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많이 컸네. 유혹할 줄도 알고.
성준범 이사가 소영하를 봐온 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가 손댔던 수많은 스타 중 유일하게 성공했던 케이스니까.
소영하만은 성준범 이사에게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한 존재라 믿었다.
“형, 나는 민재가…….”
“아직도 그 여자를 못 잊겠다 이거지.”
여기서 입을 조금만 잘못 놀려도, 저 골프채가 어디로 날아들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어떻게든 핑계를 대야 한다.
소영하는 필사적으로 그간 있었던 일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그 여자가 그랬어. 어차피 둘이 결혼한 건 얼마 못 갈 테니까, 민재가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도와준다고 했어.”
“그 여자가 누군데?”
“조장미. 그러니까 조원식, 형이 말했던 그 법무법인 조조 대표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조원식이 미리 사윗감으로 점찍어두고 애지중지 키우던 사내가 그의 뒤통수를 치고서 다른 여자와 만났다고 했다.
원래대로라면 조원식의 딸과 결혼해야 했을 텐데, 거기에 석민재가 끼어들며 모든 것은 파국에 이르렀다.
“또 석민재, 그 여자 때문이지.”
이쯤 되면 듣는 것조차 지긋지긋한 이름이라, 정말로 더럽게 얽혔다고밖에 볼 수 없다.
풀이 죽은 소영하를 내버려 두고서 성준범은 내선 번호를 눌러 누군가를 불러들였다.
“그렇게 놀고 싶으면 놀아. 안 말릴 테니까.”
“정말 그래도 돼?”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한참 파릇파릇한 신예들이 치고 올라오는 줄도 모르고 업계 평판을 깎아내리는 짓에 푹 빠졌다.
자기 관리가 안 되는 건 예사에, 그토록 자랑하던 얼굴도 피곤한 탓인지 까칠함이 배었다.
“상관없어. 어차피 네가 아니라도 그 자리를 채울 사람은 많으니까.”
냉랭한 눈빛에 더는 다정함 따위는 없다.
그 말을 꺼내기 무섭게 성 이사의 사무실 밖에서 누군가가 인기척을 냈다.
“이사님. 저 이시준입니다.”
“들어오세요.”
소영하를 내보내지도 않고서 성 이사는 손님을 방에 들였다.
저보다 열 살은 더 어려 보이는 어린 배우는 갓 제대한 기색이 역력한 채 하늘같은 선배인 소영하를 보고 허리를 숙였다.
“이사님, 소영하 선배님. 신인 배우 이시준, 인사드립니다.”
“오늘 너 대신 리딩 들어간 녀석이야. 연기도 곧잘 하니까, 네 CF 몇 개 시준이 앞으로 돌렸다.”
“형!”
배역이면 몰라도 광고까지 넘기는 건 곤란하다.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어리석은 소영하를 두고 성 이사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참 잘생긴 친구지. 마치 어릴 적 네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이런 식으로 계속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내치는 수밖에.
상대가 소영하를 직접 지명한 일조차, 회사 쪽에서 다른 배우에게로 돌리기 시작했다는 건 소영하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
아침 햇살이 눈이 부셨다.
일찌감치 잠든 민재는 제 몸을 감싼 이질감을 느끼며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랬었지, 참.”
한바탕 난리가 나고 오늘은 드디어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다.
저녁을 먹고 무혁이 일을 마무리한다고 해서 민재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일찍 잠들었었다.
“늦게 잤나 보네.”
어슴푸레하게 해가 뜬 걸 봐서는 아직 새벽인 것 같은데.
평소라면 일찌감치 일어나 돌아다닐 진무혁이 오늘은 참으로 곤히 잠들어 있다.
유난히도 긴 속눈썹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쉽게 남에게 틈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런 세세한 것까지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을 터.
모처럼 달게 잠든 모습을 보니, 그가 이렇게 편히 잠들 수 있는 곳도 어쩌면 제 곁뿐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으음…….”
마치 습관처럼. 무혁은 품에 안긴 민재를 꼭 안고서 다시금 깊이 잠들었다.
살짝이 빠져 나가보려 애를 써봤지만 그랬다간 잘 자는 사람을 괜히 깨우게 될 것 같아 망설임이 앞섰다.
“정말 자?”
“…….”
아무 대답도 없는 걸 봐선 정말로 잠이 든 모양인데.
마치 곰 인형을 안고 자듯 이러는 습관도 좀처럼 나아진 게 없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헤어진 일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며 민재는 문득 깨달았다.
정말로. 진심으로.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만 있다면.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
이 따뜻한 품 안에서 영원히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가슴팍에서 익숙한 코롱 향기가 났다.
밤사이 체온과 함께 녹아들어서, 이제는 완연한 그의 향기로 스며들었다.
두근. 두근. 두근.
반쯤 열린 잠옷 안으로 그의 탄탄한 가슴팍이 보였다.
