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아직은 너무 일러.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까. 민재는 옷을 챙겨 입으며 고민에 빠졌다.
지금쯤 병실에 있어야 할 분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걸까.
“드세요.”
급하게나마 셔츠를 걸치고 나온 무혁이 두 노인에게 다과를 대접했다.
비록 이런 형태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드디어 할머니 앞에 손녀가 사는 집을 보여드릴 수 있게 됐다.
“집이 좋구나. 우리 집도 그대로 뒀다면서?”
“그쪽은 천천히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계약이 끝나고 돌아갈 곳이었지만, 이대로 지낼 거라면 그 집은 슬슬 정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건 다 정리하게 되더라도 부모님의 유품만은 챙겨와야 할 텐데.
계약이 언제까지 이어지게 될지 확정되지 않는 이상 그쪽도 쉽게 손을 대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말이다.”
옷을 입고 나오는 민재를 보며 할머니는 무혁의 방 쪽을 힐끔 바라봤다.
구경을 하면서도 안방에는 거의 다 민재의 물건만 보이고, 서재로 보이는 방에는 원룸처럼 침대가 놓여 있다.
“너희 혹시 각방 쓰니?”
“각방이요?”
이 집은 거실을 중심으로 두 사람의 공간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무혁의 집은 모두 현관을 기준으로 우측 공간에 모여 있고, 민재는 주방과 가까운 안방에서 모든 용무를 해결했다.
“에이, 할머니도 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가 가끔 밤새워 일하느라 침대를 뒀습니다. 혹시나 저 때문에 민재가 잠을 설치면 곤란하니까요.”
“우리 민재가 잠을 설친다고?”
할머니는 손녀의 잠버릇을 알아도 너무 잘 알고 있다.
머리만 가져다 대면 금세 잠이 들고, 일단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게 잔다.
술을 마신 거라면 모를까.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도 모조리 꿰고 있는 할머니 앞에서 어설픈 거짓말 같은 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며칠 전에 싸워서 그래요. 제가 홧김에 쫓아냈거든요.”
할머니를 이해시키기 위해 민재는 눈물을 머금고 악당을 자처하기로 했다.
야속하게도 할머니는 민재의 거짓말을 의심하기는커녕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할머니도 참!”
“우리 손녀 때문에 자네가 고생이 많아.”
남들 앞에서는 무심한 민재도 할머니 눈에는 한없이 응석받이라서.
무혁은 한 술 더 뜨며 맞장구를 쳤다.
“과찬이십니다. 이건 전부 민재를 화나게 한 제 잘못이 큽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아까 그걸 보면 둘이 화해는 제대로 한 모양이로구나?”
게슴츠레 눈을 뜬 안 대표가 민재와 무혁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그 시선 속에 무슨 의미가 담긴 건지는 모를 래야 모를 수가 없다.
이걸 대체 뭐라고 수습해야 좋을까.
쥐구멍에 숨고 싶은 민재와 달리 무혁은 무심한 얼굴로 차갑게 받아쳤다.
“노망도 적당히 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뭐야, 이놈이!”
안 대표는 다시금 지팡이를 거머쥐었다.
그가 뭐라고 한마디를 더 보태려던 찰나 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내 손님일 거야.”
누가 온 걸까, 무혁이 문을 열자마자 곧 분노한 안 팀장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아버지!! 대체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씩씩대는 안 팀장은 곧 옆에 앉은 민재네 할머니를 보고 꾸벅 인사부터 했다.
두 사람 다 민재의 결혼식 때 만나 안면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드님께서 우리 민재를 많이 보살펴 주셨다죠.”
“뭐, 제 조카라고 생각하고 예뻐하곤 했습니다.”
음,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무려 예뻐하셨다는 상사를 보며 민재는 애써 말을 아꼈다.
지금이나 ‘우리 석민재, 우리 석민재’ 거리며 잘해주는 거지.
들어오고 처음 몇 년간 민재도 안 팀장 밑에서 구르며 눈물깨나 쏟은 전적이 있다.
“예, 이놈이 바로 제 못난 막내 아들놈이지요. 봉구야, 인사 올려라. 이분이 네 새어머니 될 분이시다.”
“뭐라고요?”
안 대표의 폭탄선언에 민재가 더 놀랐다. 어느새 얘기가 거기까지 흘러간 걸까.
아들인 안 팀장도 무슨 얘긴지 몰라 민재 쪽을 보며 눈치를 줬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그게 말이죠.’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좋을까.
보다 못한 무혁이 개입해 이 상황을 더할 나위 없이 명쾌하게 해결해줬다.
“일단 두 분의 가정사는 알아서 해결하세요.”
“네. 아버지는 저랑 얘기부터 좀 하시죠.”
안 팀장이 노인을 끌고 나가고 나서야 민재는 염려 가득한 얼굴로 할머니를 살폈다.
