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배보단 다른 게 더 고픈 것 같은데.
일 중독이라 소문이 자자했던 진무혁의 아버지, 진이한 검사는 자연스레 혼인이 늦었다.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기도 전에 아나운서며 재벌가며 여기저기에서 혼담이 밀려들었지만, 그는 내리 일만 하다 그만 법원 속기사와 눈이 맞았다.
부인은 가진 것 없는 고아였지만 진이한 검사는 그런 것으로 사람을 재단하지 않았다.
- 제 아들놈입니다. 무혁이라고 하지요.
검사 월급으로는 셋이 살기 충분하다며, 진 검사는 아내와 하나뿐인 아들을 진심으로 아꼈다.
똘똘한 눈을 한 어린 무혁은 안 대표의 눈에도 잘 자랄 떡잎이었다.
매사에 오냐오냐 자라서 반항적이기만 한 막내아들이 무혁이 놈을 반만 닮았어도 이리 아쉽지는 않았을 텐데.
- 전 아버지처럼 정의로운 검사가 될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말에 어른들은 쓴웃음만 삼켰다.
법복을 입고 그 많은 악당에게 법의 심판을 받게 했건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검사는 언제나 부패하고 악랄한 악의 집단이었다.
진이한 검사의 죽음만 해도 그랬다.
오래 묵은 폭력조직 독사파의 수뇌부는 권력의 중추와도 연결된 탓에, 수사 과정에서 검찰 내외부에서도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다.
차라리 특검 제도를 활용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얘기가 나오며 안 대표 역시 외부 고문으로 참여했다.
- 제가 해보겠습니다.
언제 보복을 당할지 두려워 모두가 피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를 자원해 나선 것이 무혁의 부친, 진이한이었다.
- 진 검사가 나서준다면야. 우리도 적극적으로 협력하지요.
그는 대쪽 같은 성품과 치밀한 수사능력으로 검찰 내부에서도 인망이 두터웠다.
하지만 안 대표만은 그런 진 검사를 말렸다.
- 자네 하나가 나선다고 뭐가 변할 것 같나. 더럽게 얽힌 건이니 손대지 않는 게 좋아.
그런다고 알아주는 사람 하나 있을 리 없는데.
고생을 자처하던 그는 결국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됐다.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는데.’
안 대표는 진 검사의 죽음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백방으로 증거를 알아보는 사이 어린 무혁은 돌봐줄 이 하나 없이 시설에 버려졌다.
“그 애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비루한 집안의 유일한 자랑이었던 진이한의 아들은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가 되어 내몰렸다.
가엾은 그 아이는 결국 어른들의 손에 끌려 장례를 채 다 치르기도 전, 시설에 버려졌다.
뒤늦게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조원식 변호사가 그 애를 데려간 이후였다.
간간이 얼굴을 볼 일이 있었지만 해맑던 그 아이의 미소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굳이 양자로 삼지 않은 건, 제 딸과 결혼을 시킬 속셈이었답니다.”
조원식은 왜 굳이 죽은 친구의 아들을 데려간 걸까.
겉으로는 사이가 좋았다지만, 진이한 검사와 조원식은 굳이 따지자면 물과 기름 같은 존재였다.
정의감과 책임으로 무장한 진이한 검사와 달리 조원식은 돈 되는 일이라면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후, 한참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막내 봉구 놈이 이상한 것을 들고 왔다.
- 아버지, 이거 알고 계셨어요?”
아들놈이 꺼내든 판례를 보고 숨이 막혔다.
모두 다른 사건으로 보이지만 연루된 자들은 대부분 독사파와 관련된 이름이 많았다.
[ 법무법인 조조, 조원식 변호사 ]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의 이름 뒤로 다양한 사건들이 뒤를 따랐다.
살인, 강간, 매춘, 마약. 흉악하기 그지없는 범죄자들은 조원식의 변호에 힘입어 모두 이례적인 감형을 받아냈다.
