다.

“이거란 말이지.”

더욱 확실한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홍 사장은 미리 구해둔 언니의머리카락과 민재의 머리카락을 비교했다.

“나가 봐.”

어지간해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녀조차도 이 순간만은 심장이 떨렸다.

망설일 필요가 뭐가 있을까, 홍 사장은 거칠게 봉투를 찢고서 단숨에 결과를 확인했다.

[99.9퍼센트 불일치, 친자 관계가 아닙니다.]

무정하게 쓰인 글자를 마주하고도 홍 사장은 쉽사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말로 제 예감이 틀렸다는 걸까.

아니라는 결과지를 받아들고도 홍 사장은 이 결과지 쪽이 오히려 의심스러워졌다.

분명 검사용 머리카락에는 모근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없어서 결과가 잘못된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닮을 수 있을까.

의심하는 홍 사장을 두고 비서가 조사 결과를 가져왔다.

“가족관계등록부에는 확실히 친자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입양된 게 아니란 말이지.”

“예. 조부가 직접, 출생 신고를 마쳤습니다.”

서류상에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의심할 여지는 없는 모양인데.

마음 같아서는 호적을 고쳐서라도 어떻게든 손을 쓰고 싶지만, 대쪽같은 그녀의 언니는 그런 얕은 술수에 당해줄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홍 사장은 손을 까딱이며 진무혁의 번호를 찾았다.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그녀답지 않게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은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저 잠시, 사람들 사이에 의심을 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누군가의 신경을 건드릴 타입은 아니니, 곁에 두신다고 불편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진무혁의 호언장담을 듣고도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제 언니를 닮았다 한들 대역을 세우는 게 과연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실물을 보고 나니 오히려 욕심이 났다.

그동안 스스로를 행방불명된 아이라 자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골수이식을 받은 탓에 유전자가 변한 거라고 우기는 사람부터, 굿이라도 해 아이를 찾아주겠다는 무속인까지.

갖은 방법을 모두 동원해봐도 누구 하나 진짜 성아린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발견해 낸 사람이 없다.

혹시라도 시설에 맡겨졌을까 전국의 명단을 모두 뒤져봤지만, 그 당시 그 또래의 아이가 시설에 입소한 흔적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해외로 입양된 건 아닐까 싶어 와병을 핑계로 언니와 함께 세계 각지를 떠돌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대체 어디 있는 거니.’

차라리 사체라도 나왔다면 죽었다고 포기라도 할 수 있을 텐데.

행방을 알 수 없는 아이에 매달리는 사이 이대로라면 성 회장 부부가 평생 일궈온 혜성이 저 망나니 같은 성준범 손에 넘어가게 생겼다.

저쪽은 벌써 사모펀드까지 끌어들여 어떻게든 경영권을 탈취할 생각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도 요즘 석민재를 끼고 다닌 덕분인지 혜성 이사회 내부에서는 바로 반응이 왔다.

[어쩌면, 성 회장의 딸이 살아 있을지도 몰라.]

누구에게 살뜰한 적 없었던 홍 사장이 애지중지하는 여자는 젊은 시절 성 회장의 부인과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단순히 생김새를 떠나 분위기까지 비슷하기는 쉽지 않은데.

그럴 리가 없다고 다들 말을 하면서도 분위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준범에게 이미 제대로 찍혀 혼이 났다더니, 그 얼굴을 본 거라면 혼이 나간 것도 무리는 아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 그 정도로 닮은 거라면 그것도 인연이니까.

“차라리 결혼은 안 시키는 게 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보면 볼수록 욕심이 나는 아이다.

매사에 성질이 급한 자신과 달리 민재는 숨 쉬는 모습조차 무서울 만큼 제 언니를 빼다 박았다.

정말로 조카가 아니더라도 제 옆에 두고 평생 보고 싶은데 옆에 있는 진무혁이 영 거슬렸다.

‘그놈은 진심이니까.’

진무혁은 누가 오라가라 한다고 네, 알겠습니다 하는 놈이 아니다.

그런 놈이 민재가 아프다는 말에 눈이 돌아 달려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석민재 본인이 진무혁이 아니면 안 된다고 목을 매는 게 아니라면, 그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나눠볼수록 석민재의 결혼은 좋아서라기보단 상황에 떠밀린 것에 가까웠다.

그런 것까지 언니를 닮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형부가 한 짓을 떠올리면 지금도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언니한테 가자.”

“사장님, 하지만!”

“어차피 친자식이든 아니든 알게 뭐야.”

하는 짓이 착해서 걱정했더니 소영하 앞에서 하는 걸 보면 만만히 당하고만 있을 성격은 더더욱 아니라 더 마음에 들었다.