이 연세에 재혼은 둘째치고 건강은 괜찮으신 걸까.
“이렇게 병원에서 나오셔도 괜찮은 거예요?”
“검사 결과가 잘 나와서 그래. 네가 결혼한 후로는 훨씬 더 건강해졌다더구나.”
“정말요?”
할머니가 가져온 검사 결과까지 보고 나서야 민재도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그동안 줄곧 위태롭기만 했던 할머니의 심장도 몇 차례의 수술 덕분에 이제는 제법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차를 가지고 온 모양이야. 할머님이랑 천천히 말씀 나눠.”
“무혁 씨.”
“나는 오늘 서재에서 잘게.”
저것도 아마 핑계겠지만, 무혁은 일부러 할머니와 단둘이 있을 수 있게 기꺼이 자리를 양보해줬다.
굳이 집 밖에 나가면서까지 저럴 필요는 없는데.
세심한 마음 씀씀이에 괜히 더 속이 쓰렸다.
“여기가 침실이에요. 제 물건들은 대부분 여기에 있어요.”
방에 걸린 드레스까지 둘러보며 할머니는 야무지게 정돈된 살림을 두루 살폈다.
언제나 못 미덥기만 한 손녀가 제 손으로 이렇게 해놓을 리는 만무하니 할머니는 금세 무혁의 솜씨라는 걸 알아차렸다.
“네가 참 남편 하나는 잘 만났구나.”
“얼마나 깐깐한지 몰라요. 속옷 한 장이라도 다른 데 넣으면 얼마나 잔소리가 심한데요.”
“넌 좀 그런 소릴 들어야 해. 내가 더 가르쳐서 결혼을 시켰어야 했는데.”
“할머니도 참.”
얼굴을 보자마자 잔소리부터 하다니. 그래도 이렇게 싫은 소리를 할 수 있을 만큼 병세가 회복된 게 더 기뻤다.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한 손녀를 앞에 두고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잘 살면서 울긴 왜 울어. 보아하니 참 재미나게 사는 것 같은데.”
“응. 할머니 말대로 결혼하길 잘한 것 같아요.”
할머니만 아니었다면 결혼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텐데.
할머니가 이렇게 안정된 걸 보면 이제 정말 더는 바랄 게 없다.
“우리 민재가 이렇게 여려서 어찌할꼬, 이 어린 것을 혼자 두고 내가 어찌 갈까.”
괜히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민재는 애써 숨을 삼키고서 환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아까 그 얘기는 뭐예요?”
“안 씨 영감님이 그러시더구나. 혹 내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족의 연을 맺어두면 그 집에서 널 보살펴 줄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깜짝 놀랐다. 할머니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영감도 먼저 보내고, 내가 이 나이에 새 사람을 만날 줄 어떻게 알았겠니?”
“하지만!”
“민재야. 지금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네가 비빌 언덕 하나는 있어야지.”
대체 할머니는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걸까.
어쩌면 이 결혼이 가짜라는 사실조차도 이미 알고 계시는 걸지도 모른다.
“네가 결혼을 서두른 것도 이 늙은이 때문이겠지.”
“아냐. 아니야, 할머니. 나는 그냥…….”
모르실 거라고. 잘 속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민재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내 보물. 우리 강아지. 이 할미가 널 두고 어찌 눈을 감을까.”
이제껏 할머니를 지탱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런 할머니가 있었기에 민재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할머니가 있었으니까. 세상 모두가 적이 되더라도 할머니 한 사람만 있으면 충분했다.
“안 영감님이 네 친부모도 찾아주겠다더구나. 분명 그쪽도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게야.”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보육원 문에 버리고 간 것도 모자라 삼십 년이 넘게 찾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저쪽은 민재 따위는 아예 잊어버렸을 텐데 왜 굳이 찾을까.
하지만 할머니는 그런 민재의 생각을 딱 잘라 부정했다.
“제 새끼를 떼놓은 부모가 어찌 하루라도 멀쩡히 살 수 있을까. 그러니까 민재야.”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소중한 할머니의 말씀이지만 민재도 이 문제만큼은 쉽사리 결론을 내리기 힘들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두려움이 앞섰다.
이제야 부모를 찾는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차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
“부탁하신 검사 결과입니다.”
미리 홍 사장 쪽에 심어뒀던 직원은 자동차 열쇠와 함께 민재의 유전자 검사지를 넘겼다.
처음 샘플을 손에 넣었을 때부터, 그는 다른 여자의 머리카락을 대신 넣고 민재의 머리카락 샘플을 빼돌렸다.
“이쪽이 원래 있던 샘플과 비교한 결과입니다.”
“열어보셨습니까?”
“그럴 리가요.”