그 뒤로 수상한 정황을 짚어나갔다. 친한 경찰 간부까지 털어내 겨우 물적 증거를 확보했다지만 그런다 한들 달라질 건 없다.
“사주한 놈이 따로 있다고 해도 죽인 건 다른 자니까. 실행범이 이미 자백해 처벌받은 이상 더는 죄를 물을 수도 없게 되어버렸지요.”
진 검사의 후배들과 함께 정리한 자료는 늘 그렇듯 검찰청 캐비닛 어딘가에 보관되었다.
검사가 된 이후 그 자료를 찾아본 건지 무혁은 동부지검 시절 안 대표를 찾아와 제 부친의 사건에 대해 물었다.
“후회는 한 번이면 족하니 말입니다.”
정말로 조원식 곁에 진무혁을 붙여 뒀다가는 언제 또 제 아비 꼴이 날까 두려웠다.
- 자네 하나가 나선다고 뭐가 변할 것 같나. 더럽게 얽힌 건이니 손대지 않는 게 좋아.
아버지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아들에게 하는 건 그 역시 괴로웠다.
그러니 차라리 검찰을 그만두라고.
안 대표의 권유 때문이었는지 그로부터 얼마 후 무혁은 동부지검에 사표를 내밀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도 여사님 단 한 분뿐입니다.”
미래가 창창한 아이들이, 이런 더러운 일에 얽히는 것을 두고만 봐야 하는 것이 괴롭다지만 그로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법은 너무나 연약한 미봉책일 뿐, 복수는 언제나 개인의 몫이 된다.
“민재가 모쪼록 그 녀석을 잘 잡아줬으면 합니다.”
제 아버지의 일 때문이었는지 진무혁은 그 무엇에도 애착을 보이는 일이 드물었다.
지독할 정도로 일 중독이었지만 인망이 높았던 제 아버지와 달리 친구도 거의 없었다.
사람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아이였다.
그런 녀석이 제법 멀쩡한 여자를 데려와 결혼까지 하려고 나설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랬나 봅니다. 우리 민재 친부모를 찾아주려고 그렇게 애를 쓴 걸 보면.”
“친부모라니요?”
민재 할머니의 말에 안 대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모르셨군요. 우리 민재도 사정이 있는 것을요.”
할머니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서야 안 대표도 조금은 진무혁의 집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다 참으로 외로운 처지라서. 어쩌면 같은 아픔에 끌렸던 걸지도 모른다.
무혁은 곧 깨질 유리처럼 위태로운 아이였다.
조원식 밑에 있던 시절에는 특히나, 막 나가던 제 아들놈보다도 더 위험한 눈빛을 풍기곤 했다.
저러다 자살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던 녀석이었는데.
그런 놈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토록 순한 척을 하며 제 발톱을 숨기기 바빴다.
“어쩌면 무혁이 놈은 민재를 만나 다행인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새는 민재를 돌보느라 바쁜 모양이었어요.”
예전의 진무혁은 언제든 조원식과 함께 파멸해버릴 것 같던 놈이었다.
그래도 석민재라는 억제제 하나가 붙어 있으면 조금은 다른 길을 찾아줄지도 모른다.
또다시 제 아버지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어서는 안 될 테니까.
“가시지요.”
민재네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서 안 대표는 모자를 눌러쓰고 외출 준비에 나섰다.
***
“뭔가 아쉬워.”
정말로 일만 하다 끝난 휴가였다.
고작 이틀 사이, 강렬한 햇빛 아래 태닝을 마친 안 팀장은 제법 거뭇해진 피부를 뽐내며 민재 부부를 비웃었다.
“너희는 아침부터 뭘 했길래 홍 사장이 문을 부쉈단 소리가 들려.”
“먼저 올라가시죠.”
“홍 사장이 차는 아예 서울로 실어다 줄 테니까 자기 전용기를 타고 가자는데? 석민재, 너 차 오래 타는 거 싫어하잖아.”