살짝이 만져본다면 혹시나 깨지 않을까 싶지만.
‘만지고 싶어.’
눈앞에 잠든 진무혁을 그냥 바라만 보는 건, 아무래도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그를 여전히 좋아한다는 걸 자각한 탓인지 자꾸 눈만 마주치면 두 뺨이 달아올랐다.
‘좋아한다고 말하면 싫다고 할까.’
분명 진무혁도 아예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함부로 말을 꺼내자니 괜히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만약 그의 마음이 민재와 같은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 결혼은 어떻게 될까.
무방비한 그의 입술을 빤히 보며 민재를 애써 숨을 삼켰다.
‘그냥 확, 덮쳐버려?’
어차피 부부니까. 계약서 어디에도 부부 생활을 금지한다는 조항은 없었다.
억지로 하자는 조항도 없었지만 이렇게 되면 민사 재판에서는 사회 통념을 따라가니까.
두 사람이 부부로 있는 이상 뭘 하든 문제가 될 건 없다.
“어떡하지, 선배. 나 자꾸 나쁜 생각을 하게 돼.”
민재는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 겨우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허전한 무혁의 팔 안에 베개를 안겨주고서 민재는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입술을 볼 때마다 자꾸 결혼식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사진첩에 사진까지 찍어둔 걸 보면 어지간히도 키스가 고팠던 모양인데.
‘키스하지 말란 조항도 없긴 했지.’
어차피 한 번 한 거 닳는 것도 아닌데, 두 번 한다고 뭐가 문제일까.
조심조심 고개를 숙이며 민재는 무방비한 무혁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가져갔다.
“음?”
막 입술이 닿기 전, 진무혁의 눈이 떠졌다.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몸이 기우뚱하며 무혁의 앞니 위로 민재의 입술이 내리꽂혔다.
“윽!”
“아파!”
갑작스러운 접촉 사고에 결국 피를 보고야 말았다.
무혁은 영문도 모르는 채 오만상을 쓴 민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니, 아무, 아무것도 아니야.”
도둑 키스를 하려다 벌을 받은 건가 보다.
대충 소매로 닦아보려고 했지만 찢어진 자리가 벌어져 피가 더 나오기 시작했다.
입술이 아파 얼굴을 찡그리자 무혁은 잠이 덜 깬 채 민재의 상처를 살펴줬다.
“조심하지.”
무혁이 입술을 어루만지는 사이 눈이 마주쳤다.
어차피 들켜버렸으니까, 민재는 그대로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게 무슨 신호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분명 알아차릴 테니까.
부드러운 촉감과 함께 입술에서 피 맛이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어느새 민재는 제 두 팔로 무혁의 목을 끌어안았다.
“많이 컸네. 유혹할 줄도 알고.”
“됐거든.”
정말로 이제는 선을 넘어도 좋을 것만 같아서 민재는 무혁의 손에 모든 걸 맡겼다.
자연스레 몸이 뒤로 넘어가고 어느새 그는 무방비한 민재의 위에 올랐다.
“무르는 건 없어.”
“누가 할 소릴.”
그의 셔츠가 침대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이른 아침 햇살 아래에서, 민재는 아주 오랜만에 떨림을 만끽할 수 있었다.
“무혁 씨.”
“응.”
이런 기분은 너무 오랜만이라서,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유난히 노골적으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아침을 가득 메웠다.
“밖에서 이상한 소리 안 들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애써 무시하고 다시 그를 마주하려 했건만.
갑자기 누군가가 쾅, 쾅 하며 문을 두드렸다.
“일어나. 아침이야!!”
해맑은 홍 사장의 목소리에 분위기가 완전히 깨져버렸다.
하지만 무혁은 소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민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내버려 둬. 저러다 말겠지.”
잠옷 틈새로 무혁의 손이 파고들었다.
마치 다비드 상이 현신한 것처럼, 머리를 쓸어 올리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야성적이다.
“힘 빼.”
어차피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숨을 꼴깍 삼킨 채 민재는 제 위에 오른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머리 속이 금세 새하얗게 변했다.
“아픈 건 싫어.”
“그럼, 알지.”
“그러니까 천천히……. 읏…….”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일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머리로 생각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얘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드디어 홍 사장도 포기한 모양이다. 내심 안도하며 그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진무혁의 까만 눈동자 안에 제 모습이 담긴 게 좋았다.
살짝이 미소를 머금은 채 무혁은 그대로 민재에게 입을 맞췄다.
“나는…….”
“안 되겠다. 힘으로 열어!”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민재가 뭐라고 움직이는 것보다 진무혁 쪽이 한발 빨랐다.
“이런.”
급한 대로 시트를 끌어다 민재에게 덮어주고서 무혁은 짜증 섞인 얼굴로 침실을 나섰다.
“지금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뭐야, 살아 있었어?”
홍 사장은 흐트러진 무혁의 차림을 보고서 히죽 웃었다.