아마 지금쯤이면 홍 사장도 결과지를 받았으리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현찰로 수고비를 건네주고 무혁은 제 차에 홀로 앉아 봉투를 바라봤다.
왜 굳이 이런 짓을 했을까.
그냥 샘플을 없애버리는 게 나았을 테지만 무혁은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을 버리지 못했다.
아닐 테지만. 그럴 리가 없을 테지만.
정말로 아니라면 제 눈으로 확인해두는 게 낫다.
‘비슷해도 너무 비슷하니까.’
샘플에는 가명을 썼다.
두 샘플의 유전자 일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한쪽에는 민재의 머리카락을, 나머지 한쪽에는 홍옥자의 것을 넣었다.
처음 미국에서 홍 사장의 언니를 본 순간 무혁은 제일 먼저 민재를 떠올렸다.
홍 사장이 의심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조용한 성격도, 쉽게 웃지 않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제 속내를 쉽게 내보이지 않는다는 점까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동생 쪽과 달리 언니는 원래도 속 모를 얼굴로 제 마음 한 자락 하나 내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만 미쳐갈밖에.
만약 정말로 민재가 ‘그 아이’라면, 홍옥자와는 3촌 관계니 모계 혈통의 유전자에서 유사성을 찾아낼 수 있을 터.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무혁은 봉투를 열어 검사 내용을 확인했다.
[DNA 영역에서 염기 서열을 분석한 결과 모두 일치합니다.]
외할머니에게 어머니에게, 다시 조카들에게까지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는 모계를 통해 유전된다.
[모계에서의 혈연 관계가 성립합니다.]
서류를 구기고서 무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라지만 홍옥자의 성급함이 화를 불렀다.
“아직은 아니야.”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했더라면 굳이 샘플을 바꿀 필요가 없다지만.
지금은 설령 이 검사 결과가 사실이라 해도 영 때가 좋지 않다.
이제 겨우 마음을 열기 시작한 민재가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내버려 둘 수 없다.
“내 속도 모르고.”
뒤늦게 생모를 만난다 한들 민재는 이미 결혼한 후니까.
누가 뭐라 해도 석민재의 ‘보호자’는 여전히 그일 것이다.
어째서 결혼이어야 했는지 아마 민재는 전혀 모를 테지만,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무혁은 쓴웃음을 삼켰다.
병원에 사람을 붙여둬서 안 대표가 올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민재가 하는 어설픈 유혹에는 넘어가고 싶어도 넘어갈 수 없었다.
일부러 관심을 내보이지 않자 민재는 천연덕스레 다가와서는 그의 관심을 받기 위해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행복한 고문이었다.
‘만약 그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민재를 홍 사장 옆에 붙인 건 고의가 다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혜성 가의 개싸움에 민재 본인이 말려들게 된다면 그건 곤란하다.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어떻게 되찾았는데. 어떻게 손에 넣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서 민재는 그를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 배보단 다른 게 더 고픈 것 같은데.
민재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서 짓궂게 그의 심장을 콕콕 찔러댔다.
촉촉이 젖은 머리카락, 동그란 눈동자, 샤워 가운 아래로 보이던 예쁜 다리까지.
절대 먹어서는 안 될 금단의 과실처럼 석민재는 무방비한 얼굴로 그를 유혹했다.
완전히 제게 마음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려 했건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뜸을 들일 수 없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제는 무혁 쪽도 여유를 부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밤 열 시, 지금이라면 워싱턴주는 막 일과를 시작할 시간이다.
[ 모든 계획은 변경됐어. 네 도움이 필요해. ]
미국에 있는 파트너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채 일 분도 되지 않아 답장이 왔다.
[ 바라던 바야. ]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이 나라에서는 조원식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안 대표는 무혁에게 포기하라고 했지만, 무혁은 더는 참고 견뎌줄 의향이 조금도 없었다.
방관하고, 견디고, 참아낼수록 상대는 더욱 악랄해질 뿐.
일부러 제 딸을 보내 상황을 보던 조원식도, 이제는 본인이 직접 나설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시애틀에서 아예 허리케인을 몰고 올 수밖에.
“아직은 너무 일러.”
무혁은 CCTV가 닿지 않는 구석으로 향했다.
이 사실은 좀 더 수면 아래에 머물러야 한다.
제 손이 닿았던 검사지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석민재.”
정말로 손이 많이 가는 여자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럽다.
곤란에 빠진 민재가 제 옷자락을 꼭 잡아준다면 행복할 텐데.
적어도 지금의 민재라면 예전처럼 쉬이 제 곁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나야말로 단 한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는걸.”
무혁은 본인은 듣지 못할 고백을 중얼거렸다.
이것이 설령 기만일지라도, 그는 자신의 행동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검사지가 완전히 잿더미가 되는 순간까지 잠자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진실을 모조리 태워버린 불꽃은 실로 아름다웠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