안 팀장은 작정하고 민재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분명 틀린 말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민재는 잠시나마 무혁의 눈치를 살폈다.
“오래 운전하면 힘들지 않을까?”
“난 괜찮은데. 너만 옆에 있으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무혁은 대놓고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명분보다는 실리가 앞섰다.
차로 네 시간이 넘는 거리도 비행기로는 한 시간도 안 걸린다는 말에 넘어가 민재는 결국 일행과 함께 홍 사장의 전세기에 몸을 실었다.
“이래서 그냥 차를 타고 가자고 한 건데.”
“에이, 그래도 금방 집에 갈 수 있잖아.”
비행기 안에서도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무혁은 내내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밖만 바라봤다.
아침의 일 때문인지 무혁은 내내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아보였다.
“언니, 나랑 종이접기하자.”
“응. 그래.”
어색한 것도 잠시였다. 문 변호사의 아이들이 놀아달라며 떼를 쓴 탓에 민재는 비행기 안에서도 계속 바빴다.
“진 변. 아까 홍 사장님이 자기들 방문을 부쉈다는 거 진짜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아침부터 나만 빼놓고 둘이서 뭘 그렇게 바쁜 너희가 잘못한 거야.”
남의 부부 침실에 테러를 자행한 주제에 홍 사장은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듯 당당하기 그지없다.
그 덕분에 무혁과는 제대로 대화 한 번 나눌 겨를이 없었다.
“집까지는 우리 차로 모셔다드릴 거야. 차는 이따가 도착하는 대로 보낼 테니 다들 푹 쉬도록 해.”
처음에는 홍 사장이 자신을 예뻐한다고 생각했던 민재도 이쯤 되니 슬슬 수상한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 민재는 심각한 얼굴로 무혁에게 물었다.
“있잖아, 홍 사장님 말인데.”
“홍 사장이 왜?”
“이상하게 들릴 건 아는데, 혹시 날 싫어해서 일부러 이러시는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는데.
이상할 정도로 제게 유난하게 구는 걸 보면 어쩌면 일부러 괴롭히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럴 리가. 딱 봐도 좋아서 저러는 게 티가 나잖아.”
무혁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며 딱 잘라 선을 그었다.
대체 무슨 근거로 저렇게 확신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홍 사장의 행동 하나하나가 어쩐지 미심쩍었다.
비행기에서는 애들한테, 내리고 나서는 홍 사장한테 시달린 탓이었을까.
“피곤해.”
집에 도착하자마자 민재는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오늘은 한 것도 없는데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은 언제나 이렇게 피곤하다.
“일어나, 씻고 자야지.”
“그냥 잘래.”
이대로 녹아내려 침대와 한 몸이 되고 싶건만, 무혁은 민재의 속옷 한 장까지도 차곡차곡 개서 옷장에 집어넣기 바빴다.
“빨래할 거니까 옷 벗어.”
“귀찮아. 이건 나중에 빨아.”
“지금 할 거야. 어서 벗어.”
설마 하는 마음에 민재는 일부러 무혁이 어찌하나 가만히 내버려뒀다.
무표정한 얼굴로 앞 단추를 하나하나 풀면서도, 그는 정말 원피스만 홀랑 벗겨 그대로 빨랫감과 함께 챙겼다.
“속옷은 벗어서 문 앞에 놔둬. 이따가 따로 돌릴 거니까.”
이 남자가 일부러 이러는 걸까, 아침에는 분명 덮치기 직전까지 갔던 주제에.
정말 속옷만 남겨둔 채로 무혁은 민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빨래를 하러 나가버렸다.
‘혹시 어디 문제 있는 거 아냐?’
이 정도로 했으면 한 번쯤은 못 이기는 척 넘어와 줄 법도 한데.
저 남자가 고지식한 원칙주의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MBTI로 따지자면 ESTJ, 성실한 관리자형.