다른 문제는 다 제치더라도, 일단 까다롭기 짝이 없는 제 마음에 들었으니 석민재는 특별 대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홍 사장은 검사 결과를 구겨버렸다.

이깟 종이 따위가 뭐 대수라고, 루비 홍은 자신이 원하는 바든 뭐든 이뤄내는 여자였다.

그러니 우선은 언니부터 설득해야 한다. 그녀는 곧장 성 회장이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

아마 지금쯤이면 제법 둘만의 시간을 즐겼으리라.

무혁은 열 시가 넘은 걸 확인하고 집에 돌아왔다.

“진 서방, 왔나.”

“네, 할머님.”

이야기를 나누다 지친 건지 민재는 아예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 손녀의 머리를 토닥여주며 할머니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에 들어갔다.

“오늘은 주무시고 가시죠.”

“안 영감님이 데리러 오신다는구나. 먼저 가려다가,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렸지.”

할머니 옆에는 왠 꾸러미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분명 민재의 옷장 깊은 곳에 들어 있어서 무혁도 존재만 알고 있었을 뿐, 열어본 적이 없었다.

“이게 뭔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우리 민재가 버려져 있을 때 입고 있던 배냇저고리라네.”

보육원에 말은 해뒀지만, 아들 내외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할머니는 내심 민재의 친부모가 찾아오지 않기를 빌었다.

저밖에 모르는 이 어여쁜 손녀를 어찌하면 좋을까.

조금은 주책인 제 아들도, 정 많고 야무졌던 며느리도 그렇게 보낼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할머니도 민재가 없었더라면 아들 내외의 죽음을 쉬이 이겨내지 못했을 터였다.

“설령 민재 부모를 찾더라도, 자네만은 반드시 민재 옆에 있어 줬으면 해.”

“당연한 일입니다.”

무혁을 못 믿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쉽사리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잠든 손녀는 여전히 아이 같아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주며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자식을 서두르라고 한 건데. 자네나 민재나 피붙이가 아쉬운 처지 아닌가.”

할머니의 은근한 권유에 무혁은 곤혹스러운 기색을 감출 길이 없었다.

물론 그런 미래를 그려보지 않았다지만 무혁은 아이 문제만은 쉽사리 응할 수 없었다.

“저희 부모님은 제가 여덟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들었네. 그 이후로는 아버님의 친구분 댁에서 자랐다면서.”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어른 앞이라 매우 절제했지만 순간의 침묵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모를 수는 없다.

애써 담담한 듯 말해도 진무혁의 눈동자 속에는 그가 차마 말로 뱉어내지 못한 오만가지 감정들이 녹아 있었다.

“자네도 자네 아버지처럼 될까 두려운가?”

“저 없이, 민재가 혼자 남게 되는 건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 민재는 야무지니 어떻게든…….”

“민재의 모든 기억 속에 제가 존재하지 않는 게 싫습니다.”

예상치도 못한 맹랑한 대답이 돌아왔다.

할머니는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날이 선 무혁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학생 때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았던 탓에 할머니도 이제야 진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듣자 하니 요령이 좋아 제힘으로 재산도 많이 불렸고, 업계 내에서는 아직 젊은 데도 실력을 인정받은 인재라 했다.

아무리 고아라 해도 무엇 하나 아쉬울 처지가 아닐 텐데 어째서 저런 이가 민재를 이리도 못 놓는 걸까.

어쩌면 할머니에게 하나 남은 손녀가 전부였듯이, 저 외로운 이에게 민재는 첫사랑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재도 알고 있나?”

“그럴 리가요.”

제 남편의 속도 모르고, 손녀는 할머니를 만난 기쁨에 젖어 진작에 잠이 들었다.

물 먹은 천처럼 늘어진 민재를 침실에 데려다 놓고 무혁은 잘 자라는 키스를 잊지 않았다.

다정도 병이라더니. 할머니도 이제야 조금은 진짜 진무혁이 어떤 사람인지 알 법도 같았다.

“우리 민재가 그리도 좋은가?”

“소중합니다.”

맹랑한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는 그런 상투적인 말이 아닌 소중하다는 말.

손길 하나조차 조심스러운 저 이는 이미 민재를 손에 넣었음에도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엇이 저 이를 저토록 불안하게 하는 건지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진무혁은 절대로 석민재를 상처입히지 않을 것이다.

제 손녀를 끔찍이 여기는 무혁을 보며 할머니도 비로소 마음의 짐을 덜었다.

“이건 자네가 보관해주게. 안 영감님이 알아봐준다고 했으니, 혹시라도 실마리가 잡히면 이것도 어떻게든 쓰이겠지.”