정말로 저걸 확 죽여버릴 수도 없고. 모처럼의 기회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난 또, 아무 말이 없길래 둘 다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지.”
“민재는 자고 있으니 건드리지 마세요.”
침실까지 훔쳐보려는 무례한 이를 어쩌면 좋을까.
본인은 유전자 검사까지 맡겨놓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자? 민재가 누굴 닮은 건지 잠이 많나 보네.”
이불 속에 숨은 채, 그 대화를 듣고 있는 민재도 곤란하긴 피차 마찬가지였다.
머리끝까지 시트를 덮어쓰고서 민재는 눈치 없는 홍 사장을 내심 원망했다.
‘날 싫어하는 건가.’
일부러 장난을 치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제대로 엿을 먹이려는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괜히 이상한 짓 하지 마. 그땐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
“돌아가세요.”
마치 엄마처럼 구는 홍 사장의 태도가 수상하기 짝이 없다.
아무 연고도 없는 제게 대체 왜 저러는 건지.
‘망했어.’
모처럼 큰맘 먹고 유혹한 게 수포가 되어버렸다.
좋았는데. 정말로 좋았는데. 아쉬움이 앞서서 민재는 한없이 울상지었다.
***
서울 근교에 위치한 미리내 요양병원.
평소 조용하기만 한 이곳은 요즘 노년의 로맨스가 피어나는 사랑의 스튜디오가 됐다.
“여사님, 검사 결과 나왔다면서요.”
“남들 보는 데서 이러지 마시라니까요.”
안 대표는 싱글벙글 웃으며 민재 할머니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이고, 주의하겠습니다. 많이 좋아지셨다기에 너무 좋아서 그만.”
마지막 발작 이후로 제법 시간이 흐른 덕분인지, 요즘 할머니의 증세는 예전보다 훨씬 더 나아졌다.
“손녀분 결혼 덕분인가 봅니다.”
경과를 보던 주치의조차도 그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심신이 안정된 덕분이었을까.
이제는 살살 산책도 다니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할머니는 매일 같이 제 곁에 붙어 희희낙락하는 안 대표를 힐끔 바라봤다.
싫다고 말은 하지만, 그래도 매일 같이 이렇게 찾아와 정성을 보이는 마음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괜찮아졌으면 뭘 하시려고 그렇게 물어보신 건데요?”
“아니 뭐, 하고 싶은 거라면야 많지요. 여사님만 괜찮으시다면 우리 김 기사를 시켜서 같이 드라이브라도…….”
“외박이라.”
벌써 몇 년째 병원에만 있었으니 답답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게다가 하나뿐인 손녀가 어떻게 사는지도 심히 궁금했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잠은 잘 자는지, 무엇보다 두 사람이 정말로 잘살고 있는 건지 안심이 되지 않는다.
“그럼 이런 것도 가능해요?”
마음에 둔 여인이 원하신다면 하늘의 달도 따다 줄 기세라.
할머니의 물음에 안 대표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 안종인, 사나이 이름을 걸고 못 하는 것 따위 없답니다.”
꾀병 입원까지 했는데 건강만 괜찮다면야 바깥나들이 한 번 못 시켜줄까.
그 정도야 안종인 대표에게는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다.
“그럼 손녀분께 연락 드릴게요.”
“아니, 그러실 거 없수.”
미리 얘기하고 갔다가는 분명 또 준비하느라 신경을 써야 할 테니까.
으레 집에 있을 퇴근 시간에 맞춰 잠깐 얼굴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무혁이 놈은 제가 확인하지요. 여사님께서는 그저 저만 믿으십시오.”
호언장담하는 안 대표가 영 미덥지는 않지만, 그래도 애들을 놀라게 하려면 기습이 최고다.
“지금은 출장을 가 있다는 거 같은데, 아마 오늘 저녁이면 다들 돌아올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요.”
아마 이 사실을 민재가 안다면 분명 기뻐하리라. 할머니는 부푼 마음을 안고서 하나 하나 짐을 챙겼다.
“고마워요. 내가 영감님 아니면 어디 부탁할 데가 있어야지.”
“별말씀을요. 무혁이 놈도 이 늙은이가 아니면 누가 챙기겠습니까?”
헤어지라고 할 때는 언제고. 빈말로 괜히 트집을 잡긴 했지만 안 대표도 무혁을 아끼는 게 눈에 선했다.
분명 부모가 죽고 아버지 친구 집에서 자라났다고 했는데.
제 손녀를 퍽 좋아하는 것만은 진심인 것 같지만 그 뒤로 어딘지 모를 서글픔이 보였다.
“그 친구. 영감님이 보기엔 어떤 사람이에요?”
믿는데, 정말 믿고는 있는데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석연찮은 점들이 존재했다.
“무혁이 놈도 사정이 좀 복잡하지요.”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좋을까. 안 대표는 잠시 뜸을 들이며 말을 골랐다.