진무혁은 원래도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기 전에는 다른 곳으로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나 씻을게.”
나머지 속옷도 가져가라고 하고서 민재는 샤워기의 더운물을 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분명 키스까지는 정상적으로 잘했는데.
“샤워 가운 문 앞에 걸어놨어.”
분명 싫은 기색은 아니었건만 무혁은 지금도 엄마처럼 민재의 수발을 들기 바빴다.
설마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샤워가운을 입고서 젖은 머리로 민재는 바삐 움직이는 무혁의 뒷모습을 그저 지켜봤다.
“바빠?”
“정리 다 해놓고 저녁도 시켜 놨어, 너 배고플 것 같아서.”
유난히도 깔끔한 체하는 분이라 무혁은 진작 샤워를 마치고서 바지만 입고 바쁘게 정리 정돈에 들어갔다.
오늘따라 윗도리를 벗고 설치는 통에 그의 잘 발달 된 등 근육이 선연하게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다.
“배보단 다른 게 더 고픈 것 같은데.”
바쁘게 움직이는 남자의 뒤태를 보며 먹음직스럽다는 형용사를 떠올린 자신은 분명 변태일 거다.
하지만 이미 한 번 깨달은 이상 본능적인 충동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뭐 해?”
저쪽도 분명 싫은 눈치는 아닌데.
일부러 슬쩍, 샤워 가운을 들어 올려 맨다리까지 보여주고 있건만 무혁은 심드렁한 얼굴로 차갑게 빈정거렸다.
“너 그러다 또 감기 걸린다.”
“됐어!”
정말로 몰라서 저러는 걸까. 아니면 일부러 약을 올리는 걸까.
괜히 화가 나서 민재는 머리의 물기를 털며 곧장 방으로 향했다.
그러던 찰나 갑자기 딩동, 하며 초인종이 울렸다.
“배달이 벌써 왔나 보네. 내가 나갈게.”
“돈은 이미 줬어, 문 앞에 둔 것만 가지고만 오면 돼.”
무혁이 세탁실에 가 있는 사이 민재는 샤워가운 차림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분명 음식만 가지고 오려고 한 거였는데.
문 앞에는 어째 발 네 개가 가지런히 서 있는 게 보였다.
“어?”
“민재야! 너!!”
곱게 한복까지 차려입은 할머니의 모습에 민재는 순간 환상을 본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정상적인 양장 차림을 한 안 대표가 민망한 듯 눈을 가리고서 먼 산을 보고 있었다.
“할머니가 여긴 어떻게…….”
“허, 허허. 저, 저희가 너무 일찍 온 모양입니다. 여사님.”
이 상황을 뭐라고 정리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데.
하필이면 상체를 훤히 드러낸 진무혁이 곧장 민재의 뒤에 따라 현관으로 나왔다.
“무슨 일 있어?”
“무혁이, 무혁이, 네 이놈! 어디 감히 남의 집 귀한 처자를!!”
분명히 신혼집에 찾아온 건 두 사람이지만 안 대표는 이 상황을 무난히 넘길 희생양이 필요했다.
샤워 가운을 입은 여자와 바지만 입은 남자.
두 사람은 신혼부부이니 중간에 무슨 과정이 있었는지 연륜 깊은 어른들이 못 알아볼 여지가 없다.
“배달이요!”
안 대표가 지팡이를 들고 무혁을 잡으러 간 사이, 뒤늦게 도착한 배달부는 문 앞에 선 할머니 손에 음식을 들려주고 그대로 가버렸다.
“이 늙은이가 이리 생각이 없어서야. 미안하구나. 미리 연락하고 올 걸 그랬나 보다.”
“그, 그게 아니라요…….”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는 너무나 반갑긴 한데 어째서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드는 걸까.
오늘따라 자꾸 앞섶이 풀리려는 샤워가운을 부여잡고 민재는 울고 싶은 마음을 애써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