결혼식 날 받아온 이후로 깊숙이 처박아놓고 펴본 흔적 하나 없으니 차라리 무혁에게 맡겨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친부모의 단서가 될 짐은 무혁에게 맡기고 할머니는 안 대표와 함께 병원에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여사님, 그만 가시지요.”

할머니는 잠든 민재를 두고 방문을 닫았다.

정말로 할머니밖에 모르던 손녀였는데, 어쩐지 이제야 새삼 민재가 정말로 결혼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아들을 장가보낼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어쩐지 딸을 시집보내는 것처럼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자네가 우리 민재를 잘 돌봐주게.”

“명심하겠습니다.”

깍듯이 배웅하는 무혁을 두고 할머니는 힘겨운 걸음을 내디뎠다.

제대로 옹알이도 못 하던 그 작던 아이도 이제는 이렇게 크게 자라 제 인연을 만난 모양이다.

잠자는 공주를 지키는 기사처럼, 무혁의 모든 신경은 언제나 민재를 향해 있었다.

저게 득일지 독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 제 손녀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건 이 사내뿐이다.

“민재를 잘 부탁하네.”

그래도 잘 지내는 모습을 봤으니 이제는 언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

할머니는 무혁에게 뒷일을 맡기고 안 대표와 함께 집을 떠났다.

***

집에 돌아오자마자 장미는 문을 걸어 잠그고 방에 틀어박혔다.

대놓고 약을 올리는 진무혁도 원망스럽지만 역시 제일 용서가 안 되는 건 그 여자였다.

“석민재…….”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확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었는데.

함부로 움직이기에는 홍옥자 사장이 마음에 걸렸다.

“장미야.”

“아빠!!”

조원식의 눈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딸이라, 장미는 제 아빠를 보자마자 소매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난 도무지 이해가 안 돼. 그 여자가 대체 뭐길래!”

“무혁이 놈에게 다녀온 모양이로구나.”

오갈 데 없는 고아를 데려다 먹이고 입히고 키워줬음에도 은혜도 모르고.

게다가 하필이면 그런 여자를 택한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놈은 내버려 둬라.”

“아빠!”

“그놈은 이미 글렀어.”

검찰을 그만두고 돌연 미국행을 택했을 때만 해도, 일이 이 지경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잠시 방황하고 곧 제 품에 돌아온다면, 너그러이 있는 곳을 마련해주고 후계자로 키울 생각이었다.

누구를 닮은 건지. 고지식하고 속이 훤히 보이던 제 아비와 달리 무혁은 홍옥자의 뒤에 숨어 교묘하게 제 세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몰래 심어둔 박 뭐라는 변호사도 금세 들켜 안 팀장의 손에 내쳐졌다.

사실상 A&Z의 후계자인 안종인의 막내아들조차, 남들 눈에 신기할 정도로 석민재를 싸고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석민재. 그 여자 하나만 없었더라도 모든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여자가 너무 싫어. 아빠, 걔 좀 제발 어떻게 해줘.”

“안 그래도 아빠가 다 알아보고 있단다.”

이제는 귀여운 제 딸의 눈에 눈물까지 나게 했으니 석민재만은 절대로 곱게 넘어갈 수 없다.

안 그래도 생긴 게 그래서 그런지, 요즘 들어 업계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홍옥자 사장 옆에 붙어 다니는 묘령의 여자가 꼭 젊은 시절 성 회장 부인의 모습을 빼다 박았다고.

그 성질 나쁘기로 소문난 홍옥자가 사람을 달고 다니는 것도 신기한데.

보란 듯이 옆에 달고 다닌 덕분에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의심 몇 가지가 피어났다.

‘그래서 석민재였구나.’

그러면 그렇지. 굳이 결혼까지 서두르며 석민재를 놓지 못한 이유가 이제야 드러나기 시작했다.

성준범 이사조차도 소영하를 완전히 버려놨다며 석민재에 대해 공공연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클라이언트께서 그렇게 나오신다면야 이쪽도 마냥 손을 놓고 있을 필요가 없다.

석민재 하나만 사라진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문제는 결국 다시 제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아빠가 어떻게든 할 거니 걱정하지 말렴. 장미야.”

그들의 손을 빌리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이제는 수단도 방법도 가릴 처지가 못 된다.

제 친구 진이한이 그랬듯이.

석민재 하나만 사라지면 모든 일은 다시 제 뜻대로 굴러가게 될 것이다.

사람 목숨 하나 끊어놓는 것 정도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용히.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것은 다시 원래 자리를 되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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